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동안 뒤숭숭한 기분 속에서 지냈다.

이전에 면목을 익혔던 얼굴들이 나를 만나면 거의 다 작별인사를 해왔다. 어떻게 나간 소문인지 내가 나진을 떠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섭섭해마지 않았다.

평양의 장사군 아낙과 가격흥정이 다시 한번 붙고나서 끝내 약 백곽을 사게 되었다. 약을 사놓지 않더라도 떠나기로 작심한 나에게는 부담으로밖에 되지 않았다. 북경에 가서 공부를 하는 동안 또 다른 일이 생기는 것으로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중국에 가져가는가가 문제되였다.  

장사군 아낙은 신흥동의 어느 한 보위부담당 지도원과 함께 뻔질나게 뛰어다니면서 모든 수출문건을 만들어냈고 그 문건을 우리가 확인 하고나서 약값을 지불했었다. 역시 보위부가 거들어 주어야만 장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실감했고, 그 아낙은 내가 보는데서 약값의 일부인 내화 10만원을 돈 다발 그대로 지도원한테 주어서 나를 경악케 하였다.

아낙이 넘겨준 수출문건으로 원정을 통과하려다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게 퇴송당했다.

괜히 작별인사를 다 하고 다시 나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출, 입국 모두 소지품과 몸의 구석구석을 다 수색하는 원정의 검사절차를 거쳐야 하는것과는 달리 권하교두에서는 전혀 사람의 몸을 훑지 않았고 차도 별로 검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어쨌든 문제는 조선에 있다. 일단 로따가 다른 방법을 대기로 하고 나는 약보다 먼저 귀국하기로 했다.  

내가 입던 옷은 거의 다 나진에 내친 채로 있었다. 하나도 갖고 가지 않으려던 원래의 생각을 고쳐먹고 괜찮은 것들만 골라냈고, 보던 책들도 트렁크에 챙겨 넣었고, 이불은 거추장스러워 그냥 나진에 둬 두기로 했다. 동생네가 쓰다 남긴 이불과 담요와 같이 나진 식구들이 두고두고 쓰게 될 거였다.

로따는 며칠후 러시아 유조차가 오면 그 차에 앉아 돌아가라고 말해주고는 그동안 일하지 말고 편히 쉬라고 했다. 내 방 문을 나서는 로따의 뒤 모습을 보면서 어제 저녁 일을 떠올렸다.  

귀국한 후 북경에 가서 공부를 한다. 나는 북경행 이유를 설명했고 로따는 공부의 여가에 북경출장사무소 수석대표의 신분으로 회사의 일을 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의 월급 문제를 제출했을 때 도리머리를 젓는 거였다.

이제부터는 회사를 떠나게 되었기에 월급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보여주는거였다. 이미 쌓여온 빚에 북경행 경비를 빌려주겠다고 답복은 받아놨지만 월급문제로 로따의 심사를 시탐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실망만 가득 쌓이게 되었다.

헌데 이것 만이 아니었다. 이모가 한 얘기는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우리가 그때 너를 불러 쓰지 않았더면 어디 취직도 못했을 거 아니냐?”  

쳇, 천만에!  

2년동안 나에게는 자동차 정비기술을 기본적으로 터득한 것밖에 남은게 없다.

그 대신 빚은 1만원에 치달았다. 그만한 돈을 팔면 더 깊은 기술을 배워낼수도 있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기술은 돈을 적게 팔고도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배워낼 수 있었다.  

이모의 말은 마치도 기술배우는 걸 떠나 우리가 아니였더면 너는 굶어죽게 생겨먹었다는 식으로 들렸다. 이런 무정한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 다 바쳐 헌신적으로 일해준 내가 더없이 얄밉고 가증스럽다. 밤을 새고 끼니를 굶었고 지어는 생명의 대가를 치를 번했다.

회사식구들 중 어느 누가 나만큼 고생한 이가 있는가?

그런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말투가 그렇게 거칠 수가 있단 말인가?  

2년동안 다른 일은 몰라도 가이드 노릇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북경에서 2년 동안 부지런히 했더면 지금쯤 훌륭한 가옥 몇채도 사놓았겠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어했던 공부도 다 끝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희생으로 회사의 호황을 맞는데 한몫 한 사람의 존엄을 여지없이 꺾어 놓으면서 로따네는 그 도고한 자존심을 굳이 치켜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존엄은 꺾이였어도 인생의 참된 수업을 받은만큼 수확이 큰 게 없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나를 철들게 했던 나진행을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길 수 있었고 늘 나를 고무해주고 있다. 단 그 한가지만으로도 위안을 얻고 기꺼운 심정으로 나진을 떠날 수 있었었던 것 같다.  

