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밤낮으로 길을 조여서 서은은 이튿날 해질무렵 드디어 건주여진의 헤투알라성(지금의 중국 요녕 흥경)에 당도할수 있었다. 그녀가 성문을 지키는 군사에게 누르하치를 만나게 해달라고 통보하자, 얼마 안지나 융복차림의 누르하치가 성채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임도련님이 어떻게 여기 오셨습니까.”

누르하치는 의외라는듯 그녀를 내려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혹시 형님께서 아직 여기 계시는지요.”
“네. 내일아침 출발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
“다행입니다.”

서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성채 문이 열리기 바쁘게 그녀는 말을 재쳐 성안으로 들어갔다.

헤투알라성은 작고 아담했지만 빠질것 없이 규모가 갖추어진 단단한 성곽이였다. 그녀는 성곽 곳곳을 둘러보면서 짧은 시간내에 이정도 규모를 갖춘 누르하치에 능력에 은근히 감탄을 했다. 그녀가 성곽위로 올라가자 누르하치가 머리를 숙여 그녀를 영접했다.

누르하치는 총병부에서 봤을 때보다 한결 더 성숙되어 보였다. 그는 구리빛 얼굴에 깊이를 알수 없는 담담한 미소를 담고 그녀를 보았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그녀는 머리를 숙여 가볍게 답례했고 누르하치는 군사를 시켜 성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신의 저택으로 그녀를 안내하게 했다. 누르하치에게 소식을 들은 듯 이여백이 문밖에 나와있었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살짝 미간을 구겼다.

“어찌 이리 왔느냐. 총병부에서 기다리라 하였거늘.”

그녀가 입을 열어 대답을 하려는데 신충일이 문밖으로 걸어나오면서 하하 웃었다.

“참 형제간의 우의가 극진하십니다요. 헤어진지 이제 몇일인데 그렇게도 참지 못하십니까.”
“신공자께선 웃지 마십시오.”

그녀는 가볍게 대꾸한후 이여백에게 눈길을 돌렸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이여백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다시 신충일을 보았다. 신충일은 그에게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십시오. 저 혼자 돌아보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성곽위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여백은 신충일을 눈바램한 후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누르하치가 내어준 조용한 객방에서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후 이여백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넌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한다.”
“허나…우사는 분명 형님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내일 부디 숲속 소로로 가야 합니다.”

그녀의 고집에 그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나와 명교의 일이다. 상관없는 네까지 이 일에 걸려들 건 없지 않느냐.”
“잊으셨습니까. 저희의 결의를요. 형님의 일이자 곧 저의 일입니다. 왜 아직도 절 타인 취급 하십니까.”

그녀의 언성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그는 그녀를 응시하면서 잠깐 어정쩡해 있었다.

“지금…화를 내는 것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화를 내겠습니까.”

그녀가 얼굴을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자, 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피씩 웃었다.

“화내는 것이 분명하구나. 널 알아서 네가 이렇게 언성을 높이는 걸 지금까지 본적이 없거늘.”
“네. 화가 납니다.”

그녀는 머리를 홱 돌려 그를 보았다. 그와 잠시 시선이 부딪쳤을 뿐인데 그녀는 자신의 눈확이 뜨거워지는 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전부터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
“저를 대하는 형님의 태도, 언제부터인가 야유가 섞였습니다. 형님 생각엔…제가 그렇게도 우스워 보입니까.”
“그건 무슨 소린가.”

하도 뜬금없는 말이었는지 그가 그녀를 주시했고, 그의 그런 의아한 표정에 그녀는 이름못할 좌절을 느꼈다.

“제가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는데도, 형님의 안위가 저랑은 상관 없는 일이라니…참으로…정말이지…너무너무 섭섭합니다.”
“그게 아니다…”
“뭐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형님에게 전 뭡니까. 그냥 놀리고 싶으면 놀리시는 심심풀이 땅콩같은, 형님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상관할 자격도 없는 그런 사람입니까…”
“서안아…내 뜻은…”
“형님께서 이러시면 제 마음이 얼마나 서글픈지 아시겠습니까. 항상 무슨 일이나 저를 믿지 못하시고, 일이 생기면 저를 밀어내기만 하시고…제 심장은 돌인줄 아십니까. 제가 형님께서 불신하고 외면해도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는 그런 강심장을 가진 줄로 아시나봅니다…”

말하다말하다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훅 올리치밀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방안을 거닐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애꿎은 옷 앞섶을 틀어쥐었다 풀어내기를 반복했다.

