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밤낮으로 길을 재촉한지라 서은 일행이 광녕에 도착한 시간은 예상보다 반나절은 앞당겨졌다. 성안을 들어서서 총병부로 말을 재촉하다가 봉선각을 지나치게 되자, 서은은 잠깐 말을 멈추고 누각위를 바라보았다.

“만일 일이 여의치 않아 저녀석이 공주님을 억울하게 한다면 봉선각으로 가서 그곳 행수를 찾으십시오. 제게 소식이 닿을수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 봉선을 만났을 때 우사가 자리를 같이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머리를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때 자신이 연주한 봉구황 가사를 듣고 문발안으로 들어가버리던 봉선의 뒷모습이 머리속에 떠올라 그녀는 한번 더 누각위로 눈길을 주었다. 바로 그때었다.

좌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누각위에서 뭔가 서은의 몸위로 쏟아졌다. 서은은 흠칫 놀라 옆으로 피했지만 이미 온몸이 물참봉이 되어버린 후였다. 옆에 있던 이여백이 서둘러 그녀에게 겉도포를 씌워주었고 그녀는 화가 치밀어 등자위에서 발을 굴렀다.

“어찌 이리 경망되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을 끼얹는단 말입니까!”

누각위에서 시비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황망히 얼굴을 내밀었다.

“송구하옵니다. 봉선아씨께서 새로 차물을 달이라 하옵기에 마음이 급하여 그만…괜찮으시다면 잠깐 들어와 마른 의복으로 갈아입으시옵소서.”
“아니, 되었소. 갈길이 급하니 이만.”

그녀는 화를 눅잦히며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바로 그때 낭랑한 웃음소리가 누각위에서 울려퍼졌다.

“임도련님께서도 봉선각을 꺼리신다면 이년 또한 할말은 없사옵니다. 다만 오늘의 엄정하신 그대가 그 다정한 봉구황을 부르시던 모습이 바로 어제 같은데…”

봉선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어조가 꽤 도발적으로 들렸다. 서은은 발끈해서 이여백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시비를 일으킬수는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잠깐 들어가 보고 오겠습니다.”
“총병부가 바로 코앞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몰골로 아버님을 뵈올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그는 잠깐 침묵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같이 들어가마.”
“어림도 없는 말씀을. 아버님께서 기다리실터인데 어찌 기루를 먼저 들리신단 말입니까.”
“그러면…지체하지 말거라. 일각후에 사람을 보내겠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말에서 내려 혼자 봉선각으로 들어갔다. 시비가 급히 그녀를 마중나왔다.

“안으로 드십시오.”

시비를 따라 누각위로 올라간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잠깐 주춤했다.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망사 비단옷에, 역시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린 봉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풍겼고, 서은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여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이런 기연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전번에는 봉선이 실례가 많았으나, 오늘은 그냥 지나칠수 없어 감히 불렀사오니 부디 이년의 무모함을 웃지 마옵소서.”

봉선의 목소리가 살짝 웃음기를 띄고있었다. 서은도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인 역시 낭자께 사죄하려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 행동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잊지 않고 거론해주시니 이 자리를 빌어 그날 일을 사죄할까 하옵니다.”
“임도련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 사죄하려 하십니까.”

봉선은 서은에게 자리를 권한 후 시비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시비가 물러나가자 서은은 머리를 숙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제 짧은 재주를 뽐내느라 낭자의 아픔을 건드렸으니, 그 죄가 어찌 가볍다 하겠습니까.”
“그것이 죄라면 정녕 임도련님께서 봉선의 마음을 옹졸하게 보시는 겁니다. 하지만 다른것에 대한 사죄라면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다만. 예를 들어 신분을 감춘 일이라든가.”

봉선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분명 그녀의 정체를 알고 하는 말인듯 했다. 서은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소식이 빠른 분이라는 걸 그만 깜빡했습니다.”
“실은 그전부터 임도련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태연한 듯 말하는 봉선의 어조에 또 한번 웃음이 섞였다. 자신의 남장 모습이 그렇게도 티가 났단 말인가. 그녀의 의혹을 해소해 주려는 듯 봉선이 이어서 말했다.