이 날은 내가 나진을 영영 떠나기 사흘전인 3월 17일이다.엊저녁의 음울했던 분위기를 침착하게 되찾은 평온으로 되새기면서 나는 오늘 귀국하는 그 날을 그려본다.

돈도 안되고 명예도 안된 나진바닥에서 참다운 인생공부를 해왔다. 거칠고 문제투성이였던 성격도 많이 고쳐졌고 사회인으로서의 훌륭한 마음의 자세도 갖출수 있게 되었다. 여자를 비롯해 세상물정을 너무나도 몰랐던 나였지만 질기고 질긴 성질 하나로 끝내 파악할수 있게 되었다. 타락된 생활도 겪어왔지만 사회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생관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이 더없이 기쁜 일로 남았다.

대졸후 10년이 넘어서야 진정한 사회인으로서의 모든 기반을 닦을수 있는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남들은 대졸후 가장 빠른 시간으로 1-2년 사이에 급격히 성장했지만 돈도 없고 배경도 없었던 나에게 풍부한 사회경험이 생길 수 있게 된 것도 천부적인 재주가 없던 나한테는 그만한 시간도 빠른 거라고 해야겠다.

어쨌든 가이드생활에 묻혀 있는 것보다 월등했다. 오히려 5년동안의 가이드경력을 저주할 지경까지 됐으나 그 것도 그만인 걸, 역시 내 생애를 장식하는 한송이 꽃이 되어있었다.  

가난에서 탈출하자!

어서 빨리 지독한 가난을 몰아내고 남 보란듯이 잘 살아야지, 이제 그 첫보조로 나진을 탈출해야 한다.

그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나진의 모든 것을 툭툭 털어 버릴 날이 다가온 것이다. 지체할 것도 없다. 어서 빨리 떠나야 한다.  

바다가에 나가 그 동안 잊고 지냈던 할아버지네들과 만나고 싶어졌고 원매와도 만나고 싶어졌다. 나진을 탈출할 것을 선언하고 이 세상 끝까지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싶어졌다. 정이 든 산과 들, 바다와 도로 그리고 나와 같이 가난을 떨쳐 버리려는 나진사람들을 모두 다 만나고 싶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정말 만났다. 꿈속에 굴러 떨어져 만날만한 모든 것을 다 만나 보았던 것이다. 진정 고마운 하루밤이었다.

기다리던 유조차는 와주지 않았다. 19일 오후 늦은 시간에 85호가 도착했는데 이튿날 그 차를 타고 귀국하기로 했다. 85호가 도착하면 늦은 시간이라는 것을 판단하고 오후에 출입국 사업처에 가서 다음날 출국도장을 찍었다. 그러면 20일 아침 이른 시간에도 출발이 가능하다.

85호는 이날 수입 문건을 만든 상태로 나왔기에 이제부터는 나진의 번호판을 달아야 한다. 능율이 낮은 작업시간을 감안하면 빨라도 10여일 후에야 조선차 행세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건이 만들어지면 나진의 번호판이 발급될 때까지 세워두어야 했지만 일감이 많은 85호를 세워두면 그만큼 손해보게 되므로 로따는 나진과 원정쪽에 말해두어 번호판이 나올 때까지 중국차 번호로 계속 국경을 통과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일은 판매용 중고차에도 적용되었는데 권하쪽에서는 중국 넘버가 걸려 있으면 그만이었으므로 조선 번호판이 나오면 차는 두 나라에서 다 합법적인 신분이 있게 되는 것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대외상품검사소 사람들이 검사를 했는데 밥을 먹고 가라고 건성으로 말했더니 아무런 사양없이 주방에 들어왔다. 로따와 말다툼을 하고 손찌검이 날번했던 주정뱅이 정영감은 오래도록 검사를 오지 않는다. 늘 담배 두 갑 정도를 챙겨가던 그 영감은 다른 회사에 가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모양이였다. 종합검사장이 건설되기 전에 점심과 저녁식사를 대접받고 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특수한 완검사(이를테면 러시아 유조차) 외에 손님이 거의 없다. 언제나 풍성한 우리 음식을 먹고 다시 집의 밥상을 마주 앉았을 때 입맛이 잃어져서 우리 음식을 그려본다고 한다. 얼마 안되는 생활비로 쌀을 사고 나면 옷과 신발도 사기 어렵고 겨울에는 땔감도 걱정인데 어찌 부식품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사치와 향수를 바라겠는가?  

