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종업원 대회에 참가했다.
적어도 나한테만은 딱 그 한 번 뿐이었다. 때는 6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차영감이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계속 건설 관리를 하기로 했고 둘째 이모부가 종합 지도원으로, 영철이가 창고장이 되였다. 숙모를 부기장으로 임명했고 이장근을 운전수 반장으로, 김영옥을 차장 반장으로 임명했다.
바로 경비실 앞에서 닛산 승용차의 부품을 군대들이 도둑질해 가는 것을 보고도 제지하지 않은 경비생 김용철(金勇哲)이를 해고한다고 선포했고 앞으로 차의 부품을 도둑 당하면 그 차의 운전수가 배상하고 경비생 차실이면 경비생이 배상한다고 했다. 운전수들끼리 다른 차의 부품을 훔치는 행위가 있었는데 그걸 제지하지 못해 하는 노릇이었다.
휘발유는 차장이 전표를 떼고 수익금에서 빼내며 차 정비에 들어간 모든 부품의 값도 수익금에서 빼낸다고 했다. 그리고 음주 운전을 단속하는데 운전수 반장과 차장 반장이 감독하라고 했다. 피로 운전도 감독하라고 했으나 완전히 근절할 뾰족한 수가 없다.
정류소에서 가끔 휘발유를 다른 사람에게 뽑아주는 현상을 근절하기 위해 휘발유 공급을 줄이기로 했다. 원래 나진ㅡ선봉 구간의 1회당 15키로던 것을 12키로로 했고 운전수와 차장이 부족한 형편에 새 인원을 받아들인다고 했으며 차장이 부족하면 잠시 철도 승무대의 처녀들을 빌려 쓴다고 했다.
회사 구내에서 건설 작업 때문에 늘 보는 얼굴들이었고 직업도 비슷했기에 실습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모든 일은 각 부문 책임자들의 지휘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착오를 범한 종업원들은 벌금 시키거나 해고하는 등 다른 규정도 이날 회의에서 공포했고 차영감이 전적으로 건설을 책임지고 버스 운행을 둘째 이모부가 관리하기로 했다.
5월에 이런 일이 있었다.
이장근의 차는 엔진을 대보수 해야 했는데 선봉군 홍의리에 있는 한 유명한 기능공 아바이를 청해 왔다. 수리 반장으로 용철이가 있는데도 굳이 청해 온 것은 차영감의 개인적인 좁은 소견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영감은 용철이와 나에 대해서 신임하지 않는 태도였는데 우리들의 기능을 아예 인정해 주지도 않았었다. 나는 몰라도 용철이는 엔진을 두 대나 대보수 했고 이상 없이 잘 뛰고 있는 데도 말이다.
용철이는 규격에 맞는 피스톤이 나온 후 조립해야 하겠다고 했지만 차영감은 기어이 지금 있는 규격이 큰 피스톤이라도 능히 조립할 수 있다고 하면서 고집을 부려 그 기능공 아바이를 청해 왔던 것이다.
피스톤을 버니어 캘리퍼스로 재어 보더니 확실히 지금의 실린더와 규격이 맞지 않게 좀 큰 것이었다. 그 것을 어디로 가져가더니 선반에 가공하여 엔진에 조립할 수 있게 깎았다고 한다.
용철이는 기상 천외의 그 말을 듣고 입을 딱 벌렸다. 아무리 설명해도 소귀에 경 읽기다. 무조건 된다는 것이다.
용철이는 설득하다 못해 그렇게 하는데 수긍하고 말았는데 조립해서 불과 20일만의 운행 중에 피스톤이 다 녹아 났다. 분해하고 보니 실린더 벽에 홈채기까지 많이 패워서 차영감이 더 고집하려 해도 안되었다.
이런 경우에 반드시 더수쇠해야 한다. 그리고 규격에 맞는 피스톤을 조립해 놓으면 이번과 같은 사고는 아예 있을 수도 없다.
이모부가 나와서 엔진을 중국에 보내서 더수쇠를 하고 아예 조립도 중국에서 다 하고 내와야겠다고 해서야 풍파가 가라앉았고 1주일만에 그 엔진을 차에 올리니 다시는 고장이 없었고 수명도 예견대로 1년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엔진은 수명이 보통 4년 정도 되었으나 정원을 배 이상이나 초과해서 실을 수밖에 없는 나진 버스의 경우 엔진은 수명이 1년이면 다 괜찮은 것이었고 또 제일 긴 것이기도 했다.
나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에서 부품이 없는 세례를 많이 겪어 왔는지라 비슷한 것만 있으면 그 수명이 얼마든지를 막론하고 억지로라도 맞추고 조립해서 쓰는데 습관이 되어 온 것 같았다. 그 열악한 조건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차영감의 고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립할 때 기능공 아바이와 넌지시 물어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바이, 그렇게 하면 얼마 쓸 수 있음둥?”
“2년 동안은 문제 없습니다.”
그러는 조선 사람을 두고 이모부는 항상 우리와 경계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차 수리에서는 조선 사람의 말을 절대 듣지 말라. 다 너희들 생각대로 해라.
무조건 된다는 조선 사람의 말은 우리 훈춘 식구들의 사고 범위 내에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후일 많은 일을 하면서 행동으로 될 수 없다는 도리를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엔진 사건이 조금 충격적이었다면 이날 오후의 일은 그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다 수리된 엔진을 다시 올려놓고 장근이의 213호 차에 앉아서 전기 장치들에 대해 점검하고 있는데 장근이가 석쉼한 음성으로 노래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바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내가 백두산 관광 가이드로 한국의 관광객들과 함께 많이 불러 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한국에서 나온 노래인데 한국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조선에서 어찌하여 한국 노래를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궁금증을 풀어야 했다.
“장그이 아저씨, 그 노래를 어떻게 부를 줄 알게 되었음까?”
“아~, 다 알고 있소.”
평양에서 있었던 제13회 세계 대학생축전 때 남조선 대표로 임숙영 양이 참가했으며 그때 그녀가 이 노래를 불렀고 그 후부터 조선에서 다 알게 된 노래라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불렀으며 또 나진에서는 많이는 아래 동네라고 했었다.
그 후부터 1년 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통일이라는 말을 가끔 들을 수 있었는데 나진에 있는 동안 오히려 우리 훈춘 식구들이 통일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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