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가 다 지났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란 부품판매원 노릇을 직접 해본거였다. 낮경비로 있던 차장이 방문객이 왔다고 알리면 먼저 경비실에 간다. 거기서 종이돈을 갖고 온 사람은 며칠 후에 오라고 잘 말해준 후 돌려보냈고 현금을 갖고 온 사람한테만 팔았다.

종이돈 중에 군대들이 갖고온 군수물자증표 외에도 물자 위임장, 무현금 행표 등이 있었는데 거의 다가 마분지에다 볼펜으로 줄을 긋고 글을 써넣은 후에 도장을 찍은거였다. 무현금 행표만은 좀 두꺼운 백지에 인쇄해서 발행한 것으로서 보기와 쓰기에 괜찮다는 느낌이 들뿐이고 극히 적게 사용되고 있었다.  

나는 그 종이돈을 볼 줄 몰랐다. 이름만 알고 있을뿐 유효 기일, 지배인과 부기장의 수표(사인), 물자 인수자의 수표, 공인 명판(도장), 돈액수, 거래은행 등을 확인하는 것이 번거로워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로따가 의식적으로 나에게 회사의 돈에 대해 신경쓰는 일 없도록 경고준 일도 있었으므로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로얼은 오래동안 받아 보았고 은행거래 내용도 다 알고 있었으므로 받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설 휴가가 지난 다음에 받기로 하겠다면서 기어이 돌려보내라고 했던 것이다.

로따부부와 임씨네 형제가 나왔고 로얼은 훈춘에 들어갔다. 웬 일인지 외숙모가 나오지 않았고 나를 계속 남아있으라고 했다. 위홍이의 부친과 영철이의 생일이 같은 날인데 며칠후 생일을 쇤 후에 영철이랑 오게 될거며 용철이는 나진에서 뼈를 잘못 이어주어 훈춘에서 다시 잇고 지금은 치료중이라고 한다.  

주문이 들어온 샤시 작업을 해야 했기에 임씨 형제가 나온것이었고 영철이가 나오지 못하면 그 대신 내가 《창고장》이 되어야 한다. 그렇잖아도 요즘 부품 사러온 사람들은 나를 《창고장》이라고 불러 주었었다. 설전의 어느날 일제 승용차를 수리하러온 어느 기업소의 지배인한테 로따가 나를 《기사장》이라고 소개한 일이 있었다.

1년 동안에 감투를 몇개나 썼지만 어느 것이나 부르기 힘든 직무여서 종업원들은 계속 《영도 선새임》과 《영도 동무》로 부르고 있었고 그까짓 감투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나도 뭔가 고정된 한가지 일만 했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나진에 있어보면 다 휴식하는 일요일이 제일 한가하다. 저녁시간에는 밥 먹고 아랫집에 가서 잤지만 낮시간에 아랫집에 가본 일이 크게 없었다. 가보려고 작심했고 오전에 경비실을 탐방한후 오후에 가보기로 했다. 이날이 나에게 있어서 태어난후 제일 큰 충격을 받은 하루로 되리라고는 정말로 상상밖이었다.  

먼저 오전의 경비실 탐방을 보기로 하자.  

예전과 마찬가지로 담배 연기가 자오록했고 수리반과 낮경비인 허은희가 있는 외에 차영감도 와있었다. 수리반의 이창현과 함께 경비실밖에서 낮시간에 쓸 장작을 패느라고 수고한 차영감이 자연 이야기 코를 떼기 시작했다.  

– 너희 중국사람들은 뻔질나게 잘도 다닌다. 마치도 동네집 놀러다니는 식 같단 말이야, 우리가 지대밖에 나가는 것도 국경을 넘어다니는 너희들보다 더 어려운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니깐 말이야.  

