2/3: 탈린(Tallinn) 30/12/2019 – 01/01/2020

순탄지 않은 시작  

탈린의 첫인상은 리가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공항이 아닌 버스역을 나오면서 탈린에 첫 발을 딛게 될 거고, 버스역은 대부분 도심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아마 리가 공항을 벗어날 때 그 당황스러움은 없겠지? 

티켓에 씌어진 대로 8시 정각에 출발한 리가-탈린 행 버스. 

티켓을 미리 산 덕분에 일인석에 앉아서 편히 밖을 내다볼 수 있다. 아직은 깜깜하니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좋은 풍경이 나타나겠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아침 8시가 넘은 시간이다.

탄산수와 요구르트를 번갈아 마시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는데, 정작 보이는 건 우중충한 짙은 구름 밑 엉성한 나무들. 급기야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은 챙기긴 했다만 추운 겨울에 오는 비라 기온이 확 떨어지지는 않을가 걱정이 됐다.

아침을 적게 먹었기에 혹시라도 체온마저 함께 떨어질가봐 사이사이 버스 커피자판기에서 두세번 정도 라떼를 뽑아서 마셨던 것 같다. 그렇다, 신기하게도 이 버스에는 동전을 넣으면 뽑을 수 있는 커피자판기도 있거니와  작지만 깨끗한 화장실도 있다. 발트 지역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야 한다면 Lux Express를 선택하는 것을 추천한다. 

탈린에 도착하니 오후 1시. 비도 약간 잠잠해진 것 같고 호텔로 가는 길을 검색해보니 택시 18분, 버스 22분, 혹은 걷기 32분. 셋 다 별 차이가 없으니 차라리 돈도 아끼고 탈린의 분위기도 산책하면서 느껴볼 겸 걷기를 선택했다. 32분 걷기라, 이 정도면 가벼운 산책이겠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일단 조금 작아졌다 싶었던 빗줄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는데 이미 난 버스역 근처를 벗어난 뒤라 어쩔 방법이 없다. 

우산이 있으니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면서 간간이 맵도 체크해야 하고, 비는 커지는데 손바닥만한 우산이 열심히 걷고 있는 나를 어느만큼, 얼마나 더 막아줄 수 있을지… 그 와중에 캐리어 바퀴에 진흙은 잘도 들어만 간다

그리고 난 왜 "버스역은 대부분 도심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라고 생각을 했을가, 주변에 볼거리 하나 없는걸 보아하니 평범한 주택구역인듯 하다. 날씨 때문에 사람도 별로 안 보이고. 

15분쯤 걷다가 주변에 작은 쇼핑몰이 보여서 푹 젖은 옷도 정리하고 화장실도 갈 겸 들어갔는데, 화장실 입구에 ATM 비슷한 것이 보였다. 아, 0.3유로를 카드로 긁어야 문이 열리는 방식이다. 다른 사람이 열기를 기다리다가 함께 들어가도 되지만 "난 문명한 시민이니까"라고 생각하면서 카드를 긁었다. 

결제 성공. "삐-삐-삐-삐-삐" 5초 다섯번 경고음이 들리는 동시에 ATM 비슷한 스크린에서 숫자가 5부터 1까지 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 아, 5초 기다리고 열면 되겠다 싶어서 마지막 "삐-"가 멈추면서 나는 덜컥 소리에 맞춰 문을 밀었다. 응? 왜 안 열리지? 

10초 만에 깨달았다. 아, 아까 다섯번의 경고음과 숫자는 5초 사이에 문을 밀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구나. 허탈했다. 결국 문명한 시민이고 뭐고 다른 사람이 들어갈 때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함께 들어갔다, 짧은 해석은 했지만. 

날씨 탓인가, 탈린의 첫 시작이 좀 심상치 않다

뜬금없이 잡힌 플랜  

이렇게 잠깐 휴식은 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겨우 오후 1시 반인데 비실대는 나 자신이 웃겨서 가는 길에 조금 괜찮다 싶은 커피숍에 들려 카페인과 당을 보충하고자 쇼핑몰과 호텔 중간지점 근처 카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커피와 디저트를 시켰다. 에스토니아 사람들 영어수준이 라트비아보다 나을거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주문이 힘들었다. 설마 내가 비를 맞고 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와서 무시당하는 건 아니겠지?  

