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어쩌면 줄곧 이 날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서안공주를 대신하여 이 황궁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서은은 오직 자신이 궁을 완전히 벗어날수 있는 이 날만을 학수 고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로 칼을 맞대야만 하는 황궁의 높은 담벽이 그들을 에워쌌지만, 그녀는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평온해 지는 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평온한 느낌은 어쩐지 슬픔과 허무감을 동반했다. 오늘이 지나면, 궁궐의 이 높은 담벽은 더이상 그녀와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서글픈 표정으로 이태후를 바라보았다.

“저를 원망치 마세요. 먼저 군사를 동한 쪽은 어마마마입니다.”

“명교 호교법왕이 제 손에 있습니다.”

만력의 말을 들은 이태후의 얼굴이 한결 해쓱해졌다.

“황상…”
“명교는 아주 큰 세력을 등에 업었더군요.”

만력의 얼굴에 자조섞인 미소가 얼핏 스쳤다.

“일개 호교법왕이 무공비급에 눈독을 들여, 황궁에 침입하여 방화까지 하는 대역무도한 행동을 서슴치 않으니 말입니다.”
“…”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호위 무사들은 건청궁의 심복들이라, 오늘의 영화전 일은 자금성 담장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만력은 이 말을 한후 문득 얼굴색을 변했다.

“지금부터 제가 몇말씀 드리겠사오니 부디 어마마마께서 경청하여 주시옵소서.”

이태후는 만력을 응시했고, 만력은 걸음을 옮겨 이태후의 앞으로 다가갔다.

“소자 미욱하여 지금껏 정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어마마마의 수렴청정을 받들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였으니, 혹여 어마마마는 이를 아셨습니까.”
“…그랬군.”

이태후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들어 늠름한 자태의 만력을 보았다.

“그래서 명교의 힘을 이용한 것이오? 황상…”
“…”
“명교는 본시 태조 황제께서 백련교와 더불어 사악한 교파로 지정한 조직이라, 이 일이 강호에 퍼져 기강이 흔들릴까 나는 두렵소. 듣자니 근간에 명교 교주가 은퇴를 하고,명교는 새 교주의 지시대로 움직인다고 하니 호교법왕도 새 교주의 지시를 받았음이 틀림없소.”
“궁궐에 높이 앉아 불교에만 심취해 계시는 어마마마께서, 명교의 일은 참으로 속속들이 잘 아십니다.”

만력의 비꼬는 말에 이태후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황상도 이미 다 알고 말을 꺼내는 것일터, 내 구태여 더 숨길 것이 무에 있겠소.”
“호교법왕이 이렇듯 횡포를 부릴수 있는 것은, 그의 배후를 봐주는 황궁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만력은 이태후를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하여 소자는 태조 폐하의 뜻을 받들어, 장차 이런 사악한 교파들을 일망타진하겠사옵니다. 이 모든것은 호교법왕이 벌인 일인즉, 날을 택하여 그에게 참수형을 내리고 이로써 명교 새 교주에게 힘을 실어주던 황궁세력에게 경종을 울리려 하옵니다.”

이태후가 놀란 눈으로 만력을 보았다. 만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뒷말을 이었다.

“혹여 어마마마께서도 명교와 관련이 있는 황궁의 사람을 알고 계신다면, 부디 이 일을 소상히 알려 소자의 향후 정사에 차질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황상의 말뜻인즉.”

이태후의 말을 만력이 받았다.

“명교는 이제 끝나야 할 것입니다. 그 배후도 이젠 앞잡이를 잃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만력에게서 시선을 거둔 이태후가 문득 몸을 돌려 이여백에게로 돌아섰다. 그녀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한때 명교 좌사로 있었던 사람을 황상은 어떻게 처치하겠소? 명교 호교법왕도 참수 당하는 판에 좌사라면 더 놓아줄수 없지 않겠소?”
“어마마마께선 명교 좌사로 있었던 사람이, 장재상을 죽이라는 지시에 불복해 명교를 탈퇴하고, 또 그로 인해 목숨의 위협을 받아온 것은 정녕 모르시옵니까.”

