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은 나하고 인연이 너무나도 깊은 존재였다. 사람의 인생에 큰 상을 세 번(첫돌 생일 상, 결혼 상, 회갑 상) 받게 되는데 이미 두 상은 눈의 축복속에서 받아보았다.

연길에서 근무할 때 훈춘의 부모집에서 11월 말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결혼 일 며칠 전부터 큰 눈이 내려서 하마트면 눈에 막혀 훈춘에 오지 못할 번했고 처가에까지도 겨우 갔는데 눈 내리는 새벽에 큰 상을 받았었다.

다들 눈과 인연이 그렇게 깊은데 앞으로 잘 살게 될 거라고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식으로 축복해 줬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잘 살아 보았던 기억은 거의 없고 오히려 지독한 가난만이 숨막히게 누르고 있었다. 이혼 후 두번 째로 맞는 해였고 가난했던 지난 일을 검토해 볼 때가 되었다고 느껴지는 새해 눈 내리는 첫 날을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겠는 지를 고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사실 나진에 다니면서 진정 사회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고 머리 속에 어떤 환각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그 환각이 희미한 형태로만 보일뿐 분명하지 않아서 고민 중이었으며 앞으로 며칠 간 눈이 내릴 거라는 일기 예보를 들으면서 나진에 가지 못할 며칠 동안을 가지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팽이처럼 돌아치던 몸을 눕혀 놓고 있자니 답답하기만 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TV도 보는 둥 마는 둥, 오히려 눈 길을 걷는 것이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더 좋을상 싶다. 오늘 언제까지라도 훈춘 시내를 걸어서 돌아다니며 내 마음을 안착시켜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고 그렇잖으면 또 누군가와 니 죽고 내 살고 크게 싸우고 싶어질 거였다. 돌아다니다가 다리 힘이 풀리면 다방에라도 들어가서 쓸쓸한 노래를 주문한 뒤에 조용히 몇시간 동안 앉아있어 보리라.  

바람도 없는 푸근한 날에 눈을 맞으며 길을 걷는다. 새해 첫 날에 친구도 없고 아내도 없고 아무 동행도 없이 나 혼자서 눈 길을 걷는다. 

그것이 좋다.  

지난해에는 너무 힘들게 보냈다. 고독하다거나 외롭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집에 돌아오면 옷도 벗지 못한 채 쓰러져 잤었다. 나의 앞날이거나 가족의 미래에 대해서 심각히 생각해 볼 겨를이 없이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 오늘은 어느 누구의 영향도 없이 혼자서 열심히 생각만 해보리라.  

내가 중학교 때 우리 집은 잘 사는 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섯 식구 중에서 어른 세명은 다 생활비가 나왔고 할머니가 생활비 관리를 잘했기때문에 갖출 수 있을만한 걸 다 갖추고도 돈이 남아돌았다. 그때 당시는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사지 못했었다.

외갓집이 너무 지독하게 가난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가끔 두 외삼촌네 집에 조금씩 보내주군 했지만 그래도 돈이 남았었다. 아버지가 오랜 환자여서 약을 끊지 않았지만 약 값은 다 나라에서 대주었으므로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할머니도 풍습 관절염으로 오래동안 고생하다가 내가 고중 다닐 때부터 운신하기 힘들어했고 그때부터는 어머니가 생활비 관리를 맡기 시작했다.

내가 연길에서 학교 다니면서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학교에서의 모든 비용을 해결했었는데 집에서 돈이 딸리는듯한 느낌을 받지 못했었다. 문제는 내가 대학다닐 때부터인 것 같다. 방학에 집에 오면 아버지는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하신다.  

“니게 돈을 부치고 나면 집에선 한 달에 돼지고기 한 근도 못 먹는다.”  

한 근은 500g이다. 아무리 돈이 딸리기로 한달에 한 근도 못먹다니? 뭔가 잘못된 데가 있는 것 같았다.  

