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또 하나의 봄, 사계절이 분명한 이 땅위에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자금성, 자주색 기와와 붉은 벽이 어우러져 황실의 고귀함과 장엄함을 연출하는 이곳, 자신의 전생이  태어나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낯설고 생경하게만 여겨지는 이곳에서 서은은 명의 두번째 봄을 맞았다. 느린 바퀴를 굴리는 커다란 황금빛 수레가 그녀를 싣고 천천히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앞장을 선 내시들과 뒤를 따르는 궁녀들의 옷자락이 봄바람에 하늘하늘 나붓겼다.

“잠깐 멈추거라.”

문득 울려퍼지는 청아한 목소리에 수레가 멈춰섰다. 서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느슨하게 쪽을 진 머리타래가 어깨위로 흘러내려 그녀의 완숙한 자태를 한결 우아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도, 그녀 눈동자에 가득차있는 우수의 느낌은 지울수 없었다.

“정귀비마마께서 웬 일이십니까.”

그녀는 수레에서 몸을 일으킨 후 살풋이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인사와 더불어 봄바람에 미소를 머금은 정귀비의 얼굴이 찬연하게 빛났다. 정귀비는 앞으로 몇걸음 다가와 머리를 쳐들고 그녀를 보았다.

“공주마마께서 어디로 행차하시는 길인지요.”
“어마마마께서 부르시어…”
“마침 잘 되었사옵니다. 소첩 또한 영화전으로 가는 길이오니 동행하심이 어떻겠사옵니까.”
“네에…그럼.”

그녀가 담담히 머리를 끄덕이자 정귀비는 궁녀의 부축을 받아 수레에 올랐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은 후 부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옥체에 완연히 표가 나옵니다.”
“수개월이 넘었사오니 어찌 표가 나지 않겠습니까.”

서은은 자신의 배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은 후 고개를 들어 정귀비의 시선을 마주했다.

“마마께서 어찌 영화전으로 납시옵니까.”
“아…그게….”

정귀비는 문득 낯빛을 흐리더니 덤덤히 수레앞만 볼뿐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괜한 것을 물었다 싶어 서은도 입을 다물었다. 이태후와 정귀비가 사이가 좋지 않은것은 이 높다란 궁궐 담벽을 넘어 널리 민간에까지 파다하게 전해진 일이었다. 궐에 돌아온지 두달이 지나도록 그녀는 이태후가 정귀비를 부르는것은 물론, 정귀비가 이태후에게 문후를 가는 것도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는 궐안의 이런 시비보다는, 머나먼 요동의 길어진 전장이 마음에 걸렸다.

“부마께서는 소식이 없으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정귀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알릴락말락 걱정이 스쳤다.

“그런 호칭이 불가합니다. 그냥 이장군으로 칭하여 주십시오.”
“그래도 그분은 공주마마의…”
“이번에 염치없이 궐에 돌아왔지만 세간에선 이미 잊혀진 신분입니다. 제게 공주라는 호칭은 과분합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정귀비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어찌 그토록 초연할수 있사옵니까. 부디 제게도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귀비마마께서 어이 그런 망극한 말씀을…”

그녀는 의아한 눈길로 정귀비를 보았다. 죽는 날까지 황궁에서의 명분과 지위를 위해 싸웠던 여인…그런 여인이 지금 자신에게 이런 나약한 질문을 하다니..그녀는 대답이 구구해졌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입니다. 의욕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삶에 대한 열정이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바라지 않는것이 아니라, 바랄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귀비는 혼잣말처럼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러더니 머리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래도 공주마마께옵선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고 계십니다. 그것은 소첩이 오매불망 바라던 일이기도 하구요…”

햇살을 등지고 영화전의 전각이 그녀들의 눈안에 들어왔다. 수레가 천천히 멈추어지고, 영화전 마당의 보리수가 바람에 은은한 향기를 풍겨왔다. 서은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고 수레에서 내렸다.

……

“소첩 어마마마를 뵈옵고 문후 드리옵니다.”

이태후의 근엄한 시선이 서은을 거쳐 정귀비의 얼굴에 와 멎었다. 서은은 이태후에게 가볍게 만복을 하고 궁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큰 예를 올리고난 정귀비는 이태후가 아무 말도 없자 살짝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난감한 시선이 자신에게로 오자, 서은은 이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름을 받고 오다가 걸음을 같이하였습니다.”
“여긴 어인 일인가.”

