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전군을 끌고 우사가 출발한 후 서은은 이여백과 작별하고 말에 올랐다. 그녀의 어두운 표정과는 유달리 달리 맑게 개인 날씨었다. 후군을 거느리게 된 이여백이 걱정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원외님이 오시길 기다려 당신은 나랑 같이 가지.”
“중군을 통솔할 사람이 없습니다.”
“딴 사람한테 맡기면 되니까 그만 고집 부리고…”

문득 그녀가 손을 들어 이여백의 말을 중단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군졸이 이여백의 장군기를 그녀앞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어 자신의 뒤에 따르는 군졸에게 넘겨주고는 이여백을 보며 웃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면 다들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오히려 표적이 된다는 생각이 드는군.”

이여백이 피씩 웃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들었다. 유난히 흰 구름송이가 하늘을 가로질러 유유히 흘러간다. 지금까지는 모든게 평화롭다.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글쎄요, 그렇다면 제가 손해지만.”

다시 고개를 숙인 그녀앞으로 이여백이 뭔가를 내밀었다. 그녀의 행장이었다.

“빨리 가지 말고 종림앞에서 기다려. 거기까지만 뒤를 끊고 중군과 후군을 통합할 것이니.”

그녀는 말없이 행장을 받아든 후 그의 준일한 얼굴을 보았다. 종림…종림…림(林)이 끝나는 곳, 정녕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게 끝날수도…그리고 만일 그녀의 예감이 틀림이 없다면 그들은 결코 헤투알라성 성곽을 무사히 벗어나지 못하리라.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여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참담한 미소였다.

“그럼 전 먼저…가보겠습니다.”
“잠깐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더이상 부르지 마라, 이렇게 떠나는 게 아쉬워질수도 있으니까.

“총병부로 회군한 후 산서로 갈 것이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꼭 마치 그녀의 확답을 받기라도 한듯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산서라면 이여송이 있는 곳이 아닌가…천충…그들의 아이.

그녀의 옷깃 사이로 차거운 기운이 흘렀다. 모든것이 눈앞으로 느리게 흘러갔다.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모든 것들이…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러, 지금 그녀는 그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아이의 근황을…들으셨습니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 싶었다.

“형님이 데려가셨다면 준조나 응조처럼 아껴주실것이다. 이젠 이 못난 동생이 데리러 갈 것이라고 형님께 기별을 넣었다.”

그녀는 묵묵히 말머리를 돌렸다. 역사에 이여송의 아들로 남아야 하는 아이…만일 그 아이를 데려온다면 또 어떤 후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잠깐 이름모를 공포가 그녀의 가슴을 스쳤다. 그런 그녀의 무거운 기색을 그가 줄곧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종림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목이 메어왔다. 그녀의 말에 태양처럼 밝은 얼굴을 하고있는 그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했다.

말을 재촉하면서 그녀는 낮은 한숨과 함께 하늘을 보았다. 햇살이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훈훈한 바람도 그녀의 옷깃을 맴돌았다. 그녀는 이 모든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했다. 염라대왕은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그전에 미리 손을 써야 했다.

한참 말을 달린 후 뒤를 돌아보니 흐릿한 시선안으로 그의 절륜한 모습이 오롯이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 지난후 말이 굽인돌이를 돌자, 흘러내린 눈물때문에 그것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

눈앞에 종림이 어렴풋이 보였다. 전군을 통솔하고 떠났던 우사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 그가 한사람을 데리고 그녀쪽으로 말을 달려 오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이미 오던 길에 길옆 인가에 들려 융복을 갈아입고 투구까지 쓴 뒤였다. 그녀앞으로 다가온 우사는 잠시 어정쩡해 있다가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차리니 이장군과 닮았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공주님을 장군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장군기를 가지고 가는 것이니 그럴듯하게 차림새를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입가에 쓸쓸한 웃음을 띄웠다. 그리고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우사를 보았다.

“전군은 어찌 하고 되돌아 오십니까.”
“다름아니라 저의 부중에서 보낸 사람을 만나 공주님께 아뢰려고 오는 길입니다.”
“부중이라…경성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것이…”

우사는 잠시 말을 중단하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경성에 괴질이 돈다고 합니다. 집사람도 괴질 증상을 보여…”
“봉선이…”

그녀는 놀란 얼굴로 우사를 보았다.