“자고로 사향의 향기에 무심한 사람은 둘째도련님을 제외하고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그분외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남자가 아닐테지요.”

서은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녀를 보았다.

“형님이 사향의 향기에 무심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광녕 제1기녀인 이 봉선의 이름에 먹칠을 할 일이 있겠습니까.”

봉선의 자조섞인 말에 서은은 머리를 들고 봉선을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왠지 불퉁함이 묻어나왔다.

“제 정체를 안다면, 형님과의 관계도 모르시진 않을텐데요.”
“그래서요. 공주마마…설마 제게 둘째도련님을 넘볼 자격이 안된다는 말씀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망사뒤에서 봉선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서은은 아연한 눈길로 봉선을 보았다. 그녀의 놀라움을 의식했는지 봉선이 다시 간드러지게 웃었다.

“마른 옷을 바꿔 드린다는 것이 이야기에만 정신이 팔렸군요. 저를 따라 안방으로 오시지요.”

서은은 가슴 한가득 의혹을 품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안방 문발을 들어올리자 한결 그윽한 사향냄새가 코를 찔렀고, 꽃과 나비를 수놓은 비단 병풍에는 한눈에도 고급스러운 여인의 의복이 걸려있었다. 색상이나 질감으로 보아 결코 황궁의 의복에 뒤지지 않는 옷이었는데, 깃을 달아 주름잡은 붉은 비단에 흰 가죽으로 안을 댄 걸로 보아 명문 가문에서 신분이 존귀한 여인들만 입는 학창의인 듯 했다. 서은은 또 한번 놀라운 눈길로 봉선을 보았다.

“이건…”
“이번에 총병부로 가시면 공주마마께선 전의 신분과는 다르게 사셔야 하오니 특별히 마련하였습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으셔도 이 봉선의 정성이니 받아주시어요.”

봉선의 차분한 말에 서은은 한결 더 어리둥절 해졌다.

“왜 저한테…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그냥 공주님을 아끼는 마음으로 생각하옵소서.”

봉선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손벽을 두번 쳤다. 그러자 시비들이 들어와 목욕물을 대령했다. 봉선은 나가지도 않고 그녀가 옷을 벗는 것을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젖은 도포를 벗은 후 중의만 남게 되자 그녀는 봉선을 보았다.

“저 혼자 씻겠습니다.”

소매를 걷고 물의 온도를 가늠하며 봉선이 싱긋 웃었다.

“오늘은 그냥 누리시옵소서. 총병부에 들어가면 오늘같은 호사를 누릴 마음이 없을지니.”

그녀는 봉선의 말을 이해할수 없어 살짝 미간을 구겼다. 하는수없이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봉선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와 닿았다.

“상투를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봉선이 하는대로 맡겨버렸다. 은잠을 뽑자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렸고, 봉선은 빗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주었다.

“총병부에 눈이 많으니 잠시후 제가 준비한 가마를 타고 가시옵소서.”
“형님이 사람을 보낸다 하였습니다.”
“사람을 보내도 가마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녀는 잠자코 봉선의 시중을 받았다.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봉선의 성정으로 쉽게 말할 것 같지 않았다. 목욕을 마친 그녀가 학창의를 입고 은백색 바탕에 연두빛을 돋힌 띠를 띠자 봉선이 다가와서 말했다.

“머리는 제가 올려드리리다.”

서은이 면경앞에 앉자 봉선은 곧 빗을 가져다 그녀의 머리를 운계 모양으로 틀어올려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화장함을 열어 그녀에게 정교하게 화장까지 해주었다. 이 모든것을 마치자 봉선은 그녀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머리를 끄덕였다.

“과연 옥같고 꽃같은 공주님이십니다.”
“어찌 이렇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오늘만은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앞으로는 그 어떤 일에도 관여치 않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중단하며 봉선이 간청하다 싶이 말했다. 서은은 더이상 봉선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단장을 마치자 봉선이 문밖까지 배웅나왔고, 문밖에는 총병부에서 보낸 시종들이 봉선이 준비해둔 가마옆에 시립해 있었다. 가마를 타려던 그녀는 문득 봉선에게 머리를 돌렸다.