방안에서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뭔가 결심을 내린 듯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떠나오기전…”
“…”
“총병부로 돌아가면 네게 할 얘기가 있다 하였지.”

그의 말에 그녀는 몰래 숨을 들이켰다. 드디어…고개를 들자 마치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선연한 눈빛과 마주쳤다. 그녀는 당황함을 감추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네에…그러셨지요. 무슨 얘기인지 줄곧 궁금했습니다.”
“혹…자청비와 문도령의 이야기를 아는가.”

자청비라…전혀 예상밖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잠깐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지상의 자청비와 천상의 문도령…조선의 농경신 자청비의 이야기 말씀입니까.”

그의 수긍에 그녀의 심장이 한박자 멈췄다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자청비와 문도령, 양산백과 축영대, 로미오와 쥴리엣…모두 자신이 현대에서 한때 즐겨 읽었던 고금중외의 사랑이야기들이었다. 특히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청비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신화캐릭터였다.

남장을 하고 3년간 문도령과 같이 글공부를 한 자청비…자청비와 문도령의 이야기는 중국의 양산백과 축용대의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문도령은 글공부 당시 한방에 기거하는 동안 자청비의 여자 신분을 의심했지만 확신을 할수 없었고, 그뒤로 두 사람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부부로 이어질수 있었던 것이다.

자청비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겪었던 그 수많은 고난들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던 때가 있었다. 그런 절절한 사랑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걸로 알고 있었지만, 또 언젠가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하였으면 하는 막연한 동경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사춘기 시절을 기억에 떠올린 그녀 입가에 옅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는 사색을 중단하고 이여백의 시선을 마주했다.

“왜 갑자기…그걸 물어보십니까.”

이여백은 그녀를 응시하면서 여전히 침묵만 지켰다. 하지만 잠시후 그가 던진 말은, 그녀로 하여금 금세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느라 급히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차라리 네가 자청비였으면.”
“…”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당황해서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민망함에 그녀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잠시 허둥댔다. 지금일까…어쩌면 바로 지금이 자신의 정체를 그에게 얘기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그녀가 헛짚은 것이 아니라면 그의 말은 어쩐지 자신에게 주는 그 어떤 기회처럼 들렸다. 그녀는 흔들리는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의 시선도 가만히 그녀를 향했다. 침묵속에서 둘의 시선이 잠시 얽혔다.

“저는…”
“…”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그가 알고 있는 걸까. 그의 따뜻한 미소와 격려의 눈빛은 그녀더러 용기를 내라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과연 자신의 정체를 숨김없이 털어놓아서, 그의 용서와 이해를 바랄수 있을런지, 그녀는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자청비처럼…”
“쉿.”

그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었다기 보다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바람에 겨우 꺼낸 그녀의 용기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지금이다…지금 말해야 했다…하지만 문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은 그녀에게 더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다.

……

똑. 똑…

방안의 정적을 깨면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시선을 내렸고 이여백은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전을 파고들었다.

“두분 도련님, 진지 마련했사오니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그는 그녀를 돌아본 후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나치야.”

그녀는 급히  머리를 들었다. 나치야는 홍조어린 얼굴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러는 그녀의 눈에는 반가움과 서글픈 기색이 엇갈렸다.

“오랜만입니다. 두분 도련님께서 귀체 무강하신지요.”
“덕분에 잘 지내고있습니다. 나치야는요.”

그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나치야의 손을 잡으려다 그만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자신의 손에 스친 나치야의 손은 얼음처럼 차거웠다. 전보다 훨씬 가늘어진 그녀의 손목위에 묵직한 여진의 장식품이 걸려있었고, 나치야는 서은의 시선이 자신의 손목에 닿자 쑥스러운 듯 소매로 팔을 가렸다.

“보시다싶이 잘 지내고있습니다.”

나치야가 웃으며 몸을 돌리자, 문밖에서 또 한사람의 미인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옷차림에 도도하게 어여쁜 얼굴이였다. 미인은 나치야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운 장신구들을 착용하고 있었고, 그녀의 정교한 얼굴에는 격식을 차린 미소가 은은히 담겨있었다.

