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파란 껍데기와 빨간 껍데기, 호구부의 설움
자… 이제 다시 우리 전주김씨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꾸나.
앞서 할머니네 이야기를 하느라 잠시 멈췄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우리 가족의 뿌리가 어떻게 이곳 연변 땅에 깊이 박히게 되었는지 더듬어 보자. 가장 먼저, 룡정으로 건너와 연길에서 중약방을 운영하며 독립군 북로군정서에 몰래 군자금을 대셨던 조선족 1세, 너의 고조할아버지 김치권 어르신이 계셨지. 그리고 중국에서 태어나 왕청현 류수하(柳樹河)에 터를 잡으셨다가 훗날 왕청대대에 편입되셨던 2세, 너의 증조할아버지 김성산 어르신. 마지막으로 해방 후 증조할아버지의 계급 성분 탓에 온 가족과 함께 모진 시대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3세, 너의 할아버지이자 나의 아버지 이야기까지…
오늘은 그중에서도 제3세인 아버지가 청춘을 바쳐 겪어내야 했던 그 시절, 삶의 터전이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던 생산대대(生産大隊)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사실 이 생산대대라는 말이 요즘 세대인 네게는 참 낯설게 들릴 거야. 잠시 아빠가 역사 선생님이 되어 설명해 주마. 중국의 생산대는 단순한 마을이 아니라 집단화 시기에 만들어진 조직이란다. 1953년 농업 협동화 운동이 시작되면서 농민들이 서로 돕는 호조조를 거쳐, 토지를 합치고 함께 일하는 협동사로 발전했지. 그러다 1958년 그 유명한 인민공사화 운동이 불면서 행정, 경제, 사회가 하나로 통합된(政社合一) 거대 조직인 인민공사가 탄생했단다. 그 거대한 인민공사의 손발이 되어주던 말단 조직이 바로 생산대였어. 이 체제는 1983년 인민공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무려 25년 동안이나 농민들의 삶을 지배했단다.
당시 길림성 왕청현 왕청진에는 여러 개의 생산대대(生産大隊)가 있었는데, 조선족자치주라는 특성상 민족 구성에 따라 대대가 나뉘어 있었지. 우리 같은 조선족 농민들로만 구성된 생산대대가 있었고, 반대로 한족이나 만족 농민들이 모인 대대가 따로 있었단다. 생산대대(生産大隊) 아래로는 30 ~ 80세대가 모여서 한개의 대(隊)가 모인 농민 단체조직이였다. 왕청대대(汪清大隊)는 12개 생산대(生産隊) 로 구성되었고 그중에서 너의 증조할아버지는 왕청대대 11대에 편입되셨어. 이 11대는 다른 말로 채대(菜隊), 즉 채소대대라고도 불렸는데 이름 그대로 곡식보다는 채소를 전문적으로 심어 공급하는 곳이었지.
내 기억 속의 11대는 50여 세대가 합쳐서 만들어진 단체 농민조직이 였는데, 참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어. 조선족 생산대임에도 불구하고 마(馬)씨, 공(孔)씨 성을 가진 한족 5세대 정도가 우리와 섞여 있었어. 이들은 본래 채소농사 기술 좋기로 소문난 산동성(山東省)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는데, 아마도 채소 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채대의 특성상, 기술이 뛰어난 산동성 사람들을 일부러 편입시켜 한 수 배우게 하려던 게 아니었나 짐작된다. 그 덕분에 우리 채대는 조선족의 정서와 산동성 한족들의 억척스러운 채소 농사법이 묘하게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지.
더욱 잊히지 않는 건 그분들의 생활 모습이란다. 비록 그분들이 드시는 음식이나 방을 데우는 구들 구조, 밥을 짓는 가마솥 같은 살림살이는 우리네 방식과 사뭇 달랐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만큼은 우리말을 어찌나 똑같이 하시는지… 겉모습이나 집안 풍경은 달라도, 조선족 이웃들과 잘 어울리며 우리말을 기가 막히게 구사하셨던 그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그렇다면 과연 채대(菜隊)에서는 무엇을 심었을까? 같은 채소 농사라 해도 다 같은 걸 심은 건 아니었단다. 왕청대대 11대 외에도 전문적으로 채소만 짓는 동풍대대(東風大隊)라는 곳이 따로 있었거든. 이 동풍대대는 재배 작물이 아주 뚜렷하고 규모가 컸어. 주로 큼직한 양배추나 가시오이(水黄瓜), 감자, 당근, 땅콩, 부추, 고구마, 피망(大辣椒) 등을 집중적으로 지었고, 비닐하우스 같은 온상 재배 기술도 뛰어났지.
그에 비해 우리 할아버지가 계셨던 왕청대대 11대는 좀 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채소 농사를 지었단다. 주로 작은오이(旱黄瓜), 가지, 배추, 청무우, 애호박, 매운고추(小辣椒), 들깨, 상추, 장단콩(扁豆角) 같이 우리 밥상에 매일 오르는 소규모 작물들이 주를 이뤘지. 작물의 생김새가 다르다 보니 우리는 거기에 걸맞게 '한족오이'와 '조선오이', '한족고추'와 '조선고추'라고 구분해 부르기도 했단다.
그 시절은 철저한 계획생산의 시기였어. 내가 땀 흘려 농사지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먹거나 팔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단다. 모든 것은 자급자족이라는 명분 아래 통제되었지. 생산대대에서는 '채소표'라고 부르는 하얀 종이 쪽지를 세대수에 따라 나눠주곤 했어. 그 종이에는 '오이 몇 근', '가지 몇 근' 이렇게 적혀 있었지. 우리는 그 하얀 종이로 된 '채소표'를 들고 길가의 전문 매점으로 가야 했단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듯 '채소표'를 내밀면 그제야 그에 해당하는 채소를 배급받을 수 있었어. 그 하얀 종이 한 장이 그 시절 우리네 식탁을 결정짓는 유일한 '권력'이었던 셈이지.
