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았을 때,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일단 당신이 편지를 받는 게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저는 당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자 합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저는, 어쩌면 그때 당신의 만류를 듣지 않고 베낭여행을 떠났다가 사고를 당한 그 철없는 애엄마가 아닙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저는 지금 400여년전의 명나라에 와있습니다. 강보에 쌓인 아기를 두고 막무가내로 길을 떠난 벌을 제가 이렇게 받는 가 봅니다.

철령시의 고찰을 염두에 두고 떠난 길이었습니다. 철령위에 위치에 대해서는 예나 제나 사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했기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 철령위가 명사(明史)에 기재되어있는 철령시 은주구의 위치가 맞는지, 그리고 철령에 가면 성자산이라는 옛 산성도 한번 둘러볼수 있는지 골똘히 생각하면서 걷다가 그만 호텔로 가는 길을 잃었습니다. 똑같게 생긴 골목들을 헤매다가 어느 작은 뒷골목을 막 빠져나오고 있었을 때었습니다. 자금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목이었습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둔기가 제 머리를 강타했습니다. 그대로 땅에 쓰러진 제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낯설었습니다.

“신원 확인은 했어?”
“사흘을 미행했으니 틀림 없습니다. 투숙명단도 확인했습니다.”

대체 이 큰 도시의 치안이 어찌 이리 허술하냐고 분노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배운 약간의 무예로 그들을 대적하기엔 택부족이었습니다. 그대로 두 장정에게 끌려갔고, 그들이 제 목을 조였을 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은 북쪽 하늘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북두칠성이었습니다.

“사람의 죽음을 관장한다는 북두성, 이 억울한 죽음을 그대로 내려다보고 가만히 있을 텐가…”

이생에서 저의 뇌리를 스친 마지막 생각이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저는 명부에 있었습니다. 보통 인간의 모습을 한 염라대왕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더군요.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습니다.

“요즘따라 왜 이렇게 골치아픈 명수들이 많아…”

염라대왕의 말에 이어 포졸의 소리가 울렸습니다.

“북두성군 오십니다.”

염라대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군요. 머리에 하얀 백발을 떠인, 한 기품있는 할머니가 염라전에 들어섰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힐끔 보았습니다. 왠지 그 눈빛에 수많은 사연이 숨겨진 듯 했습니다.

“이 명수는 내게 한번 맡기는 게 어떻겠소.”
“성군이 갑자기 웬일이시오. 웬만한 건 명부에서 처리하기로 합의를 보지 않았습니까.”
“웬만해야 말이지요.”
“…”
“이번만 내게 맡기시오. 비명횡사를 했은 즉 명부에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소. 원래는 명부에 들어오지 못하고 무주고혼으로 떠돌 팔자나, 전생에 지은 덕과 사찰이 많아서 오게 된 모양이오. 이왕 이렇게 된 바엔…”

북두성군이 염라대왕의 귀에 대고 잠시 뭐라고 얘기했습니다. 염라대왕의 얼굴이 그제서야 약간 풀리더군요.

“어차피 이 뒤의 일도 있고 하니…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허나 맹강탕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맹강탕을 마시면 유약한 성정으로 변할수도 있고, 역사 그대로를 완성시키기 어려울수도 있소.”
“…”
“유왕부의 첩부인이 자결을 했는데도 명부에서는 그 명을 거두어 후생을 만들었소. 내가 이걸 위에 고하면…”
“아, 그건…진왕비의 박해를 받아 죽은 걸로 착각…”

염라대왕은 말을 끝내지도 않고 좌우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서 나로 하여금 허구한 날 협박만 당하게 하느냐.”

북두성군은 희미하게 웃은 후 제게 얼굴을 돌렸습니다.

“내 너를 인간세상으로 돌려보내려는데…”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내 말을 마저 듣거라.”

저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할머니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에 저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너는, 명나라로 가야 한다.”
“네?”
“다시 말해서 400여년전의 유왕부로 가야 한다.”
“왜서입니까.”

저도 모르게 반문했습니다. 할머니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너의 전생이 사람을 죽게 하였다.”
“네?”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할 사람을 품어, 무고한 사람이 한많은 생을 끝내게 만들었다.”
“말도 안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기억에도 없는 전생의 일을 왜 후생인 제가 감당해야 하는지요?”
“그럼…여기 머무르든가.”
“할머니…”

저는 일단 할머니의 소매를 잡고 매달렸습니다.

“저 할일이 많이 남아있어요. 연구하던 과제도 남아있고, 남편과 어린 딸도 있습니다. 제발…”
“네가 이 조건에 대답하면, 딸을 한번 만나볼수 있게는 해주겠다.”
“…”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네가 인간세상의 사명을 끝내기 전엔 가능할 것이다.”
“…”
“다만 너는 그 아이에게, 너의 정체를 말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금기사항으로 명부에서 너의 입을 막을 것이다.”
“애아빠는…요.”
“그것까진 무리다.”
“…”
“어떡하겠느냐. 명부에 남겠느냐? 명나라로 가겠느냐?”

저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일단은, 살아남기로 했습니다. 살면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요. 당신을 만나거나, 당신에게 연락이라도 닿거나…

그렇게 저는 환생을 했고, 눈을 떠보니 유왕부의 첩부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시비들의 말에 의하면 방에서 목을 매었다가 회생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유왕은 집안 망신이라고 이를 절대 발설하지 말도록 하인들을 단속했습니다.

