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가 새 앨범을 냈고, 제목이 '부럽지가 않아'란다. 유독 주술어가 완전하거나 술어로 끝나는 경우가 많던 예전 곡들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던진건데, 듣는 사람의 머리에 꽂히는 그런 화법을 닮은 노래제목.
1.
그래 뭐 좀 새롭겠지. 장기하는 늘 새로우니까. 그건 나도 알지 라는 생각을 했음에도, 유튜브에서 클릭한 뮤직비디오영상에 적잖게 당황했다. 이거 팬이 만든 B급 뮤비인가? 마술을 하듯이, 검정 화면에 손 두개가 동동 떠있는 모습(글쎄 손가락 춤은 십년전에 '그렇고 그런 사이'에서도 나온적 있긴 하다). 미래지향적인 종잡을 수 없는 곡이 흐르더니
"야,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웃겼다.
야, 하고 부르면서 시작하는 것도 웃기지만, 의문의 손바닥이 사라지고 장기하 실물 등판.
빌려 입은 것 같은, 바지통이 너르고, 상의 자켓도 헐렁하고 기장이 긴 철지난 검은색 양복안에 대충 입은 하얀색 라운드 티(글쎄 찬찬히 보니 그나마 흰 셔츠).
이렇게 입고 뭘 하냐면, 설듯 넘어질듯 이상한 움직임으로 태극권 비슷한 것을 한다(그게 아닌거 나도 알지만 그럼 대체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그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니 언뜻, 너네 자랑해봐 다 덤벼, 난 안부러워해 그런 뜻인가?
이렇게.
무튼 시종일관 단일한 비트와 아까 그 미래지향적인 곡(어떤 팬이 표현한 바로는 '목성 여행가는 우주선 안에서 나올법한 노래')을 깔고 나오는 가사 또한 짧고 굵다.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부럽지가 않아. 부러워하니까 자랑하고, 자랑하니까 부러워하는거 아닌가.
이런 멘트가 몸에 익숙해 지고, 포토샵을 배우다 만 것 같은 화면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일때쯤 장기하가 하품을 하더니
난 잔다.
이러고 노래 끝. 방심하다가 또 크게 웃었다.
2.
궁금해서 찾아 들은 다음 신곡은,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뭘 자꾸 할라 그래' .
아까는 맨손으로 서있더니, 이번엔 그냥 앉아서 다리를 꼰 자세. 시작해서부터 90초 가량은 그냥 앉아만 있다가, 내가 몇번이나 말했는데 또 말하게 만드냐는 표정으로 고개와 발을 까딱거리면서 단마디 가사를 읊조린다: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뭘 자꾸 할라 그래
제목이 곧 가사. 이 한마디에 모든게 들어있으니 알아서 해석해라고 하는 것 같다.
배경으로 판소리가 깔려서 뭔가 했는데 뮤비 마지막에 '이자람 심청가 판소리' 앨범을 한번 비춘다. 판소리와 콜라보한 곡은 장기하가 처음이 아니겠지만, 가운데 랙걸린듯한 가사처리는 아무튼 나에겐 새롭다. (여기서 국악인 이자람을 처음 알고 찾아듣다가 판소리 듣고 감동받긴 또 처음)
6분에서 1분 30초를 이렇게 그냥 앉아있는.
댓글 천재들의 활약.
3.
장기하가 솔로가 아닌 '장기하와 얼굴들'로 활동할 때의 앨범들에도 다들 아는 좋은 곡이 많다. 나는 장기하의 음악을 좋아는 하지만 전부 찾아듣거나 자주 듣는건 아닌데 그럼에도 가끔 생각나는 곡들은 몇개 있다.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
노련한 것을 미덕으로 삼는 요즘의 연애풍토에 필요한 노래.
전통시장 한가운데 대충 야트막한 무대를 설치하고 밴드와 함께 공연하는 모습. 지금 보니 얼마전 유행하던 박새로이 머리는 사실 장기하가 먼저 했다.
남의 연애에는 이런저런 간섭을 잘해 감놔라 배놔라 잘해 이럴꺼면 이번참에 헤어져라
근데 니가 토라져 버리면 나는 그냥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하겠어
그리고 메인 가사 뒤에 깔리는 가사,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댓글을 살펴보니 내가 들은게 맞았다:
'금마가 사람이가, 금마가 사람이가 '
4. 이별후에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이별후유증을 노래하는 '빠지기는 빠지더라', 모르고 들으면 페브리즈 CM송인줄.
억장을 무너뜨리는 날들이 절대로 안 끝날 줄 알았더니
목이 늘어나버린 티에서 나던 니 냄새마저 빠지기는 빠지더라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너의 민낯에서 풍기던
아주 흐릿하고 향긋한 냄새마저 빠지기는 빠지더라
5. TV를 봤네
무의식중에 일상의 고민을 잊으려고 티비에서 쏟아내는 정보에 스스로를 마비시키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현실자각타임이 오는 것을 표현한 곡. 지금이나 신인시절보다 더 젊은 장기하.
눈이 시뻘개질 때까지 TV를 봤네 만사 걱정이 없는데
왜 자막이 올라가는 그 짧디 짧은 시간 동안에는
하물며 광고에서 광고로 넘어가는 그 없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시간 동안에는
노래는 듣고 싶은데 웃고도 싶고, 사이사이 단순하고도 가볍지 않은 참도리로 조련당하고 싶을 때 듣기 좋은 노래들이다.
2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