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이민실록] 003. 한희운 가족(길림 돈화)

내 부모 세상뜨는걸 보지도 못하구 동생들을 다 남북에다 널어놓구 나 혼자 설을 쇠자구 하니 한평생 원이 되였구나.


한희운, 남, 1918년생
길림성 돈화시 흑석향 경독촌 거주

나는 조선 경상북도 의성군 의연동에서 태여났다. 그때 우리 집 살림은 워낙 먹고 쓸만했는데 부친이 술마시느라구 그만 토지를 팔아먹고 집을 팔아먹고 하는바람에 구차하게 되였다. 부친은 술 한동이를 지고 가라면 못가도 마시고 가라면 마시고 가는 량반이였다. 나는 11살부터 일본사람집에서 소를 먹여주면서 일년에 그때 돈으로 15원씩 받았는데 식솔이 많아 그 돈으로는 안되였다.

14살까지 소를 먹이고 15살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이태동안 하다가 그래도 안돼서 어머니하고 만주땅에서는 농사를 마음대로 짓고 배불리 먹는다는데 한번 가보자고 했다. 어머니는 선뜻 동의하면서 부친에게 알리지 말고 가만히 가자고 했다. 하여 밤중에 누구도 모르게 떠났다. 모두 넷이 떠났는데 어머니하고 나하고 녀동생과 남동생이였다. 짐이란건 솥 하나에 옷견지나 바가지 같은것뿐이였다.

중국땅에 들어와서 처음에 교하에 갔댔는데 가보니깐 틀린 판국이였다. 먼저 온 사람들이 좋은 곳을 다 차지했던것이다. 하여 그곳에 몇달 있다가 돈화 신설툰(新设屯)이 라는 곳으로 나왔댔다. 그곳에 와서 밭을 얼마간 부쳤는데 그래도 열댓섬 나서 이것저것 제하고도 나머지를 찧으니 쌀로 열네마대 됐다. 거 과연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우리 부친에게 편지를 하여 건너오게 했다.

그런데 그곳은 보뚝이 자꾸 터져서 후에 남황니하자(南黄泥河子), 녕하진으로 두루 돌다가 이 흑석(黑石)에 왔댔다. 그땐 이 흑석에 홍송과 락엽송이 꽉 들어차있었다. 한족이라곤 하나도 없고 전부 조선족뿐이였다. 새 부락이 돼서 개암나무판에 새로 집을 짓구 들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들어와 가지구 양춘구(阳春沟) 저쪽에서 부락을 합병시켰다. 일본사람들은 일본에서 이민으로 개척단을 무어가지구 들어왔는데 한 40호가 있었다. 그놈들은 강제적으로 부락을 합병시키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집에 불을 지르고 날창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또 이사를 하였다. 그 이듬해부터 부락에 도랑을 깊이 파고 주위에 전부 토성을 높이 쌓았다. 밥만 먹으면 그 역사질이였는데 하루라도 빠지면 안되였다.

그때 또 소백산(小白山)에《토비》가 나졌다고 해서 쩍하면 일본놈들에게 붙잡혀 짐을 지고 그리로 갔댔다. 우리 여기서 소백산까지 60리이고 산밑에서 산꼭대기로 올라가는데 또 한 10리 된다. 한번은 짐을 날라주고 돌아와서 산에 낭기(나무)하러 갔댔는데 오다가 또 붙잡혀 짐을 지고 갔댔다. 공산당이 산에 있다고 일본놈군대들이 까맣게 산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또 한번은 그놈들에게 붙잡혀 마호(马号)라는데 갔댔다. 골안으로 한참 들어가는데 그만 앞에서 싸움이 붙었다. 총알이 푱푱 옆을 지나가고 나무잎이 활활 떨어졌다. 돌옆에 딱 엎드려 한참 있으니 총소리가 멎었다. 호각소리가 나더니 일어서라구 하는것이였다. 공산당 유격대원 여섯을 붙잡았는데 녀자 셋에 남자 셋이였다. 일본놈이 한 녀자대원을 보구 좋은 남편 얻어줄테니 귀순하라구 했다. 그러니 그 녀자말이 너같은걸 낳을가봐 결혼 안한다구 하는것이였다. (후에 들을라니 모두 죽였다는것이였다.)

그때 공산당 유격대가 있던 집이라는걸 보니 그저 큰나무를 찍어다가 산을 깎아서 지은것이였는데 겉으로는 잘 알리지 않았다. 그안에 무슨 물건이 많았는데 일본놈들이 전부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길로 안도의 어느 골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일본놈들이 또 열몇집을 삑 둘러싸고 불을 놓구선 보이는 사람마다 날창으루 찔러죽이는것이였다.

북로군정서 군인들 모습

그후로는 농사를 지어서는 일본놈들에게 절반씩 바쳤다. 많이 바치면 일본놈들이 광목천을 줬다. 그때에는 입성(의복)이 제일 귀했다. 소금같은것은 일본놈들이 가져왔댔는데 쌀하구 바꿨다.