“이분은 추장님의 셋째 푸진(福晋,여진에서 부인을 이르는 말) 맹고아씨입니다.”

나치야의 소개에 여럿은 인사를 나누었다. 서은이 머리를 돌려보니 나치야의 얼굴에는 처연하고 허탈한 기색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미인이 고개를 돌리고 여진말로 뭐라고 분부하자, 곧 시비들이 줄지어 들어와 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미인은 방싯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접대가 소홀하여 송구하옵니다. 총병부의 산해진미와는 비길바가 못되오나 헤투알라성의 특산물로 두분의 진지를 갖췄으니 두분 도련님께서 행여 초라하다고 웃지 말아주시옵소서.”
“그럴리 있겠습니까. 이처럼 성대한 접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서은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받자 미인은 나치야에게 머리를 돌렸다.

“둘째도련님은 뵈어서 알지만 이분은 처음 뵙네요…”
“총병님께서 근간에 제일 아끼시는 아드님이십니다.”

나치야의 말에 미인은 얼굴 한가득 미소를 담았다.

서은은 그녀에게 살짝 머리를 숙여보였다. 예허의 최고 미녀 예허나라씨 맹고…청태조 홍타이지의 생모답게 고귀한 기품이 몸에 넘쳤고, 적당히 나치야를 아우르는 여유있는 모습이 그녀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나치야…윤아…누르하치를 따라보냈을 때엔 이런 생활을 하는것을 원한 것이 아니였는데…나치야의 수심에 찬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 서로 인사가 끝나 맹고가 나치야의 부축을 받으면서 몸을 돌리는 순간, 살짝 부풀어오른 맹고의 배가 눈에 띄이자 그녀는 더이상 참을수 없었다.

“저어…”

그녀가 부르자 맹고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더 필요한 것이 있사옵니까.”
“저도 성곽 구경을 하고 싶사온데…”

그녀는 말을 꺼낸 후 잠깐 나치야를 일별했다.

“실례인줄은 아오나 나치야아씨한테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구면이니…”
“실례라니요.”

맹고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떠올렸다.

“여진은 한인처럼 남녀유별을 엄하게 따지는 민족이 아닙니다. 더욱이 밤도 아니고 백주인데 그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맹고는 말을 마치자 나치야에게 얼굴을 돌렸다.

“도련님께서 부탁이 있으시니 나치야는 여기 남아서 식사시중을 들고 오세요.”
“네에. 푸진님.”

나치야는 시선을 내리고 공손히 대답했고, 서은은 맹고의 고운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맹고, 홍타이지의 생모…”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수난으로 밀어넣은 청태조 홍타이지, 이제 그 홍타이지가 태어난다면 명이 쇠약해지고 청이 일어서는 역사의 흐름은 더 이상 그 누구도 막지 못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의 무릎을 꿇은 조선의 치부도 그대로 역사에 아로새겨져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나치야를 위해서, 그리고 명과 조선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이 한단락의 역사를 돌려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무슨 방법이 있을까.

그녀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차츰 한가지 생각이 어렴풋한 윤곽을 그리며 그녀의 머리에 자리를 틀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치야와 함께 헤투알라성의 성곽을 돌아볼 때에도 그녀는 줄곧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녀가 성채아래에 이르러 머리를 들어보니 신충일이 성곽아래에 서서 성안팍의 지형을 살피는 것이 눈에 띄였다.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건주의 지형과 군비, 풍속 등 내용으로 역사에 길이 남겨진 한만관계사의 중요한 자료—건주기정도기의 집필은 이렇게 그 첫시작을 떼기 시작하는 걸까. 그녀는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나치야는 그녀를 말없이 따라오다가 드디어 갑갑했는지 입을 열었다.

“혹 저에게 할 얘기가 있습니까.”

그녀는 길가의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치야는 나직히 한숨을 내쉰 후 그녀의 등뒤로 다가서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저를…동정하진 말아주십시오.”
“동정하진 않습니다. 어차피 당신이 선택한 길이니까요.”