“회임한 몸으로 괴질에 걸려서는 아니됩니다…지휘사님께서 빨리 가보십시오.”
“네, 그러려고 이렇게 아뢰는것입니다. 제가 이리로 올때 경성에 두역(痘疫,천연두)이 돌고있다 하여 불안하던 참이었습니다. 부중에선 이 사람을 보냈고, 이 사람은 먼저 광녕에 들려 총병부를 거쳐 이리로 온것입니다.”

우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와 같이 말을 달려온 사람이 서은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얼굴이 준수하고 어딘가 영민해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소인은 지휘사님 부중에서 보낸 동방씨(东方氏)입니다.”
“마침 잘 오셨소. 봉선의 증세가 어떠하오.”
“부인께선 다행이 어른이라 버틸수 있을듯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아행이…”
“아행?”

그녀가 우사를 보자 우사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봉선이 복중의 태아에게 달아준 태명이옵니다.”

그녀는 머리를 끄덕인 후 고개를 들어 급히 그들을 재촉했다.

“그럼 빨리 가보셔야지요. 전군의 군사는 제게 맡기십시오.”
“네…그리고 궁중에서 소식이 왔는데, 이태후마마께서 령이를 수양딸로 삼아 공주의 호를 내리시고 만후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합니다.”
“령이요?”

서은은 눈을 크게 떴다. 이생은 그녀를 위해 살겠다는 령이…끝내 그 길을 택하였다니…저도 모르게 가슴이 저렸다.

“령이가 스스로 원한…일인지요?”
“네, 이태후마마께서 강요하신 일은 아닌 듯 합니다. 그리고 만후가 위인이 충직하여 령이의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호를 내렸는지요.”

우사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서안…공주의 호라고 하더이다.”

그녀는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이로서 서안공주의 운명은 령이로 인해 달라지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자신의 운명은…

“이곳이 험한 요새지오니 더이상 전진하지 마시고 이장군을 기다려 출발하십시오.”

우사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시선을 들어 그녀를 깊이 응시했다.

“공주님…”
“네.”
“소직 이대로 하직하게 되오면 언제 다시 뵈올지 기일이 없사온데…”
“말씀하십시오.”

그녀는 우사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다는 듯 시선을 들었다. 우사는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주님깨선…명교는 해체되고 명교라는 이름을 더이상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셨지요.”
“…”
“그렇다면 명교 명(明)자를 흩어서, 일월교(日月教)라고 하면 힘을 지킬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휘사님!”

그녀가 언뜻 언성을 높이자, 우사는 흠칫 놀라 두손을 가로저었다.

“아닙니다…소직이 그저 해본 소리입니다. 마음에 담아주지 마십시오. 그럼 소직은 이만…”

우사가 말에 뛰어올라 채찍을 안기자, 그의 가신도 늦을새라 말에 뛰어올랐다. 그들이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멍한 얼굴로 옆의 군졸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방금…뭐라 하였느냐.”
“네?”
“지휘사님의 저 가신 이름 말이다.”
“동방씨라 들었습니다.”
“아이의 아이의 태명은…”
“아행이라 하였사옵니다.”

말고삐를 쥔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만력이 우사에게 새롭게 내린 성씨가 임(任)씨였다는 것이 기억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임아행(任我行)…동방불패(东方不败)…일월교(日月教) 교주…어찌 그 생각을 못했을까? 소호강호(笑傲江湖)에 나오는 규화보전(葵花宝典)은 바로 만력(万历) 년간에 궁궐에서 잃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강호의 피바람을 막기 위해 명교를 해체한 그녀와 만력의 애타는 노력은 이제 곧 우사 한사람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지휘사님…안됩니다…!”

그녀는 문득 목소리를 높여 크게 웨쳤다. 그리고는 까마득히 사라진 우사의 뒤를 쫓아 종림속으로 말을 내달렸다. 막아야 한다…바로잡아야 한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더라도…

하지만 때는 늦었다. 언덕을 지나 숲속으로 뛰어들 무렵, 언덕뒤에 매복한 한무리 군사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말고삐를 팽팽하게 당겼다. 말이 멈추면서 앞발을 들고 울부짖었다. 그속에서 앞장선 우두머리의 외침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 쟁쟁하게 들려왔다.