– 중국에서도 특별구인 심천이나 주해로 가자면 통행증이 있어야 갈 수 있음다. 기차로 거의 60시간이 걸리기에 가려는 사람이 지루함을 이길수 있다고 자신이 서면 아무때나 갈수 있음다. 통행증은 선 자리에서 받을수 있구요. 나진에 다니면서 보니까 중국의 심천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저 듣는 말에 여행증 내기가 힘들다던데 그게 정말임까?  

– 기업소에서 신청해 준단 말이야. 시간이 좀 걸릴뿐이지. 그리고 유효기간 사이에 차때문에 돌아오지 못할가봐 걱정이 되기도 한단 말이야.  

조선의 철도는 전국적으로 전기화라고 한다. 그런데 전기사정 때문에 나진에서 800키로정도 되는 평양까지 2박 3일 지어는 그 이상이 걸린다고 하며 정상적인 경우라도 서른 시간정도 걸린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갈 때는 기차보다 길에서 차잡이 하는것이 더 빠르다고 한다.  

– 아바이는 평양이 많이 다녀 오셨겠음다?  

– 어, 그래. 몇번 가보았지. 한번은 노친을 데리고 갔는데 돌아올 때 차표를 떼지 못했다(끊지 못했다). 혼자 올 때는 비집고 서고 꿇어앉고 되는 대로 타고 다니지만 노친을 고생시키려니까 그게 마음에 내려가지 않더란 말이야.

그래서 출발전에 시험삼아 역종업원을 한명 붙들고 얘기해봤지. 나 대의원대회에 참가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인데 노친이 앓고 있어서 침대표를 뗐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노친과 꾀병을 하기로 이미 약속을 해놓았고 대의원증을 보여주었지.  

처음에 시답지않게 여기던 그 사람이 대번에 차렷자세로 거수경례를 하더란 말이야. 그 사람이 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침대칸에 와서 시중들던 일이 잊어지지 않아. 그런데 그 꾀병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그때 알게 됐거든. 차가 출발해서야 한숨이 나가더란 말이야. 대의원을 지낸 덕에 내가 침대차까지 타 보았잖아.  

조금 침울한 기색으로 바뀌어지더니 듣기에도 끔직한 이야기를 서서히 하기 시작했다.  

평양과 원산사이에 조선에서 가장 험하고 가파로운 양덕 고개가 있다. 1월말에 전국성적인 회의가 세개나 열렸었는데 지대안의 기관, 기업소의 국장, 소장, 지배인들은 거의 다 참가했고 2월 1일날 돌아오는 열차를 탔었다.  

아침 여덟시 경에 양덕 고개의 제일 높은 곳의 역에 도착했고 그때따라 정전이 되어 저녁 아홉시까지도 전기공급이 되지 않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사고가 발생했다. 캄캄칠야속에서 열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모두 후진하는 열차를 두고 이상하게 생각하고있는 동안 열차는 역을 빠져나왔고 점차적으로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열차는 에어 브레이크 시스템이었는데 오랜시간 서있는 동안 고압에어가 다 빠져 버렸고 라이닝을 작동시킬 그 어떤 힘도 없어져 관성의 작용으로 내리막길을 저절로 마구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무게가 엄청난 열차가 순 관성의 힘으로 가파로운 내리막을 내려가면 속도는 점점 빨라지기만 한다. 다음 역까지 후진상태로 아무런 저애력도 없이 맹열하게 달려갔다. 그 역에도 정전때문에 열차 두대가 서있었는데 윗역에서 엄청난 속도로 내려온 열차가 같은 차도의 열차와 정면 충돌하였고 탈선하면서 옆에 서있던 군용 열차를 떠박았다.

한차례 참상이 눈깜작할 사이에 벌어졌다.  

회의대표를 실은 열차의 마지막 차량은 연석침대칸이고 나진에서도 괜찮은 인물들이 탔었다. 거대한 충격력으로 차량은 납작하게 되었고 그안의 죽은 이들을 산소 절단기로 차량을 끊어서야 들어낼수 있었는데 완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머리는 머리대로, 팔다리는 팔다리대로, 몸뚱이는 몸뚱이대로 그야말로 피에 물든 양덕 고개로 되었다고 했다.  