이때의 저—이태후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유왕의 소실인데다가, 정실부인인 진왕비의 모함으로 유왕의 총애를 잃고 냉궁에 갇혀있는 신세였습니다. 명부에서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이 유왕이 자비를 베풀어서 아들과 딸이 가끔 들리도록 유모들에게 명하였더군요.

그리고 그날, 제게 오던 어린 딸이 유모가 소피하러 간 사이 화원에서 길을 잃고 울고있다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제 처소로 당도했던 그날…저는 당신을, 꿈에도 그리던 당신을 보았습니다…

“저를 요동으로 데려가주십시오. 총병부의 시비로 살아도 좋습니다. 저는 여기 있으면 죽은 목숨과 다름 없습니다.”

당신에게…아니, 당신을 닮은 그 사람에게 매달렸습니다. 제게는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었지요. 하지만 그분은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럴수밖에 없겠지요. 나는 그를 알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테니까요…

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유왕이 나를 멀리한 것도 다 당신, 아니 그분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 요동으로 심부름을 갔던 유왕의 첩부인이 그분—이성량장군을 뵌 후로 오매불망 잊지 못해 상사병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목을 맨 것도 그 이유였습니다. 유왕은 이성량에 대한 적의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지만 자나깨나 탄핵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저는 어떻게 해서라도 유왕부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토만과 곁탁했다는 유왕의 탄핵 방향을 돌려 여진의 포로를 풀어줬다고 문제 삼으면, 일단 이성량은 출세의 기회만 뒤로 미루게 되는 것이니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라도 제 공로를 높이 사서 총병부에 머물 기회라도 줄줄 알았습니다. 이건 제가 아는 역사 사실과 일치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여기에서 변수가 생겼습니다. 이성량의 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역사에서 이성량의 부인은 누르하치를 놓아준 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저의 영향력으로 탄핵의 방향을 바꿔서 이성량의 출세길이 막혔기 때문에 원래 포로를 놓아준 일로 자책하던 이성량의 부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수 있다는 얘기지요.

유왕부에서 이성량에게 저를 데리고 떠나달라고 사정했을 때, 문뒤에서 듣기만 하고 나서지도 못하던 그 가냘픈 그림자가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여린 심성의 사람이라면 이성량의 냉대와 자책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죄책감으로 한동안 괴로웠습니다. 당신도 알지만, 저는 유약하지 않고 모진 성정이긴 하나 그리 사악하지는 않은 성격입니다. 저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것도 원치 않구요…하물며 하나의 소중한 생이고 목숨인데.

북두성군 할머니가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역사를 바꾼 저를 질책하진 않으셨지만, 사람의 목숨을 해하였다고 준절히 꾸짖었습니다.

“난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이런 일이 더이상 벌어져서는 아니될터.”
“저도 모르고 한 일이었습니다!”

제 변명에 할머니는 피씩 웃었습니다.

“과연 그럴까.”
“…”
“넌 유왕을 잘 구슬려 탄핵을 접을수도 있었다. 굳이 이성량의 출세를 막은 것은, 너를 외면한 그에 대한 소심한 보복이었다. 넌 그러한 성정이다. 작은 은혜를 잊지도 않지만, 작은 원수도 반드시 갚아야 하는 성정이었지.”

할머니는 과연 신선임이 틀림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저의 은밀한 마음까지 다 꿰뚫고 있었으니.

“그런 성정때문에 후생에도 척을 졌었지. 너의 사고가 단순한 우연은 아닐터.”
“…누군가가 절 해하였다는 말씀인가요.”
“다 지난 일이다. 너는 지금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너의 딸과 한번의 상봉이나마 할수 있느니라.”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젠 후생은 잊어야 할 것이다. 너는 전생에서 이성량의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그 죄값을 치르려고 그의 후생과 잠시 부부의 연을 맺은 것뿐이다. 이로서 죄값은 치렀으니 이젠 그 후생은 놓아주어야 할 것이야.”

눈물이…흘렀습니다. 뭐가 이렇게 허탈하게만 느껴질까요. 저와 당신이 단순히 전생의 죄얼때문에 만난 사이라니…당신이 어떻게 절 사랑해주셨는데…그리고 내 딸 서은이…서은이 나중에 크면 나는 어떤 엄마로 기억되는 걸까요.

당신이 죽도록 보고싶어졌습니다…내 딸도 보고싶어졌습니다. 제가 욕심을 부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걸 알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목숨이, 전생의 삶을 덤으로 얻어놓고 지금 가족의 재회까지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인줄 압니다. 하지만 이젠 놓아야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래야만…그래야만 딸이라도 한번 만날수 있을테니까요.

유왕의 총애를 다시 얻었습니다. 현대의 티비 프로그램에서 그 많은 궁중 암투극을 봐왔으니 그걸 시기적절히 이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진왕비가 냉궁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왕이 황제가 되고, 저는 황귀비가 되었습니다.

유왕은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이 역시 역사에 기재된대로 흘러갔습니다. 저는 어린 황제를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수렴청정도 하고, 장거정과 정사도 돌보았습니다. 현대에서 허망하게 당한 일이 화가 나서 태후라는 권력으로 강호의 고수를 청해 오랜 시간 무예도 익혔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렀습니다.

뭔가 삐걱거리는 느낌이 든 건, 자수사를 재건하려고 몇달 궁을 비운 후의 일이었습니다. 제 딸이, 그러니까 서안공주가 어딘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수은을 삼키고 회생한 후 여러가지 모진 일을 겪었기때문에 성정이 크게 변한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한마디.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건, 엄연한 인권침해입니다.”