그녀는 머리를 돌려 담담히 나치야를 보았다. 나치야는 쓸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길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임도련님도…아직 진전이 없어보이는군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나치야도…이제는 사람을 놀릴줄 아시는군요.”
“둘째도련님도 참 답답합니다.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하시다니요.”

나치야가 눈웃음을 지었고 서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제탓입니다.”

나치야는 알릴락말락 미소를 지었다.

“이럴땐 여자의 감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저는 임도련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름못할 질투가 느껴지더군요. 숲속에서 당신을 구할때 더 한층 확인했을 뿐입니다.”

서은은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밀을 공유하고 지켜준다는 자체는 야릇한 우정의 시작이였다. 윤아와도 그랬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자신에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걸 무척 싫어했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그것이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녀는 엄마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자신이 싫었고, 또 그런 엄마와 자신을 되새기게 하는 모든 화제를 피했다. 그리고 우연히 그녀의 가족란에 엄마가 없는 것을 발견한 윤아는, 친구들이 엄마를 화제에 올릴 때마다 교묘하게 말머리를 돌려주군 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윤아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추억에 잠겨 희미한 미소를 짓던 그녀의 눈에, 문득 나치야의 눈에서 반짝이는 투명한 것이 들어오고 말았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그녀는 입밖으로 내뱉었다.

“나치야…이렇게 살라고 누르하치에게 보낸 것이 아니잖아요.”
“이렇게라니요…이렇게 사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지금의 이 생활에 만족을 합니다.”

나치야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그녀는 나치야의 말을 반박했다.

“그러면 왜 아직 푸진이 되지 못한 겁니까.”
“그건…”

그녀는 친구를 닮은 나치야를 깊이 주시했다.

“첫째푸진 동가, 둘째푸진 군다이, 셋째푸진 맹고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당신은 대체 뭘 하고 있은 겁니까. 특히 둘째푸진 군다이는 재가로 누르하치에게 시집왔어도 무난히 푸진이 되었습니다. 만난 순서대로 서열을 정리한다면, 응당 당신이 둘째푸진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나치야는 고개를 돌린 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은은 냉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이젠 제가 알려드리리다. 당신이 푸진이 되는 방법을.”

……

서은은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검은 야행복 차림으로  몰래 방문을 나섰다. 누르하치가 송별연회를 차리고 그들 셋을 불렀지만 그녀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방에 남았던 것이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한 맹고도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면서 낮에 나치야가 알려준 방향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맹고의 부풀어오른 배가 눈앞에 얼른거렸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을 위해서나 조선을 위해서나…맹고가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는 걸 막아야 해.”

맹고의 아담한 처소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계획은 이러했다. 맹고는 예허의 추장 나린부루가 누르하치를 포섭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었다. 아무리 정략결혼으로 친목관계를 맺었다고는 하나 나린부루와 누르하치는 아직 서로 허심탄회한 사이는 아니었다. 이럴때에 맹고의 처소에 야행복 차림의 정체모를 사람이 드나든다면, 의심이 많은 누르하치는 꼭 맹고와 나린부루를 견제하고 멀리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누르하치가 맹고를 멀리하게 되면 나치야에겐 자연 기회가 올 것이고 더이상 맹고에게 눌려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매안에서 검은 복면을 꺼낸 그녀는 얼굴을 가린 후 잠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냥…맹고를 의심받게 해서 누르하치의 총애를 잃게 하면 돼. 이건…이건 나쁜 짓이 아니야…”

그녀가 길게 심호흡을 하며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문득 검은 그림자 하나가 맹고의 방문을 스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때 방안에서 누군가의 새된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흠칫했다가 급히 몸을 날려 지붕위로 올라갔다. 

삐걱…방문이 열리면서 시비 두명이 총총히 문을 나섰다. 뒤이어 방안에서는 맹고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서두르지 말고 연회청에 가서 조용히 추장님을 부르거라. 자객이 들어 잠시 놀라긴 했으나 별탈은 없다고. 다만 자객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어서 오시라 전하거라.”
“네에. 푸진님.”

시비들은 총망히 사라졌고 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허나라씨 맹고…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산처럼 의연한 몸가짐으로 시비들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맹고를 섣뿔리 건드리려는 자신이 무모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일 누르하치가 도착해서 경계를 삼엄히 한다면 여기를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위기를 감지한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바로 이때,누군가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속삭였다.