자리를 잡고 창밖을 마주하여 앉았다. 커피 두어모금 마시고 디저트를 먹으려니 아, 티슈가 없네. 마침 서빙해주는 사람이 근처에 있어서 영어로 얘기했다, 혹시 티슈 가져다 줄 수 있냐고. 

예의를 제대로 갖추고 단어를 바꿔가면서 4-5번 정도 말했는데 이 사람이 대체 왜 알아듣지 못하는 거지? 티는 안냈지만 슬슬 화가 나려고 했다. 최대한 태연한 척 다시 자리에 앉는데 갑자기 옆 테이블 사람이 서빙하는 사람과 뭐라고 하더니, 기적처럼 티슈가 서빙됐다. 와, 현지인한테 도움을 받았군. 고맙다고 한마디 인사를 건넸다. 

다시 내 커피와 디저트에 집중하는데 갑자기 독일어가 들려온다. 애매한 내 독일어 수준은 내용은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하는 대신, 꽤 자주 들리는 익숙한 단어들에 귀가 절로 솔깃해지는, 딱 그런 수준이다. 설마 이 사람이 독일 여행객? 그렇다면 에스토니아어는 어떻게 알고 아까 날 도와줬지? 

기력이 생기니 궁금증도 따라서 생긴다. 굳이 머리를 돌려 보고싶진 않지만 독일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통화를 하는 이 사람이 궁금하다. 도대체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통화가 끝나는 걸 확인하고도 한참이나 끙끙거리다 용기를 냈다. "아까 도와준 거 고마운데 혹시 너도 여기 여행하러 온거니? 독일어를 들은 것 같아서 말야." (영어라서 존칭이 없다.)

"여행하러 온건 아니고 여기가 고향인데 지금은 스위스에서 일하고 있어. 잠깐만, 내가 하던 일을 끝내고 니 테이블로 갈게." 이렇게 얘기하는 이 사람은 대략 30대후반-40대초반, 눈짐작으로 키가 190cm정도가 되는 갈색머리 남자. 전체적인 외모, 표정, 분위기 모두 유럽 회사에서 흔히 대화하는 동료 이미지라 그런지 낯설고 불편한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이 사람 입장에서는 희한하겠지. 웬 비 맞고 꾀죄죄하게 들어와 티슈 하나 절로 받지 못하는 동양인이 자기의 독일어를 알아듣다니 (이 사람을 D라고 부르겠다).

그렇게 10분 쯤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기본정보로부터 시작해서 여행했던 유럽 도시 얘기, 회사 얘기 등등. D는 탈린 사람이고 스위스에서 산 지 12년쯤 됐는데 크리스마스에 할머니를 만나기/보살피기 위해 어제 탈린에 도착했다고 했다. 내가 아무 계획 없이 온 걸 듣고는 탈린 공짜투어 사이트를 추천했다. 결국 추천대로 내일 낮 12시로 스케줄을 잡았다. 

대화를 계속 이어간지 1시간 뒤, D는 이제는 들어가봐야 한다며 명함을 건넸다. 탈린처럼 아름다운 도시를 고작 대낮 공짜투어로 즐기기엔 너무 아깝다면서, 필요하다면 여섯시 쯤에 탈린 야경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와, 나에게도 이런 좋은 일이 생길 줄이야. 결국 우리는 왓츠앱(What's App)을 통해 서로 폰 번호를 확인했으며, 나도 바로 호텔 체크인하러 자리를 떳다. 

너무 서둘렀던 탓일가, 테이블에는 D의 명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뒤늦게 안 일이다, 내가 자기의 명함을 챙기지 않는걸 보고 약간 의아했지만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했다는 D의 얘기를 듣고). 

러시아 판잣집 느낌이 나는, 90유로 호텔 중 최악의 최악

호텔이 관광객이 많은 탈린 옛 시가지 (old town)에 있는 데다가 크리스마스 시즌인지라 기대감을 많이 낮췄지만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 싶을 정도로 상태가 별로였다. 사진으로 보기엔 멀쩡하지만 실제로는 벌레가 나올 법도 한 낡은 방, 샤워기를 틀면 물이 화장실은 물론 침대 근처까지 적실만한 크기. 잠 잘때 빼고는 절대 있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래, 추워서 덜덜 떨더라도 차라리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커피를 마시자.
 

