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1년의 방문학자 자격을 얻어서 P대학에 온 지도 이젠 2개월이 되어간다. 국내 유수의 대학에 왔다는 설렘도 있지만, 나에게 무엇보다 가장 와닿는 것은 북방의 계절이다. 

남방에서 6년을 지낸 나에게 남쪽의 날씨는 이젠 결코 낯설지 않다. 나쁘지도 않다. 어느 해인가 추석 연휴를 이용해 놀러 온 사촌 동생 부부가 더위에 헐떡이면서 죽으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물론 더웠지만, 그냥 “아, 덥구나” 이 정도일 뿐, 특별한 감각은 없었다. 벽에 물기가 맺히는 습한 날씨에도 별로 습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을이 다가오면 그 건조함에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고향이란, 고향의 기운과 날씨란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의식 같은 것일까? 북방의 계절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친숙함을 느낀다. 

한번은 20년 전 가을, 광동성에서 2개월을 지낸 뒤 상해, 북경을 거쳐서 연길로 돌아갈 때였다. 상해에 도착해서 버스 차창 너머로 북방의 나무를 보았을 때 나는 문득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긴 수염을 드리우고 길가에 늘어선 벵골보리수(榕樹)가 아니라 북방의 형상의 하고 있는 나무였기 때문. 이름도 모르는 그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집에 온 것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생판 처음 가보는 낯선 도시에서, 시골뜨기인 내가 고향의 느낌을 받았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옛도시인 상해에서 인간의 냄새가 더 짙게 풍겨와서였을지도. 국제적인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거쳐가고 있는 지역은 아마도 옛 거리여서 그런지 도로의 폭이 좁았다. 신도시인 선전(深圳, 심수)에서 내가 느꼈던 그런 광막함과 황량함이 아니라 좀더 오밀조밀한 삶의 냄새가 났다.

다른 한번은 코로나 때문에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한국에서 보낼 때였다. 한국의 5월, 5월은 정말 축복의 계절이다. 밝은 햇살과 돋아오르는 생명의 기운들, 땅에서는 삶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냥 해빛 속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환상인 것처럼 행복이 넘쳐 흘렀다. 

잠깐 머물렀던 북방의 기운 탓인지, 다시 돌아온 광동성의 가을은 어쩐지 황량했다. 사철 푸르른 나무들과 풀들이 시야를 메워도, 나에게는 그것이 약동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오자, 북향인 집은 찬 기운이 음습하여 나는 우울해졌다. 

나는 햇볕을 찾아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책 한 권을 들고 운동장 옆에 있는 벤치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 따뜻한 햇볕은 내 몸의 한기와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기운을 조금씩 채워넣어 주었다. 햇볕에 온몸이 따뜻하게 데워질 무렵이면 잊었던 행복감이 다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광주의 2월 역시 축복의 계절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더불어 그곳 또한 내 고향이라는 것도. 광주의 2월은 서울의 5월과 흡사하다. 약간 건조한 느낌이 드는 쌀쌀한 날씨에, 개인 날이면 햇볕이 온화하게 세상을 어루만져준다. 하늘은 맑았고, 머리 위의 나무에는 망고가 잔뜩 매달렸다. 

벤치에 드러누운 채로 나는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어둡고 음습한 방에 있다가, 화창한 햇살 아래로 나와 바람을 쐬는 것. 

이번에 북경에 와서도, 나는 고향의 계절에 물씬 젖어버렸다. 9월의 북경, 북방 특유의 맑은 날씨와 따뜻한 해살, 서늘한 바람. 그것들을 느낄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생각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다.

10월이 끝나가는 지금, 가을의 막바지에서도 이곳의 하늘은 맑고 이곳의 바람은 서늘하다. 햇볕 아래에서 길을 걷고 있거나 낡은 건물들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으면 몇 백년을 살아온 것 같은 친숙함을 느낀다.

오늘은 호숫가 주변의 낡은 건물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특이한 냄새를 맡았다. 살짝 시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냄새… 알구배 냄새였다. 알구배가 익어서 문드러지는 냄새… 

나는 아는 사람을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어쩌면 알구배 나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구배 나무는 보이지 않고, 가을을 맞은 스산한 나뭇잎들만 눈에 들어왔다. 

순간 눈앞에 고향의 산과 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풋풋한 벼이삭 냄새, 알구배, 구름나무 등에서 풍겨오던 가을의 익은 내음까지… 

아득한 느낌에 혼자 멍하니 서 있다가, 환각이 사라질 무렵 그곳을 천천히 떠났다. 귓가에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알구배 구름나무 익어가던 곳으로.” 

찾아보니 노천명의 시이다. 뒷구는 내 허술한 기억력이 멋대로 바꿔치기를 한 거고. 아무튼, 발 닿는 곳마다에서 고향을 느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한용운이 그랬지. 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 “친숙한 것은 다 고향이요, 사랑은 다 행복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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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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