만력의 말에 이태후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 말에 우사가 고개를 들었다. 서은은 머리를 돌려 우사를 바라보았고, 우사는 복잡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돌렸다.

서로 대치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자 서은은 우사의 곁으로 다가가 다짜고짜 그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우사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고, 만력과 이태후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검을 들고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늘의 이 자리는 사실 저의 하직인사여야 합니다.”

마치 모든 상황을 정리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검을 쳐들었다. 황궁은 마치도 수많은 비밀을 품은 거대한 미궁과도 같아서, 그 속을 파헤치면 파려는 사람도, 지키려는 사람도 모두 상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만력과 이태후, 만력과 우사, 이여백과 이태후, 그리고 자신과 이여백…얼마나 얽히고 설킨 관계들인가. 문득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지금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착잡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그들중 그 누구도 상하는 걸 원치 않았다.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저는 작별인사를 하려고 여기를 왔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치 수은을 삼킨 서안공주가 그녀를 향해 비웃는 것만 같은 환각이 생겼다. 그녀는 쓸쓸한 눈빛으로 이여백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 원한을 품고 있어서 그녀가 들어갈 자리조차 없었던 남자, 그런 남자의 마음을 가지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녀의 행동에 이여백이 한껏 미간을 찌푸렸고, 만력과 이태후는 그녀를 향해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검을 내려놓거라.”
“저 한사람으로 인해 일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이태후에게 고정시켰다.

“어마마마…어마마마께선 황궁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이라는 걸…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겪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걸 제게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어마마마가 정녕 싫습니다.”
“…”
“어마마마께서 저 사람과…어떤 인연이 있었든…별로 애틋하지도 않은 공주를 내어줄수 없다는 것이 바로 어마마마의 본심이 아닌가요…그 본심이 저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고 싶은 아집이시라면…전 이런 어마마마가 너무 싫고 무섭습니다.”

이태후의 입귀가 푸뜰 올라갔다.

“그래…싫겠지. 네가 이해하리라고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젠 그 무서운 집념…끝내시지요. 저만 여기서 빠지면 되는 것 아닙니까.”
“…”
“그리고 오라버니…그동안 저를 도와주려고 했던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더이상 명교를 이용하지 않겠다고…제게 한 약속도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와 이 황궁과의 인연은, 오늘로서 끝을 맺을 것 같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만백성을 아우르는…선정을 베푸시길…”
“서안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벌써 두번째다. 수은도 모자라서 이번엔 검이냐. 어서 검을 내려놓거라.”

만력이 다급히 말했고 그녀는 우사에게 얼굴을 돌렸다.

“지휘사님께 한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공주님…”
“소(小)를 버리고 대(大)를 취하시면, 어둠에서 나와 광명의 빛을 보실수 있을것입니다.”
“…”
“그리고 형님…”

그녀는 드디어 눈을 들어 이여백의 시선을 마주했다.

“자청비가 문도령에게 가는 길은…길고 험난하지만 종국에는 서로 만나 농경신의 신화로 남게 되었습니다.”
“…”
“저는 아마도 자청비가 될수 없나 봅니다.”
“…”
“어차피 이것이 운명이라면…그 무심함을 통탄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디…천수를 누리시고 귀체 보중하옵소서.”

이여백은 검을 든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짜릿하게 저렸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운명은 거슬러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녀의  말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운명.”
“네. 그리고 이젠 다치지 마십시오, 제발…”

그녀의 절절한 말에 그는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를 주시하면서 슬프도록 무연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아무래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살아오셨잖아요. 이번에 상경하신 것도 아마 그런 마음이셨지요. 제가 어떻게 마음을 졸이는지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
“저도 이젠 지쳤습니다…자중하지도 않으시고, 저를 소중히 생각지도 않으시는데…더이상 혼자 마음 졸이고 형님을 바라보는 일에 지쳤습니다. 한번 있었으니 두번이 없겠습니까…”

그녀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그녀의 검이 번뜩하자, 만력과 우사가 거의 동시에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빠른 한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말을 하는 사이 그녀와의 거리를 좁힌 이여백이었다.