가난해도 그때 조선사람들은 조선학교까지 세웠댔다. 흑석에서 조남이라는 사람이 글올 가르쳤다.

그때 조선사람들은 생활이 구차했지만 명절같은 때는 한데 모여 노는 습관은 그대루 가지구있었댔다. 중국사람들은 함께 노는 법이 없어두 우리 조선사람끼리는 서루 어선(의지)이 돼가지구 재미있게 화목하게 지냈다. 내 결혼은 23살에 했다. 남의 중매루 결혼했다. 혼례는 조선풍속 그대루 했댔다. 그때 혼례는 지금 혼례보다 많이 달랐다. 관을 쓰고 절을 할 때 먼저 북쪽에 하고 신랑 신부가 서로 맞절을 하고 했다. 그때 조선사람들끼리 서로 잔치두 도와서 했댔다. 서로서로 관계가 참 좋았다. 누구네 집 일손이 딸릴적에는 모두가 나서서 방조를 하군 하였다.

조선에서 갓 이사해온 사람들이 서로 이집저집 다니며 은 동삼(겨울) 먹어도 밥값을 받는 법이라곤 없었다. 조선땅에서는 모두 딴 고장에서 살던 사람들이였으나 여게 와서 이렇게 서로 아주 의좋게 살았댔다.

집이름같은건 조선에서 살던 곳이름을 따서 불렀댔다. 대개는 조선의 도를 가리켜 이름을 지었다. 무슨 충청도집이라든가 전라도댁이라든가 이렇게말이다.

그때 로인들도 많았다. 그러니 명절같은걸 쇨 때면 조선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설이랑은 조선에서 쇠던대로 쇠였다. 식기같은것이라든가 기타 생활도구들두 다 조선에서 가져온대루였다. 연자방아라든가 조선식 술기(수레)라든가 다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우물도 조선식대로 팠댔다. 로인들은 역시 조선서처럼 갓을 쓰고 복장도 그대로였다.

간혼 조선에 갔다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이틀이면 가닿을수 있었으니깐. 누가 조선땅에 갔다 오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서는 고향이야기를 듣군 했다.

그때 집같은건 형편없이 해놓고 살았다. 그저 아무때건 고향에 가겠다는 생각이였으니깐. 그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꼭 고향에 가서 산다산다하며 집같은것도 대수대수 지었댔다. 그래서인지 그때는 마당에 과일도 심지 않았다. 그런데 또 조선에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던것이 속에서 내려가지 않아서 꾹 눌러있었다.

그때 우리 사촌형이 조선서 독립운동을 했댔는데 거기서 배기지 못해 중국에 들어왔다. 후에 길림 어딘가 가서 한번 편지가 왔댔다. 우리 큰아버지,큰어머니랑 아들을 찾아 들어왔댔는데 글쎄 일본놈들이 먼저 소식을 알고 붙잡아간후 소식이 없었다. 그때 일본놈들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붙들어다가는 구뎅이를 절로 파게 하고는 산채로 파묻었다. 독립군하구 조금 관계있는 사람두 사정없이 죽였다. 조선사람들 인재는 많이 독립군에 있다가 젊은 나이에 수없이 죽었다.

광복이 날 림시에는 일본놈들에게 멀기(머루)를 따다가 공출로 바쳤는데 멀기가 없다면 멀기잎이라두 따서 바치라구 해서 하여간 멀기공출에 몽땅 동원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산에서 멀기를 따는데 머리우루 비행기가 앵하구 나는걸 보니 일본놈 비행기가 아니였다. 마을에서 사람이 올라와서 일본놈 망했다, 인젠 따지 말라 해서 집에 돌아왔다. 그날 모두 마을에 모여서서 비행기를 구경하는데 일본사람들이 보따리를 싸가지구 떠나가는것이였다.

광복후에 조선에 갔댔다. 온 집안을 다 데리구 원산까지 갔댔는데 거기엔 일본에서 나온 사람으루 중국에서 나온 사람으루 우글우글하는 판이였다. 그래 에라 모르겠다 되비 떠나서 중국으루 들어왔다.

그런데 그때 중국에선 팔로군하구 국민당이 쌈한다면서 부친이 안들어오겠다고 우겨 부친과 막내동생이 남조선에 떨어졌다. 후에 둘째동생은 항미원조 복구건설로 조선에 나갔다. 그러니 내 육친은 남북조선과 중국 세곳에 갈라져 살게 된셈이다. 그래 내 금년 설에 자식들하고 한 말이 이랬다.

《내 부모 세상뜨는걸 보지도 못하구 동생들을 다 남북에다 널어놓구 나 혼자 설을 쇠자구 하니 한평생 원이 되였구나.》

단경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만은 옮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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