대학 3학년 째부터는 동생도 출근하게 되어 월급쟁이가 나를 내놓고 네 명이 다였다. 내가 제일 많이 쓸 때 매 달 두 사람의 월급을 쓰는 것과 맞먹었고 제일 적어서 두 사람의 월급이 집에 남게 되는데 그 돈으로 왜서 네 명의 생활비를 조절하지 못한단 말인가? 다른 집들은 둘이 벌어서 7명까지 산다는데 우리 집은 계속 마이너스라고 한다.

너무도 이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원체 손이 큰 분이셨다. 부조를 하는 것도 과학적으로 따지면서 하는 것이 기본이다. 조선족 사회에서 부조 돈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얼마 안되는 월급에서 한달 동안 이집 저집에 부조를 보내주고나면 조금밖에 남지 않는다. 부조 상대는 친척, 친구, 같은 기업소에 근무하는 동료들이고 명목은 돌생일 잔치, 결혼 잔치, 회갑 잔치, 그리고 상가집과 령도들과 친구들의 생일이다. 아무리 피한다해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부조해야 하고 최고 많을 때는 열 번 정도 된다.

80년대 말에 월급 수준이 80원 정도였고 부조 돈은 10~20원이었다. 10원짜리 부조를 네 번 하면 월급의 반이 빠져버린다. 부부가 맞벌이를 한다해도 한사람의 월급이 다 부조로 나가는 때가 있다. 지어 어떤 때는 부부의 월급을 다 밀어넣고도 모자랄 때가 있다. 신혼 부부인 경우에는 항상 돈때문에 걱정하였고 부조 돈을 내고나면 돌아올 줄 모르는거여서 부모님들께 손을 내미는 경우가 많았었다.

한마디로 조선족은 부조때문에 녹아나고있다. 신혼 부부는 돈을 좀씩 모으고 모은 돈으로 뭔가 갖춰놓는 재미로 살아야겠는데 부조때문에 돈을 모으기는커녕 죽 먹기도 힘든 살림을 하기 십상이다. 신혼 부부는 모든 부부들중에서 부조의 충격을 제일 세게 받고 있었기에 혼인 생활도 대해속의 일엽편주와 같이 가혹한 고험기를 겪는 것이다.

그럼 우리 부모의 경우는 어떤가?  

친척들 사이에 부조 돈이 너무 많이 나가고 간혹 돌아온다 해도 남기지 않고 다시 일부분씩 나누어준다. 예를 들어 외갓집에서 아버지 생일에 왔다가 돌아갈 때면 부조를 받았다가 되돌려 주었고 차비까지 대주었으므로 오히려 밑지는 장사를 하게 된다.

어머니는 그 외에도 돈이 얼마 있으면 얼마 쓰고 모자라면 꾸어서 쓰는 현명하지 못한 관리로 달마다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후에는 습관이 되어 그 빚이 쌓이고 쌓여서 어머니 힘으로는 도저히 갚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만큼 계획이라는게 없었고 한푼이라도 쪼개쓰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집의 형편은 날에 날마다 못해가고 있었다.

나의 결혼 때 부조 돈을 적지않게 받았었다. 그런데 원래 저금이 일전 한푼 없는 데다가 꾸어서 치르게 되었고 부조가 들어온 것을 아무런 계획없이 손이 나가는 대로 쓰게 되었으니 꾼돈 갚을 돈이 안남았고 빚에 빚이 쌓인 격이 되고 말았다.