“임도련님…”

그녀는 화뜰 놀라 옆으로 머리를 돌렸고, 나치야의 눈동자는 어둠속에서 조용히 빛났다.

“일단 저를 따라오세요.”

둘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지붕위를 이동했다. 나치야를 따라 지붕을 타넘자 바로 뒤에 또 하나의 작은 처소가 나타났고 나치야는 서은을 이끌고 그 처소의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서은은 소리를 죽여 물었다.

“여긴…”
“제 처소입니다. 앞채엔 누르하치가 곧 들이닥칠테니 앞문으로 빠져나가면 위험합니다.”
“하지만…누르하치가 여기까지 온다면요? 그리고 제가 이런 행색으로 나치야의 처소에 있는다면…”
“걱정 마십시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나치야는 방안에 들어서자 궤를 열고 여진의 옷을 꺼냈다. 서은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장식이 화려한 의복을 바라보면서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이렇게 하셔야만 합니다. 환복하지 않으시면 당신은 물론, 총병부와 둘째도련님도 위험하십니다.”
“하지만…맹고를 놀래킨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녀의 불평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치야는 의복을 그녀에게 밀어준 후 문밖으로 망을 보러 나갔다. 그녀는 잠시 멍해있다가 하는수없이 의복을 갈아입고 상투를 틀었던 머리카락을 풀어내렸다. 바로 그때 방안으로 들어온 나치야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옷이…제게 맞지 않나 봅니다.”

그녀가 애꿎은 옷 앞섶을 잡아당기자 나치야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몸에 꼭 맞습니다. 다만…이렇게 여장을 회복하시니 맹고아씨도 울고 갈 자색입니다.”
“놀리지 마십시오.”
“놀리다니요?”

나치야는 그녀를 경대앞으로 잡아당겼다.

“이것 보십시오. 경국지색이란 바로 이런 고운 분을 일컫는 말이지요.”
“나치야…제발 그만 놀리십시오.”
“머리를 틀어올려야겠습니다.”

나치야는 그녀를 경대앞에 주저앉혔다. 빠른 손놀림으로 그녀의 머리를 여진의 방식으로 꼬아서 올려주던 나치야의 시선이 경대안의 그녀의 시선과 잠시 마주쳤다.

“아까 낮에 제게 하신 말씀 말입니다.”

나치야가 손놀림을 계속하며 입을 열었다.

“제게 푸진…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던.”
“네. 이제야 그 방법이 궁금하셨습니까.”

나치야의 입꼬리에 쓸쓸한 웃음이 걸렸고 서은은 청정한 눈빛으로 거울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일 그녀와 이여백의 혼사를 그대로 진행했다면, 지금쯤 둘은 행복한 연인 사이로 남을수 있었을까. 하지만 자신이 가져야 하는 이여백의 마음은…삼검불처럼 엉킨 머리속을 정리하며 무심히 눈을 들어 경대를 보는 순간, 그녀는 나치야의 얼굴에서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말았다. 가슴이 뭉클해진 그녀는 나치야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나치야, 당신은 푸진뿐만이 아니라 대푸진이 되어야 합니다.”

나치야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후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직 푸진도 되지 못했는데 어찌 대푸진 자리를 바라볼수 있단 말입니까.”
“맹고를…견제하시면 됩니다.”

그녀의 말에 나치야는 놀란 눈을 들었고 서은은 경대속으로 나치야의 얼굴을 보았다.

“예허나라씨 맹고…그녀는 당신이 대푸진이 되는 길에서 제일 강력한 적수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녀를 견제하기만 하면 됩니다.”
“…”
“첫째부인 동가는 한인이고 몸이 허약해서 대푸진이 되어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군다이는 출신이 낮고 위인이 용렬하기때문에 대푸진 자격이 없습니다. 앞으로 누르하치의 대푸진의 자리는 맹고가 제일 유력한 후보이긴 하지만, 맹고아씨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영민하여 하늘의 질투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예허의 추장 나린부루에 지지 않는 당신 아버지의 도륜성 세력을 등에 업으면 당신도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아버진…누르하치와는…”