“오늘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봉선이 불복하듯 말했다. 서은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옷은 그렇다 쳐도 봉선의 아끼는 마음까지 받았으니.”
“봉구황을 들려주신 은혜를 제가 지금 갚는 것입니다.”

봉선의 말에 서은은 가볍게 눈웃음을 지은 후 머리를 숙이고 가마에 올랐다. 그러느라 봉선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하고 말았다.

“부디…공주님은, 저처럼 되어서는 아니되옵니다.”

봉선각을 뒤로 하고 가마는 천천히 총병부로 향했다. 총병부 문안에서 이여백이 기다리고 있었고, 시종이 다가가자 그가 낮게 분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청에 손님이 있으니 먼저 후원으로 가있거라.”

교군군들은 가마를 든 채 후원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청 마당을 지날때 서은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성량의 중후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전해졌다.

“경성에서 여백을 따라 내려온 식솔이오.”

식솔이라…이제는 드디어 이 집안 식구가 되는 것인가. 그녀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바로 그때 니칸외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경하드립니다. 총병부 안채가 너무 적막하오니 하루빨리 저런 식솔을 보태어야 합니다. 하물며 도련님도 이젠 장성하셨사온데 첩을 몇 들인들 무엇이 과하리까.”

“첩…”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총병부 후원의 자신이 전에 있었던 처소에 들어서자, 그녀는 교군군들을 돌려보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성량이 그녀로 하여금 니칸외란과 나치야를 대면하지 않게 하는 것은, 아직 그들이 그녀의 공주 신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분은 감추더라도 나치야와 회포는 풀어야 할 것 같아서 그녀는 처소를 나섰다.

후원을 벗어나 대청부근에 이른 그녀는 문득 대청안에서 들려나오는 호통소리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도륜성이 그리 된 것이 어찌 내 뜻이란 말이오!”

이성량의 목소리가 왠지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있었다. 니칸외란이 야비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인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도륜성이 일조에 초토가 되고 누르하치는 예허와 손을 잡고 요동을 종횡무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총병님이 누르하치를 방치하고 부추겼기 때문이옵니다.”
“니칸외란! 혀를 함부로 놀린 대가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소!”
“소인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습니다. 제 일가가 도륙을 당하고 겨우 딸 하나에 늙은 목숨을 구구히 부지하고 있사온데 총병님까지 이 늙은이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신다면 저 또한 할말은 없사옵니다.”
“그래서…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오? 이깟 총병자리는 내놓으면 그만이오.”
“총병자리는 아까울 것 없으되 요동의 변란은 총병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닐테지요…”

니칸외란…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고 대청안에는 이성량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니칸외란은 한참 침묵하다가 다시 대청의 정적을 깼다.

“총병님께선 그동안 요동에서 쌓아온 위망과, 그 혁혁한 조상님의 이름이 이대로 더럽혀지기를 원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장거정의 추천으로 폐하께서 총병님께 요동의 방위를 맡긴 것이 구경 무엇때문이겠습니까. 총병님을 내놓고는 그 누구도 여진인, 조선인, 몽고인, 한인 등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이 요동의 안정을 도모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총병님 전에 여러 총병이 바뀌면서 요동의 정세가 어떠했는지는 이 늙은이가 굳이 말씀 안드려도 아실테지요.”
“…”
“허나 소인이 만주국 국주 신분으로 몽고에 일봉 서찰을 띄운다면, 우선 몽고가 침입해올것이고 이 요동의 안정은 더 이상 지키기 힘들다는 것도 잘 아실테지요.”
“성주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이여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칸외란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둘째도련님과 말이 통하는군요. 소인의 딸 비록 불미하오나 어렸을때부터 사서오경을 읽어 여자의 도리는 잘 아는 터이고, 또 도련님께는 혼담이 오갔던 사이이기도 합니다. 지금 와서 둘의 미뤘던 혼사를 치루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은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나치야…이런 일이었구나. 그동안의 불안도, 봉선의 동정도…결국은 다 이런 영문이였구나…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자고로 혼인이라 함은 마음이 맞아야 하는 일이며 중요한 것은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나치야도 그렇지만 저 또한 따로 마음을 준 사람이 있어 성주님의 호의에 대답할수 없습니다.”