마침내 2001년 3월 20일 아침이 다가왔다.  

간밤에 눈이 꽤나 내려져 있다. 눈은 전생에 연분이 있어서 그런지 나의 중요한 행사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온다. 장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피발이 선 눈을 겨우 들고 식사도 잊은채 5시 30분(중국시간)에 출발했다. 조국시간 6시 30분이여서 종업원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게 오히려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그 동안 고생이 많았다. 잘 가라!”  

로따가 나와서 배웅했다. 엔진이 더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외삼촌내외도 달려나왔다.

다른 식구들은 아직도 새벽 굳잠에 빠져있다. 외삼촌은 악수로 인사를 대체했고 외숙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돌리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잘 있소! 후에 놀러 오겠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왜 하는건지? 사람은 그야말로 이상한 동물이다.  

외숙모가 건네주는 과자 한봉지와 물 두병을 받고 나서 길을 떠났다. 로따는 방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외삼촌 내외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재일 교포 한영감이 아침경비를 보고 있다. 벌써 대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 내 저쪽으로 정화네 집이 보였는데 아직까지는 두터운 얼음이 덮여 있어 질러가지 못한다. 찦차정도만 겨우 지나갈가 말가다. 한영감에게 손을 저어보이고 아스팔트길에 들어섰다.

오른쪽은 영예군인공장–여기서는 1년 내내 정전때문에 술과 과자를 얼마 생산하지 못한다. 《4.15》와 같은 큰 명절전에 10여일 전기를 공급해주어 명절에 내 놓을 식품을 만들도록 보장할뿐이다. 왼쪽은 나진시장(장마당)으로 들어가는 서쪽 입구다. 노천 정류소로 쓰던 입구 옆의 부지에 대만 투자자가 3층집을 짓고 회사를 앉혔다.

내리막을 다 내려가면 널직한 남산호텔광장이 오른쪽에 보인다. 큰 행사 대마다 집단무용을 추던 곳이었다.

우회전을 하면 곧은 길 끝쪽에 나진 기차역이 있다. 계속 가면 나진항에 도착할수 있고 다시 청진을 거쳐 조선 방방곡곡 어디에나 갈수 있다. 나라 통일이 이루어지면 반도 최북단에서 《3.8》선 넘어 팔도강산 구석구석 다 갈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  

우리는 좌회전을 하여야 했다. 좀 떨어진 곳에 태양상이 마주 보이는데 김일성 주석이 자애로운 얼굴로 사람들을 반기고있다. 거기서 좌회전해 지난해 새로 닦은 곧은 도로를 따라 관곡고개를 탈 수 있다.

가면 갈수록 지세가 높아져 고개 아래쪽의 모습을 잘 내려다 볼수 있었다.  

안화동 골짜기 –이곳은 내가 2년동안 고생하면서 살던 곳이다. 처음 1년은 인수원으로 두 나라 사이를 오가면서 한달에 10일정도 머물렀고 나머지 1년은 차대대장으로 별로 귀국하는 일도 없이 한달에 평균 25일을 살아왔다. 귀국한다 해도 훈춘에 있는 시간이 며칠 되지 않았기에 나진이 오히려 내집 행세를 한 셈이다. 피뜩 생각해 봐도 나진에서 지낸 시간이 1년이 넘는 것으로 계산이 나온다.

중국의 전통명절인 구정을 두번 다 나진에서 쇠었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는 청명과 추석에도 나진에서 집을 지켰다. 불효가 막심한 놈으로 되어버려 부모님들 생일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바로 저 골짜기, 저것이 나로 하여금 불효자로 되게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그만한 불효는 괜찮은 거였다. 피곤해진 심신으로 집일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고 돈을 벌어들이지 못한 데다가 몇번을 사경에서 헤매면서 앞으로 살아갈수 있는 제일 큰 자본인 내 육체를 잃을 번했다. 손자를 키워주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나는 그 손자보다도 더 큰 걱정을 부모님들께 끼쳐드렸다.  