생활비 관리에서 어머니는 정말 지혜가 너무나도 모자라는 분이셨다. 써도 되고 안 써도 될 때에는 쓰지 말아야겠는데 그럴 때일수록 더 쓰고 싶어하는 것이 어머니의 성질이다. 요즘 부조도 50원 하면 충분할것을 가지고 100원을 하며 100원 짜리 부조는 200원으로 한다. 우리 집은 그 때문에 못살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원인이 또 있었다. 동생은 공장에 출근하다가 입대하게 되고 군대에 간 다음부터 집의 돈을 뭉청뭉청 잘라 썼다. 제대한 후에는 정상적인 출근을 안하고 큰 재간도 없어 가지고 큰돈 벌 것처럼 사회에 나가 휘둥대더니 남에게 사기당하고 자동차 사고도 저질러 원래 돈없는 집을 더 큰 빚더미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아내 몰래 아무리 많은 돈을 보내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우리 집 돈 항아리는 어머니와 동생이라는 커다란 구멍으로 돈이 새 나가기를 정신없이 이어대고있는 판인데 이제 이 가정을 만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동생네 부부는 분가를 했지만 방세를 포함한 모든 비용을 어머니가 대주고있는 판이었다. 인생살이 30년이면 자수성가하고 한창 돈을 벌려고 열심히 뛰어 다녀야 할텐데 주는 돈으로 고이 먹고 놀고 한다. 우리 부모 세대들은 자식들을 너무 곱게만 길러주고 자립성이라는 걸 모르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할 일이 없다고 빈둥대는 남자들이 부지기수로 많은 지금에 와서 우리 부모들은 참답게 반성해 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부모들 중에도 이런 일 때문에 뉘우치는 부모들이 적다. 그만큼 그 시대에 공부를 못한 탓이겠고 나라의 평균주의 정책에 깊이 매장되어서 오히려 요즘의 경쟁 사회를 저주할뿐 돈 버는 방도를 찾아주기 힘들어하고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우리 아버지가 바로 그런 전형이었다.  

평생 병을 핑계로 건달 생활을 해온 아버지였다. 돈을 몹시 아끼는 아버지였지만 월급이 너무 적었고 병으로 기업소에 더는 출근을 못하게 되자 50이 안되는 나이에 벌써 노인네들과 어울려 카드도 놀고 문구(門球-게이트 볼)도 치면서 집일에는 까딱 손을 대지않고 있었다. 그런 습성이 동생한테도 전해 져서 집안의 무거운 일, 힘든 일을 어머니 혼자서 거의 할 지경이었다.

더욱 사람을 실망케 하는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공장에 다니면서 많은 손재간을 익혔었다. 아무리 중한 병을 앓는 사람이라도 자전거 수리 정도는 놀면서 해도 수입이 짭짤했지만 그 좋은 손재간을 썩혀가고 있으면서도 10여년 동안 놀기에만 열중했다. 그동안에 아무리 못벌어도 아파트 두채 정도는 살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포기했었다.

게다가 걸핏하면 성내고 어머니한테 손댔으며 가장 집물을 부수는 일도 꺼리낌없이 하는 일종 정신 질환도 앓고 있어 집식구들을 곤혹스럽게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우점이 없는것은 아니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을 고스란히 어머니한테 갖다 주었고 용돈이란 담배돈 밖에 없고 술은 거의 마시지 않고 있었다. 고생스럽게 돈을 대어 내가 대학까지 마칠 수 있게 했지만 내가 돈을 보내주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감추고 있어서 그런지 내가 집에 크게 보태주지 못하는데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을 품고 있기도 했다.  

내가 나진에 가기로 한 것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가이드 노릇을 해보면 돈이 잘 벌어지고 또 쉽게 돈이 나간다. 나는 천성이 가이드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고 보수적이어서 웃으면서 손님 주머니의 돈을 꺼내는 직업인 가이드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갖은 감언이설을 다 해대고 없는 웃음을 웃어야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노라면 자연히 자유 분방하고 활발한 성격으로 개조될 것 같았고 화술도 제고될 것 같았다.

책을 많이 보아와서 가이드의 통병인 거짓말을 많이 삼가했으므로 나의 해설은 지식적인 면이 많았고 너무 딱딱했기에 손님들은 나의 스타일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만큼 성격 개조와 화술의 제고에 많이 신경쓴 탓으로 감언이설과 속임수로 돈을 버는 가이드 직업에 적성이 맞지 않았으므로 큰 돈을 벌 수가 없었다.