이여백의 단호한 말도,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후 귀를 기울였다.

“나치야는 누르하치와…이젠 더이상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누르하치가 저의 일가를 도륙 냈은즉 이제 저희와는 철천지 원수입니다. 나치야가 이 일에 더 이상 딴마음을 품는다면 제가 먼저 제 딸의 피로 일가를 위해 제를 지내오리다.”

니칸외란이 낮게 말을 내뱉었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위협조로 말했다.

“저는 도륜성 일에 대해 폐하께 올릴 장계와 몽고에 띄울 서찰, 그리고 피를 묻힐 칼을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총병님께서 이 혼사를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저와 제 딸의 피로 먼저 이 총병부를 씻으리다.”

니칸외란의 말에 대청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한참 지나 이성량의 무거운 한숨소리가 새여나왔다. 서은은 그만 몸을 돌리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한가닥 한숨이 새어나왔다.

니칸외란의 위협은 총병부 식구들이나 그녀에게 있어서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이성량의 번민과, 윤아를 닮은 나치야의 목숨, 그리고 이제 겨우 마음을 준 이여백과, 언젠가는 현대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자신…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까. 그녀는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몽고를 끌어들여 요동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겠다는 니칸외란의 계획도 충분히 난감한 문제였지만, 가문에 대해 순종적인 나치야의 목숨을 제물로 이용하는 니칸외란의 비정한 모습에 그녀는 치가 떨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는 분노가 그녀의 발길을 후원으로 이끌었다.

후원으로 들어가자 후원의 한쪽 끝에 자리잡은 운치있는 정원이 보였고, 문안의 짙고 푸른 대나무가 그녀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연꽃이 만발하는 호수가에 자리잡은 자신의 처소처럼, 이곳 역시 총병부의 귀객을 접대하는 또 하나의 별채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뉘시옵니까.”

문앞에 앉아있던 어린 시녀 하나가 벌떡 일어나서 서은에게 물어왔다. 그녀는 눈을 들어 시녀를 주시했다.

“나치야아가씨가 안에 계신가.”
“뉘신데 감히 저희 아가씨의 함자를 직접 입에 담으십니까.”

시녀가 발딱하고 있었고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총병부의 유순한 시비들과는 달리 어딘가 당돌하고 낯선 얼굴의 시녀였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어린 시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륜성에서 성주를 따라 같이 왔는가.”
“그걸…어떻게 아십니까.”

시녀가 놀란듯 눈을 크게 떴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방안에서 쟁쟁히 울려나왔다.

“경성에서 내려오신 도련님의 정인이시다. 예의로 찾으시는 분을 어찌 문밖에서 가로막는단 말이냐.”

서은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고개를 들어 방문을 마주했다. 뒤이어 방문이 활짝 열리며 전보다 훨씬 날카로운 나치야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보는 순간 나치야는 몸을 흠칫했다. 서은은 나치야에게 고개를 숙이며 쓸쓸하게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임…도련님?”
“네…바로 접니다.”

서은은 머리를 들고 나치야의 경악어린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쓸쓸한 미소가 한결 깊어졌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찾아왔습니다.”

……

“혹 아황과 녀영의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나치야가 따라준 차를 한모금 마신 후, 옅은 미소를 머금고 서은이 말했다. 그녀의 눈부신 자태에 나치야의 눈빛이 암담해졌다. 나치야는 서글픈 기색으로 그녀를 보다가, 그녀의 정교한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순황제때 두 비(妃)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에 우거진 깊숙한 대나무숲을 바라보았다.

“순제가 죽자 아황과 녀영이 뿌린 눈물이 대나무에 얼룩이 졌다고 하죠.”

그래서일까. 저 곧고 푸른 대나무에 얼룩무늬가 생긴 것이.