충돌과 전복 사고로 얼마나 되는 인간이 저 세상으로 갔는 지는 누구도 모른다. 나진에서는 아직도 사망자 명단을 전달받지 못했다. 그러나 소문만 듣고서도 살아 돌아오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결론이 쉽게 내려지는 공화국 역사에서의 최고 사고라고 한다.  

“열차에 응급 제동장치가 있겠는데요?”  

내가 듣다못해 경악하는 가운데서도 한마디 물었다.  

두가지 응급제동이 있다. 하나는 정전에 대비해 레루장 위에 철덩어리를 놓아 바퀴를 받쳐놓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기차 위에 있는 기계식 응급제동이다. 이번 사고에서 가능하게 어떤 나쁜 놈이 그 철덩어리를 빼갔다. 기계식 응급제동 장치는 정비를 하지않아 다 녹이 쓸어있고 작동되지 않아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왜서 정비하지 않는 겁니까?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친 거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듯이 물었다. 철도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는 차영감은 기차정비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는 터였다. 응급제동은 화물 기차에서나 가끔 쓰고있고 여객기차는 쓰는 확률이 적기때문에 거의 정비를 하지 않는다.  

일개 기사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해온 사람의 입에서 말도 안되는 소리가 나온다. 사고의 원인이 바로 정비 불량인데 거기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기사장이 만천하에 도대체 몇명이 있단 말인가?

나의 의혹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아바이가 계속했다.

정비 과업은 연간 계획 중의 한부분이다. 정비가 채 되지않은 차는 내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정비에도 소홀한 부분이 있다. 수년간이나 수십년간의 정비경험 대로 운행에 필요한 부분만 정비하고 거의 쓰지않는 응급제동같은데는 점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지나온 세월 동안 조선은 전기사정이 괜찮았고 오히려 조선과 가까운 훈춘 쪽에서는 조선의 전기를 썼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전기 사정이 극도로 곤난한 지금 조선에서 응급 제동장치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데 정비를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경험주의가 빚어낸 악과이다. 간첩이 정비불량인 차인 것을 알고 레루에 고여놓은 철덩어리를 빼갔다고 의심하는 일도 이해할만한 일이다. 간단히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철덩어리를 빼다가 폐철(고철)로 팔아서 살림에 보태려는 작은 욕심으로 빚어진 결과라고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뭐가 어찌됐든 사고는 일어났다. 예방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책임을 져야할 거였다.

그러나 1년 동안의 관찰을 통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일하기 싫어하고 특히 남자들은 술주정이나 하고 매일 음담 패설로 세월을 허송하는데 습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보아냈고 나라에서 개인장사를 반대하는데도 단속을 무릅쓰고 가만히 장사를 하는 아낙들과는 달리 생의 의욕이 점차 쇠퇴해 가는 남자들의 모습을 많이 보아 왔었다.

말하자면 정책이 어떻든 지간에 집행자가 열성을 내어 일하지 않는다.  간신이 욱실거리는 나라가 어떻게 강성해질수 있단 말인가? 간첩들보다 간신이 해내는 하찮은 일로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는데 그런 손실만 없어도 나라 사정이 구차하게 되지 않을거였다. 나는 개인차 한대도 없는 조선에서 나라의 차를 운전하는 기사들 대부분이 자동차 정비를 소홀히 하는 현상들을 두고 간신들의 너절한 행위로 보아왔다. 자기 집 차라면 그렇게 다루지 않을 거였다.  

나진에 다니는 중국 기사들 대부분은 다 자체로 차를 사가지고 운수업을 하고 있는데 그 차를 얼마나 아끼는지 모른다. 조금만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세워둔다. 그런데 나진의 기사들은 정비작업이 엄청 수요되는 차를 억지로 끌고 다니고 있었고 그런 기사들이 문제될뿐만 아니라 기사한테 운수작업임무를 주는 령도들도 문제된다. 나라의 재산을 자기 몸 한부분처럼 진정 생각해주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한 사람들이니 사고를 쳐도 큰 사고를 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오후 시간에 있었던 일을 보기로 한다. 