“저놈이 이여백이다! 오늘 이 종림에서 싸움에서 패한 원한을 모조리 갚으리라…!”

니탕개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미처 말을 멈추기도전에 휙 하고 강궁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날카로운 그 무엇이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헉 하고 짧게 신음하며 그녀는 그만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수풀속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눈앞으로 또 무언가가 날아들어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그녀는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참기 어려운 극심한 통증이 가슴깊숙히 스며들었다. 어차피 남의 몸을 빌어 회생했으니, 설사 죽어도 통증이 없으리라 생각한것이 후회되었다. 죽음의  통증은 그토록 생생하게 그녀의 살을 꿰뚫고 심장까지 전해졌다.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만큼 고통스러웠다.

“이여백…너만 없애면 돼! 내 이 니탕개가 다시 부락 깊숙히 도망가지 않아도 되니까…”

흐릿한 의식속에서 니탕개의 너털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의식을 가다듬었다. 죽음이라는것이 더이상 추상적이 아니라 생동하게, 실감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허한 웃음을 떠올렸다. 눈앞에 누군가의 익숙한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죽는군요…제가.”
“끝내 이 길을 택하였구나.”

염라대왕의 시선이 웬지 처연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그녀만의 착각이리라. 그리 생각하며 그녀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대왕님께 방해가 되는 일은…없을 거에요.”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적은 없었다.”

염라대왕의 말은 여전히 딱딱했지만, 그것은 어쩐지 눈앞의 상황에 화를 내고있는 듯 들렸다.

“네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은 주마.”

염라대왕은 말을 끝맺고 소매를 한번 저었다. 순간 까맣게 온 세상을 덮으며 지옥에서 불어오는 듯한 회오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치기 시작했다. 니탕개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려 숲속으로 도망쳤고, 군졸들도 강궁에서 손을 떼고 분분히 그 뒤를 따랐다. 한참후 염라대왕이 소매를 내리자 수림속은 삽시에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 고요한 적막을 깨뜨리며 급촉한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임서은…”

그다. 말에서 쓰러질듯 미끌어져 내리며 그가 말했다. 헤어진지 불과 반나절뿐인데 무섭게 창백해지고 일그러진 그의 얼굴…그런 무너져내린 얼굴을 하고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땀인지 눈물인지 그의 얼굴을 덮었고, 성급한 공포가 그의 눈길에 머물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가면 안돼. 당신…내앞에서 어떻게…당신 이건 너무 잔인해.”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가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실낱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세가지 부탁이…있어요.”
“…”
“첫째는, 천충을…찾지 마세요…내 아이…내 아이는 엄마가 없게 하고싶진…않아요.”
“…”
“나도 엄마가 없었고, 당신도 엄마가 없었잖아요…그 아이는…그 아이는 부모가 있어 행복하게…해주세요…”
“왜…왜 꼭 당신을 데려가야만 하는 건데…명부…염라대왕…내가 명부를 찾아갈 것이야…”

그가 더 이상 참기 어렵다는 듯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다…정해진 것이에요. 제가 온 것도…제가 가야 하는 것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뭐가 정해진 것인데? 그것이 싫어 우리 싸우기로 했잖아. 같이 명부에 대항하기로 한 건데…날 이렇게 버려두고 당신은 왜…”
“생명은…우리 소관은…아니에요…우리가…할수 있는…일은…그저…최선을…다하는…”
“이럴수가 없어. 이러면 안돼…당신은 돌아가야 해. 어찌 이렇게 죽을수가 있어?”
“이럴수가 있어요…어떤 일이든…우리에게…일어날수…있어요…우리 운명은…미지의…세계니까…당신이나 나…그걸 원했으니까…

그의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지난 일과 자신의 말을 후회라도 하듯 그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왜 하필…왜 하필 꼭 이런 식으로…내 눈앞에서 당신을 데려가야 하는 것인지…명부…명부…내 기필코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그녀는 흐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도 역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절…잊으세요…그냥…꿈을 꾸었다고…생각하세요…그리고…두번째 부탁은…”

급작스레 숨이 콱 막혀와서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벌써 시간이 다 된 것인가. 멀리 염라대왕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입귀에서 주르륵 피가 쏟아졌다. 그가 손으로 그것을 막았지만 붉은 피는 울컥울컥 흘러내려 땅위의 풀들을 적셨다.