설마…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으나, 요동에 가서 두루 사람을 만나고 견식을 넓혔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미타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돌한 눈빛이며 도고한 성미며…참 젊은 날의 나를 많이 닮았더군요.

그렇다고 무작정 단정지을수는 없더라구요. 요동을 드나들며 성정도 크게 변할수 있는 데다가, 원래 사랑에 빠지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사람의 능력이니까요. 심지어 출중한 경공을 선보여 제 방의 궁인들을 물리쳤다는 보고를 받았어도 놀랍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두고 지켜본 결과.

무료함을 달래고자 입궁한 광녕부 최고 기녀였다는 한 아이의 거문고 소리가 제 의심을 증폭시켰습니다.

“어디서 익힌 곡조더냐.”
“공주마마께 듣고 익힌 곡조입니다. 하도 아름다워서 기억해두고 있었지요.”

손이 떨렸습니다. 그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당장 그 아이를 곁에 부르고 싶었습니다. 황제의 이름으로 조서를 꾸몄습니다.

“영원백도 상경하라.”

여기서 잠깐 실토를 하자면, 그들을 경성으로 부르기 위해, 당신을 닮은 영원백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황제를 겁박한 풍보의 무리들을 이용했습니다. 그들에게 공제 당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금의위는 제 손을 벗어난 적 없어서 황제를 구출하기는 식은죽 먹기였지만 말입니다.

일은 제 뜻대로 되어, 영원백은 제가 한낱 연약한 여인의 모습을 보이자 굳이 지난 일에 악감정을 품지 않더군요. 이제 그 아이와의 상봉만 남았으나, 저를 미워하고 경계하는 그 모습에 저는 가슴이 저렸습니다.

“나를 어미로 생각하거든 그대로 누워있거라. 나를 원수로 생각하거든 그 아이를 찾아 데려오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는 한, 당신은 제 어머니가 아닙니다.”

최대한 알아듣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금기어를 들먹이자 곧 참을수 없을 정도로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정도는 내색을 내지 않을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저를 강력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송두리채.

“언제부터 묻고싶었습니다…왜 저 아이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지…”

용납하지 않는 게 아니라…역사대로 움직이려고 했을뿐…그래야 너를 만날수 있기에.

“저 아이뿐만 아니라, 요동도, 아버님도, 총병부도, 서방님도…다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역시 역사의 순리를 거스르기 때문에…특히 이여백은 황실을 향해 무모한 도전을 했었습니다. 그가 저를 죽이기 위한 그 몇년동안의 피타는 노력을 설마 제가 모르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너무 저의 지략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말해야 그 아이가 알아들을까요.

“그리고 왜 굳이 저로 하여금, 어머니를 원수로 대하게 하는지…저는 알수 없었습니다.”

그런적 없다…얘야, 다만 나는 표현에 서툴뿐…어떻게 딸과 상봉하고 천륜의 정을 나눌수 있는지, 그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어서…

“한낱 유왕부의 시비가 한 나라의 국모로 되기까지, 당신의 모략과 지혜가 출중하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있습니다.”

저는 애써 냉정함을 유지한 채, 입꼬리를 들어올렸지요.

“칭찬받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처음이군.”

“당신의 일장설화가 아버님을 속일수는 있어도, 저를 속이지는 못합니다.”
“그래, 다 정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 거짓인 것은 아니다.”

저는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어차피 제게 이정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 제가 누군지 알아도 그 아이에겐 괴로운 일이 될뿐이겠죠.

“해서, 네가 날 어떻게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지금처럼 허약한 몸으로, 지금의 네 세력으로.”
“제 아이를 돌려주십시오. 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보십시오, 그 아이에게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저도 모르게 허구픈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미 태어났은즉 저 아이의 명은 내 소관이 아니다.”
“복중의 태아에게도 손을 쓰는 당신이, 이미 태어난 목숨에게 관대할수 있겠습니까.”
“뭣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이입니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지옥의…”

그 아이가 뭐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지옥의 세례를 받는 아이입니다. 그러니 부질없는 죄를 추가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사욕을 위해 희생된 사람은, 총병부인 한사람으로 충분합니다.”
“…”
“모든것을 바꾸고 싶었다고 하셨지요. 당신은 당신이 연모하는 남자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 사람의 부인을 희생시켰습니다. 당신의 아들의 정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정계에서 막역한 지기였던 장거정을 희생시켰습니다. 지어는 요동으로 시집가는 당신 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한 무고한 남자에게 그토록 많은 자객을 파견했었지요…”
“…”
“하지만 유독 제 앞길을 막는 데엔 실패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어린 아이에게까지 손을 뻗친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전장으로 내몰고, 그 사람의 아이를 해한다면 당신 딸의 운명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나요.”
“…”
“그런데 어쩌죠…제 운명은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 걸…아니, 설마 바뀐다 해도 당신이 원하는대로는 되지 않는 걸…그래서 비상을 삼킨 것임을, 그래서 요동으로 간 것임을 당신은 알기나 할까요.”
“그게…무슨 말이냐.”

드디어, 그 아이도 더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싫었나 봅니다. 저처럼…

“네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고.”
“네,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봤자, 운명은 정해진대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서안공주의 운명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서안공주의 운명이라…”

그래, 그냥 같은 시간대에서 왔다는 것만 밝혀두지요. 그건 금기사항이 아니겠지요. 그것만으로도 만족입니다.

“바뀌지 않는다면…지금…지금 일어나는 이 일들은 다 무엇이란 말이냐.”