관곡고개를 넘으면 한눈에 안겨드는 나진만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드디어 나진을 탈출하게 되었고 이제부터 더는 부모님들께 불효막심한 자식으로 살아가게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나진아, 안녕!  

새하얀 눈에 덮인 그림처럼 아름다운 나진만이 내 뒤에 사라져 버리었다.

태양상을 지난후부터 줄곧 머리를 돌리고 차 뒤켠을 보면서 고개위에까지 왔었다. 뻣뻣한 목뒤를 어루만지면서 이제는 나진의 모든 것과 작별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먼 훗날 어느날엔가 다시 고갯길에 나타나 아니, 고개 밑에 뚫린 터널을 빠져나가 빌딩이 숲을 이룬 새 나진을 보는 것만 같은 감미로운 환각에 빠져버렸다.  

그때가 오면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새 고속도로를 이용해 반도 최북단의 두만강가에 어렵지 않게 올 수 있으리라. TV로만 보아오고 바다를 건너 넓디넓은 중국 대륙을 에돌아야만이 볼수 있는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도 하루 코스로 등반하게 될 것이다.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남녘 하늘 아래에 우리 이주민들의 후손이 두만강위의 고속도로 다리를 타고 뻔질나게 다닐 수 있는 그날이 바야흐로 몸 가까이에 돌진해 오고 있는듯한 흐뭇한 느낌이 정녕 좋을 수밖에 없다.  

머리를 들어 멀리 앞을 보아라.

선봉평야를 가운 데에 두고 저술령이 저쪽 먼곳에서 관곡고개를 빤히 마주보고 있다.

수백차 지나 다녔을 저술령 도로 굽이굽이마다 나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산기슭에서 맑은 시내를 조금 엿볼수 있을뿐 가파로운 영길 옆에서 자동차에 보충할 물마저 구하기 힘든 산이라지만 도로 옆은 소나무를 비롯해 자연 그대로 두어온 것이 너무나도 다행스럽고 산기슭에 우거져 있는 인조림도 자랑할만하다. 그 덕에 돈주고 살수 없는 맑고 청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이 나라 혈맥을 이어 나갈 후손들에게 무궁무진한 재부를 남기고 있다.

차없이 도보로 다니는 이들이 우등불 지펴 놓고 휴식의 한 때를 보내는 곳곳마다에 항일유격대의 흔적도 남아있다. 요즘은 새로 나타난 습격조 때문에 기사들이 마음을 조이고 다니기는 하지만 고개 양켠에 큰 골짜기로 입을 만들어 놓고 자동차를 발명한 인간들을 끊임없이 삼키고 토해낸다.  

언제쯤은 저 저술령도 대반령처럼 인간에게 정복되겠지. 터널이 뚫리고 관광도로가 건설될거야. 나같이 제일 처음 고생한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서 회포를 누릴 수 있게 할거야.  

생각을 하고있는 동안 벌써 거대한 산체가 눈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밤차를 운전하고 다닐 때 무시무시한 느낌도 없지 않던 저술령, 이제는 너와도 빠이빠이다. 세월이 썩 지난 뒤에 너의 바로 가까이에서 새 나진과 마찬가지로 빌딩들이 키 돋음을 할것이고 너의 등성이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들놀이 장소로도 될 터이지? 나진이 세계로 나가는 날 너도 함께 이름을 빛내이게 될거야.

그 때까지 참아줘!

그 때가 되면 나도 다시 너의 품에 안겨보련다.

허구헌 날 험한 너를 타고 넘었던 지난 일들을 정녕 잊을 수 없다. 너의 등을 넘을 때면 중국 쪽의 산들도 보이지. 바로 권하를 끼고 앉은 수려봉 위에 설치된 삼림관측 전망대를 보면서 너만 타고 넘으면 두만강을 바로 건너 내 고향에 금방 도착하는 기분이었지.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멍든 내 마음을 위안해주던 너였는데 오늘은 눈에 묻혀 너무나도 부드럽기만 하구나. 세찬 바람에 눈과 낙엽 모두를 날려보내고 길에 눈을 펴놓지 않은 채 나를 안전하게 넘겨주던 너였는데태풍을 막아 주어 외갓집 동네에서 농사를 잘 짓게 했고 내 고향이 해풍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해서 믿음직한 존재였었다.