“두번째…두번째 부탁은…”

그녀는 여러번, 아주 여러번 애를 써서야 행장을 그에게 내밀수 있었다. 그가 받아들자 그녀는 행장에 시선을 주었다.

“이안에 있는 물건들…보관해주세요.”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숨을 몰아쉰 후 깊이 그를 응시했다.

“마지막…부탁은…”

그는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바싹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입술 사이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끝까지…살아 남으세요.”
“…”
“살아서 역사를 다시 쓰세요…이 땅을 지켜주세요…그리고 잘못된 것들을…바로잡아 주세요.”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어렸다. 그 눈빛에는 누구도 막을수 없는 단단한 그 무엇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그녀의 입밖으로 안도와 체념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는 마지막이 분명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우리…다시…만날수…있을…”

그녀의 손이 툭 하고 그의 손위에 내려졌다. 그는 한참 눈을 감았다가 붉게 충혈된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물로 온통 뒤덮힌 얼굴에 뭔가 결연한 표정이 어렸다. 투명한 여름 해가 정오의 하늘에 높이 걸린 채, 조용히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맥박.”
“정상입니다.”
“호흡, 혈압.”
“모두 정상입니다.”
“분명 움직였다고 했지?”
“네, 아까부터 손가락을 움직였다고 환자의 가족이 알렸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아득히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으로 서은은 조금씩 의식을 회복했다. 죽은 것인가. 이젠 지옥에서도 현대 말을 쓰는 걸까. 만일 여기가 지옥이라면 저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는 어찌 저리 귀에 익은 것일까. 몸이 부서질듯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 언뜻 미간을 찌푸린 것이 대화를 주고받던 그들의 눈에 띄였는 모양이다.

“선생님, 환자가 깬 것 같습니다.”

여자의 목소리가 약간 환희를 띄었다. 그제야 알수 있었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자신이 현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그녀는 가슴이 미어지는 감을 느꼈다.

“깬 것이 확실합니까? 선생님, 다른 문제는 없는지 한번 더 살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귀에 익숙한 중후한 목소리가 그녀의 침대 옆에서 울렸다. 아아…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 누군가의 목소리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마냥 밝고 명랑하기만 하던 어제로 그녀로 다시는 되돌아갈수 없음을.

“서은아. 아버지다. 내 말이 들리냐? 내 딸아…깼으면 눈을 뜨렴아. 내가 미안해…내가 널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서…”

굳게 감긴 그녀의 눈틈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의 욕심이란 참 끝이 없다. 처음엔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점점 같이 있고싶어지고 소유하고 싶어진 것을 어떡하랴.

“환자 정서가 안정될 때까지 잠시 나가 계셔요.”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버지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져 가는 것이 들리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시선안으로 흰 가운차림의 남여의 모습이 어렴풋이 들어왔다.

“령아…?”

여자의 얼굴 윤곽이 또렷해지자, 그녀의 입에서 문득 이런 부름이 튀어나갔다. 여자는 머리를 기웃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가까이 듣기 위한 듯 앞으로 몇걸음 다가와서 몸을 기울였다.

“네?”
“네가 기어이…장하구나.”

그녀는 곧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의 모습이 그토록 령이를 닮았음에야. 궁인으로 살아감을 한탄했던 령이, 다음생에는 꼭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던 령이.

“당신이…선생님?”

그녀의 띄엄띄엄 잇는 말에, 령이를 닮은 여자는 빙긋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자신의 명찰을 가리켰다.

“유진입니다. 진이라고 부르면 돼요. 지금은 의대 소속 병원 실습중입니다. 환자분 담당 선생님은 따로 계십니다.”

진이는 허리를 펴더니 등뒤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

“진선생님…저 수업때문에 먼저 가볼께요. 환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녁에 또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니가 꼭 가족 같잖아.”
“그동안 쭉 같이 있었으니 가족이나 다름없죠 뭐.”

진이는 싱긋 웃더니 고개를 돌려 서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병실을 나섰다. 서은의 시선의 그녀의 뒷모습으로부터 서있는 남자가 서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남자의 목소리도 익숙한 이유, 이제야 똑똑히 알수 있었던것이다.