서은의 말은 들은척도 하지 않고 이태후가 정귀비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정귀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부탁이 있어 찾아왔사옵니다.”
“이 늙은 몸이 무슨 부탁을 들어줄수 있다고 그러시는가.”

여전히 싸늘한 이태후의 목소리는 한치의 드팀도 없었다. 곁에서 서은이 오히려 민망해질 정도였다.

“어마마마…우선 자리라도 권하심이…”
“영화전이 좁아 자리가 마땅치 않음을 용서하게. 그대 궁전이 여기보단 넓을터니 어서 돌아가게나.”

이태후의 말에 정귀비는 눈을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 언뜻 물기가 어렸다.

“방이 넓어 무엇하리오까. 독수공방의 처연함을 어마마마께서 헤아려 주시리라 믿고 찾아왔습니다.”
“귀비는 금상의 용체가 걱정이 되지도 않는가. 어찌 이 늙은 사람앞에서 독수공방을 입에 담는단 말인고.”

이태후의 눈길이 한결 예리해졌다. 정귀비는 얼굴을 확 붉혔으나 여전히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하오면 어찌하리까. 궐에 돌아온지 몇달이 지나도록 소첩 폐하의 용안을 한번도 뵙지 못하였으니 자연 마음에 송구하온지라…”
“금상의 환후가 경하지 않으니 신중을 기해야 하네. 그만 물러가 있게. 귀비의 걱정하는 마음은 이 사람이 전해주겠네.”

서은은 머리를 숙이고 궁인이 가져온 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만력의 병은 이태후의 말대로 중하기는 중한 모양이었다. 정귀비는 물론 그녀까지도 궁에 돌아온지 두달이 넘도록 만력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규화보전”의 위력은 강호에 떠돌던 소문보다 훨씬 더 강할수도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대로 물러갈순 없사옵니다. 소첩 꼭 폐하를 뵈어야 할 것입니다.”

정귀비는 뭔가 단단히 결심하고 온듯한 기세로 이태후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강경해졌다.

“폐하께서 모든 조회를 물리치시고 어마마마께서 수렴청정을 다시한다 들었사옵니다. 자고로 여인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소첩 또한 이런것을 물을 것이 못되오나, 되돌이켜 생각한즉 어마마마께서도 일국의 국모이기 전에는 필경 황실 여인의 신분이라…”
“무엄한지고!”

서슬 푸르게 정귀비의 말을 자르며 이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귀비는 몸을 흠칫했고 서은은 저으기 놀라서 이태후의 거동을 보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궁인이 뭔가를 들고 들어오자 이태후는 고개를 돌리고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 했다. 그리고는 서은을 향해 부드럽게 안색을 풀었다.

“근자에 몸은 어떠하냐.”
“네, 기거에 별다른 지장은 없습니다.”

서은은 궁인이 들고 들어온 그릇을 보며 이태후의 물음에 대답했다. 이태후는 손을 내밀어 궁인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든 후 그녀를 보며 자애롭게 웃었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인자한 모습이었다.

“네 몸을 호전케 하는 보신약이다. 요동에서 모진 병을 앓고 왔으니 몸이 허하다 하여 어의에게 지어오라 일렀다. 네게 보내주면 어린 궁녀들이 약시중에 무심하기로 오늘 여기로 불렀느니라.”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

서은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이태후를 보았다. 후자의 얼굴에 어린 착잡한 기색에 약간 머리를 갸우뚱했지만 그녀는 금세 그 생각을 털어버리고 두손으로 약그릇을 받았다.

“다만 어의보다는 이마두 신부님께 부탁할 걸 그랬습니다. 요동을 떠날때 소주에서 지인을 만난 후 바로 상경하겠다고 하셨는데요. 날짜를 미루어보아 이젠 경성에 오실때도 된 듯 합니다.”
“너를 사경에서 구해주었다는 그 사람 말이냐? 동양과 서양 사람들의 체질이 틀린데 그 사람의 의술이 궁중의 어의보다 더 낫다고 믿는단말이냐?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꼭 그렇게 얕은 의술부터 뽐내고 다니지.”

이태후가 피씩 입꼬리를 올렸다. 어딘가 냉정하면서도 야유섞인 어조였다. 서은은 뭐라 대답할지 몰라 그냥 얼핏 웃어보이고 약그릇을 입에 가져갔다. 이태후의 웃음섞인 눈길이 천천히 그녀를 따랐다. 바로 그때였다.

