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사랑이 뭐길래?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최근에 친구들과 사랑에 대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대부분 결혼한 지 십수 년, 길게는 20년을 넘긴 이들이라, 무슨 사랑이냐며 남사스럽다는 이도, 그냥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사랑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이도 있었다. 물론, 보면 웃음이 나고 안 보이면 보고 싶다고 예쁘게 말하는 신혼 중인 후배도 있었다.
한편, 나는 사랑은 감기나 사고처럼 내 의지와 무관하게 시작되지만, 그것을 지속하는 데는 ‘결단’이 필수라는 생각이다. 또, 우리 할머니가 하셨던 “일이 사랑이다”라는 말씀도 사랑의 구체화에 대한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해 왔다.
20여 년 전, 연애하고 지금의 결혼을 결정하던 때만 해도 나는 사람 사이의 만남과 사랑을 운명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나의 세계관에는 변화가 생겼고, 삶이 주어진 운명이란 믿음은 희미해졌다.
삶의 전제가 되는 세계관이 바뀌니,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하나씩 다시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다시금 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안녕한지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2. 철학이 말하는 사랑
인류는 오래도록 사랑의 본질을 묻고 답해 왔다.
고대의 플라톤은 사랑(eros)을 “결핍에서 출발해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운동”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philia)을 “덕 있는 삶을 함께 추구하는 우정”으로 보았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향한 이타적 사랑(caritas, =아가페)과 세속적 쾌락, 재물 등에 집착하는 왜곡된 욕망(cupiditas)을 구분했고, 칸트는 이웃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준칙”이라고 말하며 도덕적 실천의 문제로 보았다.
현대에 이르러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배워야 하는 기술”이라고 규정하였다.
요컨대, 철학의 질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은 ‘사랑은 무엇인가?’하는 존재론적 질문을, 칸트와 프롬 등은 ‘사랑은 어떻게 행해지는가?’하는 실천적 질문을 탐구해 온 것이다.
3. 할머니의 사랑 ― 일이 곧 사랑
내게 사랑을 가르쳐 준 첫 스승은 우리 할머니이시다. 할머니는 열여덟에 시집을 와서 할아버지께서 일찍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돌도 되지 않은 아버지를 혼자 키워내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많이 사랑하셨슴까?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많이 사랑하셨슴까?”라고 내가 물으면, 할머니는 그저 웃으시거나 “옛날엔 그런 말도 몰랐고, 스무 명 넘게 큰집에서 같이 살다 보니 언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새가 있었겠니?”라고 답하시곤 했다.
한번은 할머니가 집 구석구석을 닦으시며 “일이 사랑이다”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에 고소한 밥 냄새가 가득하고, 앞마당에는 깨끗한 옷가지들이 빨래줄에 걸린 채 바람에 춤추며, 뒷마당에는 할머니가 손수 심으신 가지며 고추며 토마토가 무럭무럭 자라던 어린 시절의 우리 집 안팎의 풍경 – 그것은 할머니의 노동의 현장이었고 그 노동은 곧 할머니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할머니의 헌신적인 노동과, 매일 골골거리던 어린 나를 안아 주시고 반겨 주시던 자상한 모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활동’, 프롬이 말한 ‘훈련된 기술로서의 사랑’ 그 자체였다.
한편, “일이 사랑“이라는 할머니의 말씀은 다른 말로 “사랑은 결국 돈과 시간, 노력(勞力)을 기꺼이 쓰게 만드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사랑은 매일의 반복되는 살림살이 속에서 한결같이 빛나며 우리 손녀들을 키워 주었다.
4. 사랑의 세 축: 본능, 의지, 제도
사랑은 본능에서 시작하지만, 그 불길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 아니라고,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내심 반박하고 싶지만, 최신 뇌과학 연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랑의 강렬한 감정은 도파민과 옥시토신 같은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분비와 관련이 있으며, 이런 화학 반응은 수개월에서 수년 내에 크게 줄어든다. 결국 초기의 본능에 의한 사랑의 불꽃은 자연히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그림 1. 페르닐라 스탈펠트 저, 이미옥 역(2016),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 사랑”에서 인용
이처럼 취약하고 단기적인 본능적 사랑 때문에 인간은 혼인이라는 제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혼인 제도는 본능적 감정이나 설렘이 옅어질 때 관계를 지탱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방향의 욕망이나 새로운 선택 의지가 생겼을 때 제도는 굴레가 되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사랑을 영속하는 데 믿을 것은 ‘의지’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의 행위(Works of Love)』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양심의 문제”이며, “매일 새롭게 반복되는 선택”이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의지만으로 충분한가? 그것도 아니다. 책임과 의무만 남았을 때 사랑은 메마를 수밖에 없고, 혼인은 어쩌면 ‘그저 함께 사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지도 모른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관계 유지에 대한 의지로 작은 설렘들을 다시 소환하는 일이다. 따뜻한 말, 소소한 배려, 함께하는 새로운 경험이 모여 사랑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익숙한 일상에서 배우자와의 설렘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반면에,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설렐 수 있는 존재이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만남에서 설렘을 경험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설레는 대로 흔들리기보다 그 설렘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이때, 설렘은 금기가 아니라 자신과 관계에 대한 성찰의 계기이며, 익숙한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자극이 될 수도 있지 싶다.
결국 사랑은 본능이 시작을 열고 제도가 울타리가 되어 주지만, 끝내 그것을 지속시키는 힘은 의지이다.
5. 철학자들의 사랑과 혼인
플라톤에게 사랑은 영적 상승의 계단이었고, 혼인은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인을 가장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우정(philia)의 장으로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혼인을 욕망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울타리이자 성화(聖化)의 통로로 보았다.
칸트는 혼인을 성적 욕망을 법적으로 공유하는 계약으로 정의하며 의지가 이를 도덕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롬은 혼인을 사랑의 자동적 보증이 아니라, 매일 훈련하고 실천해야 하는 장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롭게도, 철학자들의 실제 삶은 그들의 이론과는 일치하지만은 않다. 플라톤과 칸트는 독신으로 살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실혼 관계에서 아들을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롬은 혼인 경험이 있었는데, 특히 프롬은 세 번 결혼했다.
이처럼 철학자들의 삶은 각기 달랐지만, 그들이 남긴 사랑의 정의는 후세에 여전히 회자된다. 철학자들이 정의한 ‘사랑’과 ‘혼인’은 어쩌면 그들 또한 이루고 싶었던 이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론과 실제 삶 간의 간극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6. 에필로그: 오늘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믿는 사랑은 본능에서 시작해 의지로 이어지며, 제도 안에서 매일의 작은 실천으로 구체화된다. 제도가 반드시 사랑의 필수 조건인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그 틀이 우리의 노력을 지탱해 주기도 한다. 특히 양육해야 하는 아이가 있다거나 하는 공동의 의무가 확실할 때는 더욱 그렇다.
따뜻한 한 마디, 배우자가 좋아하는 간식을 무심한 듯 건네는 손길, 상대의 표정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세심함 – 사랑은 바로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다. 세월이 흘러 달라진 모습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오히려 더 예쁘다/멋지다”라고 말해 주는 다정한 말 또한 사랑이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계를 가꾸려는 의지이다.
남편의 농담처럼, 20년을 내내 연애 초기처럼 설레며 살았더라면 우리의 심장은 진작에 지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결국 사랑은 매번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설렘이나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매일 새롭게 선택하고 행하는 작은 실천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돌아보니, 나는 이 글의 제목이 던진 질문의 답을 이미 찾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오늘도 사랑을 선택했는가? 오늘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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