“지휘사님.”
“지휘사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우사를 닮은 진씨성을 가진 의사가 메마른 어조와 함께 조용히 그녀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그녀의 눈앞에 손가락 세개를 들어보였다.

“몇개입니까.”
“지금이 언제입니까.”

서은이 대답대신 하는 질문에 우사를 닮은 의사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한참 그녀를 관찰하는 듯 하다가 곧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2019년 7월입니다.”
“제가…얼마동안 이러고 있었습니까.”
“정확히 두달이군요.”
“그대로 두면 죽을수도 있는 거죠?”
“네.”
“그럼 왜 저를 구하셨죠?”

드디어 그녀의 질문이 수상했는지 의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 정적이 감도는 병실, 그 고요함 속에서 링겔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녀는 똑바로 의사를 응시했다.

“대답해주세요. 왜…왜 저를 구하셨죠? 이젠 살아가는 것이…죽는 것보다 더 힘들어질 사람을.”
“…”
“차라리 그대로 두지 그랬어요. 항상 당신은 이런식이죠. 나를 위한 것처럼 하는 모든 일들이, 결국엔 나를 궁지에 빠뜨리는 일들이네요. 당신같은 사람은…절대 변하지 않는군요.”

의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하도 차분하고 담담하여 괜히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기억이 없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는 괜히 무리수를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갑자기 돌아온 이생이, 그 사람이 없는 이생이 너무 낯설어 견딜수가 없었으니까.

“진정제 투여하겠습니다.”

의외의 짤막한 말이 의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뒤이어 간호사가 병실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주사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녀는 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후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감을 느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 사람만…그 사람만 두고 다들 여기 있었군요…”

무연한 암흑을 지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병실안에는 그녀말고 한사람이 더 있었다.

“임서은!!! 이 못된 기집애!!!”

윤아의 다른 사람보다 한옥타브 높은 목소리는 여전히 그녀의 귀를 따갑게 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윤아는 아랑곳하지 않은채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쁜년…”

삽시에 눈물범벅이 된 윤아때문에 그녀도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서은은 윤아의 등뒤로 손을 올려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속말로 불러보았다.

“나치야…”

윤아는 머리를 들더니 눈물자욱이 흥건히 남아있는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제야 깨어나다니…그동안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건줄 알어? 혼수상태인 애가 호흡곤란도 오고 합병증까지, 진이가 아니었다면 넌 벌써 염라대왕을 만나러 갔을거야.”
“만났어, 염라대왕.”

그녀의 나지막한 응대에 윤아는 관심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가 할 말만 떠들어댔다.

“진이 어디갔냐? 너 진이한테 고맙다는 인사 해야겠다. 어? 얘가 오늘은 웬일이지? 밤낮으로 니 옆에 붙어있던 애가.”
“수업때문에 학교 간댔어. 저녁에 온대.”

그녀의 대답에 윤아는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진이 봤지? 애가 좀 딱딱하긴 해도 공부도 잘하고 너한테도 진국이고. 아직은 실습이지만 졸업하면 곧 이 병원 온댄다. 아저씨랑 내가 옆에 없을 때는 걔가 널 가족처럼 보살펴줬어.”
“나를? 진이가 왜?”

그녀가 묻자 윤아는 문득 신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로보다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모르지, 널 보자 바람으로 뭔가 그런 그런 생각이 들었댄다. 이 환자,자기가 보살펴야겠다고. 이상한 애야. 혹시 아니, 너랑 걔랑 전생에 친구 사이일지도, 아니면 니가 전생에 걔한테 무슨 도움을 줬든가.”
“그럴리가…”

서은은 가볍게 대꾸한후 물끄러미 윤아의 얼굴을 보았다. 윤아를 닮은 나치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치야…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니…그녀가 떠나온 후 어떻게 지내다가 자신의 생을 마감했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문득 가슴 한구석에서 울컥 하고 뭔가 올리치미는 감을 느끼며 그녀는 다급히 윤아의 팔을 잡았다.

“나…인터넷 좀 할수 없을까?”
“의사선생님이 야단하실텐데…좀있다 검진 받으러도 가야 하고.”

윤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집요한 시선으로 윤아를 보았다.

“확인할 것이 있어.”
“그 확인을 꼭 지금 해야 하겠니?”
“어. 중요한 거야.”