치익.

공중에서 호선을 그린 그녀의 검은 정확히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간 후,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한줌 베어 허공에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줄곧 그녀를 지켜보던 이태후가 문득 손을 들었다.

“그만.”

서은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고, 이태후의 눈에는 일순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작별인사 한번 요란하구나…”
“…”
“가거라…그리고 돌아오지 말거라.”

서은은 고개를 들었다. 이태후의 다음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 멍하니 서있다가 이여백을 부축했다. 그리고는 피가 흐르는 그의 상처자리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는 그녀의 입에서 원망이 터져나왔다.

“왜 또 다치셨습니까.”
“네가 다치는 것보단…”
“고육계였습니다. 자고로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 하였습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되는건데…”

그녀가 소리를 낮춰 소근거리는 말에, 그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검에 베어져 흩날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효경에 이르기를, 신체발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거라 하였으되…본의아니게 이를 훼손하여 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부디 이 불효를…용서하시옵소서.”

이태후는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석연한 눈길로 이태후를 바라보았다.

“슬하에 남는 효도는 대신할수 없는 것이오나, 앞으로 소식은 전하겠습니다. 부디 옥체 보중하시옵소서.”

그녀는 이태후를 향해 정중히 절을 올렸다. 석양이 보리나무를 비추어 황금빛 그림자를 둥글게 만들고 있었고, 영화전 마당에는 만력의 한숨소리가 길게 울렸다.

……

“언제 그런 재주까지 익혔더냐.”

경성을 나서는 길에 말머리를 나란히 한 두 사람이 있었다. 흰색 도포차림의 준수한 얼굴의 남자가, 옆에서 말고삐를 당기고있는 백옥같은 얼굴의 남자에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백옥같은 남자는 눈을 흘겼다.

“재주라니요. 목숨을 걸고 한 연기를 어찌 간단히 재주 두글자로 평하십니까.”
“어찌 그와중에 고육계를 쓸 생각을 다 했는가.”

준수한 남자는 여전히 미소띈 얼굴로 말했다. 백옥같은 남자는 발로 살짝 등자를 구르며 앞을 바라보았다.

“더 지체하다간 성문을 닫겠습니다…”
“어차피 이젠 길을 재촉할 필요도 없는 것을.”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말을 재촉해 경성을 벗어났다. 경성을 떠나 요동으로 향하는 이 두 사람은 바로 이여백과 서은이었다. 봄바람이 가볍게 불어와 둘의 얼굴을 스쳤고, 서은은 고개를 돌려 이여백을 바라보았다.

“다치신 곳은 괜찮습니까.”
“가볍게 스쳤을뿐이다.”

이여백은 간단히 대답한후 말고삐를 바싹 틀어쥐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미 한두번이 아니니.”
“그래도…”
“게다가 폐하께서 어의까지 보내셨느니라.”

그가 말을 마치고 말에 박차를 가하자, 그녀는 빙긋 웃다가 그 뒤를 바싹 따랐다. 한참 말을 달려서 정오가 되자 둘은 어느새 숲속으로 난 길에 들어섰다. 그가 말에서 내리자 그녀도 따라 내린 후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형님…은잠은 왜 돌려주셨습니까.”
“…”
“어머님의 유물이실텐데.”
“언젠가는 기억을 떠올리라고.”
“…”
“한때 변함없는 우정을 약속했던 사람이, 본인의 사리사욕때문에 그렇게 속절없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말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게 말입니다…”

그가 그녀에게 눈길을 주자, 그녀는 봄바람에 휘어 늘어진 나뭇가지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동진(東晋)시기 왕도(王導)가 한 말이 있습니다.”
“…”
“내가 비록 백인을 죽이지 않았지만, 백인이 나로 말미암아 죽었구나. 유명(幽冥) 가운데 있으나, 이 훌륭한 벗에게 잘못했구나(吾雖不殺伯仁,伯仁由我而死,幽冥之中,負此良友).”