그 아이가 미간을 구깁니다. 드디어 의심을 자아냈습니다.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합니다.

“너 또한 운명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더냐. 왜 지금은 너답지 않게 움츠러드느냐.”

그 아이를 똑바로 주시했습니다. 그 아이의 눈빛에 잠시 당혹감이 스칩니다.

“설마…”

영민한 아이입니다. 제가 엄마라는 생각은 못했겠지만, 같은 곳에서 왔다는 동질감으로 충분합니다.

“그래. 지금 니가 하는 그 생각이 맞아.”

조금만 더 생각하거라, 얘야. 나에 대해서 조금만 더.

“그래서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전공이 사학과였던 내가, 명나라 역사에 이토록 정통한 내가, 어쩌면 너와 아주 가까운 사이일수도 있다는, 그런 가정을 한번이라도 해보려무나.

“내 사람은, 내가 지킵니다. 더이상 서방님과 제 아이를 해하려 들지만 마십시오.”
“이여백은 소생이 있어선 안돼. 아니, 서안공주 주요원이 이여백과 부부의 인연이라는 자체가 역사와 어긋난 사실이다. 서안공주는 만력13년 즉 내년에 만휘에게 시집을 가게 될 것이고, 천계년간에는 대장공주로 봉해진후 천수를 누리게 될 것이야. 만력의 누이들중 제일 팔자가 좋은 공주였지.”
“저는 서안공주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안공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꼭 마치 본래 이태후가 아닌 내가, 이 생에 와서 이태후의 모든 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지어는 기억에도 없는 총병부인을 죽였다는 누명까지 쓰고.”

그렇게 이튿날까지 이어진 설전…아직도 모르는 것이 분명합니다…금기어만 아니었다면, 가슴이 터질것만 같아서 저는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여기로 오게 된 건 사고…였습니까.”

드디어…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구나. 사그라진 불꽃이 다시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몸은 보리수, 마음은 명경대, 부지런히 털고 닦으면, 티끌 먼지 묻지 못하리.”

제가 좋아하는 계까지 꺼내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인성태후마마의 아들딸들은 다 죽고 이태후의 자녀들은 살아남았지요.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그건 내가 오기전의 일이다.”
“그러면 정귀비의 유산은 어떻게 된 일인지요?”
“현대로 치면 정귀비는 천성으로 체질이 약해서 습관성 유산 증상이다. 역사대로 간다면 그녀는 2년후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아이는 원자와 태자의 자리를 다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제게 준 탕약은…”
“그건 난산을 예방하는 탕약이다.”
“하지만 유산을 촉진하기도 한다지요.”
“임신 개월수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 내가 임신 초기에 약을 내려주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러니까 이게 다 오해란 말씀입니까.”
“적어도 내가 니가 생각하는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 아기도 안아가셨잖아요.”
“이 궁궐에서 자신이 낳은 아기를 자신이 직접 돌보는 경우는 니가 처음이다. 아기는 유모가 돌보는 것, 그것이 명나라 궁궐의 법도이거늘.”
“그렇지만 당신이 역사 그대로 만들어가려면, 어쩔수 없이 무고한 사람을 해쳐야 할지도 모릅니다. 꼭 마치 그 사람에게 극독을 쓰는 것처럼.”
“그가 하도 나를 원수 취급 하기에, 독으로 겁을 주려 한 것뿐이었다.”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돌에, 지나가던 사람이 맞아 죽을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일부러 독침을 쓴다면 사람이 상하는 것은 시간 문제지 않습니까. 제가 그 독에 상한적이 있어 하는 얘기입니다.”
“…”
“저 역시 우발적인 사고와 일부러 작정한 살인은 그 죄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순리라는 그 멍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당신은 언제 어디에 있어도 영원히 불행할 것입니다.”
“…”
“또한 당신이 총병부인 일에 겁먹어 역사의 순리에 따르려고 행한 일들은 어떤 일인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영화전 마당에서 군사를 동한 일이며, 요동 그 먼 곳까지 자객을 파견한 일…”
“그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저에 대한 원망과 편견으로 마음이 꽉 닫혀있습니다. 그런데 전 무얼 바라고 있었던 걸까요.

“그러니 저는 바꿀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막는다 하여도, 저는 세상을, 운명을 바꿔갈 것입니다.”
“참으로 고집불통인 아이로구나. 꼭 누구처럼.”
“저는 당신과 적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 앞길을 막는다면, 저는 맞서 싸울 겁니다.”

그거 아십니까. 그 아이의 고집은 완벽하게 당신을 닮았습니다. 아마 당신은 거기서 고집스레 절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머리 반백이 다 되도록, 누구에게 마음 한번 여는 일이 없이…

허탈한 웃음이 나갔습니다. 명부에서 굳이 금기로 정하지 않아도, 저는 그 아이에게 제가 누구란 걸 말할수 없습니다. 솔직히 이젠 그 용기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동안 그 아이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그토록 제가 이여백을 반대했던 이유는…그가 저를 원수취급 해서도 아니고, 서안공주가 만휘에게 시집가야 할 운명이어서도 아닙니다. 저는 역사에서의 이여백의 운명과, 그 운명때문에 영향받을 그 아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여백은 나치야와 혼사가 오가긴 했지만 종국에는 함께 있지 못했고, 후세에 전해지는 이여백의 소첩 신분은 누르하치의 동생 수르하치의 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즉 그에게는 정실부인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아이는, 그 아이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불행중 다행이랄까, 애초에 북두성군이 염라대왕에게 말하는 걸 제가 그만 들어버렸습니다.