나치야는 말을 끝맺지 못했고 서은은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진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예허도 누르하치와 반목이 있게 됩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벗이 될수 있고, 오늘의 벗은 내일의 원수가 될수도 있습니다.그러니 당신은 그런 부족 싸움엔 신경 쓰지 마시고 누르하치의 마음을 얻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나치야는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은은 한숨을 내쉬면서 경대속의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로서는 나치야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에서 부인과 자녀가 많기로 유명한 누르하치는 정실부인만 해도 넷이였다. 동가, 군다이, 맹고, 아바하이…동가는 추잉과 대선의 생모였고 군다이는 병자호란때 조선을 침략한 망구얼타이(용골대)의 생모였다. 맹고는 청태종 홍타이지의 생모였고 아바하이는 누르하치가 죽은후 순장된, 섭정왕 도르곤의 생모였다.

하지만 나치야는…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나치야는 누르하치의 첩부인 반열에도 이름이 없는 듯 하여 서은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녀를 누르하치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그녀의 운명도 지금과 완연히 달라지는 것이 아니였을까. 마음 한구석으로 이름못할 자괴감이 괴어올라 그녀는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나치야…이렇듯 심성이 연약하니 어찌 자신의 위치와 행복을 찾을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제 운명이라면…”
“전에도 말했었지만, 자신의 운명에 그리도 쉽게 타협할 생각이십니까. 운명은 나약한자의 변명일뿐입니다.”

그녀의 반박에 나치야는 말문이 막힌 듯 했다. 그녀는 그런 나치야를 주시하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대푸진이 될수 있게끔.”
“당신이 어떻게…”
“반간계를 써야지요…맹고는 나린부루가 누르하치에게 붙여놓은 첩자입니다. 누르하치가 아직은 새사람을 탐해 경계심을 늦추고 있지만 곧 이를 깨닫고 맹고를 멀리하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맹고의 처소를 탐문하셨군요.”

나치야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저보다 먼저 맹고의 처소에 진입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앞채에 소동이 일어났어도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당신은 마음을 굳게 하고 누르하치를 차지하도록 집념하십시오.”

……

“추장님께서 오십니다.”

나치야의 시비가 고하기 바쁘게 문이 펄쩍 열리며 누르하치가 노기등등해서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시 방안을 둘러보다가 경대앞의 서은에게 천천히 시선을 고정시켰다. 경대를 마주했던 그녀가 몸을 돌려 누르하치와 시선을 마주쳤고, 누르하치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만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임…임도련님?”

누르하치는 믿기 어렵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는 경대위의 손수건을 들어 살풋이 어깨위로 올리고 무릎을 굽혀 나치야에게 배운 여진의 인사를 했다.

“추장님.”
“임도련님이 어찌…”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누르하치의 이런 반응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여장을 회복하니 본연의 조신한 모습도 같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외람되이 이곳에서 지체하여 죄송하오나, 전부터 극진하게 지내던 사이라 추장님께서 이런 작은 일은 문책하지 않을줄로 믿겠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무료하던차 잠깐 장난끼가 발동하여 나치야아씨에게 이리 청을 든 것입니다.”
“…”
“다들 하도 제 얼굴이 여인을 닮았다 하기에, 오늘 한번 실험해보려 한 것뿐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기 바쁘게 누르하치를 향해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깜빡했다.

“추장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이렇게 차린다고 남자가 여자로 보입니까. 나치야아씨는 마냥 이쁘다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하셔서…”

누르하치는 대답대신 나치야에게 머리를 돌렸다.

“셋째푸진의 처소에 자객이 들었다는데, 혹시 앞채에서 이상한 거동을 듣지 못했소?”
“자객이요? 어찌 그리 불미스러운 일이…저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나치야는 놀란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곧 서글픈 눈으로 누르하치를 보았다.

“그런 일이 아니면…이리로 걸음을 안하셨겠지요.”

누르하치는 잠시 나치야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은을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방금전보다 좀 누그러들었다.

“두분의 흥을 깨뜨려 죄송합니다. 다만 이 헤투알라성에 자객이 든 일은 있지 않은 일이라 혹여 경황해할가봐 온 것뿐입니다. 여기도 별 탈이 없다면 안심하고 물러가겠습니다.”
“추장님.”

몸을 돌려 나가려는 누르하치를 나치야가 불러세웠다.