“남방에 있어야 할 상비죽(湘妃竹)이 이런 곳에 있다니 참 기이하군요.”
“저도 저 대나무가 귀하다 들은적 있어서 총병부에 올때마다 유독 이곳에 머물기를 원하였습니다.”

나치야의 눈빛에 잠시 쓸쓸한 상념이 스쳤다. 그녀는 서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게 궁금한 것이 참으로 많으실테지요. 누르하치는 어떻게 하고 버젓이 이 총병부에 와있냐고…왜 제손으로 버리고 갔다가 이제 와서 다시 빼앗는 거냐고…”

한없이 슬픔에 차있는 어조였다. 금세 물기가 배어나올것 같은 말이었다. 서은은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윤아야…네가 어떻게 해도, 난 널 내버려둘수가 없어.

나치야는 대나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서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아십니까.”
“당신의 아버지는 분명 이 모든 것을 죽음으로 위협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휘둘리는 것마저 똑같구나…현세와 전생의 네 모습은.

“당신은 그 어떤 이유로 누르하치에게 실망을 하고 도륜성으로 돌아갔으나 이번의 도륜성 일로 다시 그에게 절망을 했을테지요…어차피 이제 그에게 돌아가는 길은 영영 없을테고, 당신 목숨 하나 어떻게 되는 것도 두렵지 않으나…단 한가지, 홀로 남은 아버지가 걱정되실 테지요.”

그녀의 말에 나치야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당신은 자포자기에 빠져 아버지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를 원했고, 아무 것도 위하지 못할바에는 가족을 위해서 당신 남은 인생을 걸어보겠다는 생각을 했을테지요.”

서은은 머리를 숙이고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여자의 일생 다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제게 이런 말을 했던 당신입니다. 그러니 분명 이런 선택을 할 것입니다.”
“저를…미워하십니까. 저는 도련님에 대한 임도련님 마음을 알면서도…”
“제가 제 일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제게 당신은 뼈에 시무치는 정(情)적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단순했으면 좋으련만. 나치야의 눈에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흐르고 있었고, 서은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어쩌면 이게 바로 우리 명이 아니겠습니까. 아황과 녀영을 효칙하라는, 하늘의 뜻이 정녕 이러하다면…”

하늘의 뜻…하늘의 뜻따위에 휘둘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이것이 최선인 것을.

나치야의 처소를 나선 서은은 잠시 몸을 휘청했다. 간신히 몸을 가누고 연꽃이 만발한 호수가에 이른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하얀 구름이 떠있는 화창한 봄날씨었다. 바람속에 은은히 열기가 섞인 것을 보아 이제 곧 여름이 올 계절인 듯 했다.

문득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한참 머리를 든 채 그것을 눈안으로 밀어넣었다.

“잘한거야…이렇게밖에 할수 없잖아.”

어쩌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여백의 비운을 막으려면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만일 그녀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었다 해도, 그녀가 돌아간 다음 누군가가 곁에 있게 되면 이생에 홀로 남겨진 그에게 위로가 될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이런 생각은 나치야가 누르하치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후부터 더 확고해졌다.

“나치야…사실 오래전부터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역사에 남겨진 누르하치의 여러 부인 반열에…유독 네 이름이 없었어.”

그녀는 호수가에 서서 멍하니 물속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넌…누르하치가 아닌 그 사람의 여인으로 살았는지도 몰라. 염라대왕의 말이 맞아…그 사람의 안위를 위해서라면…난 기꺼이 내 욕심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어.”
“왜 이렇게 서있느냐.”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오자 그녀는 화뜰 놀라 옆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가를 확인하자 그녀는 금세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웠다.

“…예서 뭐하십니까.”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뭐하고 있어. 이젠 가서 아버님을 뵈어야지.”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멈췄다. 그리고는 잠시 그녀를 훝어보다가 문득 두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어쩌면 이리도 고울까…”
“어쩌면 이리도 달콤한 말만 골라하실까.”

그녀의 가벼운 핀잔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안되겠다. 사람 불러서 여길 치워야겠어.”
“네?”
“저 연꽃들 말이야. 감히 그대 시선을 뺏어가다니…”
“그건 또 무슨.”
“아까부터 연못만 보고 날 한눈도 쳐다보지 않으니 말이다.”
“형님…”

그녀는 혀를 차며 얼굴을 돌려버렸다.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웃음띈 목소리가 그녀의 귀가를 간지럽혔다.