후에는 점차 경험도 있게 되고 돈버는 요령을 익히게 되었는데 그것도 가이드 생활 4년만에야 있게 된 일이다. 성격도 많이 개조되었고 화술도 많이 제고되었으니 나의 최초의 목적에 도달했지만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연히 물러나야 하는 직업이었으므로 영원히 할 수는 없었고 늙어 죽을  때까지 벌어먹을 수 있는 기술 한두 가지를 배워 두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던 것이다.  

이모부한테서 조선의 정황을 조금씩 얻어들어서 조선의 차량이 형편없는 것이라는걸 알고 있었는데 우선 그런 차들로부터 시작해 배우면 간단한 것으로부터 쉽게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도 전공이려니와 실습했던 일도 있고 자동차와는 몇년 동안 담을 쌓고 살아왔지만 이제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까근하고 부지런한 내 천성까지 동원한다면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는 데 크게 걱정될 것도 없었다. 이혼해서 부모님들 곁에 돌아온 뒤 헐망한 찦차 한대를 사가지고 직접 운전도 하고 혼자서 이것저것 뜯고 맞추고 해보았다.

그러던 차 이모부한테서 입사 통지를 받았고 우선 몇개월  간 중고차 수리를 하다가 나진에 나가게 된 것인데 그 동안에 나의 계획대로 중국산 자동차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이럭저럭 대졸후 10년의 시간을 허비해 왔던것이다. 이제는 독립적으로 자동차에 관계된 아무 일이든지 해도 될 것 같은 자신이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한 해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일을 하든 지 먼저 꼭 어머니와 의논하는 습관이 있었다. 나이 들면서부터 뭐나 다 의논을 해오기에 버릇되어 버렸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생의 의견보다도 나의 건의를 잘 받아들였고 종래로 욕 한번 하지 않으셨으며 많이 격려해 주기도 했다. 이모부한테 청들어 뭐든 지 할 수 있게, 내가 돈을 벌 수 있게 설득하자는 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면 지금 맡겨진 일을 열심히 더 잘하는 것으로 더 큰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한 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회사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중국인들의 습관대로 나의 일을 세분한다면 적어도 세명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나는 적어도 세명이 해야할 일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한달에 최고로 출입국을 열번 이상 한적도 있고 달린 거리를 누계로 거의 5천키로까지 올린 적 있다. 나의 공헌을 감안해서 나의 자그마한 소원을 들어줄것이라는 확신을 하면서 은근히 기대감으로 온 몸에 새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새해는 나에게 더욱 지독한 가난을 가져다 주었고 그 보다도 마음속 깊이 아픈 상처를 남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눈길을 걸으면서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내 가슴에 새로운 희망이 움트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동경으로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나의 환각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듯 했다. 이제는 그 환각이 구체화되게 하고 현실로 다가오게 만들어야 한다.

중국에서는 신정에 국가 규정으로 하루만 휴일이었다. 주간 5일 근무제를 실시했으므로 토, 일 이틀 간이 휴무이고 신정 날에 이어서 3일간을 연속 놀아야 설을 쇠는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에 신정 전의 토, 일 이틀 동안 출근하고 신정 이튿날과 사흗날로 휴무를 미룬다.

이미 굳어진 습관대로  된지 오래다. 권하의 교두는 상례대로 4일부터 출근하게 되므로 우리는 이날에 나진으로 갈 수는 있다. 전제 조건이라면 여권이 있는 외에 출국 증명서를 별도로 받아야 하며 여권이 없는 사람은 새해의 첫 출근 날에 통행증을 다그쳐 수속해내야 하고 역시 출국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또 한가지 있다면 반드시 나진시 대외 사업국에서 발급한 초청장이 있어야 한다. 초청장이 없으면 두만강 건너 원정까지는 갈 수 있으나 원정 통행검사소에서 초청장이 없는 사람을 입국시키지 않았으므로 되돌아 와야 한다. 우리 식구들은 초청장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항상 월말에 다음달의 초청장을 다 만들어내어 출입국에 지장이 없도록 절대적으로 보장이 되어있었다.