나는 내 딸이, 어릴때부터 엄마가 없이 가엽게 자란 내 딸이, 지금은 또 이런 결말을 앞두고 있는 것을 차마 두고 볼수만 없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 운명이지만 그 아이에게는 재현되어서는 안될 일이지요. 그것이 얼마나 누군가의 삶의 의미를 갉아먹는 일인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거쳐야 그 고단함과 피폐함을 추스르게 되는 일인지…제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더이상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동안 이여백에게 오는 서신을 가로챘어도, 궁궐의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게 했어도, 그 아이의 마음은 온통 요동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여백 그 아이에게서 서신이 한장 날아왔습니다. 자신의 서신을 제가 가로챘다는 걸 잘 알고있으며, 만일 서신이 두달 끊긴다면 그 아이에게 보관했던 서신을 넘겨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 아이가 이렇게 서신을 끝맺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는 이태후마마의 마음이, 결코 소인의 마음보다 작지 않음을 잘 알고있습니다.”

얼마나 현명한 아이입니까. 내 딸도 모르는 어미의 심사를 이 아이가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이여백에게 따로 서신 한통을 보냈습니다. 이런 아이라면, 이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아이라면 한번 그 일을 믿고 맡겨도 될런지…기대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목궤에 이 서신과 함께 한쌍의 은잠을 넣으렵니다. 이제는 더이상 내 딸의 의사를 막지 않겠습니다. 그 아이의 인생은, 그 아이 절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언제 어디에서나, 어떤 선택을 하든지…내 딸아이가 무탈하고 행복할수 있도록…두손모아 부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그것이 죄많은 어미가 자식을 위해 할수 있는 마지막 노력입니다…

이태후의 노년은, 만력의 태정을 방치한 채 불교 사찰을 전전하는 것으로 역사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태후가 왜 그랬는지 이젠 알 것 같습니다.

만일 일이 여의치 않아 당신이 이 편지를 못받게 된다 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죽으면 무주고혼이 되더라도 당신의 윤회를 기다리겠습니다. 만일 전생에서 당신 부인에게 피해를 준 이유로 후생의 잠깐의 부부의 연이 맺어졌다고 한다면, 현대에서 저는 당신으로 하여금 실종된 와이프를 평생 기다리게 했으니 더 큰 피해를 준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그 다음 생에는…잠깐이 아닌 아주 오래동안 부부로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제 남은 생을 통털어, 부처님께 그리 치성을 드릴테니까요.  

그리고 혹시 그거 아십니까. 인간에게는 삼혼칠백(三魂七魄)이 있다는 것을. 생혼 (生魂), 영혼(靈魂), 각혼(覺魂)을 삼혼이라 일컫는데, 풀어보면 사뭇 흥미롭습니다. 생혼은 인간인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생존본능 같은 것이고, 영혼은 우주로부터 물러받는 맑고 선한 기운이며, 각혼은 땅으로부터 물려받은 감각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생혼이 없으면 삶의 의욕을 잃고, 영혼이 없으면 선보다 악이 우선시되며, 각혼이 없으면 모든 고통에 무감각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는 어쩌면 저는 생혼이 없는 사람이겠지요…아니, 어쩌면 영혼도 없었던 사람일지도 모르지요. 솔직히 말하면 정귀비의 복중 태아들은 제가 해한 것이 맞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차마 실토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로 인해 아직도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싶고, 아직도 고통스러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니 영혼과 각혼은 미약하게나마 제게 붙어 있나 봅니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이생에서 그 아이는 살고, 저는 왜 죽어야 했는지도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인명에 대한 긍휼의 마음, 그 아이에게는 근원적인 선함이 있었지만 제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어쩌면 이 차이점이 바로, 제가 그 세상으로 돌아갈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저의 생혼이 당신 곁에 머물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식으로나마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인 것을…하지만 이젠 그 욕심도 접겠습니다. 왜냐면 지금은, 제가 이런 욕심을 부릴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오래동안 아무런 모정도 주지 못한 그 아이에게, 엄마로서 해줄수 있는 마지막 일을 묵묵히 행동에 옮기는 것뿐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20년…잠깐이나마 그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이 남은 제 생을 지탱해줄 거라 생각합니다. 이 한단락의 기억이면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그 아이를 제게 보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통해 이 세상으로 보내온 당신의 그 메시지를.

다시 한번 말씀 드리자면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하지만 저는 죽은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기억속에, 마음속에 지금껏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요. 그래서 더 가슴이 찢어집니다…부탁인데, 이젠…저를 잊으십시오. 놓으십시오.

그리고 저는 당신을, 당신과 저의 딸을…사랑합니다.

절필입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한때 당신의 아내였던 사람으로부터          

……

일지1.

철령의 동굴.

행장안에는 그녀가 남긴 목궤가 들어있다. 목궤안의 내 서신들을 불태우려다 그안의 다른 서신 하나에 눈길이 끌렸다. 어딘가 눈에 익숙한 필체다.

그러니까 얼마전, 비밀히 서신을 주고 받은 적 있은 이태후의 필체와 일치했다. 아마 그녀가 서신을 전해줄 거라 생각해서 보냈는 모양이다. 그녀와의 마지막 인사거나, 후생의 가족에게 전하는 서신일 것이다.

얼마전 보내온 이태후의 서신 내용을 떠올렸다.

