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멀리서 이여백과 신충일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누르하치가 연회를 파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온 서은은 문틈으로 몰래 두 사람의 거동을 살폈다. 두 사람이 방앞에서 인사를 나눈 후 각각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경대앞으로 다가가 나치야가 틀어올려준 자신의 머리를 잠시 매만졌다.

경대안에서 여진 복색의 한 미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뭔가 사색에 잠겨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차림새때문인지 그녀는 새삼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보였다. 문득 한가지 짓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자 그녀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가만히 방문을 나섰다.

바로 옆칸인 이여백의 방에는 촛불이 켜져있지 않았다. 아마도 이튿날 떠날 일정때문에 취침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창문쪽으로 다가선후 어스름한 달빛을 빌어 창틈으로 살짝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보지 않았더라면 괜찮을 것을, 그렇게 들여다본 결과 그녀의 눈동자에 포착된 것은 하필이면 이여백이 허리띠를 풀고 겉도포를 벗어젖히는 모습이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읍…”

그녀는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얀 중의 차림의 이여백의 모습이 몽롱한 달빛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뒤이어 그의 손이 머리위로 올라갔고, 그가 상투에 꽂은 잠을 빼자 검은 머리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언젠가 망강루 주점과 총병부 연못가에서도 그의 중의 차림을 보았었지만, 두번 다 경황이 없는 터라 지금처럼 이렇게 가만히 훑어보는 것과는 비길수 없었다. 저렇듯 절륜한 남자였으니 감히 공주를 거절할만도 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을 놀래키려고 와놓고 자신이 오히려 놀라다니…

그녀는 겸연쩍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창문에서 물러섰다. 자기 방쪽으로 몸을 돌리던 그녀가 비틀 하고 옆으로 발을 헛디뎠다. 언제 왔는지 이여백이 바로 등뒤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놀란 눈길로 창문안을 돌아보다가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건곤대나이…신출귀몰의 보법을 가진 그에게 있어서 이 시간내에 방안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등뒤를 막아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그의 미간이 언뜻 찌푸러졌다.

“너…”
“형…형님. 접니다.”

그녀가 입을 열자 이여백은 그녀의 아래위를 보았다.

“몸이 불편하여 방안에 있는다더니, 뭐냐.”
“그게…그러니까…”

그녀로서는 자초지종을 말하기엔 사연이 너무 길었다. 특히 맹고의 처소에 침입하려 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가 엄하게 꾸지람 할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방을 나서기전 뇌리에 스쳤던 생각이 떠올라 말을 이었다.

“형님을 깜짝 놀라게 하고싶어서…아까 나치야에게 부탁하여 이렇게 변장해 본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 그의 앞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변복하면 제아무리 명교 교주도 알아보지 못하겠지요.”

그는 아무 말 없이 잠잠했다. 그녀가 몸을 바로 하자 그는 시선을 돌리고 냉랭하게 말했다.

“당장 환복하거라.”
“네?”
“허무한 짓이다. 이런다고 못알아볼 것 같으냐.”

그녀는 왠지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치야나 누르하치처럼, 그도 자신의 여장 모습에 잠깐, 아주 잠깐이나마 넋을 잃을줄 알았다. 아니, 내심 그러길 바랬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그는 잔뜩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을 송두리채 뽑아서 짓뭉개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다들 이쁘다고 하던데요. 어떻습니까? 형님…”

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까 낮에 못다한 말을 이어서 말할수도 있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자청비였으면 한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차라리가 아니라 애초에 자청비였다고, 여인의 모습으로 그녀는 그리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냉랭한 모습이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넘어서 멀리 어둠속의 한 곳을 응시했다. 뒤이어 그의 시선보다 더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전을 때렸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네에?”
“들어가거라. 내일 아침일찍 길을 떠나야 할 테니까.”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뒤이어 정체모를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랐다. 밤바람에 그의 옷자락이 표연히 흩날렸다. 그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몽환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여 그가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소매를 잡았다.

“형님…”

그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도 그녀의 지금 모습이 보기 흉한가. 그녀는 눈확으로 올리치미는 뜨거운 것을 애써 눌러담은 후 원망섞인 눈길로 그의 완벽한 얼굴옆선을 바라보았다.