채소 농사에 매달렸던 우리 채대(菜隊)와 달리, 다른 일반 생산대(生産隊) 사람들의 삶은 또 달랐단다. 예로부터 우리 조선 사람들은 거친 땅에도 물길을 트고 수전(水田)을 일구는 데는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거든. 그래서 일반 생산대에서는 벼를 심어 그 귀하디귀한 하얀 입쌀을 생산해 내거나 옥수수, 콩 같은 잡곡을 심었고, 짭짤한 현금벌이가 되는 잎담배 농사까지 억척스럽게 지어 올렸지.
하지만 1년 내내 흙바닥에 땀 쏟아 거둔 그 곡식들은 온전히 농민의 것이 아니었어. 나라에 가장 먼저 바쳐야 하는 공량(公糧)이 우선이었단다. 가을바람 불어 타작마당이 분주해지면, 알곡은 먼저 나라 창고로 보내고 남은 빈자리를 세대수에 맞춰 겨우 채워 넣곤 했지.
그 고단한 농민들의 삶을 묵묵히 지탱해 주던 것은 바로 1년을 기다려 받는 연말의 분홍(分紅)이었단다.
매일 흘린 땀방울을 노동의 강도와 시간에 따라 차곡차곡 쌓은 것이 공수(工數)라면, 1년의 기다림 끝에 그 공수를 현금으로 정산받는 것이 바로 분홍이었지.
이 공수의 가치, 즉 단가는 꽤 꼼꼼하게 매겨졌어. 그해 농작물을 나라에 바치고 받은 공량(公糧) 대금부터 잎담배 판 돈, 그리고 생산대(生産隊) 사원들이 함께 부업을 해 벌어들인 수입까지 모두 합친 뒤, 이를 생산대 사원 전체의 총 공수로 나누어야 비로소 공수당 단가가 나왔단다.
그러니 농사 작황이 좋고 부업벌이도 쏠쏠해서 공수 단가가 높게 쳐지는 해는 그야말로 온 마을의 잔칫날이었지. 두둑해진 분홍 봉투 덕에 온 가족이 때깔 고운 새 옷과 신발을 장만하고, 평생 꿈도 못 꾸던 장롱이며 가전제품을 들이며 웃음꽃을 피웠단다. 농민에게는 그날이 1년 중 가장 가슴 벅찬 유일한 축제였던 셈이다.
어디 돈뿐이었겠니? 분홍을 타는 날이면 생산대(生産隊)에서는 돼지도 잡고 소도 잡아 생산대(生産隊) 잔치를 벌였단다. 잡은 고기는 세대수에 맞춰 큼직하게 썰어 나누었는데, 고기 덩어리 위에 세대주 이름을 적은 종이를 턱 하니 붙여 놓으면 가장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 고기를 찾아가 집에서 가마솥에 푹 삶아 온 식구가 배불리 먹곤 했단다.
이처럼 흙과 더불어 살던 농민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부러움의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도시의 성시호구(城市戶口)를 가진 공인(工人)들이었단다.
그들은 우리처럼 기약 없는 1년을 기다려 '분홍'을 받는 게 아니라,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살았지.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량표(糧票)라는 '특권'이 쥐어져 있었어. 비록 성(省) 경계를 넘으면 쓸 수 없는 종이였지만, 이 표만 있으면 길림성 안에서는 쌀과 밀가루를 정기적으로 '배급'받을 수 있었단다.
특권은 그뿐만이 아니었어. 식용유를 사는 기름표(油票), 옷감을 끊는 천표(布票), 고기를 사는 고기표(肉票)까지… 도시 사람들은 이 표들 덕분에 먹고 입는 걱정 없이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렸지만, 표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 농민들은 시장에서 물건 하나를 사려 해도 현금으 그 '표'를 사야만 구매가 가능했단다.
그때 세상은 마치 딱 두 가지 색깔로 나뉜 듯했다. 도시 사람들의 '빨간 호구부'와 우리 농민들의 '파란 호구부'.
'빨간 호구부'를 쥔 공인들은 월급과 배급표라는 울타리 안에서 배고픔을 모르고 살았지만, '파란 호구부'를 쥔 농민들은 흉년이 들까 노심초사하며 하늘과 땅만 바라봐야 했단다. 그것은 명백한 차별이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신분의 벽이었지. 그래서 우리는 늘 그 붉은 빛깔의 호구부를 동경의 눈으로 올려다보곤 했어.
하지만 '파란 호구부'를 가진 농민이 '빨간 호구부'를 손에 쥐기란, 마치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단다. 오직 대학을 졸업해 국가로부터 직장을 배치받거나, 나라에 혁혁한 공로를 세우거나, 남들이 가질 수 없는 특수 기술자 칭호를 얻는 등… 아주 까다로운 바늘구멍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그 신분을 바꿀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너의 할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살아야 했던 그 시절은, 그렇게 호구부 겉장의 색깔 하나로 삶의 무게가 천양지차로 갈라지던, 참으로 야속하고도 치열했던 시대였단다.
[농민호구부]
[공인호구부]
[길림성 전용 량표]
つづく
「 1.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
2. 1부2처(一夫二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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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악운(噩运)
5. 홍진(天然痘) 바이러스
6. 문화대혁명
7. 수북(水北)과 할머니의 흉터
8. 독버섯(毒蘑菇)사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