아랫집 임시 건물은 방이 세개다. 동쪽 방과 가운데 방은 우리 식구들이 침실로 쓰고 있었고 서쪽 방은 전화를 두고 사무실 겸 경비실로 쓰고 있다. 

작년 연말에 지을 때 차영감과 로따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붙었었다. 온돌 펼 때었는데 로따는 남향집이라는 것과 겨울에 북서풍이 많이 부는 상황에 따라 부엌은 방의 북쪽에, 굴뚝은 방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고 했고 차영감은 그렇게 하면 온돌 면적이 적어진다면서 기어이 부엌은 남쪽에, 굴뚝은 북쪽에 있게 만들려고 고집했다. 

안화동 회사옆의 주민들은 아직도 일제 시대의 건물들을 쓰고 있었는데 전부다 남향집이고 굴뚝도 남쪽에 있다. 일본인들이 그때 당시에 집을 짓는데서도 부엌은 북쪽, 굴뚝은 남쪽이라는 온돌방의 기본을 어기지 않았는데 아바이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거였다. 

로따가 나진 시내에 있는 일제 시대의 어느 한 집이라도 남향집 굴뚝이 북쪽에 있다면 아바이 생각대로 하라고 모를 박아서야 아바이는 고집을 거둬들였고 제일 작은 서쪽 방만은 끝내 자기 고집대로 북쪽에 굴뚝을 세워 놓았다. 

동쪽 방과 가운데 방은 불길이 잘 들었고 저녁에도 연탄가스 중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서쪽 방은 매일마다 연기가 거꾸로 나왔고 추운 겨울날에 출입문을 열고 있어서 언제 한번 온돌방 구실을 할 때가 없다. 

어느 한번 기사들이 모여들어 굴뚝밑을 헤쳐보았는데 녹아내린 물이 구멍을 막고 얼어붙어 있었다. 며칠에 한번씩 얼음까는 작업을 해서야 겨우 불을 때는 정도였고 밤경비들은 거의 매일 연탄가스를 먹고 경한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세개 방중에서 동쪽 방이 제일 컸다. 차장 처녀들이 요즘 그 방에서 《2.16》 맞이 공연 준비를 하고있었다. 가운데 방은 용철, 나, 영철이 세명이 자는 방이었는데 낮시간 치고 오늘 처음 이 방에 오게 되었다. 따뜻한 온돌방에 걸터앉아 옆방에서 울리는 노래 소리를 들었고 귀맛 좋은 아코디언과 기타 반주도 들었다. 

요즘 새로 온 김혜영이 아코디언을 타고있고 또 새로 온 강경순이 기타를 타고 있었는데 김영화의 독창에다 3인창에 합창까지 있다. 잠깐 휴식 시간이 있는 모양, 조용해졌고 이내 재잘거리는 처녀들의 말소리로 가득찼다. 내 방에는 종업원들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혼자 있을려니 멋적고 차라리 옆방에 나가서 농담이라도 한바탕 하고 싶어졌다. 

처녀들은 다 동맹 조직의 일원이고 정화가 비서를 맡고 있어 공연도 자연히 정화의 지휘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다음번 연습 때는 어떤 면에서 주의해야 한다고 거듭 말하고있는 정화 옆에 나이가 든 여자로는 남연숙과 김정애가 있었고 처녀들과 한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면서 여자들의 특유한 체취도 느껴질만큼 냄새가 심해서 약간 현훈증이 일기도 했다. 우리 식구들이 그 냄새를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지만 목욕도 별로 하지않는 몸과 땀내에 절은 양말과 좋은 세척물을 먹지 못하는 옷에서 어쩔 수 없이 냄새를 풍기고 있는데는 그녀들도 대책이 없는 가 부다. 