“제 모습이…그리도 보기 거북합니까.”
“그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장을 한 모습이…형님의 심기를 거슬렀는지요?”
“…”

그의 침묵에 그녀의 목소리가 잠깐 바람에 떨렸다.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두려우면 총병부에 있지도 않고, 형님곁에 걸리적거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잠깐 여진의 옷을, 여진의 여인 옷을 입었다 하여 형님께서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 일인지요.”
“…”
“저는 내일 출발할때 우리 일행의 안전을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하느라 그런 것입니다. 아십니까, 내일 저희는 여기를 떠나 총병부로 돌아가게 되는데 명교의 자객들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려 헤투알라성까지 잠입을 했습니다. 만일 누르하치에게 호위를 붙여달라고 하면…”
“누르하치의 도움은 받고싶지 않아.”

이여백은 드디어 그녀를 향해 되돌아섰다.

“지금 명교 새 교주는 몽고와 여진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명교의 선례까지 깨고있다. 허니 그가 작심한 일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을 것이다. 네가 여진 여인의 옷이 아니라, 궁궐 여인의 옷을 입어도 그는 정확히 우리 앞을 막아설것이다. 명교 새 교주가 될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녹록한 무리는 아닐테니까.”

그의 말투는 담담했다. 하도 담담해서 그가 꼭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머리를 들어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고있노라니 이름못할 두려움이 느껴져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차분한 성격인 줄은 알고있으나 당장 내일이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이렇 듯 조용한 어조로 차근차근 말하니 오히려 자신의 변장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정작 말로는 두려워서 그런게 아니라고 해도 자신은 확실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헤투알라성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애써 강한척, 아무렇지 않은척 했어도 그녀는 자신들에게 다가오게 될 내일의 시간이 두려웠었다. 하지만 눈앞의 그의 의연한 태도에 그녀 마음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그의 소매를 놓았다.

“혹시…내일 일에 대해 형님은 따로 계획이 있으십니까.”
“계획이라 할것까진 아니고, 내일 넌 신충일과 함께 대로로 가거라. 난 수림을 꿰질러 동굴에 들렸다가 가겠다.”
“안됩니다. 저는 형님과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신충일만 대로로 보내고 저는 형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가 도울수도 있으니까요!”
“네가 방해할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냐.”

그의 말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잠시후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최대한 형님께 폐가 되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잊지 말거라. 네가 동행한다는 자체가 내겐 폐가 되는 일이다.”

그녀는 또 한번 말문이 막혔다. 그는 그런 그녀와 눈을 마주치면서 마침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의 찬연한 미소를 보자 그동안 무거웠던 마음이 드디어 납덩이를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워졌다. 그녀는 얼굴을 숙이고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느라고 그녀는 그의 눈빛에 뜨거운 불길이 스치는 것도, 그리고 그가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뜬 것도 알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형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바람에 그녀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렸다. 그 속삭임에 달도 쑥스러운 듯 구름뒤로 살짝 얼굴을 감추었다.

“다만 화만 내지 말아주십시오. 지금처럼…지금처럼 항상 그리 웃어만 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

누르하치와 나치야의 전송을 뒤로 하고 헤투알라성을 벗어날 때까지 서은은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다. 신충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지형을 눈에 담아두느라 그외의 일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남장을 회복한 그녀에게 이여백의 눈길이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가.”
“왜 그곳에…계셨던 것입니까.”

그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듯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무심히 앞을 내다보았다.

“이와중에 그게 궁금하더냐.”
“궁금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일도 그렇고…형님께서 부마 자리를 거절하신 것도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그는 여전히 침묵했고 그녀는 그를 주의깊게 보았다.

“오늘같이 위험한 상황을 앞두고, 첫번째는 몰라도 두번째 궁금증은 풀어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익수가 삼천이라도 난 그중 한바가지만 취하려니(溺水三千只取一瓢饮).”
“네?”

그녀는 머리를 갸웃했다. 이 말의 뜻을 그녀가 모를리 없었다. 다만 왜 하필 지금 이 말을 하는지 몰라 그녀는 의아해졌고,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려는듯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부마를 거절한 이유다. 궁금증을 풀어주었으니, 이젠 저 앞에서 두 길로 나뉘자꾸나.”
“네? 벌써요?”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수수께끼같은 말 한마디를 달랑 던져놓고 그녀와 신충일을 보내려는 그의 의중에 그녀가 불복하려는 순간, 문득 그의 시선이 멀리 한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눈을 들어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잠시 바라보았다.

