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또 나진에 왔다. 집에서 좋은 소식도 얻어 들었고 나쁜 소식도 얻어 들었다. 

연변은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바다의 혜택을 보지 못하며 그 때문에 경제가 낙후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UNDP의 착상에 의해 중-러-조 3국이 인접해 있는 두만강 하류 지역의 3각주는 바야흐로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3국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가 이어지지 않은 중국 측은 애써 바다로 나가는 길을 열어 보려 시도했는데 몇 년 전에 얻은 두만강 출해권이 바로 그 노력의 결과였다.

이제 바다로 나가는 일은 두만강 외에도 나진항을 빌리고 자루비노항을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진척이 되었다. 이날 속초-자루비노-훈춘 항선의 《동춘호》개통식이 속초에서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제부터 연변은 훈춘을 기점으로 나진과 자루비노 두 항을 통해 세계로 나가는 바다 길이 열렸기에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좋은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경신에서 제일 가까운 바다인 러시아의 포시에트만까지 직선거리로 4키로 정도밖에 안되지만 먼 옛날 청나라 때부터 러시아와의 경계선이 바다를 막고 있어 여기 중국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아득히 먼 존재로밖에 될 수 없었다. 바다를 지척에 두고 있지만 나가지 못하고 중국 땅 전체를 놓고 볼 때 제일 편벽하고 제일 구석진 곳으로밖에는 될 수 없는 곳이므로 낙후할 수밖에 없다.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중심 지대인 것이 제일 큰 우세이고 그 중에서도 훈춘은 핵심적인 곳으로서 무궁무진한 발전 전망이 있었다. 

많고 많은 자원 외에도 요즘은 두만강 제일 아래 마을인 방천의 연꽃 늪을 새로운 관광지로 개발했다. 수십 년 전 경신 전 지역에서 피고 지던 연꽃이 지금은 제한된 몇 개 호수에서만 피고 있는데 듣는 말에 의하면 중국의 동북 지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야생 연꽃이고 연구 가치가 대단한 거라고 한다. 방천의 국경선 관광 코스 외에 또 하나의 인기 있는 코스가 개발된 것이라 해야겠다.

또한 나진이 개방된 3년이래 그 혜택을 조금 보고 있다. 나진으로 도로로만 통하는 경신 쪽은 나진의 발전 템포에 따라 그 발전 가망이 결정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훈춘에서 남으로 4키로 좀 더가면 갈림길이 나지고 오른 쪽은 나진으로, 직진하면 자루비노로 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부터 대러시아 국경 통상구가 있는 장령자까지 11키로밖에 안 된다. 이 통상구를 이용해 러시아의 원동 지역 어느 곳에든지 갈 수 있고 자루비노항을 이용하면 세계 어느 항구이든 다 갈 수 있다. 마침내 이 길도 열리고 만 것이다. 나만 흥분하는 게 아니고 모두가 흥분할 수 있는 이유의 하나가 바로 자루비노를 이용한 바다 길이 훈춘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진항을 이용한 이래 제한된 나라와의 무역만 허락되어 이용가치가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자루비노항은 세계 어느 나라와의 무역이든지 다 허락이 되었고 사람도 통과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훈춘이 바다로 나가는 길이 진정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훈춘의 전망이 충분히 기대되었고 그 기대가 불원간에 현실로 다가오고 날로 줄어드는 연변의 조선족 인구도 그 발전에 힘입어 증가될 가망도 보이는 것이다. 발전이 있게 되면 생활이 윤택해 지고 따라서 사람도 흥할 거였다. 

나쁜 소식은 여러 개 되었으나 그 중에서 연유 가격이 오르고 계속 오를 추세를 보여 주는 것이 제일 충격적이었다. 보도에 북경시의 일부 승용차가 저질 휘발유를 사용하여 엔진이 파손되었다는 소식이 나왔고 디젤 가격도 함께 오르고 있는 형편에 나진에 다니는 기사들의 아우성이 대단했다. 그런데 나진 도착 후 식사 중에 이 소식을 전했더니 로따가 흥분하는 거였다. 

“이겼다! 내가 이겼다!” 

이제 러시아의 디젤을 대량 들여다 중국 기사들에게 판매하면 그 수입도 짭짤할 것이었으므로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며칠 후부터 디젤이 들어오고 또 나진항에서도 대량으로 디젤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면서 로따는 애들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예나 다름없이 자질구레한 일들을 했고 동생은 그 동안에 낮 시간은 차 수리에 붙어 일하고 저녁엔 나와 함께 늄창 작업을 했다. 

동생은 며칠 전에 선봉까지 오는 차를 탔고 차에서 내린 다음엔 14키로를 걸어서 나진에 왔었다. 이미 주방은 아랫 집에 옮겨졌고 저녁에 나와 동생만 윗집의 침실에서 자게 되었다. 며칠 일하면서 동생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나한테 불편했던 일들을 얘기하군 했다. 알고 보니 동생이 입사한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운전 면허가 B급이고 그 외 재주라는 게 거의 없다. 