냄새가 어떻다고 종래로 그들앞에서는 말을 해준적이 없지만 오늘은 어쩐지 하고싶었다. 

– 여자의 몸에서 왜서 냄새가 나는지 아십니까? 

모두 엉뚱하다는듯 머리를 갸우뚱한다. 

– 옛날 옛날 먼 옛날, 어느 마을에 순이라고 부르는 처녀가 살았습니다. 

어느 봄날, 마을 뒤산에서 나물 캐던 순이가 목 축이러 샘터에 갔습니다. 거기서 생각밖에 계란을 한알 줏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을의 암탉이 샘터까지 와 가지고 금방 낳아 놓은 거였습니다. 

샘물을 마시고 샘터에 앉아 휴식하는 동안 이 계란을 어찌할 것인가 궁리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몸에 넣고 싶은 묘한 충동을 받았습니다. 넣었다가 빼고 다시 넣으면서 흥분하고 있었지요.

이때 한 마을의 돌이가 나타났습니다. 샘터를 지나다가 쭈그리고 앉아있는 순이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돌이를 발견한 순이는 깜짝 놀라 그만 계란을 몸의 깊숙한 곳에 넣고 말았습니다. 

돌이는 순이를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순이가 응해주지 않았습니다. 

돌이가 치근거릴가봐 순이는 바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에 들어간 계란은 좀처럼 나오질 않았습니다. 부끄러워 부모님들한테도 말을 꺼내지 못한 채로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습니다. 

계란을 넣은 지 20여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날도 샘터에 찾아온 순이가 샘물을 마시고 나서 오늘은 어떻게 하든 그 계란을 빼보려고 작심했습니다. 그가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가는데 난데없이 삐악삐악하는 병아리 울음소리가 나는게 아니겠습니까? 두리번거리면서 병아리를 찾았지만 나중에야 자기 몸안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 참 야단입니다. 그 계란이 순이 몸안에서 병아리로 까난 것입니다. 

게다가 듣기도 싫은 울음 소리를 잠시도 쉬지않고 냅니다. 집밖에서 까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병아리를 꺼내려고 마음먹었습니다.아무리 애를 써도 끝내 꺼내지 못했습니다. 이제 순이는 기진맥진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또 돌이가 나타났습니다. 쓰러져있는 순이를 일으켰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안아보게 된 것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삐악삐악하는 병아리 소리가 들립니다. 어디서 나는 난데없는 소리일가 귀를 기울여듣다가 순이의 치마 밑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치마를 들어보았으나 병아리는 없습니다. 참 귀신이 곡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또 삐악삐악하는 소리가 납니다. 분명히 치마 밑인데 병아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순이는 용기를 내어 자기 몸속에 병아리가 있다고 알려주었고 빼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에야 돌이는 무슨 영문인지 알았고 오히려 시뚝해졌습니다. 병아리를 빼주면 그 대가로 자기한테 시집와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순이는 이제 조건이 얼마 각박하든 가릴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하마고 대답했습니다. 

돌이는 순이더러 두 다리를 벌리게 하고 주머니에서 좁쌀을 꺼내 두 다리사이에 좀씩 뿌리면서 

쥬-! 쥬쥬쥬-!

하고 병아리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몇번 부르니 병아리가 다리 사이를 놀라운 힘으로 비집고 뛰쳐 나왔습니다. 나와서 좁쌀을 맛나게 쪼아먹었습니다. 

생각밖으로 너무 쉽게 빠져 나온 병아리를 보고 순이는 방금 돌이와 한 약속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돌이보고 아까 한 약속을 취소한다고 말했습니다. 

돌이와 순이는 옥신각신 했습니다. 누구도 누구를 설득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쉬운 일이면 나도 한다는 순이었고 돌이는 밸이 꼬여 병아리를 잡아 다시 순이의 몸에 밀어 넣었습니다. 쉬운 일을 혼자 해보라는 배짱이지요. 돌이는 씩씩거리며 마을에 돌아갔습니다. 