“형님…”

눈앞에 펼쳐진 수림속에서 연기가 자오록히 퍼져있었다. 그 수림은 바로 이여백이 꿰질러가야 할 길이었다. 이여백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기만 했고, 그녀는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연기가 있으니 분명 매복이 있을겁니다. 그냥 차라리 저희랑 함께 대로로 가시는 게…”
“저건 적벽대전때 조조를 화용도로 끌어들이던 허허실실(虚虚实实)을 본딴 것일뿐.”

이여백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신충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신공자를 뫼시고 광녕까지 가고싶으나, 제가 잠깐 볼 일이 생겨 철령에 들렸다 가야 합니다. 남은 길은 제 아우가 길을 안내할 것입니다.”

신충일은 그제야 헤투알라성에서 시선을 거두고 이여백에게 고개를 숙여 답했다.

“이번에 이공자가 아니었다면 저의 요동행은 헛걸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으나 조선에 돌아가서도 이 은공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여기까지만 동행하겠습니다. 부디 몸 조심하십시오.”

이여백은 신충일에게 머리를 숙여보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일별한후 드디어 수림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차츰 안개속에 파묻히는 그의 담백한 뒷모습에 그녀는 어쩐지 목이 꽉 메이는 감을 느꼈다. 비록 역사에 남겨진 그의 운명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닌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뒷모습에서 그녀는 그 어떤 비장한 슬픔을 느끼고 괜스레 불안해졌다.

그녀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수림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옆에서 신충일이 길을 재촉해서야 겨우 대로쪽으로 말고삐를 돌렸다. 신충일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공자의 행색이 총망하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혹시 제가 도울 일이라도…”
“아닙니다. 신공자는 과념치 마십시오.”

그녀는 애써 담담하게 말한 후 신충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신공자께선 이번에 누르하치를 만나시고, 원을 푸셨겠네요.”
“네, 만나보니 참으로 기이한 인재입니다. 누르하치는 아마도 하늘에서 낸 인물인 듯 합니다.”

신충일의 경탄에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까.”
“누르하치는 경륜이 높고 포부가 큰 인물입니다. 아마 절대 건주여진의 추장으로만 그치지 않을 듯 합니다.”

신충일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명이나 저희 조선에는 불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저는 개인적으로는 누르하치에게 탄복이 갑니다.”
“혹시 일전에 제가 그린 죽화의 시를…기억하십니까.”

그녀의 느닷없는 말에 신충일은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네, 뜻이 좋아 기억해두었습니다만.”
“신공자는 대나무의 지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충일의 낯색이 흐려졌다. 그녀는 잠시 수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누르하치에게 오배삼고두를 해서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탄핵을 받을 신충일에게 그녀는 이름못할 연민이 느껴졌다. 신충일이 입을 열었다.

“임공자께선 저에게 우국충정(忧国衷情)을 묻는 것 같은데…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그깟 몸 하나 굽히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조라는 것은,대나무처럼 겉모습만 봐서 쉽게 판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료됩니다.”

그녀는 머리를 돌려 신충일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우국충정이 없었다면, 어찌 몇번씩 황량한 만주땅을 넘나들며 후세에 길이 남을 건주기정도기를 써낼수 있었던가. 나라의 국력이 미소하여 무릎을 굽힌 것을, 어찌 지조를 운운하며 개인에게 그 책임을 지게 한단 말인가. 그녀의 선연한 눈길을 신충일은 담담한 얼굴로 마주했다.

“그래도 임공자의 묵죽도는 제 기억에 깊이 남을 것입니다. 이제 조선에 돌아가면 마음을 정화하고 묵죽도를 처음부터 익혀볼까 합니다.”
“아니, 원래부터 죽화를…그리신 것이 아닙니까.”

그녀의 의아한 표정에 신충일은 웃으면서 답했다.

“저는 청정한 난초를 좋아하여 줄곧 난화만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임공자의 그림을 보고 돌아가서 죽화를 한번 배워볼까 합니다.”
“…”

뭐지…그녀는 문득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조선중기 이정(李霆)과 함께 죽화의 양대가로 불리웠다는 신충일이 아닌가. 그런데 애초에 죽화가 아닌 난화에만 흥취가 있었다는 그의 얘기는 지금 그녀에게 가히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만일 신충일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그린 백년후의 정판교의 죽화 때문에 신충일이 묵죽도에 매진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되는데…그렇다면…정녕 그렇다면…

여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훅 머리속으로 불어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정신이 아찔해져서 급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혹시 자신이 여기로 오게 된 것에는 염라대왕이 말한 이유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녀는 문득 머리속이 어지러워졌다.