“탕…”

정귀비의 곁에 서있던 궁인이, 정귀비가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정귀비와 부딪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서은에게 덮쳐왔다. 그바람에 서은의 손에 있던 약그릇이 떨어져서 다들 화뜰 놀라고 말았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궁인이 와들와들 떨면서 이태후의 앞에 부복한다. 정귀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이태후는 한심하다는 듯 그들을 노려보다가 노기띈 목소리로 거칠게 궁인에게 호령했다.

“가서 곤장 20대를 청하거라.”
“네에…황송하옵니다. 소인 바로 가서 대죄하겠나이다.”

궁인이 황망히 영화전을 나서자, 서은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이태후를 보았다.

“어마마마…”
“네가 나설 것 없다. 궁안에서 처신을 바로 하지 않는자들은 반드시 그 죄값을 치뤄야 하느니.”

이태후의 말에 정귀비는 머리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딱해서 서은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분부가 없으시다면 소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약은 다시 달여 처소로 보내겠으니 잊지 말고 복용하거라.”
“네.”

서은은 만복을 하다가 머리를 돌려 정귀비를 보았다.

“일전에 오라버니께서 마마의 처소에 진귀한 명화들이 있다 하셨으니 오늘 구경코자 합니다.”
“아…알겠습니다.”

정귀비는 그제야 눈치를 차린 듯 이태후를 향해 만복을 하였으나 이태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정귀비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서은을 따라 영화전을 나왔다. 수레에 올라 얼마 가지 않았을 때 서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는 왜 그러셨습니까.”

그녀가 던진 말의 무거움에 정귀비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서은은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수레앞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 경거망동 하실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왜 약그릇을 쳐내셨습니까. 설마 어미가 딸을 해한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제가 어찌 감히 그리 끔찍한 생각을…”

정귀비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무어라 할지 모르는 듯 손으로 자신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다만…다만…”
“…”
“다만 사향의 냄새가 나더이다. 그 약에…”
“사향…”

서은은 잠깐 멍해있다가 피씩 웃음을 터뜨렸다.

“난산을 치료하는데 좋은 약이 아닙니까.”
“하지만 유산을 촉진하기도 합니다.”

정귀비의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공기속에 흩어졌다. 그녀는 불안한 시선으로 서은의 옆얼굴을 보았다. 옷소매를 움켜쥔 그녀의 손도 약간씩 떨리는 게 보였다.

“제가…제가 이 몇년동안 몇번 아이를 잃었는지…공주마마께서 아시지 못하니 그러시는 겁니다.”
“그게…어마마마께서…”

서은은 놀란 시선을 정귀비에게 던졌다. 어렴풋한 기억 저편으로 뭔가 떠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우사와 함께 궁을 탈출하려고 자녕궁을 지날때 엿들은 두 궁녀의 대화…그때 그 궁녀가 받아쥔 약도 결국 정귀비가 회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약이였던 것을, 그녀와 우사가 바꿔친 것이 아니였던가.

“어마마마께선…한때 당신의 궁녀였던 왕황후를 위해서, 제가 아이가 있는걸 절대 허용하지 못하시는 겁니다. 폐하의 은총을 받아 회임을 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자는 왕황후의 소생인 주상락으로 정하려고 제 복중의 태아를 무참히…”
“무슨 근거로 그렇게…”

웬지 모르게 이태후의 역성을 들던 서은은, 정귀비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무슨 근거가 필요하겠습니까…제 처소의 궁인들도 다 어마마마의 심복인데…제가 왜 따라다니는 궁인 하나 없이 공주마마의 수레를 막았겠습니까…”
“미안합니다…”

서은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정귀비를 보았다.

“어마마마께선 이 나라의 국본을 튼튼히 하시고자…당신도 원하지 않음에도 어쩔수없는 선택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마마께서 너그러이 헤아려 주십시오.”
“…”
“다만…제 아이까지도 해하려 한다는 마마님의 우려는 기인우천인 듯 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어마마마의 소생이고, 이 아이는 어마마마의 외손자입니다. 어마마마께서 어찌 그런 천륜을 어기는 일을…”
“그럼 제 복중의 아이는 어마마마의 친손자가 아니였던가요…”

어깨를 들먹이며 정귀비가 낮게 오열했다. 서은은 더이상 뭐라 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진정하십시오…마마,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폐하를 뵙고싶습니다.”