순이는 돌이가 하던 방법대로 병아리를 불렀습니다. 아무리 해도 병아리는 나와주지 않았고 삐악삐악하던 소리도 점점 약해지더니 순이가 기진맥진한 것처럼 나중에는 울지 않았습니다. 끝내 빼내지 못한 채로 순이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병아리가 울지않아 그런 대로 지낼만 했습니다. 

며칠 후부터 순이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병아리가 전혀 울어주지 않아 죽지 않았나 의심하게 된것입니다.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돌이가 빼낼 때 병아리의 주둥이가 밖으로 향해 있었는데 다시 밀어넣을 때 주둥이부터 밀어넣어 그만 병아리가 질식되고만 것이지요. 

지금 여자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그때 죽은 병아리가 계속 썩은 냄새를 내기 때문이지요. 순이가 생계란으로 장난을 치지 않았다면 여자들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답니다. 

이야기를 듣는 여자들의 표정과 행동이 참 재밌었다. 남연숙과 김정애는 온돌 바닥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눈물이 날 지경으로 웃어댔고 얼굴이 빨개진 처녀들이 눈을 흘기면서도 입을 가리고 쿡쿡 웃고 있었다. 

그래도 정화가 대담하다. 한참 뒤에 마침내 축객령이 내렸다. 

“영도 선새임! 빨리 가쇼! 처녀들 앞에서 망탕소리 하지말고!” 

여자들은 다시 한번 포복 요절하고 웃어댔다. 내가 어느 책에서 본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짙은 농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매일 기사들의 음담 패설과 몸을 주물리는데 습관된 여자들이라 처음뿐이었고 대수로워하지 않았는데 후일 남연숙은 우리가 종래로 들어보지 못한 걸직한 농담들을 주어대어 오히려 우리 식구들이 더 웃어댈 지경이었다. 

처녀들은 또 다시 공연 연습을 하기 시작하고 김정애는 나를 따라 내 방으로 건너왔다. 여자의 몸으로 외국인 단독 회사의 세포 비서로 일하자면 곤난이 많았다. 여자는 참군해야만이 입당이 가능했다. 김정애는 참군한 후 입당했으며 성격이 칼날같아 어지간한 남자를 찜쪄먹을 정도로 강했고 과오를 범한 사람에게 사정을 봐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다들 김정애의 세포 비서일에 만족하고 있었고 종업원들도 잘 호응해주는 터였는데 군대에 너무 오래 있은 탓으로 사회 생활을 체험하는 중이어서 종업원들의 심리를 조절해 주지못하는 것이 조그마한 흠이었다. 

회사에서 행사할 때마다 나의 도움을 청하던 비서다. 오늘은 무슨 청일까 하고 생각하는데 종이 한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수령님께서 장군님의 쉰돌 생일에 쓴 시인데 한자로 잘 적어주오.” 

비서의 아들은 나하고 이름이 똑 같았다. 나진에서는 젊은 엄마들을 부를 때 아이 이름을 부르는 습관이 있었고 비서를 부를 때 비서와 내가 동시에 달려갈 때도 있었다. 

“영도야!” 

하고 부르면 내가 잘못 응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리고 나의 둘째 이모와 이름이 똑 같았으므로 나는 장난으로 《엄마》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모》라고 부르기도 했다. 비서의 아들이 학교에서 받은 과업이라 하면서 잘 써오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나진에 있으면서 조선 사람들이 한자를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썩 전에 알았었다. 중국어를 한다는 사람들은 다 약자 쓸 줄밖에 몰랐는데 비서가 가져온 시는 정자로 되어있었고 학교에서 외국인 기업소의 중국 사람에게 부탁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보내온 것 같았다. 