“집에 오면 이젠 매일 당신 얼굴 보고 살수 있겠다 하였거늘.”
“지금 이렇게 보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가 그의 선연한 눈빛과 마주치자 그만 시선을 내렸다. 조금 더 보고있다간 자신의 불안한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였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그는 손을 내밀어 천천히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

그녀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듯 살짝 미간을 구겼다. 문득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뒤이어 그의 얼굴이 가까워오자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면서요.”

그의 얼굴에 잠깐 허탈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래. 가서 인사 드리고 혼례도 말씀드려야지.”
“저어…오늘은 저 혼자 가서 인사 드리고…혼례는 다음날 말씀드리는 건 어때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두손으로 옷 앞섶을 매만졌다. 다행히 그는 눈치채지 못한 듯 흔쾌히 허락했다.

“하긴…당면에서 혼사를 거론한다는 건 불편할수도 있을터. 이 일은 내가 따로 아버님과 상의할테니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거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그녀는 그에게 머리를 숙여보인 후 몸을 돌려 대청쪽으로 향했다. 대청에 들어서자 이성량 혼자 서안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앞으로 몇걸음 다가선후 정중히 만복의 예를 올렸다. 이성량은 그녀의 행동에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저어…공주마마…”
“아버님…예전처럼 자식으로 대해주시옵소서. 소녀와 황궁의 인연은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녀의 말에 이성량은 뭔가 생각난 듯 그녀를 주시했다.

“여백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혼례는 섭섭치 않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여기는 황궁에 미치지 못하오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미 결심을 내리고 왔은즉 아버님께서 자식으로 받아만 주신다면 베옷에 푸성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성량을 보았다. 이성량이 말했다.

“혹 제게 따로 무슨 말씀을 하시려 온 게 아니신지.”
“역시 아버님이십니다.”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실은 아까 인사를 드리러 오다가 니칸외란과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이성량은 놀란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후 그의 눈빛에 놀라움이 가셔지고 잠깐 쓸쓸한 기색이 스쳤다.

“헛된 고민을 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소녀 그 시름을 덜어드릴수 없어 오히려 안타깝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성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한참 그녀를 주시하다가 신음 비슷한 한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정중한 태도로 이성량에게 허리를 굽혀보였다.

“제게 만전지책이 있으니 아버님께서 한번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혹…제가 생각하는 그것입니까.”
“그러하옵니다.”

이성량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 되면 공주마마께 너무 불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제게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대사를 그르칠수 있겠습니까. 하오면 반생을 요동의 안정을 위해 몸을 바치신 아버님께선 항상 공평한 일만 받아들이셨습니까.”

그녀가 대답하자 이성량은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의 심명대의는 칠척 남아라 해도 미치지 못할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제가 여기 생활에 적응할수 있도록 미리 알고 가르치신 건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부디 걱정 마시길. 그녀는 작게 입속으로 되뇌였다.

그녀의 말을 듣자 이성량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제가 가르친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공주마마께 폐가 되도록 니칸외란에게 이런 타협까지 해야 한다니 송구하여 머리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서은은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웃기만 했다. 돌아갈 일은 언제가 될지 몰라도, 눈앞의 이 사람들을 도울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다행한 일이었다. 이성량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공주님의 뜻이 여럿을 아우르는 생각이긴 하나, 절대 여백 그 아이를 통과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문득 날카로운 그 무엇에라도 찔린 듯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직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올때까지 후원 연못 호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이성량에게 말했다.

“형님은…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대청을 나와 후원으로 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터덜터덜 힘이 빠져있었다. 길에서의 노곤이 가셔지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는 일이었다.

후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여백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지도 못한 채 얄밉도록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날이 저물어 어느덧 달빛이 연못위에 넘실거렸고, 그는 그녀가 다가오기 바쁘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왜 이제야 오느냐.”