정귀비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사람처럼 서은의 옷소매를 잡았다.

“폐하를 뵙게 해주십시오, 아니 폐하가 어디에 계시는지만 알아봐주십시오. 아니 무사한지만 알아봐 주십시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도 오라버니를 뵙지 못했습니다…”

서은의 말에 정귀비의 눈빛이 삽시에 암담해졌다. 서은은 뭔가 생각하다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지휘사님만 계셔도 알수 있을것을…제가 궁에 돌아온 다음 그분도 한번도 입궐하지 않으셔서…”
“…”
“저도 외부와 소식이 거의 차단된 상태입니다. 어마마마께 주청을 드려 몇번이고 궐밖을 나가겠다고 했지만…조용히 조섭하라는 엄명만 내려지실뿐…다행이 조정에 탐마가 간간히 전해주는 요동의 소식마저 없다면 아마 저도 미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미치기 일보 직전입니다…!”

정귀비의 탄식에 서은은 문득 머리를 들었다. 뭔가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그녀는 순간 긴장해졌다. 아닐거라고 부정을 해봤지만 궐에서 만력이 사람들의 눈에 띄이지 않고 지낼수 있을 곳은 딱 한군데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사 역시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점을 미루어봤을 때, 우사는 지금쯤 만력과 더불어 그곳에 같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라버니는 무사하실 겁니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분명 궐안에 있습니다.”

그녀의 대답이 하도 확신에 찼는지라, 정귀비는 안정을 되찾고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믿어도…되겠사옵니까.”
“네, 안심하시고 처소로 돌아가 계십시오. 제가 오라버니의 소식을 알면 바로 궁녀를 보내겠습니다.”

정귀비를 보내고 처소로 돌아온 서은은, 침상옆에 놓여져있는 약그릇을 보자 갑자기 이름못할 피곤함을 느꼈다. 모든것이 미궁에 쌓여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궁에 돌아온 그날부터 그녀는 감금아닌 감금을 당한 꼴이었다. 경성에 같이 불려들어온 이성량은 입궐할 기회조차 차려지지 않아 성안 주막에 머물러 있는 중이였고, 그녀 먼저 상경한 만력과 우사, 봉선은 마치 이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는듯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동의 전선이 무한정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태후를 위수로 한 조정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성량과 그녀는 요동에 돌아가지도, 경성에 남아있기도 딱한 상황이 되어있었다. 궁안의 상황은 더 복잡했다. 만력이 없으면 이 궁궐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것을 알면서도, 정귀비에게는 이태후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태후는 정귀비가 만력으로 하여금 정사에 태만하고 태자를 일찍 정하지 않게 하는것을 알고, 이참에 만력을 감금함으로서 만력과 그녀와의 사이를 철저히 차단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모든 정적을 제거하며 탁월한 정치수완을 펼치는 이태후가, 매사 자신에게 불복하고 거스르는 그녀에 대해서는 대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정귀비의 말대로 사향이 들어있다는 이 약은, 구경 이태후가 딸에 대한 작은 관심일까, 아니면 그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녀는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태후마마께서 궁인을 시켜 보내온 약입니다. 식기전에 얼른 들라 하셨습니다.”

때마침 들어온 령이가 그녀의 사색을 깨뜨리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약그릇에서부터 천천히 령이의 얼굴로 옮겨졌다. 그녀의 착잡한 기색에 령이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옵니까. 요동에 안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오늘 너무 피곤하셨는지요?”
“령아…”

그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그래도 이 아이가 있다. 모든것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이 살벌한 궁안에, 주위 모든 인간관계가 오히려 위협이 되는 이 삭막한 세상에 그래도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이 아이가 있다.

“네게 가만히 부탁할 일이 있구나. 다만…이 일이 성사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목숨이 위험해진다.”

……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양심전에…”

서은의 말이 놀라웠는지 령이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는 령이를 향한 서은의 목소리가 공기속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그곳을 내놓고는 계실수 있는곳이 없어. 그때 나타나지도 않은 호교법왕을 사로잡을수 있은 건, 양심전안에 밀실이 있기때문이었어. 그 밀실의 구조는 오라버니와 지휘사님이 잘 아실테고.”
“그렇다면 왜…”
“왜 나오지 않는가고? 이유는 둘중 하나, 하나는 때가 되지 않았기때문이고, 또 하나는 나올수 없기때문이야.”

