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선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 오래전부터 지향해왔던 바다. 하지만 요즘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흔들리기 일쑤이다.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바라봤던 예전과는 달리 판단 기준이 맞는지부터 의심해 보게 되는 요즘이다. 한 인간이 악인인지를 우리는 그를 둘러싼 서사를 통해 알게 된다. 그를 묘사하는 얄팍한 서사만으로 어떤 인간을 악인으로 규정할 때도 있다. 바로 그 서사에 대한 믿음을 요즘은 경계한다. 이로 인한 맹목적인 믿음이 낳은 판단 오류는 자칫 위험을 동반함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선, 남에게는 악
남 일에 진심인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특히 연예인들이 그 ‘남’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너무 굳게 믿은 나머지 ‘남’에게 서슴없이 잔인해진다. 뉴스에 어느 연예인이 학폭 이슈가 터지만 심증만으로 그 연예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사건의 전말이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았고 조사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진실 여부를 떠나 심증만으로 괴롭힘을 감행한다.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고 보여지는 것 만으로 다 알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악인이라 믿는 것을 처단하기 위해 악행을 반복하는 아이러니, 스스로 그런 함정에 빠지기보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타인을 쉽게 악마화하지 않는 훈련의 필요성을 생각해 볼 때이다.
//길 위의 악
‘한블리(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주로 너튜브에서 모음집을 찾아보는 편인데 고구마의 꽉 막힘과 뚜껑 열림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자꾸 찾아보게 된다. 미리미리 운전 상식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언젠가 일어날 수도 있는 운전 사고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여러모로 득이 되는 프로그램이라 좋았지만 보다 보니 길 위의 ‘악’에 서늘함을 느끼는 순간도 적지 않았다. 음주운전, 뺑소니, 교통 법규 무시, 보복 운전 등은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고들이었고 가해자들은 생각 이상으로 적반하장이고 후안무치했다. 블랙박스는 악이 도사린 장면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믿기지 않을 만큼 가히 충격적이다.
무지한데 이기적인 것도 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이 두렵게 느껴진다. 평소의 가해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차치하고 순간의 ‘악’한 선택이 재앙을 불러온 것이다. 누구나 때때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잊지 않는 것, 그렇게 선과 악을 넘나들면서 균형을 찾는 일에 존재의 몫을 다하는 것 아닐까.
//법의 ‘유연성’
범죄 자체는 분명히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개인의 사정과 심리적 요인들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악행’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복잡한 사서를 발견하게 된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 심리적 고통 속에서 자신의 통제력을 잃은 사람, 극심한 경제적 압박 속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사람, 그들의 범죄는 복잡한 사회적, 심리적 상황 속에서 빚어진 결과인 경우가 많다. 이런 맥락에서 법정은 그들의 고통과 범행의 불가피함을 참작해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범죄자가 자신의 가혹한 환경이나 어려움을 제시하며 동정을 호소하면서 형량을 줄이는 수단으로 써먹을 때도 있다. 심신미약이 감형의 이유가 되는 사례들도 있다. 법의 본질은 같지만 후자에 찝찝함이 남는 이유는 왜 일까. 단편적인 서사만 볼 때 전자와 후자는 다를 게 없다. 모두 범죄이고, 모두 어쩔 수 없는 개인 사정으로 선처를 호소한다. 하지만 뭐가 문제일까. 정황 상 심증은 있는데 증거가 없어서 문제일까, 후자에 대한 굳어진 편견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또 흔들리는 수밖에 없다.
//매력적인 악역
문학 작품 속 악인들 역시 단순한 ‘나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인간적 결핍과 상처를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들의 악행 이면에 어찌할 수 없는 고통과 결핍이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로 인해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그들의 행동이 옳다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동정하고 공감한다.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조커의 눈물, 가족을 위해 범죄에 빠져든 월터 화이트의 절규 속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그들의 선택에 이해와 동정을 느끼기는 것처럼. 악역에 매력적인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 도덕적 경계를 흐릴 수 있기에 위험하다는 지적도 있다.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이 악역의 내면 고통에 공감하는 만큼 그들이 저지른 범죄도 어느 정도 정당화되거나 용서 받을 여지가 생기며, 작품 속 공감이 현실로 이어질 때 범죄자의 비윤리적 행동을 오히려 옹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지적도 고민해 볼 가치는 있다. 하지만 작품과 현실은 별개의 문제로 간주해야 한다. 현실에 대한 우려를 작품으로 돌리는 것은 과하다. 응징할 수 없는 악이 있음을 인정하는, 손쉬운 비난을 넘어서는, 날카롭고도 섬세한 성찰이 깃든 작품도 있다. 이런 작품 속 악역들은 감히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비난 받을 게 두려워 홀로 숨기는, 그럼에도 엄연히 내 안에 도사린 욕망과 적개심, 증오 같은 불쾌한 감정과 마주하게 한다. 이런 경험은 자기 안의 불순한 생각들을 살피고 불의한 자신을 인정하며 스스로 용서하는 치유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악역의 행보가 어떠하든 간에 그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공감하는 것은 단순히 응징이 다가 아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경계에 서 있는 위태로운 존재들에게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느낀 악역의 매력이다.
//마치며
옳다고 믿었던 것을 재고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 실은 불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해보는 연습, 자신이 내렸던 판단과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일 또한 선으로 발휘하는 용기라고 믿어보면서 말이다.
ps: (스포일러 포함) ‘베테랑2’를 보고 왔다. 극 중 빌런에게는 흑화의 서사가 없다. 응징의 자격과 복수의 당위성 또한 스스로 부여한 것이지만 직업 정신을 빙자한 삐뚠 신념은 결국 철저히 부정 당한다. 영화는 빌린에게 ‘왜’를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흑화의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관람을 마무리했다. 나는 오히려 설명의 부재가 더 좋았다. 현 사회의 일면을 그대로 담아낸, 빌런에게 서사를 주지 않는 연출이 좋았다. ‘내가 옳으며 선하다’는 빌런과 ‘살인은 살인’이라는 형사의 대립으로 좀 더 쪼이는 맛을 살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살짝 남지만 영화는 재미졌다.
*생각에 불을 지펴준 책:
미세좌절의 시대, 장강명,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편, 문학동네, 2024
악인의 서사, 듀나 외 8명, 돌고래, 2023
썸네일 BY XMENJUNO
https://grafolio.ogq.me/project/detail/450ff33e20e9448388aae725abef73d2
노랑글방 위쳇계정도 운영하고 있답니다~. 많이많이 들러주세요~.
‘구독’과 ‘좋아요’는 사랑입니다. ^^
Norang Geulbang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