“내게는 딸이 하나 있소…”

그렇게 평범하게 시작한 서두였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은 놀라웠다. 이태후가 그녀와 같은 시간대에서 왔고, 또 후생에서도 그녀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내 딸은 곧 죽을 것이오. 그 아이에게는 세번의 고비가 있소. 첫고비를 넘으면 전생으로 오는 것이고, 두번째 고비를 넘으면 후생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그리고 그 세번째 고비를 넘기려면…”

그녀가 후생으로 무사히 돌아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화살을 맞은 그녀가 내 앞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그 시신을 내가 직접 이곳에 안치하였으니…내게 있어서 그녀는 이미 죽은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태후의 말대로라면 두번째 고비를 넘겨 후생으로 돌아갔다 해도, 그녀의 앞에는 또 사신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무슨 팔자가 그리 기박한가. 그리 일찍 거두어갈거면 왜 그리 영민하게 태어나게 했을까.

“그래서 부탁할 것이 있소…염치 없는 부탁이지만, 딸을 사랑하는 한 어미의 마음으로, 그 아이를 목숨처럼 여기는 같은 마음으로, 내 말을 따라줄 것이라 믿겠소…”

하늘을 향해 허한 한숨을 내뿜어본다.

“검은 옷을 입은 갑사 49명, 검은 기 49개, 향화제물, 큰 등잔 일곱개와 작은 등잔 49개, 그리고 큰 본명등 하나…”

기양법을 상세하게 가르친 이태후 덕분에 그녀에게 북두에 수를 빌어보라 준비시켜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본명등은 꺼졌다. 그녀가 아무리 내색을 내지 않아도 그정도 눈치쯤은 안다.

어쩌면 그녀가 빈 것은 전생에서의 수명이었고, 이제 내가 빌어야 할 것은 그녀의 후생에서의 수명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나는 자결을 해선 아니되고, 윤회의 기회를 놓쳐서는 더욱 아니된다.

일지2.

30년이 지났다. 그녀를 염습하여 근처에 묻고, 그녀가 이생에서 남긴 말들과 행한 일들을 정리해서 책자로 남겼다. 이제 이 글들과 물품들은 지열의 영향을 받으며 오래동안 묻혀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세상의 빛을 다시 볼 때에는…

누르하치는 내가 내어건 조건에 대답을 주었다. 이제 그는 내가 정한 시간에 총병부 서재를 방문할 것이고, 그곳은 이생에서의 나의 최후가 될 것이다. 누르하치는 항상 행적을 비밀히 하기에 후세에서 나를 자결로 기록할수도 있다.

그토록 죽기를 희망하지만 자결은 아니된다. 이 방법을 기다리느라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누르하치는 나를 죽여달라는 말을 쉽게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성정이다. 의심이 많고 계교가 많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한가지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죽기를 두려워하는 그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최선을 다해 나를 죽일 것이다.

문제는 그 후부터다. 어떻게 윤회를 거쳐 환생을 할 것인가. 명부의 원칙이 나로 인해 바뀌어질수 있겠는지. 나는 그녀에게 꼭 찾아가겠다는 약조를 했었는데 과연 그 약조를 지킬수 있겠는지.

먼 훗날 이 일지를 다시 발견하고 그 뒤를 이어쓸수 있다면, 내 계획은 반쯤 성공한 것이다.

……

400여년후.

드디어 일지를 이어쓸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그렇다. 나는 환생을 하고, 기억을 잃지 않은 채 여기를 찾아온 것이다. 명부와 딜을 한 결과다.

이태후는 전생에 남은 자신은, 생혼이 없는 사람일수도 있다고 하였다. 인간에게 삼혼(생혼, 영혼, 각혼)이 있다면 말이다.

그녀가 떠난 전생에 남은 나는, 영혼이 없는 사람이었다.

죽지 못해 살고, 죽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명부에 당도한 내 혼백은, 그렇게 영혼이 없는 상태였다.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염라대왕이 두통을 호소했다.

“대체 너랑 관련된 인물은 왜 하나같이 복잡한 명수를 가지고 있는 것이냐.”
“제 영혼은 아마, 그녀를 따라가 있을 것입니다.”

그냥 말해봤을 뿐인데, 염라대왕이 손벽을 탁 쳤다.

“맞다. 왠지 이상황이 묘한 기시감이 든다 했더니. 언젠가 이 얼굴을 명부에서 봤던 적 있다.”

염라대왕이 우두마면의 저승사자를 불렀다.

“이여백의 영혼은 어디 가있는지 찾아보거라.”
“아, 그게…이자현이란 이름으로 환생했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교통사고로 왔었는데 혼백이 구전하지 못하다고 대왕께서 돌려보냈…”

우두마면의 저승사자가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뭣이? 생혼과 각혼도 없는데 환생을 시켰다고? 그리고 막상 이자현의 영혼은 내가 돌려보내다니…”

염라대왕이 대성질호했다. 모르긴 해도 명부에 전례없는 엄청난 실수가 벌어진 것 같았다.

“이거 큰일이군요…저는 그럼 환생조차 할수 없다는 말입니까? 명부에서 제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까? 안되겠군요. 저 하늘에 고소장을 올려야겠군요…”
“저기, 너무 야박하게 그러지 말고.”

염라대왕이 내 소매를 붙들었다.