“무슨 중요한 것이라고 깨어나자마자 인터넷을 하겠다는 거냐.”

삐걱 문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병실안으로 들어선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왠지 이 사람에게만은,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사고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아픈 것은, 단지 그 이유에서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그녀를 내려다 보면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성량을 닮은 아버지…왜 하필 그 사람의 아버지가 현대에선 그녀의 아버지가 되어있을까…그리고 왜 그 사람만 없는 걸까.

“깨어난지 얼마 안되어서 인터넷은 왜. 지금 네 몸상태가 어떤지 아직 잘 모르고있구나.”
“난 괜찮아요.”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자른 후, 그제야 시선을 들어 아버지를 보았다.

“꼭 확인할 것이 있어요. 나 이거 확인 못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버지…”
“조금 있다 검진을 받고 병실도 옮겨야 한다. 여러가지로 할일이 많은데 어찌 니 멋대로 하려 드냐.”
“잠깐이면 돼요. 10분…아니, 5분이면 돼요. 5분만…”
“또 고집이냐? 대체 언제까지 이 애비 속을 재가루로 만들 작정이냐!”
“아버진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가 다급히 소리를 쳤다. 그녀의 눈안에 물기가 고였다. 차라리 모를 걸 그랬다는 후회도 들었다. 그녀가 생각지 못한 것은 죽는줄로 알았는데 현대로 돌아온 것이고, 또 깨어나보니 그녀와 인연이 있던 전생의 사람들이 환생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은, 그 사람만은…그가 환생을 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을 막고싶었는데…그래서 자신이 그 길을 택한 것인데…그녀의 노력이 수포로 되고 모든것이 원점으로 되돌아왔다는 말인가.

“그래…난 아무것도 모른다.”

아버지의 눈에도 상처 비슷한것이 스쳤다. 잠시 문쪽을 보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 애빈…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내 딸이 어릴때부터 아빠가 반대하는 일만 골라서 한다는 것과, 그로 인해 사고가 났었고…겨우 깨어났다 싶으니 또 이상한 말만 하고있어서…내가 알고있는 건, 네가 지금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과, 정서적으로 불안해져 있다는 거야. 난 네가 검진이 끝난 다음에 다른것을 신경 썼으면 좋겠구나.”
“아버지…죄송해요…속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하지만 확인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만 같아서요…죄송해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병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윤아도 이쪽저쪽 눈치를 보느라 조용해졌다. 그리고 윤아가 뭔가 말하려 할때, 누군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가 있었다.

“무슨 큰일이라고. 스마트폰 가지고 있으니까 인터넷 가능해요. 검진 받기전에 확인하고 가세요.”

진이의 밝은 미소가 하얀 병실안에서 더욱 돋보였다. 뒤이어 그녀가 내미는 폰을 윤아가 받아서 서은에게 넘겨주었다. 폰으로 한글자한글자 입력하는 서은의 손이 사뭇 떨렸다.

“확인됐어?”

잠시후 성급한 윤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은은 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세 사람은 그녀의 무너진 표정에 잠깐 의혹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평행우주는 일어나지 않았어.”

한참뒤에야 침묵을 깨뜨리며 그녀가 말했다.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그녀는 멍하니 세사람을 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를 악물더니 그 한마디를 한번 더 곱씹었다.

“평행우주는…일어나지 않았어.”
“그게 뭔데?”

드디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윤아가 물었다. 하지만 서은은 더이상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상적인 거동에, 진이가 의사를 부르러 급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초점잃은 눈으로 멍하니 윤아를 보다가 침대에 몸을 기댔다.

“…괜찮아?”

윤아가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 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녀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기록이 그대로야.”

윤아는 어쩔바를 몰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서글픈 표정으로 그녀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곧바로 시야가 서서히 흐려졌다. 삽시에 눈물이 온 얼굴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자결한거 맞아. 바보…30여년을 기다려놓고…왜 하필 자결을…내가 무엇때문에 그리 애썼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윤아는 발을 동동 굴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서은을 보았다.

“누가 자결했대? 울지 말고 좀 알아듣게 말하면 안되겠니?”

윤아의 말에 그녀가 문득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또렷하게 내뱉은 그 다음말에 윤아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그녀가 미쳤다고 판단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염라대왕을 찾아갈 거야. 가서 이유를 물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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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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