“자객이 출몰한다니…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밤도 깊어질터이니 이참에 임도련님을 처소까지 뫼셔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나치야의 제안에 서은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런 옷차림으로 혼자 다닌다면 방금전의 소동때문에 낯선 사람들은 의심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누르하치는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 깊이 그녀를 주시했다.

“그럼 제가 처소까지 뫼시겠습니다.”

서은은 몸을 일으켜 누르하치를 따라나오면서 나치야에게 안심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누르하치를 따라 객방이 있는 바깥채쪽으로 올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방문앞에 도착하자 누르하치는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만 쉬십시오.”
“누르하치…”

서은은 몸을 돌리려는 누르하치를 불러세웠다. 누르하치가 걸음을 멈췄고 그녀는 주저했다가 입을 열었다.

“나치야를…아껴주십시오. 당신 한사람을 믿고 온 사람입니다…”
“알고있습니다.”

누르하치의 목소리가 왠지 냉랭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태도에 서서히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고륵성밖 장막에서 그가 한 약속을 떠올렸다. 지금 눈앞의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그녀는 쌀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게 한 약조를 어기고도…이젠 나치야의 마음까지 저버리는 겁니까.”
“약조를 어기다니요?”

누르하치가 벌컥하면서 되물었다. 그녀를 쏘아보는 그의 눈에 잠깐 불찌가 튕겼다.

“그 약조, 잊지 않고있습니다. 명에 대한 원한…총병님에 대한 원한을 거두어달라고 하셨죠. 제가 약조를 어긴 게 뭡니까.”
“…”
“총병님을 원망하지 않기에 둘째도련님도 지금 무사히 헤투알라성을 드나드는 겁니다. 그리고 명에 대한 원한…그것도 잊고있기에 지금 명교 자객이 나를 허술히 보고 헤투알라성까지 침입한 것이 아닙니까.”
“명교…”

그가 명교를 거론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서은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그녀의 반응에 누르하치는 싸늘하게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중원의 명교가 북방까지 침입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그들이 줄곧 헤투알라성만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번에 이 일에서 그 선례를 깬 것입니다. 명교가 명의 앞잡이라는 것은 천하에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감히 이 누르하치를 건드리다니…명교는 이번에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녀는 미간을 구겼고 누르하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제 아버지가 어떤 죽음을 당했는지 임도련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버진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원수를 지목하셨지만, 저는 그 원수의 봉록을 받고, 그 원수의 품계를 받았으니 어찌 원한을 거두지 않은 거라 하겠습니까.”
“…”
“제가 더이상 어떻게 해야 약조를 어기지 않은 겁니까.”
“추장님은…”

그녀는 약간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오늘 일이 명교의 소행이라 단언하십니까.”

누르하치는 대답대신 손바닥을 펴보였다. 그녀는 그의 손에 있는 물건에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명교의 살수가 쓰는 극독을 바른 독침이지요.”
“…”
“맹고의 처소 방문옆에 이것이 박혀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일이 어찌 명교의 소행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녀가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누르하치는 냉정을 회복하고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당신을 의심할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네에?”

그녀가 놀란 시선을 들자 누르하치는 한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일전 당신이 절 구해준 적이 없다면…오늘 일은 이대로 쉽게 끝나지 못합니다. 당신을 도와준 나치야도.”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리 여장을 하고 기민하게 둘러댔다 해도 누르하치의 눈은 피하기 어려운 듯 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조용히 누르하치를 보았다.

“나치야와는…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치야에게 묻지 않을테니 시름 놓으십시오. 다만…”

누르하치는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바람에 그의 옷깃이 가볍게 흩날렸고, 그 모습에는 알수없는 위압감이 느껴져서 그녀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저와 나치야와의 일은, 더이상 그쪽이 신경쓰지 말아주십시오.”

그녀는 누르하치의 말을 이해할수 없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르하치는 그런 그녀를 응시하면서 천천히 한마디 덧붙였다.

“적어도 그쪽에게만은…간섭받고싶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누르하치는 몸을 돌려 휑하니 그 자리를 떴다. 그녀는 그대로 멀어져가는 누르하치의 뒷모습을 한참 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성격하고는…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꾸 그쪽이래?…임도련님이라 불렀지 않았나?”

마음 한구석에서 설마…하는 의혹이 머리를 쳐들었지만, 그녀는 금세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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