그가 시선을 내렸고 그녀는 위안조로 말했다.

“이태후마마께서 당시 총병님께 불리한 말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당시 유왕님의 총애를 잃은 상황이라 유왕이 과연 그분의 말을 믿고 탄핵을 하셨는지…”

왠지 자신의 말이 변명처럼 들려서 그녀는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해요…이런 말 하려고 말 꺼낸 건 아닌데…”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따뜻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알고있다.”
“…”
“그래서 더 화가 났었지. 내 자신에게 정당한 명분을 줄수 없어서. 궐에 잠입해 태후를 해칠 그 어떤 명분도 내겐 없었다. 하지만 궁에선 잇달아 자객을 파견했지.”
“…”
“내가 화가 났던 건, 어쩌면 어머니를 그리 돌아가시게 한 내 아버지한테 화를 낼수 없어서…대신 화풀이 대상을 찾은 것일수도.”
“…”
“그동안 많은 방황을 했었다. 도피도 했었고, 살인도.”
“…”
“살수 시절엔 내 복수심에 눈이 멀어, 억울할지도 모를 인명들도 해쳤지.”
“…”
“그토록 태후마마를 원망하였지만, 나 또한 내 자신의 사심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었는지.”
“형님.”

그녀는 차분하게 그의 말을 중단했다.

“혹시 그거 아십니까?”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형님이, 자꾸 신경 씌이는 이유를.”

그는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충직하고 사려깊은 형님의 성정도 그렇겠지만…아십니까, 제가 제일 걱정하는 건 바로 형님의 이런 담백한 성정입니다.”
“…”
“제가 아는 형님은 마음이 맑고 청정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형님이 정사를 거부한다고 아쉬워 하겠지만…”

그녀는 말하다 말고 살짝 고개를 숙였고, 그는 그녀를 이윽토록 보았다.

“왜 말을 하다 마느냐.”
“…”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위로는 된다만.”
“하오니 부디 자책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녀는 시선을 들어 조용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형님께선 오라버니의 방식에 따라 호교법왕을 숙청하였고, 잘못을 범한 사람에겐 어머니의 유언을 전해드린 것입니다.”
“…”
“이보다 더 잘할수는 없습니다. 목숨까지 각오한 이번 상경으로,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네 덕분이었다.”

그가 두 손을 내밀어 가볍게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아무리 고육계라 한다지만, 목숨을 건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터. 다시는 그런 위험한 일을 벌이지 말거라.”
“이러지 마세요. 옷차림을 보세요. 남자끼리 이러면 게이라 합니다.”

그녀가 쑥스러워 물러서며 하는 말에 그가 물었다.

“게이?”

그의 의아한 표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암튼, 좀 쉬었으니 이젠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잠깐…”

그가 말에 오르려는 그녀를 막았다. 그녀가 되돌아보자 그는 자신의 접선을 꺼냈다. 뭐지, 설마 지금 무예라도 겨루자는 건가. 그녀는 영문을 알수 없어 그를 보았다.

“형님…?”
“내가…줄곧 써왔던 무기다. 이걸로 많은 사람을 해쳤었지.”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바쁘게, 그는 그 접선을 가로 들어 단번에 꺾어버렸다. 그바람에 접선안의 검이 여러 토막으로 꺾어져 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명교가 끝났으니, 이젠 이 검도 사명을 다하지 않았겠느냐.”
“왜…하필…단검을.”