그에게 끌려간 곳은 달빛이 환히 내리드리운 호수가의 정자였다. 전에 신충일이 왔을때 경합을 진행한적 있었던 그 정자였다. 정자위로 올라간 그녀는 잠시 걸음을 주춤했다. 정자위 상에는 간소한 주안상이 갖춰져 있었고, 그는 그녀를 끌어다 상앞에 눌러앉히고 그녀와 마주앉았다.

“이건…”
“이젠 곧 식구가 될터인데 이런 간단한 의식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웃다가 왠지 울컥 하는 느낌에 머리를 숙였다. 그가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황궁의 산해진미와는 비길수 없지만…”
“아니에요…”

그녀는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이토록 마음을 써주시니…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녀앞의 술잔에 술을 그득 채워주었다.

“곡주여서 몸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올롱히 뜬 눈을 보다가, 그는 품속에서 옥적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숙여 나직히 운을 뗐다. 바람이 그의 도포 자락을 가볍게 흩날렸고, 그녀는 그의 표연한 모습에 잠깐 정신이 팔렸다. 한곡조 불기를 마친후 그가 머리를 들자 그녀가 말했다.

“춘추시기 유백아와 종자기의 고산유수(高山流水).거문고 소리를 이리 옥적으로 연주하니 놀랍습니다.”

그는 옥적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로 다가온 그의 눈동자에 그녀의 물기어린 눈동자가 어렸다.

“유백아와 종자기의 지음을 만난 이야기는 세간에 널리 알려졌지만, 종자기가 죽은후 유백아가 천하에 지음이 없다고 한탄하던 그 뒤의 이야기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뒤의 이야기라니요?”
“유백아는 종자기가 자신의 지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줄곧 자신의 곁에 있은 부인이 종자기 못지 않게 거문고에 정통했을지는 알지 못했지. 어느날 유백아의 부인은 종자기의 무덤 앞에서 물흐르듯 고산유수를 연주한 다음, 그것을 보면서 멍해 앉아있는 유백아한테 말했다.”
“…”
“천하에 유백아는 한사람뿐이 아니고, 종자기도 한사람뿐이 아니라고.”
“…”
“지음을 찾지 못한다고 한 것은, 어쩌면 자기 마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그 어떤 의지가,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줄곧 기다렸던 순간이지만, 또 그녀가 두려워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공명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수 없은 건, 나 또한 자신의 마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
“하지만 지금은…”
“잠시만요!”

그녀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밖으로 내뱉었다.

“먼저 할말이 있어요.”

그녀는 그의 의중을 알아챘다. 그의 고백을 이렇게 받아버려서는 아니 된다. 아직은…돌아가고 싶지 않다.

“…”

그의 의혹어린 눈을 보며 그녀는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반응에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고, 그는 한참이나 그녀를 보았다.

“아직 무엇이 그리 두렵느냐.”
“…”
“그동안 당신 마음 몰라준 것에…그 마음 알면서도 모른척 한것에…당신 마음을 확인하고도 마음고생 시킨 것에…지금 내게 보복하는 건가. 차라리 그런 거라면…”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에게 곤혹스러워하는 그에게 그 어떤 말도 할수 없는것이 안타까웠다. 그녀는 그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라의 흥망엔 필부도 책임이 있다 하였습니다. 지금 시기가 어수선할 때에, 이런 개인적인 일로 총병부 식구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진 않아요.”
“당신 뜻이 칠척남아를 능가하는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당신에게 부족함이 없게 격식을 차려주고 싶은 걸…”
“아버님께서 니칸외란의 협박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일은 나중에…”

그녀가 하도 진중한 태도로 하는 말에, 그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니칸외란의 치졸한 협박따위에 우리가 흔들릴상 싶은가.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나치야는…어찌하려구요.”

드디어 이 말을 내뱉었다.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리도 마음이 아플까.

그녀의 얼굴로 향하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그리고 주변의 공기도 얼어붙었다. 싸늘한 바람이 정자위를 감돌아 그녀의 몸을 스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런 그를 향해 또렷이 말했다.

“나치야를 저리 방관할수 없습니다. 형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전 형님곁에 더이상 머물수 없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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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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