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초에 싸구려 중고차를 한꺼번에 6대나 샀었다. 그 수리 작업은 뛸 데 없이 내가 맡아 보아야 한다. 

우리가 부품을 주문해 놓으면 한꺼번에 많이 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품 상점이 있었는데 훈춘 버스역 건너켠에 있었고 이름이 사통 부품상점, 옆에 수리소까지 끼고 있어 거기에 수리를 맡겼다.   

버스역앞의 네거리에서 남쪽 방향으로 나진에 곧추 갈수 있었으므로 일의 편리를 위해 아침마다 첫 코스로 사통에 나간다. 나진으로 보낼 물건을 사다가 사통에 집결해 놓고 사람도 거기에 모여 있다가 차에 물건을 싣고 사람이 타면 출발한다. 매일마다 우리 식구가 들낙거렸으므로 우리 사무실과 마찬가지였고 점심밥을 먹고나서 거기서 낮잠을 잘 때도 있었다. 

나진에 당분간 갈 수 없었으므로 이젠 완전한 인수원일 뿐이다. 구매 작업이 끝나면 차 여섯 대를 돌보아야 한다.   

엔진, 미션, 액슬을 다 점검하고 겉은 보기 좋게 도장했으며 타이어를 갈아 맞추고 운전실을 깨끗이 만들었다. 피뜩 보면 새차 같았다. 먼저 두 대를 내보냈고 넉 대를 계속해야 했다.   

삼복 철 무더위에 질식할 것만 같다. 올해에는 웬일인지 비도 잘 내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노천에서 하는 차 수리는 본때스럽게 해제낄 수 있었다. 부품을 사는데 필요한 돈이 딸려 잠간씩 미루기도 했지만 그래도 빨리 되여 한달 후 내가 다시 나진에 갈 때 그중 한대를 직접 몰고 갔었다.   

한달 동안 나진에 가지 못해 안달을 떨 새도 없었다. 집에서의 한달 간은 고향을 인식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두만강하류의 중, 러, 조 3국이 이웃하고 있는 중국 쪽이 내 고향이다. 훈춘이란 이름은 만주족어로 된 것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6키로 가면 두만강 서쪽 조선의 새별군을 넘볼 수 있고 남동으로 15키로 가면 육지로 연결된 러시야 땅을 볼 수 있다. 대반령은 두만강과 러시아 국경선 사이 좁은 구간에 위치해 있어서 세나라 국경선을 지척에 두고 있었다. 

일제 통치 시기에 여기에 두번째 상하이를 건설하려고 계획했었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이 수십 년동안 전해져 내려왔고 그만큼 지리적 위치가 좋고 자원도 풍부하다. 요즘에는 두만강을 개발하여 동북 아시아지역(중국, 러시아, 몽골, 조선, 한국, 일본 등 6개국)을 활성화시키려는 UNDP 개발 착상의 핵심 지역으로 되었다. 

한낱 시골에 불과했던 이곳은 포장 도로와 철도가 들어 왔으며 화력 발전소가 건설되고 시내 안이 불과 몇년 사이에 모습이 완전히 변하였다. 지금도 일제가 지어 놓은 집이 남아 있는 곳이 드문드문 보이기도 하지만 타향 살이 10여년에 크게 변한 고향의 거리는 내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되었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아들애를 오랜만에 데리고 놀러도 다녔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어린애의 마음은 나의 멍든 마음과 타락되어 가고있는 영혼을 위안해주는 제일 좋은 약이었다. 

낮시간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데리고 다녔다. 한번은 저녁에 기독교회에 간 적도 있었는데 조용하다가도 우렁차게 찬송가를 부르는 그곳이 궁금하고 신기했는지 자꾸 이것저것 캐물어서 미사에 지장이 될까봐 나와버렸었다.   

애는 머리가 총명했으며 그림을 잘 그렸고 하나를 배워주면 열을 터득하는 재간둥이였다. 그런 애한테 뭐나 다 보여줘야겠다고 생각되어 교회에 간 것이지 결코 내가 예수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나에게 신앙이 있다면 아들애의 미래, 바로 그것뿐이었다. 또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곧 바로 아들애의 존재였다. 어떤 일이 있든지 아들애만은 잘 키워야 한다는 의식이 나를 열심히 살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있는 터였다.    