며칠 전에 이모, 로얼, 용철이, 영철이, 나 다섯명의 상무 여권이 나왔는데 오전에 대외 사업 사무실에 가서 출국 증명서를 받아 왔고 택시 사건 때의 영철의 친구 차에 앉아서 다섯명이 먼저 나진으로 가기로 했다. 나머지 식구들의 통행증 수속에 필요한 모든 서류들은 내가 다 만들어서 수산물 식당의 주(周) 보스한테 주었고 이제 발급만 기다리면 되는 판이다.

주보스는 우리 식구들이 쑈싼둥(小山東)이라 불렀는데 나이가 나와 비슷한 한족 친구로 부모님 고향이 산동성(山東省)이어서 중국 습관대로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쑈싼둥은 우리가 통행증 수속때 해결하기 힘든 일들을 맡아하고 있었다. 특히 김위홍 부부는 호적이 연길에 있었는데 내가 지난해 연초에 통행증을 발급받을 때처럼 서류가 구전하지 못했으므로 통행증을 발급받는데 뒷문거래(조선에서 말하는 《줄타기》와 비슷한 일)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일을 쑈싼둥이 크게 힘들이지 않고 해놓을 수 있어 그냥 맡기고 있는것이다.

쑈싼둥은 식당에 필요한 수산물을 나진에서 실어왔는데 통행증 수속은 우리 훈춘 M공사 이름으로 하였고 초청장도 우리가 만들어 주었으므로 결국 서로 돕는 사이었고 나와는 개인적으로도 사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의 친구인 다른 식당의 박(朴) 보스한테서 소개받은 사람인데 전화 한통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와서 도와주는 좋은 친구였다.  

박보스도 간단히 소개한다. 중국에서는 석유와 석유 제품 판매를 국가에서 독점적으로 경영하고 있으며 석유 제품 판매를 책임진 소속 공사(회사)를 중국 석유 화학 공사라고 부르며 전국 각지 어느 곳에나 다 있다.

박보스는 중국 석유 화학공사 훈춘 지사에서 근무한 적 있으며 주로는 그 산하 주유소의 연유공급 일을 맡아했는데 지난해 우리가 나진에 연유를 실어 나를 때 그가 우리한테 다리를 놓아주었다. 또한 나진회사의 바야흐로 건설될 주유소에 필요한 주유기도 주문해 주어 많은 돈을 절약하게 해주었다. 버스에 필요한 오일을 대량으로 주문해 주었고 나진에서 콩기름 장사외에도 많은 장사를 하는 것도 우리가 도와 주었으므로 역시 서로 돕는 사이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었지만 로따와는 더없이 친근한 친구 관계였었다. 새해에는 주유소 건설 때 주유설비를 장치하는 전문 기능공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우리 회사의 이름으로 나진에 다니는 사람들 중 이 두명은 우리에게 가장 많이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고 로따의 도움으로 나진의 장사에서 일정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었다. 박보스는 지난해 연말부터 늘 자랑스럽게 나보고 이런 말을 해왔었다.  

“당신이 훈춘에 있으면서 왜 이 회장님한테 알리지도 않소?”  

그 후로는 만날 때마다 뚱스장(중국어로 《회장》이란 뜻)이라고 불러 주었다. 그리고 쑈싼둥도 부회장라고 불러주었다. 물론 농담으로 부르는 거였고 그들 두 보스와 친숙해 지면서 나의 일도 능율적으로 많이 할 수 있었고 늘 도움을 청해오던 터였다.  