령이는 그녀의 말을 되새겨보다가,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께서 이리 심각하게 말씀하시니, 아마 두번째 가능성이 많겠군요.”
“이 또한 내가 네게 부탁하고싶은 일이다.”

서은은 약그릇을 들어 천천히 옆의 차반에 약을 쏟았다. 그리고는 빈 그릇을 령이에게 넘겨주었다.

“이걸 가지고 영화전으로 가거라. 약을 다 복용했다고 이르고, 오는 길에 양심전에 들려 오거라.”
“그것뿐입니까.”
“아니, 양심전 문앞에 금의위들이 지키고 있을테니, 그들에게 이것을 주고 지휘사님을 탐문해보거라.”

서은이 넘겨주는 은덩이를 받은 령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이해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궐안의 금의위 무사를 불러 직접 물어보시면 될것이 아닙니까? 왜 하필 양심전의…”
“이것이 내가 위험하다고 하는 점이다. 지금 궐안의 모든 금의위가 어마마마의 수중에 있을텐데, 양심전을 지키는 금의위가 어마마마에 대한 충성도를 확인해보고 싶어서 그런다.”
“확인해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궐안의 모든 금의위가 어마마마의 지시를 무조건 따르고 충성한다면 더이상 손쓸 기회가 없지만, 양심전의 금의위 무사가 그러하다면 그 허를 타서 알아볼수도 있고, 정 안된다면 궐밖에 있는 아버님의 힘을 빌수 있다.”

령이는 그래도 머리를 기웃했다.

“소인 아둔하여 아직 공주님의 뜻을 모르겠사옵니다.”
“몰라도 된다. 우선 그리 하고 오너라. 다만 기억할것은 양심전의 금의위 무사가 어떤 질문을 해도, 기민하게 둘러대야 한다. 너는 묻기만 하고 답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은덩이를 주고 바로 돌아오너라.”
“네.”

령이가 나간 다음 서은은 잠시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녀는 이태후의 전횡이 무서웠다. 그리고 이대로 만력을 찾지 못할까 두렵기도 했다. 만일 그리 된다면 후세에서는 만력이 태정을 한것으로 알고있을 것이고, 지금부터 명의 모든 것은 이태후가 좌우지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요동총병 가문의  몰락과 이여백의 자결은 결코 불가능한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입술이 바싹 말라드는 감을 느꼈다.

“아직 취침전이냐.”

문득 문밖에서 들려오는 이태후의 목소리에 그녀는 화뜰 놀랐다. 령이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이태후가 먼저 들이닥친 것을 보아 무슨 낌새를 챈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마중나갔다.

“어마마마께서 이 늦은 시간에 웬 일이십니까.”
“걱정이 되어 왔느니라. 령이는 점점 철이 없구나.약그릇을 갖다놓고 간지가 언젠데 아직도 길에서 늦장을 부리다니.”

이태후는 궁시렁거리면서 궁인의 부축을 받아 서은의 방안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그녀가 권하는 자리에 앉아 뚫어지게 그녀를 보았다.

“아직도 낮의 일이 마음에 걸리느냐.”
“네?”
“정귀비의 일 말이다.”

이태후가 정귀비에 대한 말을 꺼내기는 그녀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시선을 들었다.

“자고로 고부사이는…”

그녀는 잠깐 멈추었다가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어마마마로서는 귀비마마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세상에 이유 없는 미움이란 없다.”

탄식처럼 이태후가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는 이태후의 눈빛이 왠지 묘했다.

“하지만 이유 없는 사랑은 있지.”
“그런 사랑은 있을지 모르오나, 때론 그 사랑의 방식이 사람을 질식하게 할수도 있습니다.”

이태후의 눈섭이 푸뜰했다. 잠시 그녀의 눈에 스쳤던 따뜻함이 거두어지고, 곧 냉랭한 기색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서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태후를 마주했다. 어쩌면 일부러 이태후의 화를 돋구느라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로서는 이태후를 마주하고 있는 모든 시간이 그토록 불안하고 어색했다. 서안공주에겐 생모였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자칭 어머니라 칭하며 요즘따라 그녀가 적응되지도 않는 관심을 보이고있다.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친아들을 감금했을지도 모르는 이 여인이, 자신의 친딸이라 하여 과연 자비를 베풀까.