그녀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름못할 그 무엇이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딱히 어떤 감정인지는 그녀도 헛갈렸다. 단검, 단검…왜 하필 단검일까…

문득 그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아까부터 가물가물하던 그 무엇을 드디어 생각해 낸 것이다.

“왜 단검입니까.”
“이젠 지난 모든 일들을 청산하고, 나 또한 새출발을 약조하는 의미이니.”
“단검은…생사의 약조입니다.”

그의 말을 자르며, 그녀가 신음하듯 말을 내뱉었다. 뒤이어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안된다…그래선 안되는  것이다…그녀의 눈길이 서서히 땅에 떨어진 단검에 가 닿았다. 검의 뾰족한 단면들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을 보고 있느라니 왠지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런 약조, 저는 필요없습니다. 저는 다만…다만 형님께서…”

못다한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서 사라졌다. 자신의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그의 운명은 두려웠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는 그녀를 향해 씻은 듯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에 듬뿍 고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

서은의 마음은 심란했다. 궐을 떠난지 단 하루만이었다.

숲속 곳곳에서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처절하게 들려왔고, 이여백이 가끔 뒤를 돌아보는 횟수가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그를 따라 뒤를 보았지만 칠흙같이 캄캄한 밤이라 아무것도 눈에 띄이지 않았다. 하지만 뒤쪽에서 뭔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그녀도 어렴풋이 알수 있었다.

“황궁에서 보낸 자들입니까.”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희미한 달빛이건만 흰색 도포의 반사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있느니.”
“이태후 마마일리는 없고, 아마 우사가 아니면 오라버니가 보낸 사람이겠지요.”
“언제부터 알고있었지?”

그가 담담히 물어왔다. 그녀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형님께서 대로를 두고 여기 숲속으로 들어오실 때부터요. 혹시 약속하고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게 아니였는지.”

그가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에서 내렸다. 달빛을 등져 그의 표정을 볼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무거운 분위기었다. 그 분위기에 눌려 그녀도 얼른 말에서 내렸다. 누군가가 피씩 웃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급히 떠나보내느라고 작별인사도 못했는데, 이렇게 배웅하게 해줘서 고맙네.”

우사의 목소리였다. 어둠속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영화전 마당에서 장거정에 대한 말을 들은 후 복잡했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 눈앞의 우사는 그때 보였던 그 착잡함을 지운 채 의연하고 차분한 얼굴이었다.

“궁을 떠났으나, 형님과 저의 인연이 끝났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여백의 말에 우사는 알릴락말락 미소를 지었다. 그의 웃음에는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듯 건조했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그의 어조는 이미 전의 냉담함을 거둔 상태였다.

“끝나지 않았지. 난 네게 빚을 졌으니까.”
“…”
“가부를 죽이려는 교주의 지시에 불복한 것은 고맙다.”
“…”
“허나 그것이 명교를 탈퇴한 이유라는 걸 왜 말하지 않았나.”

이여백이 눈을 들어 우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번졌다.

“말하면 믿어주실 겁니까.”
“…”
“어차피 형님께서는 가문의 원수를 갚으려고 명교에 가입했다고 보기엔…시비와 흑백이 엇갈리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불만이 더 깊은 것이 아니였습니까.”
“…”
“어쩌면 저에 대한 미움도 그런 불만이지 않습니까.”

우사의 얼굴에 잠깐 민망한 기색이 흘렀다.

“그건…”
“만일 가문의 원수를 갚고 싶다면, 형님께서 서계셔야 할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황궁이어야 할 것입니다.”
“…”
“저는 형님께서 이젠 그 원한을 버리고 장재상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너처럼…말이냐.”
“저는 사사로운 은원이되 형님은 저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자고로 당쟁에 희생된 가문이 어찌 한둘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시군을 한다는 것은 천고에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
“지난 일을 잊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 형님께서 자신의 이름과 가문의 명예를 되찾는 길이라 사료됩니다.”
“내 동생 간수가…왜 네녀석을 가까이 했는지 알 것 같군.”