권하의 교두까지는 가까스로 도착했다. 대반령에서는 두대의 불도저가 눈 치기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기타 구간과 마찬가지로 며칠 동안 내린 눈으로 하여 찦차 한대가 다닐만한 길만 뚫렸을 뿐이었다. 오후 두시 경이었는데 일전에 나진 쪽에도 마찬가지로 눈이 많이 내렸으니 역시 제설 작업이 한창이라 짐작되었다. 세시까지 한시간 동안 기다려서야 저술령의 눈을 다 치지 못해서 내일부터 출국이 가능하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쑈싼둥의 북경표 찦차를 빌렸다. 구소련의 《우와즈를 모방해 만든 이 차는 수입제 찦차와 비교해 볼 때 종합 성능이 형편없고 빨리 달리지는 못했지만 눈길에서는 모든 수입제 차를 뺨칠 지경으로 잘 달렸었다. 대반령 남쪽 산비탈에서 눈속에 처박힌 미쯔비시 찦차를 끌어내주었고 아무런 이상도 없이 교두에 도착했다. 오전에 나머지 식구들의 통행증을 쑈싼둥이 받아내왔고 내가 출국 증명서도 받아내온 뒤 한집 한집 다니면서 나진에 나갈 식구들을 실었었는데 영철이가 운전하고 그 외에 앉은 사람이 무려 8명이나 되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삽 두 자루도 준비했고 야채와 고기류를 실어서 눈길을 달리는 데는 오히려 유리했으나 실내가 비좁아서 야단이었다. 조수석에 위홍이는 설화를 안은 채 탔고 뒤자리에 로얼, 용철, 장송, 내가 앉은 후 이모와 외숙모가 남자들 사이에 끼워 앉았다.  

교두에서 내가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와 보니 금방 나진쪽에서 건너온 도요다 찦차가 눈속에 머리를 틀어박고 있는 것을 우리 식구들이 끌어내 주느라고 야단법석하고 있었다. 온 마당에 차가 두대 뿐이었고 건너온 사람한테서 다리 저쪽의 도로 상태를 물어봐야 한다.  

도요다에 탔던 사람은 캐나다 적 한국인이었다. 부드러운 서울 말투였는데 나진에서 복지 사업할 수 있는 일이 있겠는가 싶어 신정 전에 나갔다가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진에서 두만강 다리까지는 제설작업이 잘 되어서 두시간 만에 도착했다고 한다. 중국쪽에 넘어와 보니 눈을 치지 않았고 그 길로 기사가 좋은 차라고 자신만만해서 들어섰는데 그만 빠져버렸다면서 투덜대고 있었다.

두만강 다리까지의 이쪽 마당을 살펴보니 과연 도요다가 지나온 바퀴 자리밖에 없었다. 도요다는 바람에 날린 눈이 쌓인 곳에 빠져있었는데 우리 식구들이 삽으로 얼마간 길을 내고  밑의 눈도 파내었다. 그런 다음 북경 찦차가 앞에서 끌고 우리가 밀고 해서야 도요다는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종합 검사장만 빠져 나가면 그래도 찦차 정도는 마음대로 달릴 수 있게 제설 작업이 되어있다고 알려 주어서야 그 캐나다적 한국인은 찌프린 미간을 펴는 것이었다.  

두만강 다리 위의 눈도 중국 쪽은 치지 않았다. 바람에 많이 날렸기에 그런 대로 지나갈 수는 있었다. 원정의 입국 수속은 문제없었고 다시 아홉 명이 찦차에 탔다. 저술령 정상까지 몇백 미터의 거리가 남았을 때 맞은켠에 우유빛 승용차가 나타났다.

우리의 225호였다. 나진항 통검에서 수리비 대신 받아온 것을 신정 전에 번호를 받아놓고 쓰기 시작했었다. 로따가 춘일이와 함께 마중온 것이다. 여자들 세명이 승용차에 타고난 뒤 먼저 출발했고 우리가 그 뒤를 따라 나진까지 갔다.

그 험한 대반령과 저술령의 눈 길을 9명이 차 한대로 정복한 2000년 1월 5일, 오늘까지도 그 날을 고스란히 기억에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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