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북쪽 하늘 아래, 눈을 감으면 선명하던 고향이 이제는 덤덤하다 못해 낯설다. 30년 세월을 건너 간 이곳은 내가 사랑했던 추억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니, 이제 왕청은 내가 기억하고 그리워하던 그 고향이 아니다.

['왕청대대마을'의 변화 및 고향집 옛사진]

나의 옛집은 '왕청대대 마을(지금의 왕청촌)'이라 불리던 곳, 바로 왕청인민광장 옆이었다. 노란 벽 위로 구새통(굴뚝)이 길게 솟아 있고, 그 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정겨운 단층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으며, 대대판공실과 인민광장이 이어지는 곳에는 사시장철 마르지 않는 자그마한 호수가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 집은 그중 네 번째 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인민광장과 맞닿은 맨 오른쪽 집부터 다섯 번째 줄까지 가주(家主)들의 이름을 지금도 술술 외울 수 있을 만큼 서로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정겨운 마을이었다. 큰 운동회라도 열리는 때면 각 진과 촌에서 선발되어 온 선수들이 우리 동네에 짐을 풀고 민박을 하곤 했다.

부엌 한쪽을 묵직하게 차지하고 있던 전통 조선족 쇠가마는 우리 집의 심장이었다. 무쇠솥 뚜껑 사이로 뿜어져 나오던 구수한 밥 냄새와 보글보글 끓던 된장국은 세상 무엇보다 풍요로웠다. 가난하고 후진 시절이었지만, 그 쇠가마와 그 옆에 나란히 걸린 '짼배가마'가 전해주는 온기만큼은 늘 따뜻했다. 그 곁에 정히 모셔져 있던 '식장(찬장)'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로망이자 자부심이었다. 가지런히 포개어 놓은 꽃밥소래와 달그럭거리던 꽃 사발들이 내는 맑은 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 소박한 그릇들에 담겼던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게 했던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기억속의 90년대 쌍둥이 광장 모습]

집 바로 옆 쌍둥이 광장은 내 유년의 전부였다. 한쪽은 겨울만 되면 은빛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했다. 중국 전역에서 얼음 질이 좋기로 소문나 전국 경기가 수시로 열리던 그곳에서, 날 선 스케이트가 얼음을 가르는 소리는 겨울 공기를 경쾌하게 깨우곤 했다. 그 옆 좀 더 넓은 광장은 매일같이 축구공을 쫓는 함성이 끊이지 않던 우리들의 터전이었고, 연변조선족자치구 성립 기념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광장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현내 방방곡곡, 각 진(鎭)과 촌(村)에서 선발 된 선수들이 모여들어 모래판에서는 씨름을 겨루고, 허공을 가르며 그네와 널뛰기를 했다. 육상과 축구, 배구 경기의 응원 소리로 온 왕청이 들썩이던, 민족의 자부심이 펄럭이던 축제의 장이었다.

배 속에서 신호가 오면 손에 신문지 한 장을 얼른 구겨 쥐고 광장 옆 재래식 공중 화장실로 번개같이 달려갔다. 문을 열면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와 함께 아래로 누렇고 시커먼 그것들이 다 들여다보여 발을 헛디딜까 아찔해지던 그곳. 위태롭게 걸쳐진 나무판자 두 개 위에 엉거주춤 두 다리를 한껏 벌리고 앉아 힘을 주던 그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 뒤에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원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쥐가 나는 다리를 참아가며 그 구겨왔던 신문지를 펼쳐서 읽던 그 지독하고도 정겨운 풍경은, 이제 막 늙어가는 나에게 웃음 짓게 만드는 유년의 조각이다.

시간이 나면 친구들과 함께 가야하 강가에 나가 반디질도 했다. 물살을 거슬러 반디그물을 대고 뒤에서 발로 돌을 뒤집거나 쿵쿵 구르면, 놀란 버들치랑 돌쫑개, 기차고기들이 그물에 걸려서 파닥거렸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로 강가 자갈밭에 돌을 괴어 솥을 걸고, 고추장을 듬뿍 풀어 넣고 내기풀을 뜯어 넣어 얼큰하게 매운탕을 끓여 먹으며 즐겼던 그 평화로운 시간들은 이제 사진 속에나 남아 있다.

