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언가를 끝낼 때는 항상 완전한 단절을 꿈꾼다. 어두웠던, 혹은 찬란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은 수많은 실로 복잡하게 엮인 실타래와 같다. 겪었던 일들, 조우했던 인연들 어느 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없다. 그 실타래에 엮인 실 하나에 문제가 생겼다면, 실타래 전체를 새로 정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내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한때 영롱했던 오색실이었던, 이미 정교하게 잘 감겨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실타래 전체의 질서를 뒤흔든 것이다.
대략 7년 전, 학술서 한 권의 편집을 맡은 적 있다. 중세 언어를 다룬 책이었다. 나에게는 천문학 기호처럼 느껴지는, 현재 사용하지 않는 문자표기가 군데군데 섞여 있는 데다가 원문 입력에 적지 않은 오류가 있어서 상당한 정도의 정력과 정성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나는 오탈자와 비문 수정에 신경 썼을 뿐만 아니라, 원시 자료까지 입수해서 인용문에 오류가 없는지 일일이 대조하고 살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이 책은 자료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친 심신을 달랬다. 어쨌든 나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한 책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책에 문제가 생겼다. 책에 일관되게 나오는 어휘 하나에 오류가 있었다고 한다. 얼마 전 최근 10년 안에 출판된 책들 전부를 새로 심사해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벌이게 되면서 내가 맡았던 그 책도 검수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심사위원이 이의 제기를 한 것이다. 확실하게 문제가 될 사안인지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내가 책임편집이었으므로 나에게 알리는 차원에서 연락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소식은 내 평화를 깨뜨리기에 족했다. 그 어휘가 확실하게 문제가 될 경우, 연루가 될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 어휘를 일관되게 사용한 저자, 문제시하지 않고 넘어간 편집자, 복심, 주임까지. 어쩌면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분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칠지도 몰랐다. 연말성과금, 진급 등 모든 사안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더 이상 받을 연말성과금도, 진급의 가능성도 없는 나에게는 사실 별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생각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오히려 문젯거리로 판정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좌절하게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따리에 계속 머물면서 이 사건과는 거리를 둘 수도 있었지만, 나는 돌아가기로 했다. 더 이상 이곳에 평화롭게 머물 수가 없었다. 물고기는 강호에서 자유롭게 노닐면서 서로를 잊고 지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하지만 뭍에 올려졌으니 서로 거품이라도 내뿜어서 말라가는 몸을 적셔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내뿜을 수 있는 거품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올라가서 이 문제에 직면해 보자.
이직 후 TODO 리스트를 떠올려 본다.
#4 새로운 직업 갖기
새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와의 단절이 이렇게 어려운데. 새로운 직업을 가지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