사실은 회사에서 국경을 넘어 다니는 중고차를 맡기면 제일 합당한 자리였지만 로따는 웬 일인지 차를 하나도 운전 못하게 했고 차를 운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다가 5월부터는 동생 색시까지 데려온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엔 로따가 우리 가정을 돌보는 입장에서 동생 부부를 함께 데리고 가서 돈을 조금이라도 벌게 하여 부모님들의 걱정을 덜어 드리려는 것 같았지만 만나면 욕부터 하고 욕을 하지 않더라도 흘겨보는 등으로 동생을 괴롭히고 있었고 나한테도 드문히 동생이 어떠어떠하다고 흠집만 말해 주는 데는 무언가 암시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참고 열심히 일이나 하자. 그것이 우리 형제가 내린 결론이었다. 동생은 처음에 집에 돌아가 남의 택시를 몰아 주는 쪽이 더 편하다면서 자꾸 떠날 소리만 하더니 나의 권고에 마지 못해 응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올 것이 왔다. 그것은 며칠 뒤의 여름날에 있었던 일인데 이제 그걸 보기로 하자. 

두 나라에서는 다 5월 1일을 국제 노동절이라고 국정으로 하루 휴가를 준다. 두만강 교두는 국정 휴가 땐 무조건 휴식한다. 

5월 2일에 식구들이 거의 다 나진에 나갔고 아랫집 새 숙소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원래의 임시 건물은 동쪽 방 한 개만 남기고 두 개 방을 허물어버린 뒤였다. 상례대로 나는 나진에 계속 남아 있었고 대기실 건설 때문에 지난해처럼 들놀이를 가지 않았다. 동생 부부도 왔고 이제는 아랫집 주방의 주인으로 되었다. 

새 숙소를 보면, 2층 사무실과 붙은 제일 서쪽 방이 야채 저장 창고이고 두 번째 방이 주방인데 온돌이 세 번째 영철이 방까지 이어졌으며 세 방이 부엌과 굴뚝을 하나씩 쓰게 만들었다. 주방에서 불을 때면 옆의 두개 방까지 더워지게 만든 것인데 그 방은 로따 부부가 쓰게 된다. 

네 번째 방과 다섯 번째 방은 역시 온돌이 이어져 부엌과 굴뚝이 한 개씩 있었고 네 번째 방에 장송이와 영철, 다섯 번째 방에 장걸이가 들었고 옆은 복도 하나가 있었다. 그 복도로 두 번째 방부터 다섯 번째 방까지 출입할 수 있게 했으며 뒷문으로 나가면 변소가 있었다. 밖에서 보면 주방으로 들어가는 문과 제일 동쪽의 복도로 출입하는 문-이 두 문과 방마다 샤시창을 만들어 넣은 것이 다섯 개 보인다. 장걸이 방은 제일 큰 방이어서 패 치기의 장소로 되었고 중국 기사들이 묵어 가는 곳이기도 했다. 

대기실이 남북 방향으로 지어지고 제일 남쪽 켠에 경비실이 달린 온돌방 하나를 동서 방향으로 짓게 되었는데 그 방이 위홍 부부의 방이었고 용철이와 나는 윗집에서 자야 했다. 이 시기에 로얼과 쟈쟈까지 우리 식구가 열세 명이었다. 

동생의 아내는 동생보다 여덟 살 연하였고 몸이 약해 자주 앓았었다. 할머니가 조선족이고 할아버지가 만주족이었는데 중국어를 썼으며 우리말을 알아듣기만 하는 정도이고 하지 못했다. 나진에 도착하기 전에 집에서 앓고 있었고 아직 채 낫지 않은 몸이었다. 힘이 없어 시걱을 끓이지 못했고 이모가 거들었다. 이모는 일이 많아 끼마다 해 주지 못했으므로 동생이 이틀 간 주방장 노릇을 했다. 

“불알 찬 놈을 내가 주방 일을 시키려고 데려 왔나? 니가 가서 하지 못하게 말해 줘라. 꼴 보기 싫다!” 

로따는 나보고 이런 말을 했다. 

옆에 사람이 많아 중국어로 했는데 언어 종류에 상관없이 내 귀에는 정이 뚝 떨어지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저녁 밥을 먹고 동생이 아무 말 없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내가 따라 나왔다. 

“내 집에 가겠소! 더러버서 못 있겠소!” 

점심 밥 먹을 때와 저녁 밥 먹을 때 로따가 흘겨보더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간 수저를 드네 마네 하는 로따를 내가 눈치 챘었다. 유난히 밥투정을 하는 로따의 성미를 알고도 남음이 있는 나였다. 

“우리 저녁엔 늄창 일 하지 말고 올라가 의논해 보자!” 