어떤 여름 날에는 남쪽에만 안개를 가두어 놓아 그야말로 신비한 모습이 이루어졌었다. 고개 남쪽에만 비가 내리거나 고개 북쪽에만 눈이 내리는 2중 경치를 보여준 것도 너였다.

참 고마워!

너를 잊지 않을게!

그리고 믿어줘!

나진과 더불어 너의 존재를 영원토록 내 가슴속에 고이 간직할 테다!

너도 나를 잊지 말아다오!

눈뿌리 아파나도록 광채를 뿜는 흰눈 속의 선봉평야를 뒤에 남기고 중국쪽 수려봉을 바라보면서 고갯길을 내려 섰고 회령교(檜嶺橋)도 지났다. 간악한 일제는 우리 민족에게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지었고 마음에 지워버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다리를 지날때마다 으드득 이가 갈린다.  

나에게도 그 상처가 있다. 이제는 그 외에도 이주민으로 힘겹게 살던 동년의 아픔에다가 동족상잔의 뼈저린 비운을 느낀 청년기의 아픔도 늘여졌다. 또한 새롭게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주민의 아픔에다가 새롭게 생겨난 인생의 진통도 첨가되었다.

조선족 동포들이 하나같이 겪고 있는 그 아픔은 세기를 넘으면서 더욱 적나라하게 나타났고 모두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나진행을 통해 이 모든 아픔을 경험해왔을뿐만아니라 경쟁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날로 박해지는 인심이 친척들 사이에서도 작용하고 그것으로 큰 충격과 모진 진통을 더 감내해야만 했다.  

정말로 괴롭고도 견디기 힘든 2년간이였다. 이제 이 모든 아픔이 그저 봄눈이 녹듯 스르르 자취를 감출 것이 아님을 나는 저술령 끝인 약수터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아픔을 영원히 잊지 말자.

모진 가난으로 허덕이는 나진형제들의 아픔도 잊지 말자. 서로 다른 국토에서 살고 있더라도 같은 겨례의 아픔이니 네것 내것도 없다. 그 아픔이 사라지는 날을 손꼽아 기대해본다.

청학초소에는 예나 다름없이 헐망한 옷을 입고 배낭을 멘채 개를 앞세우고 나진장을 보러 가는 가족들이 몰켜 서있다. 증명서가 없는 사람들은 검열병과 싱갱이질할 엄두도 못내고 초소 저쪽 켠에 서있고 이미 통과한 사람들은 피곤한 모습으로 이쪽 길옆에 앉아 있다.

그들은 이제 도로를 따라 저술령을 넘게 되겠고 나라 안에서 유일하게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팔수 있는 나진시장에서 배낭에 들어 있는 농산물과 개를 팔고 나서 필요한 일용품을 사가지고 귀로에 오를 것이다. 조선 번호판의 자동차를 구경하기 힘든 이곳에서 차 잡이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할가, 중국차는 수 없이 다니지만 신세를 지지 못하고 자기 나라 차는 타자 해도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는다.  

재작년 가을에 슬레이트를 싣고 나오던 쟈쟈의 차가 여기서 고장났었다. 그때 마침 최영감이 나진에 나가 있었는데 창주와 같이 판매용으로 내갔던 중고차 두 대를 각기 몰고 수리반종업원들과 함께 도착했다.

길이가 1.8미터고 무게가 15키로 되는 슬레이트를 우리 힘으로 두 차에 갈아 실을 수 없어 나진가지 실어다 주는 조건으로 길 옆의 사람들 수십명을 동원시켰다. 남자들은 짐을 지키고 여자들만 달라 붙어 했는데 힘깨나 쓰는 아낙들이라 순식간에 6백장을 두차에 옮겨 실었다. 짐을 보네 하면서 일에 손대지 않는 남자들이 담배를 빨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래 가지고 사회주의 건설을 어떻게 한다니?”

하고 말을 주고 받던 아낙들의 푸념을 들었었다. 이젠 그 푸념뿐만아니라 걸직한 나진의 농담에다 구수한 사투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초소에서 백미터쯤 떨어진 곳에 철도교차도로가 있다. 나진에 다니면서 오늘 처음으로 기차를 만났다. 유현동쪽으로 가는 도로옆의 철길에서 달리는 기차 위에 숱한 사람들이 매달려 타고 다니던 나진의 정경을 떠올리고 있을 때 차단 봉이 올려지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아침 이른 시간이여서 그런지 오늘은 적재함에 타는 사람이 없었다. 좀 떨어진 청학기차역을 지나고 청학고개와 하여평고개도 지났다.