“참으로 차거운 말이구나. 네가 곁을 자주 지켜주지 못했다고 그러느냐.”
“글쎄요…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로선 어마마마보다는 오라버니가 더 가까운 건 사실입니다.”

그녀의 여전히 냉담한 말에 이태후는 침묵하더니 드디어 흥하고 냉소했다.

“그외에도 네 서방과 시아버님이 있겠지. 나같은 건 네 인간관계중에서 순번이나 있는지 모르겠구나.”
“어찌 갑자기 그런 순번에 연연해 하십니까. 이미 어마마마께선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마도 상대하기 귀찮아서 그랬을 거라 그녀는 생각했다. 령이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데 이태후는 자리에서 일어날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던지는 말에 어지간히 상처를 입은 얼굴로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실낱같은 것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이태후의 다음 말이 그녀를 마음을 한결 식어버리게 했기때문이다.

“모든것을 손에 넣은 내가, 자식들의 마음은 얻지 못하였구나.”
“그래서 순종을 강요하시는 겁니까.”
“강요?”
“그 강요가 저희로 하여금 점점 멀어지게 한다는건 정녕 모르시옵니까.”

문득 이태후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바람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뒤이어 문밖으로 나서는 이태후의 얼굴이 험악했다. 그런 얼굴로 잠시 그녀를 돌아보며 이태후가 딱딱하게 말했다.

“때가 되면 다 알게 될것이다. 내가 한 모든것들이 구경 무엇을 위해서임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것을 강요하고도, 그것이 우리를 위했다고 자기합리화 하는 거야.”

이태후가 가버린 다음에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이 시간대에서 만난 사람들중 제일 독특하고 영악한 인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태후뿐만이 아니었다. 정귀비나, 만력이나, 우사나, 봉선이나…지어는 령이까지 모두 자기 나름의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었다. 자신의 개성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들…그런 사람들의 운명을 지켜보는 자신의 운명은 또한 어떤 것일까…문득 크다란 비애가 느껴졌다. 그들을 지켜볼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꾸려고 해도 항상 뭔가에 가로막히는 느낌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령이가 허둥지둥 방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됐느냐.”

그녀가 급히 묻는 질문에, 령이는 숨을 고르게 하더니 손을 내저었다.

“그들이 알려주지 않사옵니다.”
“그걸 묻는게 아니다. 그들의 표정이 어떠하더냐.”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령이는 한참 기억을 더듬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당황해 하더이다. 왜 그분을 찾느냐고 하기에, 일개 궁녀가 지휘사님을 찾으면 무슨 일이겠냐고 반문해버렸더니…그제야 더이상 물어보지 말라고 하더이다. 괜히 은덩이만 떼웠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령이는 한참 지나서야 그런 그녀가 의아한 모양이었다.

“공주님…처음부터 제게 그들의 표정을 알아오라 시키셨다면, 얼굴을 자세히 볼 걸 그랬습니다.”
“아니다. 넌 순진해서 표정관리가 안돼. 그 사람들에게 들키기 쉬워서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그럼…이젠 어떻게 하시렵니까.”
“내가 준비해둔 것이 있다.”

서은은 몸을 돌려 술주전자를 령이에게 넘겨주었다. 령이는 이번에는 묻지 않고 그것을 받았다.

“일단 그들의 얼굴은 익혔으니, 잠시후 번을 바꾸기전에 가서 이것을 주거라. 은으로 안된다면 술로 입을 열게 해야지. 할수 있겠느냐.”
“네.”
“독한 술이니 금방 취할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맡겨만 주십시오. 이보다 더 위험한 일이라도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다 해드리겠습니다.”

령이가 비장한 기색으로 몸을 돌려 나가자, 그녀는 서둘러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양심전으로 향했다. 먼발치에서 령이가 두 금의위 무사에게 한참 뭐라 말하더니 술잔을 넘겨주는게 보였다. 두 무사는 서로 마주보다가 목을 젖혀 술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바로 비칠거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령이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당황해하지 말아.”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령이의 뒤에서 말하자, 령이는 거의 울상이 되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게 독하긴…독한 술인가 봅니다.”
“몽혼약을 탔어.”
“네?”
“요동을 떠나올적에 얻은 약이다. 네가 티가 날가봐 술에 약을 넣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공주님~~~”
“쉿.”

그녀는 주의를 준 후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고 다시 령이에게 말했다.