 

같은 곳 두번씩 구경하기  

탈린의 해는 리가보다 조금 더 일찍 저문다. 

오후 5시가 저녁 9시 같은 느낌은 두 곳 다 마찬가지지만 일단 여기에는 사람이 엄청 많다. 왜 많을가? 탈린 옛 시가지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기록된 곳이라 명절이면 여행객으로 붐비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한글로 된 더 많은 정보는 여기를 클릭하여 읽으면 된다.

약속대로 6시부터는 D의 가이드대로 여기 저기 거닐기 시작했다. 현지인 시각으로 풀어지는 탈린의 역사를 친구와 대화하는 듯한 분위기로 들을 수 있는 상황 덕분에, 오늘 일이 이상하게 안 풀려서 받던 스트레스가 눈 녹듯 사라졌다. 

D와 2시간 쯤 투어를 끝낸 뒤 간단히 저녁도 먹었던 것 같은데 사진도 없고 딱히 기억에 남을만한 스토리도 없다. 아마 10시-11시 쯤에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휴식한 것 같다. 하긴, 이른 아침 호텔 체크아웃부터 그렇게 바삐 돌아쳤으니. 

짤막하게 보태야 할 내용이 있다. 서양권 국가에서 유학 혹은 장기적으로 거주한 경험이 없으면 흠칫햇을 가능성이 큰 그 부분. 홀로 여행을 다니는 여자애가 겁도 없이 낯선 사람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저녁에 만난다? 현재 이슈가 되고있는 국내 모 도시 납치/감금사건이 연상될 수도 있겠다. 

1) 예전에 나라/문화 배경이 천차만별인 사람들과 알고 지내며 친해지는 과정에서 영어교류 중엔 미약하게나마 탐지능력이 생긴 것 같다. 이 사람은 단순히 호기심이 많고 친해지고 싶어하는구나, 저 사람은 있는 척 포장하면서 내가 감탄하며 호감을 갖게끔 유인하는구나, 등등. 

2) 대화를 하다보면 디테일이 나오기 마련인데, 뭔가 앞 뒤가 잘 안 맞물리는 내용이 없었다. 회사나 업무 얘기를 들어봐도 항업/부서/타이틀 다 매칭이 되고, 이상한 멘트나 도를 넘는 호기심은 전혀 없다. 

3) 내성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낯선 사람과 주동적으로 말을 걸기어색한 나는, 모르는 사람끼리 정말 쉽게 친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강철멘탈에 강한 사교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생각해왔다. 아무도 모르는 나라에 와서까지, 심지어 대화도 통하는데 굳이 쭈볏쭈볏 할 필요는 없지. 

… 등등 나만의 판단을 거친 결정이기에 너무 생각 없이 다닌다는 편견은 갖지 말고 여행이야기에 집중을 할 수 있길 바란다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방은 전혀 깔끔하지 않지만 밖 디자인은 동유럽 스럽게 이쁜 이 호텔에서 푹 휴식하고 먹는 아침, 상당히 러시아 식이다. 주변에서도 러시아어가 들려오는 걸 보아하니, 아마 러시아 여행객들 위주로 장사를 하는 호텔 같다. 

밥을 먹고 주변을 서성이다 어제 잡은 공짜 여행투어 스케줄 대로 12시가 거의 될 무렵 예정된 지점에 도착했다. 나와 비슷한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모이기 시작했다. 여러 나라에서 온 듯한 30여명이 모여 가이드와 함께 한시간 정도 옛 시가지를 거니는데, 가이드는 몇 곳에 멈춰 역사 이야기를 하고, 투어가 끝나면 가이드한테 팁을 주는 방식이다. 

흐렸던 날씨가 점점 개이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진다.

투어를 하다 보니 결국 다 어제 저녁에 D랑 갔던 곳임을 깨달았다. 비록 결국에는 같은 곳을 두번 씩이나 중복해서 본 상황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일단 밤, 낮으로 경치가 정말 달라보이고, 개인 날씨와 흐린 날씨의 차이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여행을 즐겁게 하려면 날씨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일정을 잡아야 하는군. 