“일단 이 일은 명부에서 잘 처리하겠…”
“어떻게 해주시겠습니까.”
“응? 그게…”
“저도 환생하게 해주십시오. 그 시간대로.”
“…”
“자결을 하면 환생을 할수 없다고 했었죠. 그바람에 30여년을 기다렸습니다. 스스로 환생의 시간대를 정하겠다는 게 무리한 요구입니까?”
“그게, 그렇게 할수는 있으려나…”
“왜 안됩니까?”
“이자현은 태어난지 한참 되었고…지금 환생하면 나이가 많이 차이날 텐데.”
“400여년도 차이 났을라니 그깟 이삼십년이 문제입니까.”
“이러는 게 어떻겠나.”

염라대왕이 서책을 한참 뒤졌다.

“여기. 이자현이 동생이 하나 있어. 곧 죽게 되어 데려와야 할텐데 차라리 그쪽으로 가게나.”
“동생요?”
“그리고 이자현에게 있는 자네의 영혼도 곧 거두어주겠네. 그러면 3혼이 한몸에 자리잡게 되고 이로서 자네 한단락은 정리가 되는 것일세.”
“맹강탕은, 마셔야 합니까?”

염라대왕이 물끄러미 나를 주시했다.

“솔직히 난 멀쩡한 사람에게 맹강탕을 먹이는 일이 즐겁지 않아.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말에 금기어를 걸어놓을 것이나, 맹강탕은 명부에서 빠질수 없는 수순이라 그건 타협하기 어렵구려..”
“알겠습니다.”

그녀를 만날수만 있다면…그깟 기억의 봉인 쯤이야.

하지만 내하교를 지날 때, 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할…머니.”
“오랜만일세.”

맹강파할머니는 내게 정갈한 물 한사발을 내밀었다.

“먼 길을 떠나는데 목이라도 추기고 가게나.”

망각의 맹강탕이라… 이걸 마셔도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그때까진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나는 정녕 몰랐었다.

일지3.

그녀를 만났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를. 명부에 의해 기억이 철저히 봉인당한 그녀를.

내 얼굴을 보고 놀랄법도 한데 의외로 담담하다. 하필이면 이자현—내 영혼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묘지까지 와서 쓰러져 있었다. 일부러 동굴에 데려왔는데도 별다른 기색이 없다. 나에 대해서는 오히려 쌀쌀하고 냉담한 편이다.

환생을 한지 삼년, 아니 정확히 이시현의 몸에 들어온지도 삼년남짓이 된다. 그동안 현대의 생활도 익숙해졌고, 그리운 얼굴들도 많이 만났다. 비록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아주 가끔 그녀가 누워있는 병실로 가보았다. 령이, 아니 지금은 진이라고 불리는 실습생이 의아한 기색으로 나를 훑어본다.

“누굴 찾아왔는지요.”
“아 병실 잘못 들어왔습니다.”

몸을 돌려 나오려고 하는데 진이가 물었다.

“우리 혹시,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나요?”
“그럴리가요. 제가 원래 좀 흔한 얼굴이라.”

진이의 의아한 얼굴을 뒤로 하고 병실을 나섰다. 이제 그녀가 깨어났으니, 이생에서 내가 할 일을 시작할수 있다.

일지4.

도저히 참을수가 없다. 그녀를 매일 가까이에서 보고싶다. 세수 안한 얼굴도, 깊이 잠 자는 모습도. 보고싶어 미칠 것 같다.

내 인맥을 총동원해서 아버님에게 연줄을 달았다. 혼자 딸을 두고 장기출장을 가야 한다고 걱정하기에 집사 겸 트레이닝코치를  자청해나섰다. 그 날이 오기전까진 좀 더 곁에서 지켜줄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봉인이 풀리기 시작한 것 같다. 혹시 내가 준 영향인가. 자금성에서 그녀는 데자뷰를 믿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었던 문화전 서각의 그 방을 그녀가 가리켰을 때 숨이 콱 막히는 감이 들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금기어로 인해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에게 데자뷰 같은 걸 믿지 말라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으라고. 아픈 과거를 떠올려서 뭐하겠는가. 그녀에게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다.

예정된 시간이 다 되었다. 미리 준비를 하려면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야 하는 거지만 그녀의 얼굴을 하루라도 더 볼수 있기 위해 미적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가봐야 한다.

마침 B팀 촬영을 맡아달라는 아버님의 청탁이 와서 떠날 명분은 갖춰진 셈이다.

다행이 그녀의  기억의 봉인은 그대로인 것 같다. 그녀의 행장속에 있던 손수건을 건네줬지만 이튿날 바로 돌려주는 걸 보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었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 결과가 뻔한데 구태여 그녀의 슬픔을 더해줄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냥 스쳐지나는 인연으로 그녀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일지4.

기양법을 시작하기전 그녀 어머니의 소식을 들었다. 이태후의 서신을 보내주어야 할 때가 왔다. 아버님께서 그 서신을 받으면 후사를 처리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이라도 늦게 이 서신을 읽기 바랄뿐이다. 그녀의 슬퍼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춰주고 싶으니까.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동굴에 와서 기양법을 행한다. 준비된 갑사들은 동굴 주변을 지키고, 나는 단상에 단정히 앉아 북두를 향해 기원한다.

“저뿐만 아니라, 그 아이를 사랑하는 한 어머니의 부탁이기때문에…그녀를 위해선 그 어떤 일이라도 할수 있습니다. 꼭 목숨을 거두어야 하는 거라면, 차라리 저를 거둬가십시오. 7일동안 본명등이 꺼지지 않으면, 이에 대한 해답을 주신 걸로 알겠습니다.”