사실 중국사람들 중에서도 일어를 배운 조선족이어야 약자도 어느 정도 알뿐이고 중국의 대만이나 홍콩, 마카오를 제외한 대륙 사람들은 전부 다 약자만 알고 있기에 중국의 한족을 찾으면 헛수고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어한자 외에도 정자를 더러 배워둔 것이 있어 알아볼 수 있었고 써주겠다고 자신있게 대답해주었다. 

김일성 주석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쉰돌 생일 때 써준 시었고 금년 쉰여덟 돌 생일 축하행사 때 쓰려고 준비해두려는 것이다. 여러번 써서야 마음에 드는 글씨로 써낼 수 있었다. 이제 그 시를 한자 그대로 적어보려 한다. 

    光明星讚歌 

白頭山頂 正日峯

小白水河 碧溪流

光明星誕 五十週

皆贊文武 忠孝備

萬民稱頌 齊同心

歡呼聲高 震天地

           1992. 2. 16 金日成 

우리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광명성 찬가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소백수 푸른 물은 굽이쳐 흐르누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 돌인가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드누나 

               1992. 2. 16 김일성 

여러번 쓰는동안 김일성 주석께서 문필이 훌륭한 시를 내놓은 데 대하여 감탄했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느끼면서 내 아들도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처럼 나도 아들의 훌륭하고 믿음직한 아버지가 되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아들애가 못견디게 그리웠다. 설전에 어머니가 아내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고 했었다. 아들애를 데려다가 방학동안 지내본 후 계속 연길에 두고 키우겠는지를 결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8월에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훈춘보다도 연길 쪽이 애들의 교육에는 더 훌륭한 곳일 거라는 판단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호적을 훈춘에 옮겨왔고 연길의 학교에 입학시켜 다니게 하려면 호적을 다시 연길로 옮겨야 한다. 아들애의 미래를 걱정하여 뒤문 거래를 해서라도 호적 문제를 해결하고 연길에서 공부시켜보려는 아내의 생각이 고맙게 생각되기도 했었다. 

호적은 학교에 붙는 애들한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큰 도시에서 작은 도시로는 호적을 옮기기 쉬워도 작은 도시에서 큰 도시로 넘어가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것으로서 농민이 시내호적을 가지기 힘든 것처럼 중국 사람들은 오래 동안 호적에 얽매워 가고 싶은 고장에로 이사도 못가는 곤혹을 겪었었다. 

북경 같은 대도시에 진출한 젊은 부부가 애를 북경의 학교에 입학시키려면 북경 호적의 애들보다 몇배나 더 많은 돈을 내어야 했고 입학 후에도 더 많은 돈을 쓰게 되기때문에 호적으로 인한 애들의 입학 문제로 부모들이 무던히도 속을 태운다. 북경에서는 특수한 경우외에 호적을 넘겨주지 않았고 연길도 마찬가지었으나 지방이므로 뒤문거래에다가 돈을 좀 팔면 다시 연길 호적으로 넘길 수도 있는 거다. 

지금 아들애는 연길의 아내 옆에 있는 지도 모른다. 애가 자기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그 어머니 곁으로 놀러가겠다고 하는 데는 어쩔 수 없이 보내주고 만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되겠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언제쯤 훈춘에 돌아가기만 하면 궁금증을 풀 수도 있겠는데 언제 돌려보내겠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너무 비싼 국 제전화는 엄두도 내지 못하니 그냥 참고 있을 수밖에 없다. 

참으로 경악한 일비일희의 하루를 보냈다. 

지난 시간동안에는 나진의 일들을 보고 겪는 일들만 있고는 듣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듣다보니 너무 엄청난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 느낌이 이제까지 살아온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미래를 같이 걱정해주는 아내의 소행이 고맙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런 일비일희의 감정을 하루사이에 겪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숙명이겠고 운명의 작간이 아닌가 싶다. 

먼 훗날 내 아들의 세대가 지나간 옛일을 회억하면서 살아갈 때 이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가? 그때가 되면 같은 하늘 아래에서 과연 모두가 오붓이 모여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술이라도 나눌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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