할 일도 없는데 근처에서 연극이나 봐야겠다. 비가 쏟아지던 어제, 사진만 찍고 그냥 지나쳤던 오페라 극장이 생각났다. 

오, 분위기가 있어보이는 연극을 발견했다. 시간도 마침 오후 2시 시작이니 고민 없이 바로 20유로를 내고 티켓을 구매했다. 리가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보는 걸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내가 탈린에서 미리 더 재미있는 연극을 보게 되겠구나?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입장하는 사람들 십중팔구가 50-70대 정도로 보이는 어르신들. 뭔가 잘못되어 가고있다 라는 느낌이 들 때쯤 막을 올린 이 연극은… 

고대 뮤지컬? 악기, 옷차림, 표현방식, 심지어 억양조차 내가 생각했던 연극이 전혀 아니다. 

긴 "연극"이 끝나고 D에게 문자로 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에피소드를 전했다. D도 어이가 없었나 보다, 이건 아주 특이한 방식의 연극이라 자신도 본 적이 없으며 아마 어르신들이 즐겨할만한 거라고 한다. 신기한 경험이 또 하나 추가됐구나. 

문자를 하다가 같이 이른 저녁을 먹지 않겠냐고 했다. 오늘이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하루인데 할머니와 함께 있지 않고 왜 나오냐고 물었더니 이른 저녁은 간단히 밖에서 먹어도 되고 지금 심심하니까 밖에 나오고 싶다고 한다. 가뜩이나 어디로 갈지 뭘 먹을지 모르는 나에겐 참 좋은 소식이라 당연히 동의했다. 

그렇게 이른 저녁을 먹고 (다른 사람이랑 있으면 예의를 차리느라 그러는지 사진을 잘 찍게 되지 않아서 결국 어디에 갔던지 찾아낼 수도 없다), 산책을 하며 대화를 하다가 D가 불쑥 제안을 한다. "이제 슬슬 집에 가봐야 겠는데, 혹시 우리 할머니 만나지 않을래?

할머니 그리고 불꽃놀이 

당황함을 애써 감추면서 갑자기 너희 할머니를 만나도 되냐고 하니까, 할머니도 혼자 사니까 심심한데 외국 친구가 들이닥치면 너무 신기해하고 반가워할 거라면서. (영어 언어의 특성상 존댓말 개념이 없기에 비슷한 느낌의 어투로 글을 이어가려 한다. 그러니 오해의 소지가 없기를 바란다.) 

아… 그렇구나, 그럼 가도 되겠지? 나도 98세 할머니, 그것도 98세 외국 할머니는 전혀 만난 적이 없으니까.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누르며 할머니 댁으로 갔다. D는 혹시라도 내가 금방 안 사람을 따라간다는 것에 대해 불안할 것 같았는지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 신뢰도를 높이려 노력하는게 보였다. 할머니에 대해 미리 소개한다거나, 이 거주 지역의 이곳 저곳을 소개하는 등. 

그렇게 도착한 할머니 집은 여느 친척할머니 집과 큰 차이가 없었다. 혼자 사는 집이지만 깔끔히 잘 정리되어 있었고 이미 내가 오는 걸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반갑게 나를 맞았다. 탈린 시민으로서, 50년을 소련 국적으로 살아온 할머니는 당연히 러시아어로 나에게 말을 걸었고,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나는 영어로 답할 때 D가 얘기했다. "할머니, 얘가 독일어도 조금 할줄 알아요." 

할머니가 부끄러워하면서 웃는다. "아이고, 내가 독일어를 거의 다 잊어서 말야, 이거 난처하지만 잘 못하는 독일어로 해야겠네." "아니에요 할머니, 제 독일어가 더 형편없을 걸요." 결국 D가 우리 사이에 껴서 러시아어-영어로 통역을 하며 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통역 때문에 의사소통 효율이 떨어지는 대화, 하지만 진심이 담긴 눈빛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할머니가 간단히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한다. 사실 말이 저녁이지 9-10시에 먹는 건강한 야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할머니가 저녁을 준비할 때 도와주려고 서성였다가 등을 떠밀렸다, 손님이 주방에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집 구경이나 하라고. 집 구경중 여권이 있는 걸을 보고 D에게 그의 기밀문서를 발견했다고 하니 D가 친절하게 직접 펼쳐준다. 아하, 78년생이라, 내가 추측했던 40대 초반 맞네. 

