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녀석이 문득 말을 걸었다.
– 엄마, 우리 그거 사서 떡복이 해 먹어요.
– 떡볶이 사 와야겠네?
– 아니, 그걸로 만들어 먹어요.
– 그게 뭔데?
– 음, 이름을 몰라요. 그거 뭐라고 하죠?
이런 식으로 대화가 시작되면 거의 스무고개(스무 번까지 질문을 하면서 문제의 답을 알아맞히는 놀이)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 음, 그러니까 그 이름에 'ㄹ', 'ㅍ' 이런 소리가 들어갔어요.
– '르', '프'라, 로프? 아니, 먹는 게 아니지. 힌트를 좀 더 줘 볼래? 어디에 있어?
– 모르겠어요.
– 살 수 있는 거야? 어디서 팔아?
– 네, 그런데 어디서 파는지 모르겠어요.
– 음, 그럼 뭐 하는 거야?
– 먹는 거예요.
– 오, 그럼 마트에 있겠네. 어떤 맛이야?
– 잘 모르겠어요.
– 어떻게 먹어?
– 물에 넣었다가 치즈를 넣어서 이렇게 돌돌 말아서 떡볶이를 만들어 먹어요.
– 음, 물에 넣는 건 아니지만, 혹시 또띠아? 둥근 모양이야?
– 네, 둥근데, 또띠아가 뭐예요?
– 엄마가 피자를 만들어 줄 때 밑에 펴는 둥근 전 같은 거. 또는 안에 고기랑 야채를 넣은 뒤에 돌돌 말아서 브리또를 만들 때 쓰는 그거야.
– 또띠아가 아니에요. 튀겨서도 먹어요.
– 튀겨서 먹는다고… 칩인가? 아니면 만두피? 요만한 거?
– 아니요. 이렇게 얼굴만큼 커요.
– 어떤 색상이야?
– 하얀데 좀 투명해요.
– 그런데 너는 어디서 봤어?
– 티비에서 나왔어요. 떡볶이도 해 먹고, 튀겨서 과자처럼 먹기도 하고…
문답이 열 번쯤 오갔을 때, 녀석의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히기 시작했다. 이건 필경 작정하고 하는 스무고개 게임이 아니었고, 아이는 애간장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 엄마가 못 맞혀서 속상하지? 엄마도 너무 맞히고 싶어. 아니면, 그림 한 번 그려 줄래?
아이가 아래의 그림을 들고 왔다.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아이가 그린 그림
– 혹시 야채를 싸서 먹기도 해?
– 네, 그렇게도 먹을 수 있는 것 같아요.
– 혹시 라이스 페이퍼?
– 아, 맞아요!
– 와, 그림을 정말 잘 그렸네! 딱 보니 알겠네!
그렇게 주말 동안 우리는 라이스 페이퍼를 사다가 튀겨서 설탕을 뿌려서 바삭바삭 맛난 간식으로 먹기도 하고, 고기와 채소를 넣어서 베트남쌈을 싸서 먹기도 했다. 이제 치즈 떡볶이도 꼭 만들어 먹어야겠단다. 치즈떡볶이를 그냥 사다가 먹지, 휴…
튀겨낸 라이스 페이퍼(인터넷에서 퍼 온 그림)
아이에게 라이스 페이퍼의 설명이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먼저, 여섯 음절이나 되는 긴 외래어 탓에, 아이는 그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영어를 거의 못하는 아이한테는 기억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아이한테 말해 줬다. "라이스는 쌀 또는 밥이야, 페이퍼는 종이고. 이 라이스 페이퍼를 봐. 쌀가루로 만든 종이 모양이잖아. 그래서 라이스 페이퍼라고 이름을 붙인 거야." 아이는 "오~"하며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코로나 탓도 해야겠다. 아이가 전에 베트남쌈을 안 먹어 본 건 아닌데, 최근 2년여 코로나로 인해 베트남 쌀국수집에 안 간 지가 어언 3년 가까이가 된다. 그동안 집에서 베트남 쌀국수를 시켜 먹기도 했지만, 베트남쌈은 다 싼 채로 배달되니 집에서 싸 먹을 기회가 없기도 했다. 코로나로 잃은 게 참 많은데, 성장기의 아이들은 다양한 경험치를 쌓을 충분한 기회를 잃은 것이다.