지금까지 그녀가 겪었던 일들이 퍼즐 맞추 듯이 조금씩 맞춰져가고 있음을 그녀는 홀연 깨달았다. 그녀는 경악했다. 그리고 믿기 어렵다는듯 크게 머리를 흔들었다.

“명부에서는 왜 하필 저한테 이런 버거운 사명을 주시는 겁니까. 정녕 염라대왕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은 저의 전생이 저지른 일이여서 후생의 제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까…전란이 빈번한 이곳 요동까지 와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단순히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운명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까…왜 누구도 제게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까…!”

“네가 옳다고 판단되는 일을 하거라. 그리고 그 어떤 화가 떨어져도 받아들이거라.”

머리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철령 무당할머니와의 대화…어쩌면…어쩌면 자신의 사명은…사랑을 얻는 일도,운명을 바꾸는 일도 아니라…자신이 아는 현대의 지식으로 기존의 역사를 완성시켜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고륵성밖 영채에서 누르하치를 놓아주고 신충일에게 묵죽도를 선보인 일이 바로 그 예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새삼스럽게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녀에게 이여백의 마음을 가져야만 돌아갈수 있다고 말하던 염라대왕, 그런 염라대왕에게 자신은 처음부터 이용만 당하는 셈이였다.

명부가 원하는 질서가 바로 이것이었던가. 머리속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할머니의 말이 귀전에 또렷이 울렸다.

“네가 옳다고 판단되는 일을 하거라…옳다고 판단되는 일을…하거라…”

그녀는 갑자기 확 말고삐를 잡아챘다. 역사의 일부분이 그녀에 의해 완성되는 거라면, 그 사람은… 그는 지금 목숨이 위태로웠다. 신충일이 놀란 눈길을 뒤로 하고, 그녀는 이여백이 사라진 수림을 향해 말을 몰았다.

“제가 옳다고 판단되는 일이란…바로 형님의 운명은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기다리십시오. 제가 형님을 구할터이니…”

말안장 위에서 그녀는 이를 사려물었다. 가을하늘에 높게 걸린 해가 고개를 서쪽으로 기웃했고, 신충일은 티끌을 뽀얗게 날리며 달려가는 서은의 뒷모습을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서은은 말에 박차를 가해 숨가쁘게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갈림길까지 이른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린 후 아직도 연기가 퍼져있는 수림속으로 곧추 말을 내몰았다. 삭막한 수림속은 한낮인데도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고 주변에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그녀는 입안이 말라들었다.

“형님…”

문득 앞쪽에서 쟁쟁한 칼부림소리가 잠깐 울렸다가 바로 사라졌다. 그 소리에 그녀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말고삐를 당겨 앞으로 달려나간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잠시 몸을 주춤했다. 숲속 깊은 곳에 복면을 쓴 자객들이 몇명 쓰러져 있었고, 그 가운데 항상 차분하던 평소의 분위기를 씻은듯 거둔 냉혹한 느낌의 인영이 보였다.

“형님…”

그녀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몸을 돌린 그의 얼굴에 전에없던 한기가 서려있었다. 숲속의 자오록한 연기속에서 그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제야 목소리를 내었다.

“왜 이리 말을 듣지 않는 것이냐.”
“어디 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대답대신 초조하게 물었다. 채 흩어지지 않은 연기가 그녀의 꽤 호흡을 불편하게 했지만, 다행이 그가 별로 다친 것 같지 않아보여 그녀는 짧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명교의 자객입니까.”

그는 아무 말 없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그가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말아.”

그녀는 흠칫하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담담함을 회복했고, 그는 그녀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그대로 되돌아서서 수림을 벗어나 대로로 가거라. 그러면 안전할 것이다.”
“돌아갈거면 왜 따라왔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항상 자신을 걸림돌 취급을 하는 눈앞의 남자에게 저도 모르게 오기가 치밀었다. 그녀의 불만을 의식했는지 그는 살짝 눈썹을 꿈틀했다.