집 구경이나 저녁을 먹을 때나 사진을 찍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생각되어 그 곳에서 남긴 사진은 겨우 한 장이다. 바로 저녁을 먹고 할머니와 함께 본 새해맞이 "문예야회", 그런데 러시아 프로그램이다 (중국 CCTV-1과 비슷한 느낌). 지금 여론의 도마에 오른 러시아 그 분이 신년축사를 하는 것도 생방송으로 보게 됐다. 

간간이 대화를 이어가다가 다가오는 1월 1일, 즉 한시간 뒤에 할머니 99세 생신이라는 걸 전해 듣게 됐다. 이런, 미리 알았더라면 근처에서 선물이라도 챙겨오는 건데. 와서 공짜로 얻어먹고만 간다는 게 조금 낯 뜨거웠다. D가 여기에 11시 45분 정도까지만 있다가 근처에서 하는 새해맞이 불꽃놀이 보러 가자고 했으니 조금 일찍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슬슬 자리를 떠야 하는 시간이다. 할머니가 쵸콜릿 두 곽을 들고 나타났다. 줄 선물이 없는데 이거라도 맛있게 먹어라고. 순간 할머니, 외할머니가 생각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장 뭔가가 눈앞을 가릴가 두려워 애써 밝게 인사하고 D와 함께 문을 나섰다. 

불꽃놀이 구경, 여행객들과 현지인들이 다 여기로 몰린듯 하다. 유럽에서 이정도 인파를 보기 참 힘든데. 찍은 사진이 대부분 동영상이라 글과 함께 올리지는 못한다. 

불꽃놀이는 생각보다 짧았고, 명절 치고는 이른 시간이라 맥주 바에 잠깐 들렸다가 집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 참에 내가 한 턱 쏴야겠는데 아쉽게도 D는 평범한 수제맥주 하나만 시켰다. 

가장 인상이 깊은 건 마지막 1분이다. D는 맥주를 반만 마시고 슬슬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급하게 남은 내 맥주를 원샷하면서 핀잔을 줬다, 맥주를 다 마시지 않고 일어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연변에서도 그런 것 같지만 나는 독일/체코에서 다시 맥주문화에 빠져들게 된 케이스로,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다). 그랬더니 D는 아무리 좋은 맥주라도 굳이 다 마셔야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반만 마셔도 충분하다 느껴지면 그게 제일 좋은거라고

이렇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에 내가 무슨 감촉을 받았던 것일가.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에 난 갑자기 결심을 했다. 2020년 1월 1일, 오늘부터 나는 알콜을 완전히 끊을 것이다. 여태껏 햄버거에는 당연히 맥주, 고기 혹은 치즈에는 와인, 기분이 이렇고 저럴 때는 칵테일 혹은 양주… 이런 식으로 소량의 알콜 정도는 일상에 녹아 든 내가 갑자기 "술을 왜 마셔야 하는가, 술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인데?" 라고 의문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완전히 끊었다. 지난 2년간 불가피한 (직장생활이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2잔 마신 것 빼고는 술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더 건강해진 느낌이고 돈도 많이 절약이 됐다. 단 아쉬운 점은, 그래도 건강검진에서 내 동맥이 같은 연령대보다 조금 딱딱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역시 술이 건강에 주는 영향은 불가역적이군. 

호텔에 도착했다. 새해를 맞아 "일찍" 자려고 했는데 로비에서 러시아인들이 너무 소리를 질러댄다. 카운터에 전화해서 잠을 못 자겠다고 조용히 해달라고 했더니, 직원이 하는 얘기가, 오늘 새해라고, 이게 정상이니 나도 방법이 없다고 (눈썹을 치켜들며 어깨를 으쓱하는 표정이겠지). 그렇게 새벽 4시까지 뒤척이다 잠들었다.  