우사가 나직히 한숨을 내쉬면서 이여백을 보았다.

“지금까지는 너와 나 개인적인 일이었지만, 이제는 공적인 일로 너를 봐야겠다.”

그는 말을 마치자 품속에서 두루말이 하나를 꺼냈다.

“요동 이여백은 밀지를 받고 어명을 받들라.”

이여백은 의아한 얼굴로 우사를 보다가 곧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우사가 천천히 두루말이를 펼쳤다.

“궁에 이목이 많아 자세한 당부는 할수 없나니, 공주의 마음이 철석같은즉 이처럼 은밀히 동생을 보내는 짐의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없느니라. 만일 앞으로 공주가 일호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있다면, 짐이 경성을 비우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만나 죄를 물을 것이니 그리 알라.”
“이여백은 어명을 받들어 차착이 없게 하겠사옵니다.”

이여백이 밀지를 받자, 줄곧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서은의 눈확에는 뜨거운 것이 그들먹히 차올랐다.

“오라버니…”
“이상한 일입니다. 전에는 폐하께서 공주님을 아끼시긴 하나 이처럼 성심을 쓰신 적은 없었습니다…”

우사의 말에 서은은 그를 바라보았다.

“부디 오라버니께 용체 보중하시라고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라버니와 이태후마마께…저는 전의 서안이 아니오니 제 일을 걱정 마시라고 전해주십시오.”
“…”
“그렇게만 전해주시면 됩니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을 되새기며 우사는 영문을 모른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우사가 낮게 속삭였다.

“만일 일이 여의치 않아 저녀석이 공주님을 억울하게 한다면 봉선각으로 가서 그곳 행수를 찾으십시오. 제게 소식이 닿을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휘사님…”
“물론 그럴 일이 없으면 더 좋겠지만 말입니다.”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옆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이여백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다 들립니다.”

우사는 씩 웃어보인 후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이여백을 바라보면서 또 한번 피씩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너,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니 정신 차려야 하겠구나. 공주님의 인기가 워낙 하늘을 치솟아서 말이지.”
“그 인기에 형님도 한몫 보태신 듯 합니다만.”

이여백의 화난 듯한 표정에 우사는 장난끼 섞인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지, 네놈만 아니였으면 공주님은 궁에 남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옆에서 최선을 해보겠는데 말이다.”
“지휘사님은 무슨 농담을 하시는 거에요!”

그녀가 듣다못해 발을 구르자 우사는 머리를 쳐들고 껄껄 웃었다. 바로 그때 뒤에서 단단한 팔이 그녀를 감아 품에 안았다. 뜻밖의 상황에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 귀가에, 이여백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형님의 그런 수단은 이 사람한테 먹히지 않을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데? 그렇다면 네녀석의 수단은 먹힌단 그말이냐. 그게 어떤 수단인지 한번 들어나 보자꾸나.”

우사가 한껏 시까스르는 말에 이여백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적어도 목숨정도는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아까 단검을 보고 느꼈던 불안감이 또 한번 그녀의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의 말이 싫지는 않은데…아니, 어쩌면 고대하던 말이기도 했는데…그의 이런 말들은 점점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만일 염라대왕의 말대로 그녀가 그의 마음을 온전히 얻게 되어 무사히 현대로 돌아간다면, 그녀를 잃은 그는 그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여 사퇴와 은둔을 반복하다가 끝내는 자결을 선택한다…가능한 일이였다. 아니,실제로 역사에 기재된 그의 운명이었다.