“이 형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냐.”
“형님의 말씀이 저더러 아우된 도리에 어긋나게 한다면, 제가 듣지 않아도 무방할테지요.”

그녀의 말에 그는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교의 고수들이 다 출동한듯 하다. 이럴때 네가 있으면 내가 신경이 쓰이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아니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제가 무예가 고수를 상대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없기보다는 형님께 도움이 되어드릴 겁니다. 형님께서 지금 절 떼어놓고 가더라 해도 저는 몰래 따라갈 것이니 차라리 같이 데리고 가주십시오…”

그가 눈길을 돌려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만 시선을 내리며 머리를 숙였다. 구해야 한다…그리고 막아야 한다…염라대왕에게 이용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괘씸해서라도 역사 내용을 거슬러 가고 싶지만, 그것이 눈앞의 사람을 허무하게 잃는 길이라면 그녀에게는 절대로 허용할수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는 어망결에 그의 손에서 자그마한 환약 비슷한 것을 받아들고 시선을 들었다. 그가 부드럽게 눈을 휘였다.

“지니고 있거라.”
“무엇입니까.”
“이게 없으면 반나절도 안되어 연기에 취할 것이니라.”
“아…”

그녀가 환약을 소매속에 갈무리하자 그는 말을 세워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로 오라고 했다지.”
“네, 위험하면 그리로 오라고 우사가 말했습니다.”

급히 대답하는 그녀의 눈가에 어느새 웃음이 찰랑였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지체하지 말고 바싹 따라오너라.”
“네, 형님.”

그가 몸을 재쳐 말에 오르자, 그녀는 늦어질새라 자신의 말에 뛰어올라 그의 뒤를 바싹 따랐다. 오불꼬불한 수림속을 가로질러 동굴로 향하는 길은 가로세로 엇갈려있었다. 그와 같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녀 혼자로는 절대 찾아낼수 없는 길이었다.

그녀는 우사가 왜 위험에 봉착하면 이 동굴로 오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문득 광녕성밖에서 우사가 한 말들이 떠올라 그녀는 불안어린 시선으로 앞장선 이여백의 뒤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한마디 던졌다.

“왜 그렇게 보느냐.”
“형님…명교는…왜 형님을 이토록 쫓고 있는겁니까.”

그는 담담히 그녀의 말을 받았다.

“교주의 명령을 받드는 거겠지.”
“그럼…명교 교주는 왜 형님을 놓아주지 않는 겁니까. 형님이 좌사였던 중요한 신분이여서요? 아니면 형님같은 사람을 놓치기 싫어서인가요?
“둘다 아니다.”

그의 단마디 대답에 그녀는 더욱 갑갑해났다.

“그렇다면 더 이해가 안됩니다. 형님께서 명교의 비밀을 많이 알고있다 하지만, 항상 어두운 곳에 있는 명교가 총병부의 사람을 해하려 하는 것이 강호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명교로서는 더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닙니까.”
“…”
“왜 명교는 그런 대가를 치를 것을 감안하면서도 형님을 찾아서 여기까지 오는 건지…”
“그건 명교 교주만이 알수 있는 이유다. 교주가 날 죽이려면 구태여 지금까지 기다리지 않았을테니.”

그는 여전히 무덤덤하게 대답했고 그녀는 그런 그의 의연한 태도에 고개를 기웃했다.

“형님께서도 이 모든 것을 다 짐작 하시면서 왜 여태껏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겁니까. 교주가 형님을 해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혹시 형님을 명교에 도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 목적인지요? 이젠 이렇게 피해다니지 말고, 명교 교주와 정면으로 맞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가 우뚝 말을 멈춰세웠다. 그녀를 등진 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잠시후 그는 다시 말고삐를 당기며 조용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걱정하지 말아. 내 알아서 할터이니.”
“어찌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형님의 안위가 걸려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맞서지 않으면 형님께선 항상 이렇게 위험에 노출되게 될 것입니다. 경성 주막에서부터 금주 자객, 그리고 지금의 매복까지 명교가 형님을 시끄럽게 한 일이 어디 한둘입니까. 형님께서 아무리 성현의 마음을 지니셨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진 참지 말아야지요.”