본명등은 꺼지지 않았다. 나는 하늘의, 북두의 뜻을 알수 있었다. 우리의 인생은 뭔가를 잃지 않으면, 뭔가를 얻을수 없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나는 내가 할수 있는 모든 것을 할뿐이다. 최선을 다해 그녀를 지키는 것…이것이 내가, 이생에 환생한 사명이니까.

일지5.

혹시 그녀의 수가 더해지면 기억을 떠올리고 이곳에 올가봐, 그녀가 발견할수 없게 목궤를 잘 숨겨야겠다. 아끼던 옥적도 목궤에 넣었다. 이제는 이것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먼 훗날, 누군가에게 이 목궤가 발견된다면, 그녀의 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이땅에 살아 숨쉬었던 수많은 생명들, 그들의 꿈과 노력과 삶의 지혜들을…몇백년후의 시간속으로 다시 소환할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운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 행운에 행운이 더해져, 그녀와 함께 이곳에 다시 올수 있다면…그때는 이 모든 것을 그녀와 함께 공유할 것이다. 그녀로 하여금 내 품에 기대어 펑펑 울게 하고, 그녀의 상실감과 슬픔을 내가 위로해줄 것이다.

살면서 내게도 그런 행운이 차려질수 있을까. 살수로 있던 시절, 인명을 많이 해친 죄를 이렇게 받는 건가. 오랜 세월의 기다림도 모자라, 상봉의 행복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다니…

이젠…가야 할 때가 되었다.

……

염라대왕은 민망한 기색을 얼굴 한가득 띄운 채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마주 앉아있던 은빛머리를 떠인 할머니가 그것을 보더니 얼굴에 둥근 미소를 그린다.

“오늘은 한가한 모양이로군.”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소.”
“그래, 일이 없으면 삼보전을 찾아오지 않지.”

할머니는 찻잔을 들어 찻물 한모금을 들이켰다.

“말씀하시오.”
“왜 맹강파를 자처하였소?”
“들켰나.”

할머니는 또 한번 빙그레 웃었다.

“딱 두번뿐이었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라고???”

염라대왕은 목이 타는지 고개를 젖혀 찻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탕 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른 한번은 언제지?”
“자네…말이 짧다?”
“이젠 자기 나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신세들인데 이젠 말을 편하게 할 때도 되었지.”
“명부 질서가 개판이군.”

할머니는 입속말로 중얼거리면서 시선을 딴데로 돌렸다. 염라대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됐고. 이제 저 둘을 어떡할 거야? 북두성군이 이래도 돼? 안면 좀 있다고 막 수를 늘려줘?”
“환생을 마구 해준 염라는 그래도 되고?”
“나야 그건 그냥 실수…”
“나도 실수였어. 칠(柒)십륙을 이(贰)십륙으로 잘못 봤어.”
“아무리 그래도 그 두 글자는 엄연히 다른데.”
“뭘 그리 따지나. 따지긴. 늙으면 시야가 흐릿해서 잘못볼수도 있지.”

염라대왕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성군이 명부 찾아와서 그 아이가 어차피  이십육에 죽는다고 때가 되면 염라전에 특사로 보내준다 하지 않으셨소? 우두마면이 일을 너무 못해서 좀 영민한 아이를 거두고자 했더니…”
“뭐 암튼, 그 아이의 수는 내가 잘못 보았소. 미안하게 되었소.”

할머니가 화제를 갈무리하려 들자 염라대왕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임서은의 일은 그렇다고 넘어가겠소. 이여백의 수는 왜 거두지 않았소? 그의 기억을 남겨준 것이 이미 큰 실수인데 그 목숨도 거두지 않는다면 앞으로 알려질 일들이…”
“뭐가 그리 두렵소.”

할머니는 염라대왕을 똑바로 보았다.

“천추의 공로와 죄업은 세간에서 자연 공론할 일이요. 우리가 직책을 남용해서 그것까지 막을 셈이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내 할말은 없소. 하지만 명부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내 기필코 내게 불리한 공론들은 막을 것이요.”

염라대왕이 소매를 떨치자 할머니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막을 것이요? 고작 어린 아이로 현신해서?”

말을 마친 할머니는 표연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북두에 공양하는 사람이 많아 이만 가서 일을 봐야겠소. 명부에도 일이 잔뜩 밀렸다 들었소만.”

말을 마친 할머니는 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열라대왕을 돌아보았다.

“아참, 앞으로 이여백을 다치려면, 내게 먼저 허락을 받으시오.”
“하아, 참…지금 성군은 이 염라를 협박하는 것이요?”
“못할 것도 없지, 우리사이에.”

할머니의 모습이 멀어져가는 것을 염라대왕은 물끄러미 보았다.

“우리…사이에.”

피씩 웃으려다 말고 염라대왕이 고개를 돌렸다.

“어우…내가 하루라도 빨리 수련을 더하고 공덕을 쌓아서 염라전을 벗어나야지 원…”

궁시렁거리는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것은 의외로 부드러운 말투였다.

“예나 제나 저놈의 성미하고는.”

불전을 나서는 염라대왕의 시선이 멀리 하늘가로 향했다. 아득한 옛일을 떠올리는 듯 무연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는 머나먼 태고로부터의 신비와 경이로 가득 찬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근원과 윤회, 그들의 인연과 사랑까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불전을 에돌아 간다. 둥근 달이 지척에 걸려있고 별들이 듬성듬성 얼굴을 내민다. 염라대왕은 한숨을 내쉬며 혼돈이 뒤엉킨 삭막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한참 그것을 지켜보는 그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피어났다.

새벽 달빛 아래에서 은은한 옥적소리가 매화향기와 더불어 실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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