완전한 원을 그리다

1월 1일 오전 10시 30분.
체크인을 끝내고 버스역으로 걸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날씨도 좋은데 이번에는 다른 길로 좀 다른 경치를 기대하면서 가야지. 30분이 걸린다, 유명한 교외 여행지들은 다 너무 먼 곳에 있어 포기한다면, 12시 쯤에 여기에서 출발하면 되고.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뭘 해야 의미가 있을가? 

짐작이 됐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시 그 카페에 들렸다. 혹시나 해서 대충 주변을 둘러봤지만 D는 보이지 않았다. 약속을 안 잡았으니 당연히 없겠지. 난 이틀 전 그 테이블에 앉아 라떼를 마시면서 노트에 이것 저것 정리도 하고, 리가에 도착하면 뭘 할가 고민도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이제 일어나야겠다 생각을 할 무렵,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D와 한명의 친구가 내 뒤에 서있었다. 서로 의외인 듯,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간단히 인사를 했다. 나는 조금 뒤에 버스를 타고 리가에 가고, D는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로 돌아간다고 했다. 

마지막 인사는 악수였다.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린 서양권 문화 친구들끼리 하는 옅은 포옹의 형식으로 인사를 했었는데. 악수가 의외로 편했다. 

D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자기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태그를 붙여 마음의 서랍 속에 분류해서 넣어둔다고, 하지만 아직 날 무슨 태그로, 어느 서랍에 분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난 말했다, 당연하지, 어떻게 간단한 태그 하나로 나같은 사람을 분류할 생각을 했냐고. 

40년 살아가면서 그게 제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나는 그런 방식이 존재함을 이해하지만 그 "시스템"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기에 이런 고뇌가 없다고 말했다. 

풍경을 감상하면서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문자가 왔다. "궁금한게 있는데 넌 왜 다시 그 카페에 간거야?" 난 대답했다. "어디에서 시작을 했으면 어디에서 끝내야 그게 완전한 원으로 이어져 마무리가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별 생각 없이 한 답장이지만, D가 어제 절반 남긴 맥주로 나한테 준 영향처럼, 나의 이 말도 뭔가 여운을 남기지 않았을가? 

이 글을 공유하기:

현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13
좋아요
오~ 오~
0
오~
토닥토닥 토닥토닥
0
토닥토닥

댓글 남기기

  1. 시간이랑 일정 알차게 보낸 여행이네요. 이렇게 꼼꼼하게.기록하는걸 여기서 배워갑니다. 이렇게 기록 하고 나면 나중에 10년 20년 뒤에 보더라도 그때 기억 새록새록하고 그 감정들이 되 살아 날것 같네요. 굿굿

  2. 먼가 좌충우돌 여행기 느낌인데요 ㅋㅋ 뜻밖의 사람도 만나고, 뜻밖의 플랜도 생기고… 근데 D는 사진 한장 안 남겼는지요?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 D를 이렇게까지 믿을수 있는 계기는? 집까지 따라가고… 저만 이런 느낌인지, 여행기 읽으면서 그 상황에서의 선택과 안전이 좀 걱정되긴하네요. 혼자서 한 여행이기에 ㅋㅋ 물론 아무탈없이 잘 했겠지만

    1. 이런 댓글 예상했었는데 이제야 달렸네요! ㅋㅋ질문 고맙습니다 범이님 🙂 믿을 수 있는 계기는 3번째 부분 “같은 곳 두번씩 구경하기”에 이유 3가지를 적었습니다.

      물론 계기를 더 많이 적는다고 해도 이 부분의 “간 큰 결정”은 충분한 해석이 어려울 것 같은데 저는 일단 카페에서 했던 얘기 디테일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한 평범한 회사원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글에도 나왔지만 그 분도 내가 오해할가 조심을 하는게 많이 보이더라고요.

      여행을 하다 보면 참 많은것들이 그 순간 순간의 판단에 따라 결정이 되네요. 물론 지금의 저라면 조금 신중한 다른 결정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면 또 전혀 다른 방식의 탈린 여행이 되었겠네요. 리가 여행과 비스무레한 여행패턴. 시작이 순탄치 않고 날씨도 별로였던지라 이 “당돌한 결정”이 아니었더라면 조금 밋밋했던 여행이었을 것 같기에 전 제가 그때 했던 결정이 마음에 듭니다 (나중에는 이렇게 洒脱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더욱더).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