불퉁한 어조로 투덜거리던 그녀는 그가 손을 들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앞에는 자그마한 동굴 입구가 나뭇가지에 가려 알릴듯 말듯 보였다. 그녀는 유심히 보지 않고서는 절대 발견하지 못할 동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 동굴은 일반 사람들은 절대 찾아오지 못하겠군요.”
“한때는 명교 교주와 광명좌우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는 곳이었지.”

그가 말에서 내려 앞장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그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동굴입구에 들어서서 몇걸음 되지 않는 곳이었다.

“형님…”

굳어진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머리를 돌린 후, 그녀는 큰 숨을 들이켰다. 꽤 오래 기다렸던 모양으로 복면을 한 자객들이 검을 빼든 채 동굴안에 대기하고 있는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던 동굴안의 기이한 화초들도 눈앞의 살기에 주눅이 든 듯 축 늘어져 있었다.

……

“형님…어떡합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사가 오라고 한 동굴에 웬 자객들이 있을까. 머리속에서 한가지 의심이 차츰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고, 그녀의 그런 의심을 확인이라도 해주는듯 그가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우사…”

그의 말에 자객들이 몸을 움직여 양쪽으로 갈라섰고, 그 중간으로 복면을 한 우사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미안하게 됐네.”

서은은 억이 막혀 멍하니 우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젠 하다하다 우사에게까지 이용을 당하다니…그녀는 이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명교는 이여백을 유인할수 없었을 것이다. 광녕성밖에서 우사의 말을 듣고 왜 조금이라도 신중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가슴을 쳤다. 그녀는 우사를 노려보면서 주먹을 틀어쥐었다.

“배신자.”
“…”
“당신을 믿은 내가 바보군요.”
“날 믿으라는 말을 내가 했던가.”

우사의 어조에 야유가 섞였다. 그의 시선은 이여백을 넘어 잠깐 그녀의 노기띈 얼굴에 와 멎었다.

“암튼 그대가 이리 데려오느라 수고 많았네.”
“나쁜놈.”

그녀가 치를 떠는 사이 이여백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전에없는 차거움이 묻어났다.

“형님이 교주에게 충성하는 명교의 우사라는 걸 제가 깜빡했군요. 물론 제가 교주를 뵙자는 말은 전달하지도 않으셨을테고.”

우사는 서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교주가 어디 시간이 남아도는줄 아느냐. 그리고 못들었느냐. 명교는 새 교주의 명을 받든지 꽤 되었다.”
“좋습니다. 그럼 새 교주가 어떤 명을 내렸는지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이젠 시기가 무르익었으니 제거하라 하더이까.”
“교주께서 네놈의 목숨을 거두자면 뭐가 어렵겠느냐. 단 너에 대해서만은 전교주께서 새 교주께 한가지 청을 했으니 목숨은 부지할수 있을 것이다. 지금 네겐 두가지 선택이 있다.”

이여백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우사는 쌀쌀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첫째, 교주의 명을 받들어 네 혼인대사를 그분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다.”

우사의 말에 서은은 그를 힐끗 보았다. 우사는 그녀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둘째, 그게 싫다면 다시 명교의 좌사로 복귀하는 것이다. 어떠냐.”
“내가 둘중 어느 한가지라도 대답하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이여백이 냉랭하게 웃자 우사는 금세 낯색을 흐렸다.

“좋은 말로 할때 듣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쓸수밖에.”
“생포는 어렵겠습니다.”

이여백이 말을 끝내기 바쁘게 우사는 검을 뽑아들었고 때를 같이해서 자객들도 일제히 검을 들었다. 이여백은 그 틈을 타 머리를 돌려 서은에게 한마디 던졌다.

“입구를 부탁한다.”
“네? 네!”

그녀는 곧 이여백을 뜻을 알아차렸다. 우사의 손이 한번 번뜩하자 자객들이 우르르 덮쳐들었고, 좁은 동굴입구는  순식간에 치열한 칼부림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자신에게 덮치는 한 자객의 검을 물리치고 입구를 차지한 서은은 머리를 돌려 이여백에게 소리쳤다.

“형님, 가시죠.”

그녀의 목소리에 이여백은 검을 휘둘러 자객들을 한마장 밖으로 물리친 후 입구쪽으로 크게 몸을 날렸다. 하지만 우사도 녹록치 않았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똑같은 보법의 두 사람이 입구로 당도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입구에 서있던 그녀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전에, 우사의 검날이 그녀를 향해 덮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여백은 번개같은 속도로 몸을 날렸다.