이제부터는 두만강양안의 두 나라 풍경이 한눈에 안겨든다. 중국의 핸드폰은 예서부터 통화가 가능하다. 원정까지는 약 12키로정도 되는 거리인데 원정고개위에 교란신호를 내보내는 안테나를 가설해 놓고 핸드폰을 쓰지 못하게 한지가 오래된다.

원정에서는 무조건 몰수했고 신고한 사람들을 위해 보관비 50원(중국돈)을 받고 보관해 주기도 했지만 차안에 감추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더러 있다. 나진의 비싼 국제전화비용을 아끼려는 것이었고 이곳에서 전화를 해서 훈춘의 사람들을 마중 나오게 하면 양쪽에서 거의 같은 시간에 권하에 도착하기 때문에 편리하다.

이것도 내 기억속에서 영영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두만강은 예서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중국쪽에 깊숙이 들어간후 큰 원을 그리면서 다시 남쪽으로 흐른다. 권하와 원정은 바로 두만강이 남쪽으로 흐르는 구간의 중간 쯤에 위치해있다.

하여평 농장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중국 쪽의 회용봉(回龍峯)촌이 보이는데 거기에는 항일유격대의 비밀 근거지가 지금도 사적지로 고이 남아있고 새하얀 열사기념비도 뚜렷이 안겨온다.  

원정고개에는 언제 봐도 중국차들뿐이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저술령부터 이제까지 자동차 한대도 만나지 못했다. 약간 높은 산들이 가로 막혀 중국 쪽이 아예 보이질 않고 오늘은 아직 누구도 밟지 않고 아무 차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도로로 내가 탄 85호만 달릴뿐이다.

머리가 텅빈 느낌으로 유기사와 별로 말도 주고받지 않으면서 그 대신 노래를 들었는데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원정종합검사장이 보이는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아직도 원정의 출근시간까지 20분 남았다. 조심스레 운전했기에 두 시간 10분이 걸렸고 검열병이 막고 있어 마당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남은 시간동안 검사장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워 물었다.

두만강 저쪽은 그리 크지 않은 경신평야다. 안중근의사가 다녀갔던 저곳, 일찍 권하의 구 도로 옆에 사적비가 세워 져있었는데 새 도로를 건설하면서 그 낡아빠진 사적비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었다. 원동의 연해주와 두만강을 무대로 활발히 활동하던 의사의 발자취를 예서 더듬어 볼 수 있다.

어디라 없이 흰눈에 묻혀져 있는 산천, 이제 조용히 새날을 맞이했다. 다리 저 쪽에서 개가 컹컹 짖어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원정의 개들이 다리를 건너 먹이를 찾아먹고 돌아오더니 한달새에 살이 무척 쪘다는 원정세관원들의 말이 생각났다.

동물들은 비록 자기 영역이 있어서 서로 침범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존의 본능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사람들이 금을 그어놓고 이건 내 나라요, 저건 니 땅이라고 하는 걸 동물적인 본능으로 이해할 만 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떤 이미지로 남아야 하는 걸까?  

누가 말하기를 정치는 유령이고 나라는 괴물이라고 했다. 나는 정치를 모른다. 나라도 개념이 희미하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은 내 조상이 대대손손 살던 땅이어서 조상의 나라지만 두만강 건너 중국 쪽이 고향인 나로 말하면 고국이자 이국이다.

특히 《우리 나라》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마다 당혹하기만 했었다. 굳이 국경을 정해놓고 사는 사람들, 그들때문에 우리는 나라가 무엇이고 조국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산다. 이제가지 조선이니, 한국이니 아니면 우리 민족이니, 우리 겨례이니 또 조선족이니 고려인이니 하는 말들을 수없이 외우고 귀아프게 들어오면서 나라에 대한 개념이 얼떨떨해졌다.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나라라는 개념을 파고들면서 연구해왔지만 《우리 나라》와 《조국》은 뭐가 뭔지 지금도 모르겠다. 누가 가르쳐주겠는지, 혼자서 터득할수 있겠는지는 먼 훗날에나 있을 일일까?  