한달 전부터 어머니의 친구이자 나의 소학교 담임 선생님이셨던 분이 늘 전화를 하여 왔는데 나와 그 집 딸을 성사시켜보려는 거였다. 결혼했던 적이 있었으나 애를 낳지 않았고 직업이 괜찮음에도 다른 돈벌이를 잘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집안 또한 나무랄 데가 없이 훌륭한 자리라고 할수 있는 혼담이었는데 여자는 나보다 두살 위였다. 

어머님들 사이에 말씀이 많이 오갔는지 둘 사이가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눈치여서 두달 사이에 데이트도 몇번 했었다. 연상의 여자와 결혼한 적이 있었던 나에게 있어서 다시 연상의 여자를 만나는 것이 못견디게 싫었고 마지막으로 애를 데리고 만나려 했을 때 만나주지 않았으므로 끝내 실망하고 말았다.   

내가 이혼한 후 처음 만난 여자였으며 그런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없을거라고 상상하리만큼 조건이 훌륭했으나 억지감이 들었고 더우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데는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미 금혼을 결심한지 오래되었지만 부모들의 성화에 마지 못해 응한 만남이었어도 새롭게 자기를 인식하는 시간을 모처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결혼하던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잘생긴 얼굴에 대학 졸업생이면 장가가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아니다. 여자들은 남자가 형편없이 못 생겼거나 혹은 장애자더라도 지어는 나이가 많은 영감태기일지라도 돈만 있으면 시집 가는 세월이 되었다. 돈이 곧 사랑이다. 

나의 이혼도 결과적으로는 돈 때문에 이루어진거 아니었던가. 내가 돈 없는 놈이라는 걸 그녀도 모를리 없건마는 대부분의 여자들과는 달리 돈보다도 사랑을 소중히 여길줄 아는 여자였으므로 오직 내가 사랑해줄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두집 사이는 너무나도 잘아는 사이었던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은 우선 내 문제라고 판단이 섰다. 돈만 아는 요즘 여자들한테 신물이 났고 그래서 여자들과 상면하면 자연히 마음가짐부터 비뚤어져 있었기에 좋게 대할 리 만무했다. 

이것은 참으로 천금 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이었고 알찬 공부였다. 때 늦은 후회도 해보았으나 오직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홧김에 서방질 한다 했다. 노래방 출입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사우나에도 가끔 다녔다. 이미 중국사람들의 머리 속에 사우나는 기생방과 같은 것으로 낙인이 찍혀있다. 샤워하고 나면  

“안마 하시지요?”  

하고 물어 오는데 안마가 곧바로 섹스다. 이미 사우나는 나에게 생소한 곳이 아니었다.   썩 오래 전에 벌써 알고 있었다. 

사우나에 출입하는 것이 술 먹은 뒤끝에 손님을 모시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로 되어버렸고 요즘은 형식을 바꾸어 머리방과 일반적인 목욕탕에도 몸파는 여자들이 나타났고 즉흥적으로 노래방에서 여자를 만나 호텔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호텔은 장사가 잘 안되는지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면 규정을 무시하면서 눈감아 주는 듯했고 호텔에 가는 경우와 사우나 쪽은 돈이 많이 필요했으나 머리방과 일반 목욕탕에서 여자들은 돈을 적게 받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사우나에 다니다가 후에는 돈이 적게 드는 일반 목욕탕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비용이 엄청 드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으나 인간의 본능인 식욕과 마찬가지로 밥 먹듯이 할 수는 없으나 한참 젊은 나이에 섹스 상대가 없을 경우 가혹한 인내를 고집하는 것보다는 자기 몸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는 보장해 주어야 된다고 자기 위안을 하고 만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짧은 시간에 끝내기를 원했는데 다른 손님을 더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려는 거였고 그만큼 돈을 벌 기회가 많아진다. 그랬기 때문에 번개 불에 콩 닦듯 섹스를 끝냈고 오래 동안 여자와 떨어져 사는 나 같은 경우 미처 흥분이 시작되기 전에 일을 끝내고 만다. 

돈 주고 하는 섹스는 그렇게 여자들이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데도 있었지만 어쨌든 자위를 하는 것보다는 자극이 더 좋았고 섹스를 끝낸 후에는 나는 남자다, 나는 사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고 허영심을 만족시킬 수 있었기에 좋았다. 