치익…

그녀의 가슴을 허비는 이 소리는 바로 이여백의 등이 우사의 날카로운 검날에 베어지는 소리었다. 붉은 피가 삽시에 이여백의 도포를 물들였고, 우사는 그가 그녀를 몸으로 막아설 줄은 생각지 못한듯 검을 주춤했다.

우사와 자객들이 잠깐 어정쩡해 있는 사이 이여백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뒤이어 그의 손이 번뜩하자 스윽 하는 소리와 함깨 자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동굴안이 퍼진 야릇한 향기에 의식이 희미해진 그녀는 언제 동굴을 벗어난지도 모른채 이여백에게 이끌려 말이 서있는 쪽으로 줄달음쳤다.

둘은 말안장에 뛰어올라 그대로 줄창 내달렸다. 하도 달려서 말이 더이상 몸을 지탱할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이여백은 말고삐를 늦추었다. 말이 멈춰선 앞쪽 어딘가 차분한 물흐름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쉰 후 이여백을 돌아보았다.

“형님…”

부르다 말고 그녀는 곧바로 새된 소리를 질렀다.

“피…”

그의 옷자락에 피가 흥건하게 배어있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옥색 도포는 거의 절반이 진붉은 색상으로 물들어있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섬뜩했다. 그녀는 넘어지 듯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놀란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시후 머리를 든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겨우 추격을 따돌렸구나.”
“많이…다치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그는 몸을 움직여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붉은 피는 그의 옷에서 끊임없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겉도포를 벗었다. 중의를 두겹으로 껴입고 도포도 두벌로 입고 있어서 한벌쯤 벗는다 하여 문제될 건 없었다.

그녀는 두손으로 겉옷을 북 찢은후 천을 길게 늘여서 그의 등을 감았다. 그는 시선을 들어 바삐 움직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옷이, 망가졌구나.”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천으로 그의 상처를 압박하여 피가 흘러나오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피자욱을 따라 자객들이 쫓아오겠으니 어서 피신해야 합니다.”
“서두르지 말아.”

그는 자신의 상처 주위의 혈을 눌러 지혈을 시켰다. 그리고는 잠시 주위 지형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어 멀리 한곳을 응시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저긴 민가가 아닙니까. 어서 저쪽으로 갑시다.”

그녀는 말을 버려두고 그를 부축했다. 둘이 민가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어디선가 사내 하나가 날렵하게 달려왔다. 뒤이어 이여백의 상처를 발견한 그 사내가 주춤하는게 보였고, 그녀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사내는 이여백에게 머리를 숙였다.

“좌사님…”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그의 다음 말에 곧 사내가 누구의 수하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금주로 가서 당주님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잠시 여기서 쉬고 계십시오.”
“부탁하네.”
“어떻게 상하셨습니까.”

사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이여백은 대답대신 그를 바라보았다.

“당주께 우사를 조심하라고 일려주시오.”
“알겠습니다. 일단 집안으로 드시지요. 저는 이 주위를 정리하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이여백은 머리를 끄덕인후 집안으로 들어갔고, 서은은 아까부터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의 불안을 눈치챘는지 사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천 당문(唐门)의 단혼사(斷魂沙,당문의 독모래)를 쓰셨습니다. 당문 출신이 아니고서는 불가피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쓰지 않는 것이온데…”
“단혼사요? 그게 어떤 건가요? 그리고 어떤 경우가 불가피할 경우입니까…”

그녀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까 동굴입구에서 이여백이 뿌린 물건의 정체가 바로 당문의 독임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불안은 사내의 다음 말에 더 크게 그녀 가슴을 내리눌렀다.

“단혼사는, 독을 쓴 사람이 먼저 중독되기때문에 해독약 없이는 최악의 경우를 내놓고는 쓰지 않는 것이지요. 당문독의 해독약은 당문에만 있어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보아하니 중독이 심하신 듯 하온데, 해독약 없이 혼자서 저 독기를 다스릴수나 있을지.”

사내는 그녀에게 인사를 한 후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이여백이 들어간 집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녁노을이 문에 부딪쳐 진붉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고,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의 피를 연상케 했다.

이 글을 공유하기:

pandora

판타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판타지입니다.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4
응원합니다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