지금 이 시각 눈에 뒤덮인 두만강은 두 나라 땅을 완전히 이어버려 국경이라는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게 하고있다. 다만 다리 양켠에 세워진 두 나라 국기만이 서로 신성불가침이라는 것을 경고하듯이 높이 걸려있을 뿐이다.

드디어 귀국수속을 마치고 다리에 올라섰다. 유기사더러 먼저 떠나게 하고 거의 3백미터가 되는 두만강다리를 도보로 걷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이 다리와 언제 다시 만나겠는지 나는 모른다. 혹시 영영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지난해 가을, 놓은 지 65년이 되는 다리가 무너질 위험이 있기때문에 보수 작업을 시작할것이며 밤중에 다리 위에 차량을 세워놓는 것을 엄금한다는 공시문이 다리 저쪽에 번듯하게 나붙었었다. 일제가 놓은 이 다리는 이제 자기 수명을 다 했던 것이다.

트여진 강 남쪽으로 해풍이 살살 불어왔다.

옛날에 넓고도 깊었던 두만강, 이주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던졌던 피눈물의 강이고 그나마 우리 1세에게는 생의 희망을 갖다주는 젖줄기였다.  

황막한 북간도에 우리 1세가 없었던들 어찌 오늘의 연변이 있을수 있으랴?! 우리 1세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다면 두만강 이북 광활한 땅은 개척역사가 적어도 몇십년은 뒤로 미루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만강은 1세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는 자못 중요한 자연의 혜택이고 1세가 개척한 두만강연안은 그 자손들에게 천혜의 땅일 수밖에 없다. 그 땅을 적셔주는 두만강이 두 나라 국경을 수백 키로 만들어주고 태평양에 들어간다.

이 수로는 이제 연변인들이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 아니다. 동북아시아의 지리적중심으로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고 여러 나라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바다와 바로 붙지 않은 땅이더라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태평양과 그 보다 더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해풍이 부는 기세는 강 중심에 이를수록 더 심해진다. 2년동안 다리 중간에서 항상 한가지 느낌으로 가슴을 들먹였었다.

출국 때엔 긴장하면서도 어서 빨리 나진에 가고 싶었고 귀국 때엔 언제나 다시 나진에 갈 그 날을 그려보던 묘한 느낌이다. 이제 이 곳을 통과하면 내가 피땀을 쏟았던 나진을 영영 떠나게 된다. 발걸음이 더디어 지다가 마침내 멈춰서버렸다.

나진아, 안녕!

안녕, 조선아!

잘 있거라, 두만강!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우뢰소리와도 같은 둔중한 소리가 아까부터 귀를 자극하더니 지금은 무시무시한 괴성으로 들렸다.

다름 아닌 두만강의 해동소리였다.

“크르르, 컹, 컹-컹, 크르르르……”  

“드르르, 등-등, 등, 드르르르……”  

“쾅–, 쾅, 청청–, 츠르르르……”  

세상살다 처음으로 해동소리를 들었다. 눈에 익어 온 강바닥을 잘 살펴보니 물줄기가 드러난 곳이 몇군데 있었다. 머리 들어 두 나라 강안을 보니 나뭇가지가 푸릇푸릇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이제 두만강은 조금 후에 본격적인 봄소식을 전해주게 되겠지.  

두만강.  

너는 우리 민족의 피눈물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오늘까지 이 터를 지켜왔지,

그래, 계속 지켜라. 지키다보면 피눈물의 역사를 지나보내고 민족의 대 축제를 견증하게 될지도 몰라.

네가 있어 서럽고 고달펐던 인생을 살던 우리 겨례가 마침내 단합을 이룰 그날을 맞이하게 되겠고 너와 더불어 그 행복한 시각을 즐길 수 있을 거야, 걱정말고 기다려! 그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것이다!  

따뜻한 봄 해살이 굉음으로 가득 찬 두만강 양안을 비추고 있다. 싸늘한 해풍이 불어오는 태평양쪽을 떠올리면서 나는 오성기가 펄럭이는 다리 동쪽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였다.

그 걸음은 처음에 더디더니 마침내 씩씩한 발걸음으로 바뀌어졌다. 그 씩씩한 걸음으로 이 세상 끝가지 걸어갈 마음가짐도 갖추어진지 오래다.

씩씩한 걸음으로 대반령을 넘어선후 나를 낳고 키워준 고향 산천을 사랑하고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나 자신을 방불히 보는것만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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