우사가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수림속으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그녀는 우두커니 한자리에 서있었다. 조금씩 몸을 떨고있는 그녀에게, 그가 따뜻하게 손을 잡아왔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그녀를 들여다 보았다. 달빛이 그의 몸에 부서져 내려 후광이 비치듯 환상적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그녀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

어느새 걷힌 미소뒤로 불안감을 드러내며 그가 물었다. 그녀는 두팔을 벌려 그를 와락 껴안았다. 단단한 그의 품안에서 그녀는 눈물을 거두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꿈만 같아서요…”
“…”
“오라버니께서 이렇게 밀지까지 보내왔으니, 이젠 우리를 가로막을수 있는 것은…그 아무것도 없겠죠?”
“요동으로 돌아가는대로 바로 혼례를 치러야겠다. 네가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게.”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바로 세웠다. 여전히 힘없는 그녀의 미소가 걸렸는지 그는 반듯한 이마를 구겼다.

“아직도 무엇이 불안한가.”
“요동은 어찌 되었을까요.”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 걱정을 한낱 아녀자가 하게 하다니, 요동의 칠척남아들이 들으면 한심해할 일이군.”

그녀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더이상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들을 쫓아냈다. 어차피 2년이었다. 아니 이제는 정확히 1년남짓이 남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동안 시국과 정세가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이젠 어렵게 찾은 눈앞의 행복에만 집중하기로 그녀는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외의 그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으면 그와 그녀 사이의 남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돌려세운 것은, 요동에서 불원천리 그들을 마중나온 이성량의 수하 군졸이였다. 숲속을 벗어나 금주로 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 낯이 익은 총병부의 군졸 하나가 멀리서 그들을 향해 말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 바로 말을 세웠다. 이여백이 목소리를 돋우어 물었다.

“어찌된 일이냐.”

군졸은 그들을 발견하자 곤두박질 치듯 말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아이쿠…드디어 돌아오시는구만요. 둘째도련님…”
“나를 마중온 거냐.”
“총병님께서 걱정이 태산 같으십니다. 누르하치가…”

군졸은 말을 잇다가 이여백의 옆에 있는 서은을 발견하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여백이 다그쳐 물었다.

“말해도 무방하다. 누르하치가 어찌 되었다는 거냐.”

군졸은 머리를 조아렸다.

“누르하치가 도륜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때문에 총병님께서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곧 출병하려고 하나 총병부가 비게 되오니 저더러 속히 도련님을 모셔오라고 보낸 것입니다…”

이여백은 그녀를 보았다가 군졸에게 눈길을 주었다.

“도륜성을 공격하는 건 아버님의 뜻이 아니였더냐. 아버님께서 윤허하셨고 또 미리 감안하신 일이다.”

그녀도 머리를 끄덕였다. 도륜성에 대한 공격은 누르하치가 줄곧 계획한 일이였고 이성량은 번연히 알면서도 결코 이것을 막지 않았던 것이다.

“총병님께서 묵인하신 일이라 해도 누르하치가 너무 하더이다. 듣자니 이미 도륜성을 초토화하고 니칸외란 일가를 도륙냈다 들었사옵니다.”
“나치야…”

서은은 깜짝 놀라 군졸을 향해 다그쳐 물었다.

“나치야가 헤투알라성에 있지 않습니까. 나치야를 봐서라도 누르하치는…”
“나치야아가씨는…”

군졸은 머리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헤투알라성을 떠나 도륜성으로 간지 두달이나 됩니다. 누르하치가 그때문에 도륜성을 짓밟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랬군요…”

그녀는 나직히 탄식했고 군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다행이 니칸외란이 난전중 몸을 뺀후 나치야를 데리고 총병부로 피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총병님이 누르하치를 방치한 탓이라고 하며, 지금 곧 도륜성 성주이자 만주국 국주의 이름으로 조정에 장계를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군졸의 말을 들은 그녀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이여백을 돌아보았다. 정오의 햇살속에서 그의 표정도 차츰 무거워지고 있었다. 만주국 국주 니칸외란…그가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나치야는 왜 헤투알라성을 떠났을까…그녀는 머리속이 혼란스러워 졌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한 한가지 억측이 서서히 윤곽을 그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그 생각은 날카로운 통증을 수반했고, 그바람에 머리위로 쏟아지는 해볕이 오히려 차거운 냉수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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