“넌 이 부근에서 망을 보거라. 이상이 있다면 내게 신호를 줘야 한다.”
“어떤…어떤 신호를 하면 되겠습니까.”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거라.”
“공주님…”

령이는 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얼굴이었다.그리고는 발을 구르다싶이 하면서 말했다.

“차라리 제게 위험한 일을 맡기십시오. 고양이 울음소리를 어떻게 내겠습니까…”
“그렇다고 궐안에 있지도 않은 강아지 울음소리를 내겠느냐.”
“그…그건 더…”
“잠시뒤에 보자.”

그녀는 령이의 어깨를 다독인 후 몰래 양심전 안으로 잠복해 들어갔다. 전에 왔던 곳이어서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전에 우사와 “규화보전”을 발견하던 서안앞까지 오자, 문득 서안뒤에 세운 용을 새긴 병풍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저것이 있었던가…”

그녀는 서안을 돌아가서 그 병풍을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별로 특이해보이진 않는 병풍이었다. 손으로 쓸어보았지만 딱딱하기만 할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손이 용의 눈을 스치는 순간, 드르륵 소리와 함께 병풍이 한쪽으로 치워졌다.

“아…”

병풍에 가려져있던 문이 그녀앞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막상 예상했던것이 현실이 되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려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손으로 가만가만 그 문을 밀었다. 문은 태산처럼 끄덕도 하지 않았다.

“안되겠다. 사람 불러야겠어.”

그녀는 그만 체념을 하고 병풍을 원위치한 후 몸을 돌려 양심전을 나섰다. 조심스럽게 대문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얼굴에 비춰지는 환한 불빛에 그녀는 급히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등불이 휘황한 가운데 이태후의 추상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전을 때렸다.

“당장 저 둘을 영화전으로 끌고가거라.”
“공주님…”

령이의 울음섞인 목소리에 서은은 팔을 내렸다. 금의위 무사들에게 꽁꽁 결박된 령이가 처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이태후의 만행에 치가 떨렸다. 오늘 하루종일 마음을 졸이고 유난히 움직임이 많아서인지, 느닷없는 현훈증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맥이 풀린 듯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사에 참여했지만 정사를 어지럽히지 않았다고? 이제 와서 보니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미화한거네요. 정말 자희태후(慈禧太后)보다 더하면 더했지…”
“뭐? 뭐라고 했느냐!?”

이태후가 흠칫 몸을 떨며 그녀를 향해 큰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이태후에게 말했다.

“다 제가…시킨 일입니다. 저 아이는 놓아주십시오.”
“공주님…”
“어마…마마…제게 남은, 당신에 대한 마지막 한가닥 연은 끊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부디 저 아이만은…놓아주십시오.”
“내가…네게는 저 아이만도 못하단 말이냐.”

아주 무연한 목소리로 이태후가 말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태후의 눈빛이 암울한 빛을 띄었다.

“왜…다들 이러느냐.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구경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다들 이러느냐.”
“글쎄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피곤은 걷잡을수 없이 몰려왔다.

“국모로서 당신은…잘못한것이 없지만…어머니로서 당신은…실격입니다. 당신은, 어머니같지 않아요.”
“데려가서 영화전에 감금하거라.”

이태후가 손을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안에, 이태후의 냉정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하지만 몸을 돌리기전 이태후의 눈가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빗본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알고있는 이태후는, 울지는, 울어서는 안되었다. 자신과 친자매처럼 지내던 이성량의 부인, 이여백의 어머니를 배신하고, 유왕의 정부인도 아니면서 일약 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때부터 이태후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태후가 그닥 애틋한 감정도 없는 자신에게 눈물을 보이다니…뭔가 더 생각하려 했지만 머리가 욱신거려 서은은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이대로 가면 되겠습니까. 자성태후마마…”

궁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서은이 물었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곧 몸을 돌려 미리 대기시킨 수레에 오르면서, 그녀는 이태후가 머리를 가로젓는 것을 보았다. 뒤이어 멍하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태후의 눈에 또 한번 투명한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네가…네가 뭘 안다고. 설마? 아니, 아닐거야…”

그녀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남이었다. 마음이 가지 않는 걸 그녀도 어쩔수 없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지금 어딘가에 감금당해있을 만력 또한, 이런 이태후에게서 추호의 모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슬픔으로 가득 찬, 강력하게 부정하는 그 눈빛은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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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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