왕청대대마을은 최신식 아파트로 모습을 바꿨고, 모든 것이 변해버린 고향에서 유일하게 나를 알아봐 주는 것은 왕청대교다. 소시적 그 모습 그대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리를 보니 가슴 한구석이 찡해온다. 저 다리는 내가 떠난 30년 동안 얼마나 많은 강물을 흘려보냈을까. 다리 너머 산줄기의 모양새도, 그 아래를 지나는 가야하의 물결도 예전 그대로인데, 그 풍경 속에 살던 사람들과 나의 기억만 갈 곳을 잃었다.

[기억속의 90년대 왕청2중 모습]

다리를 건너 마주하는 풍경은 이방인의 서글픔을 더한다. 다녔던 왕청제2소학교는 제3소학교와 합병하면서 그 자리는 없어진 지 오래고, 조선족 학생들의 배움터였던 5중(초중)과 2중(고중) 역시 학생 수가 적어지면서 통합되어 낯선 곳에 최신식 건물로 지어져 옮겨가는 바람에 옛 모습을 찾을 길 없다. 그리고 이제 학교에서는 우리말로 강의하지 않고 중국어로 강의한다고 한다. 

쌍둥이 인민광장 자리에는 이제 최신식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어 옛 터를 완전히 덮어버렸고, 광장은 '왕청체육공원'이라는 새 간판을 달고 시내와 동떨어진 외곽으로 밀려났다. 새로 지은 시설은 번듯하고 으리으리하지만, 흙먼지 날리며 땀 흘리던 옛날의 그 소박하고 뜨거운 활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매끈하게 정비된 바닥 위엔 차가운 정적만 흐를 뿐, 우리네 운동회의 왁자지껄한 함성은 과거 속에 묻혀버렸고, 체육공원 입구에 새겨져 있던 '왕청체육공원'이라는 우리말 글자마저 누군가 정으로 쪼아낸 듯 흔적도 없이 깎여 나갔다.

시내 장마당(시장)의 모습은 더욱 처참하다. 이제 장마당 어디를 가도 우리 조선족 장사꾼들은 보기 힘들고(대도시로 이주했거나, 해외에 나가 일함), 한족과 만족 장사꾼들이 전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음식조차 이젠 한족들이 만들어 팔고 있어서 조선족들의 그림자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어쩌다 조선족 장사꾼 아주머니를 만나면 반가워 상품의 질을 따지지도 않고 덥석 물건을 사고 마는 건, 그것이 고향에서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온기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유일하게 남은 누님 가족을 가끔 만나러 가지만, 변하지 않은 산 모양과 무심하게 흐르는 가야하 물줄기 앞에서 나는 자꾸만 길을 잃는다. 변치 않은 풍경이 오히려 더 큰 낯설음으로 다가오고, 지워진 이름들 사이로 나의 유년도 함께 지워져 간다.

[2016년 2월- 2중, 5중 새로 통합된 학교 모습]

이제 가야하의 물결에 비친 모습은 더 이상 내가 꿈에 그리던 따뜻한 고향이 아니다. 이 서글픈 낯설음을 마주하러 다시 발걸음을 옮길 일은 이제 앞으로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변치 않는 왕청대교를 뒤로하며, 나는 오늘 내 마음속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고향의 불빛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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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짼배가마'는 국을 덥히거나 밑굽이 평평한 가마(후라이팬)를 올려서 간단한 요리가 가능한 평평한 형태의 가마솥을 이르는 말인데 중국어 '탄젠빙궈(摊煎饼锅)'에서 유래한 발음으로, 현지 조선족들의 생활 속에 녹아든 독특한 언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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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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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변 어느지역이나 다 비슷하네요. 주로 인구가 류실되니 무엇이든 다 서서히 줄어들면서 사라지고 있는거 같습니다. 슬픈 현실, 다른 형태로 다른데서 새로 태어날수는 있으나, 우리들의 기억들은 이제 지워져 가고 있는거 같슴다. 돌아갈 이유가 줄어든다는 말 공감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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