다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출입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어쨌든 여자들은 돈을 잘 벌고 있는듯 했고 그러면 남자들은 더 가난해지는 수밖에 없다. 성에 집착한다기보다 성때문에 방랑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지도 모를 일이었다. 쓸데 없는 잡념이 일순간이라도 사라지는 것이 좋았고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른다는 허망한 느낌도 나쁘지 않다.   

기분이 나쁠 때 찾았고 연길에 가면 친구들과 함께 다녔다. 친구들은 밖에서 기다리면서도 짧은 시간에나마 내가 자존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고 기어이 돈까지 내놓았다. 

나를 이해 해주는 마음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위안을 해주고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격려해주는 친구들이 또한 더없이 소중한 지기라는 것을 절감하게 한다. 내 혈육과 마찬가지로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였다.    

***

러시아 휘발유와 경유를 조선에 날라다 판다. 

러시아의 유조차는 블라디보스톡의 아르쫌에서 출발하여 장령자라고 부르는 중국측 통상구를 통과한 후 다시 두만강을 건너 나진에 간다. 두만강 하류 쪽에 러시아와 조선 두 나라를 이어 놓은 다리가 있었지만 그 것은 철교여서 사람과 자동차가 다니지 못했으므로 하루 사이에 삼국을 다니는 이 코스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 연유보다 값이 엄청 싸기때문에 중고 자동차와 같이 많은 마진을 볼 수 있는 좋은 장사였다. 장령자에 나가 마중하고 나진까지 한사람이 안내해 줘야 했는데 나는 그 일도 적지 않게 했다. 

로따와 로얼은 몇년 동안 러시아에서 지낸 적 있어서 러시아어를 어느 정도 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어 가이드 할 때 배워둔 서투른 영어로 내 의사를 나타냈지만 늘 다니는 사람들 중에 유라만이 나랑 영어로 통할뿐 기사와는 아예 의사 전달이 불가능했다. 

후에는 점차 러시아어도 조금 배웠다. 거기에다 영어, 중국어, 우리 말에다 손짓 몸짓으로 의사 소통이 겨우 되었다. 그랬지만 일하는 데는 그리 큰 지장이 없었다. 처음 몇번이 힘들었을 뿐이었다. 

러시아측 회사도 연유 장사를 우리와 거래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있는듯 했다. 1년후의 어느 하루 러시아측 회사 사장인 유라가 나진까지 가서 로따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김선생은 금닭이고 저는 금닭이 낳은 알을 받아 먹고 있습니다.”  

1년사이에 연유장사로 유라(나보다 한살 아래)는 괜찮게 돈을 벌었고 살림집도 한채 지었던 것이다. 원동 지역의 하쌍구에서 별장식 살림집 한채를 갖고 있으면 부자 행세를 한다고들 했다. 

한달 동안 세나라 국경 사이를 빈번히 오갔고 연길에도 자주 다녔기에 그 노정을 누계로 거의 5천키로나 기록하기까지 했다. 하루 사이에 두만강 교두(권하)까지 세번 갔다 온 적도 있으니 그 노고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는 동안에 8월 중순 쯤에 나의 신분증이 발급되어 훈춘을 떠난 지 16년 만에 다시 완전한 훈춘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되니 통행증 수속을 하기가 쉬워졌고 연말에 여권을 호적 소속인 훈춘에서 만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고향에서의 한달은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한달이었지만 물자 구입장소에 익숙해지고 많은 사람과 거래를 하게 되어 일하는 데 편리해졌으며 일의 능율도 눈에 뜨이게 높아지고 그만큼 나진의 회사는 초창기에 벌써 많은 이익이 따르고 있었으므로 제집일 같이 기뻤고 일할 수록 신났다. 

그러나 허리를 붙일 장소만 만나면 눕자마자 잠들었고 의자에 앉아서도 한참동안 코를 고는 새로운 습관도 생겨났는데 나진에 다니게 된 후로부터 코골기 안하던 사람이 코골기를 배워냈다고 할 수 있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나의 노고를 증명하고 있었다.   

드디어 기나긴 기다림 끝에 나진으로 갈 때가 왔다. 고향도 좋았지만 나진도 좋은 것을 어찌하랴. 훈춘과 대반령도 좋았지만 더욱 원시적 멋이 있는 저술령과 나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만큼 정이 들어 버렸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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