저녁엔 늘 우리 형제만 일했었다. 다들 편한 저녁을 보내는데 어떨 때는 술상을 벌려 놓고 술 마시지 못하는 우리 형제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우리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 마셔대고 있었다. 자가 발전하던 때어서 엔진 소리가 요란했고 그 요란한 소리만 있으면 대기실 안에서 작업 중이라는 걸 로따도 알고 있었으련만 조카들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것을 침묵으로 대해 주고 있었다. 

윗집에서 두시간 정도 의논했다. 이제 며칠만 더 참아 보자. 또 그런 결론 밖에 나올 게 없었다. 

용철이 푹 취한 채 닛산을 몰고 올라 왔고 그 차로 동생을 실어다 주고 나는 다시 윗집에 왔다. 나와 용철이는 요즘 정해진 곳이 없이 아무데서나 잤다. 편한 잠에 빠져 들어간 용철이가 그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본시 《사회주의 혁명은 술로 한다.》고들 말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병으로 해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로따가 어떻게 혁명하는 지를 많이 배워 두어야겠다고 입사 때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배움도 다 끝난 것 같이 생각되었다. 

술로 못하면 머리와 입으로 하면 된다. 머리라는 건 경험과 임기응변의 재주와 노력을 말하고 입은 능란한 화술을 말한다. 술은 로따에게 있어서 낭비와도 같은 것이어서 오히려 나진의 술이 크게 필요 없는 사업이 더 적성에 맞는 일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로따의 성질에 맞는 배짱장사까지 하면서도 남에게 척 지지도 않고 오히려 친구 사이로 가까이 보낼 수 있게 상대를 틀어 잡는 화술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나진의 장사는 날에 날 따라 흥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형제에 대한 태도 문제에서 로따는 치명적인 데가 있었다. 사원을 쓰는 데서의 일반적인 원칙과 상례를 떠난 그의 태도는 우리 형제를 무던히 괴롭혔으며 나더러 나진을 떠나가도록 압력을 주고 있었다. 

이날이 5월 4일이었다. 

낮에 윗집의 매점을 전부 아랫집에 옮겨왔고 로따는 죽을 《사(死)》자(4는 중국어로 四로서 죽을 死자와 발음이 같기에 불길하다는 뜻에서 중국에서는 가급적이면 4자가 들어가는 날을 택하지 않는다.)라면서 우리 형제를 책망했지만 영철이와 설화의 주견대로 한 일이란 걸 알고는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팔이 거의 다 나아진 용철이가 수리소를 다시 맡게 되고 아랫집의 발전기는 차영감이 보고 있었는데 이제 나는 더 불편한 몸이 되고만 셈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이 수리소에 계속 있으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항상 뛰고 뛰던 몸이어서 괴롭고 힘들더라도 충실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지만 집만 지키고 있는 데는 사람이 병나게 만들어 준다. 

어쩌다가 아랫집에서 로따가 시내에 가볼 일이 있어 부를 때가 제일 반가웠다. 나밖에 시내 일을 볼만한 사람이 없는 경우에만 차 몰고 나가서 돌다가 왔는데 후에는 하루에도 세 번씩 불러서 일 없는 윗집에 아예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회사 종업원이거나 안면이 좀 있다 해서 수리소의 공구를 마음대로 허락 없이 쓰는 사람을 내쫓는 나랑 늘 언쟁을 하는 용철이와 가까이에 있고 싶지 않았고 지어는 잠자리도 같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용철이는 언제나 나와 틀고 지냈고 술이 얼근해 지면 걸고 들었기에 낮이나 밤이나 떨어져 있는 것이 제일 편한 일이어서 썩 후에는 아예 아랫집의 장걸의 방으로 이불 짐을 옮겼었다. 

로따는 기어이 위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으나 나는 내심의 발로는 못하고 내 나름대로 아랫집에 있어도 차대 관리를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내가 왜서 윗집에 올라가기 싫어하는 지를 모를 로따가 아니었으나 대기실 건설 때문에 신경을 쓸 새가 없었고 차대도 이제 완전히 틀이 잡혀 말썽이 없었기에 그냥 지나쳐 버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동생에 대한 언행은 참으로 기막히게 고약했기에 내가 이모부로 존경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걸 다시 한번 가슴 아프게 느꼈고 우리 형제에 대한 인정 없는 처사로 하여 내 인격이 또 한번 비참하게 되었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은 떠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정든 안화동에 더 있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달통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 

나는 떠날 수 없다! 

나는 떠나지 않겠다! 

동생이 언제 떠나는 가는 시간 문제지만 나는 기어이 내가 할 일을 다하고 떠나야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버텨서 자존심을 끝까지 잃고 있으리라! 

그만큼 이용당했으면 나도 이용할 줄을 배워야 했다. 그래야 만이 자존심을 잃을지라도 내 인격을 되찾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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