게다가 그 창의적인 텔레비전 영상의 잘못도 크다. 라이스 페이퍼의 창의적인 요리법을 다 나열해 보이면서, 막상 본연의 기능인 베트남쌈을 싸서 먹는 것만 안 보여준 것이다.(물론, 우리 아이가 놓쳤을 수도 있겠다.)
자신이 이해하는 세상을 완전하지 않은 언어 능력으로 표현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이 세상에 온 지 만 7년하고 6개월이 채 안 된 아이와, 아이의 다채로운 세상을 다 알지 못하는 데다가 상상력까지 빈약한 엄마의 소통에는 가끔 매우 어려운 과정이 따르기도 한다. 다행히 충만한 소통의 의지 덕분에 아직까지는 매번 성공한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번외로 몇 자 적으면, 아이가 그린 라이스 페이퍼를 참 잘 그렸다는 생각에, 모멘트에 "이게 뭘까요?"라고 퀴즈로 올렸는데 다양한 답이 나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에 대한 입증이라도 하듯, 공돌이 동창은 반도체라고 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후배는 도서관으로, 한창 논문을 쓰고 있는 대학원생은 '안경으로 보이는 원고지'로, 집 인테리어 중인 후배는 '집 뒷마당에 깔 돌의 모양', 농촌에 실사를 자주 나간 탓인지 사회학 전공자는 밭이라고 답했다. 또, DNA배열, 현미경을 통해 보는 세포, 현미경 기기, 고기 먹는 불판, 우주에서 바라본 모 행성, 쪽지를 떼 버린 메론, 키(소보치) 등등 다양한 답이 나왔지만, 모두 아쉽게도 오답이었다…
둘째의 표현력은 그 또래에서 가히 상위 1%인듯
전혀… ㅎㅎ 평균이거나 평균에 턱걸이하는 수준
반도체 웨이퍼晶圆으로 보였습니다. 첫눈에. 하하하하
그랬군요 ^^ 공순이가 아니라도 그렇게 보는군요
원형 구멍뒤에 보이는 건축물인줄 알았어요 ^^ 인생은 자기가 이해하는 세상으로 보이죠, 애들의 창의력이란 👍🏻
네, 우리도 다 그런 아이 때가 있었는데 말이죠.. 여니는 아직 창의력이 넘치는 거 같아요.
둘째 귀여워요. 하얀데 투명해요에서 저는 맞췄어요 하하. 라이스페이퍼, 쌀종이가 외우기는 쉽겠네요 ㅋㅋ/
신기해요. 저는 요즘 수업에서 애들이랑 진짜로 스무고개 twenty questions 를 해갖고 이게 삼주째 머리속에 맴돌고 있었어요. 들레님 글 제목을 보고 제가 꿈꾸는줄 알았습니다.
학습자 간의, 또는 선생과 학습자 간의 정보차를 이용한 어휘 학습 방법으로는 스무고개가 제격이죠.^^
글 읽다가 사진 보니 바로 알겠습니다. 그냥 따로 보면 옛날 연변티비 중앙티비 모든 프로가 다 끝나고 띠— 하는 소리와 함께 대기화면이 나오던게 생각납니다 ㅎㅎ
매트릭스, 방충망도 있었어요.
하하. 아이와의 대화를 모두 읽고, 그림을 보니 딱 알앗슴다. 그림 참 잘 그리네요.ㅋㅋㅋㅋ 근데 먼저 이미지를 보여주고 뭐냐고 물으면 진까 여러가지 답변이 나올거 같슴다. 모니터 좀 뒤로 하고 보면 수박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