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란 말이 무안할 정도로 글을 쓴지가 너무 오래됐다. 저번 글은 자그만치 1년 전… 사실 처음에는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려고 거창한 계획을 짜버리고 말았다가 자신이 세운 계획에 눌려서 글들이 요절된 경우(그래서 난 계획을 세우면 안된다). 다 내려놓고. 일단 두서 없이 시작하기로 했다.
소소한 일상 속에는 기록의 값어치가 있는 것들이 사실 꽤 많다. 네살 반이 지난 요즘의 일이다. 하루는 유치원에 다녀 와서는 갑자기 아이가 질문을 했다.

– 아빠, 쿠이심보(くいしんぼう, 일본어)가 무슨 뜻이야?
= 쿠이심보? 뭘 엄청 게걸스레 많이 먹는 사람을 '쿠이심보'라고 해. 우리말로는 '먹보'라고도 하지. 아! 근데 신기하지 않아? 우리말이랑 일본말에 다 '-보'가 들어가네?
– 그러네~
= 다른 '보'두 있다? 잘 우는 사람은 '울보', 몸에 털이 많은 사람은 '털보', 뚱뚱한 사람은 '뚱보'라구두 한다? 그면 잘 웃는 사람은 '웃보'인가? ㅎㅎㅎ
– 그럼 악기를 잘하면 '악보' 겠네? 하하하. '달리보;~~, 달리기를 잘하니까. 울이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니까 '크리스마스보'!!
= 그러네 그러네 ㅎㅎ. 울이는 이루카쇼(돌고래쇼)두 좋아하니까 '이르카쇼-보'야? 엄마는 늦잠 자기를 좋아하니까 '잠보' 아니야?
– 그면 아빠는 공부를 잘하니까 '공부보'~~~~~
= (얘가 벌써 알락방귀를 뀌네 ㅋㅋ) 그면 방귀를 많이 뀌면 '방귀보' 아니야? 아빠 고향에서는 방귀 많이 뀌는 사람을 '방기툴랑재'라구두 한다.
– 웃기~인다 하하하. 그면 똥을 많이 싸면 '응치보'~~! (응치[うんち]는 일본말 '똥'의 유아어) 아빠? 이렇게 '-보'로 시리토리 게-므(尻取りゲーム[말꼬리잇기])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봅보~~'겠네?
마지막은 '뽀뽀'해 주고 싶게 만드는 멘트.
낙엽 장수풍뎅이
아이는 가끔 네살 인생 유치원 삶에서 자기가 몰랐던 말들을 물어본다. 이번은 우연하게도 일본말의 명사 접미사 '-보'(ぼう[坊])와 우리말의 명사 접미사 '-보'가 소리가 비슷하다 보니 위와 같은 대화들이 오가게 되었다.
이 일본말도 상당한 생산성을 가지는 접미사지만, 우리말 역시 마찬가지다. 표준어로 남아 있는 것만 하여도 이미 나온 '먹보', '뚱보', '울보' 외에도 '곰보', '놀보', '꾀보', '바보' 등 많다. 그리고 나의 모어방언인 연변말에도 '똥딸보', '떡보' 등 말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표준어로 사전에 올라있지만 별로 쓰는 경우를 못들음)
일본말의 이 접미사는 '坊'이란 한자로 표기하는데 상당한 생산성을 가지는 말로서 많이 쓰인다. 진짜 한자 坊의 뜻과도 관계되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소리만 비슷해서 갖다 붙인건지. 坊 자체는 벽이나 그와 비슷한 '막는(障)' 역할을 하는 방어용의 물체를 뜻하는데, 당나라 수도 장안의 도시계획인 街坊制가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도시 내부를 큰 블록들로 나눠서 그 블록마다는 밤에 출입금지하고 백성들을 관리했던 것(요즘 국내 小区들이 작은 街坊이 돼버린거네..). 이 제도는 8세기의 일본 수도 건설에도 도입된다. 하여튼 지명으로 사람을 에둘러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니 소리만 빌린 표기가 아니라 한자의 뜻 자체를 가져왔을 수도 있겠다(천황이나 후궁들을 **院이라 부르는 등).
우리말 '-보'의 어원을 뭘까? 고유어인지 한자어인지도 애매모호한 이 말. 한자라면 '甫', '夫' 등이 비슷할까. 어찌야 됐든, 지금이라도 계속하여 명사나 용어의 어간 뒤에 붙어서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 내도 좋을 것 같은 정다운 우리말로 느껴지는 것은 틀림이 없다.
위에도 여럿 나왔듯이, 아이의 단순하면서도 순진한 언어적 발상처럼 말이다. 그런 창의력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감탄을 멈추지 못하는 한편,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 혹은 우리가 되찾으면 재미있을 것 또한 바로 이런게 아닐까 싶다. 아이의 마음으로 닥치는 대로 만들어 볼 판이다.
댄서는 춤보, 발명가는 만들보, 독서광은 책보, 작가는 글보, 촬영가는 찍보, 영화감독은 컷보 쯤 될까. 요즘 사람들이 똑같이 앓고 있는 중독.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한 우리는 폰보이고 컴보이고 겜보들이 아닌가.
중국에서 많이들 입에 오르는 '躺平'한(혹은 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세대는 '눕보'일까. 계층고착의 불안으로 끝없이 '内卷'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은 '말보'일까 '안말보'일까.
어떤가. 당신은 어떤 '보'가 떠오르는가?
[관련 글]
[육아언어학 일기] 00. 아이와 함께 하는 언어 탐구생활

우리 나무를 사랑하는 저희들은 다같이 나무보 입니다.
먹보를 우리는 사투리로 먹새군관 이렇게 불렀습니다.
먹새군관 ㅋㅋ 패기있습니다. 나무보 좋네요, 나무늘보만 되지 않는다면 ㅎㅎ
귀여운 애기네요.
언어에 대한 상상력과 구사력은 아빠를 냉큼 초월하겠습니다. 애와 담화하시면서 한층 더 언어의 진미에 도달하시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즐거운 대화 속에 엿보이는 학문의 깊이.
보기 좋습니다. 01기 기대합니다.
애가 선생입니다
만들보 글보 폰보 좋네요
홍보합시다!
하핫 애기와의 대화 넘 잼씀다, 앞부분. 저는 글보다운 글보가 되는 게 꿈임다. ‘먹보’, ‘뚱보’, ‘울보’ , ‘바보’ 는 일상이고.
고운글보 되세요 ㅋㅋ
애기 말이 참 귀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