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안주머니에 벤이 적어준 메모지가 들어 있다. 그 번호가 어쩌면 십년 전의 루이스 앞으로 나를 데려다 줄 타임머신이 될지도 모른다.
그동안 루이스는 점점 따리의 어느 골목 갤러리에 걸린 정물화처럼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 오늘 벤과의 우연치 않은 만남과 대화로 그 정물화가 살아 움직이려고 한다. 교정에 윤문까지 끝낸 원고를 종심에서 반려 당했던 때처럼, 마음이 다시 심하게 어지럽다.
가끔 한 번씩 따리와 루이스가 떠오를 때면, 그 끝에는 언제나처럼 다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아이의 아빠이며, 나의 남편이다. 남편을 두고 ‘남의 편’이라고 농담들을 하지만, 그는 온전히 그리고 철두철미한 ‘내 편’이다. 온 세상이 나를 버린다 해도 아마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오래 전, 내가 갑자기 출판사를 그만두고 따리로 떠나 있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언제 오냐고 채근한 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날 아이를 데리고 공항에 나와 환한 얼굴로 내 짐을 받아주었고, 연애하던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내 백팩을 대신 메 주었다. 그때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울컥 눈물이 났던 기억이 있다. 그는 그 뒤로도 단 한번도 따리에서 내가 누구를 만났으며 무엇을 했는지 일절 묻지 않았다. 그는 내 마음을 잘 알지 못했고 캐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늘 내 곁의 멀지 않은 곳, 거기에 있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하다. 정기 수입 없이 프리랜서 작가로 서울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수필을 쓰고, 책을 낼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버지니아 울프나 나혜석이 부럽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런 내 편을 가졌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따리에 있을 때는 몰랐다. 지금도 다 아는 건 아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감사함이 더 커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때로 미안하다. 이 미안함은 말로 사과해서 풀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저 마음에 품고 사는 수밖에 없다.
됐고, 저녁 준비나 하자. 아이가 오늘 저녁은 꼭 된장국에 계란말이, 고등어구이를 먹겠다고 했었지. 국물을 만들 큰멸치와 다시마를 물에 담그고, 무우를 썰었다. 탁, 탁, 칼이 도마에 닿는 느낌이 생각보다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남편은 오늘 저녁에 뭘 먹을까. B도시의 단골 식당에서 혼자 면 한 그릇 시키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회사 사람들과 한잔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그가 잘 챙겨 먹고 있기를, 묻지 않는 사람의 끼니를 묻지 않고 비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아이를 먹이고 방으로 들여보낸 뒤,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왜 쓰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얼굴에 가는 주름이 늘고 수필집 두 권을 내고도 여전히 이 두 질문의 답을 다 찾지 못했다. 다만, 나름대로 결론을 지은 것들은 있다. 우선, TODO 리스트는 적는 것 자체가 의미라는 것. 인생은 거기 적힌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흔들리는 게 인생의 속성이라는 것.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살아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흔들림에서 생기는 반동과 힘을 어디에 쓸지가,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로는 따리에서 보낸 시간과 루이스가 진짜였던지 아닌지 아리송해질 때가 있다. 루이스가 정말 거기에 있었는지, 벤의 메모지가 내일도 가방 안주머니에 접힌 채 남아 있을지, 그 번호로 내가 정말 전화를 걸지, 새 수필집의 닫는 글이 며칠 안에 풀릴지 또 며칠을 끌지… 여전히 모르겠는 것 투성이다.
문득 아이의 방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익숙한 멜로디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
흐린 날도 화창한 날도 시린 날도
끼우고 나면 다 퍼즐이 될 거야”
나는 문득 세 번째 수필집의 닫는 글 제목을 뭐로 써야 할지가 떠올랐다.
노트북을 열고 빈 문서를 열었다. 커서가 깜빡인다.
“지금은 다 좋아 보여요.”
키보드를 두드렸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
“지금도 다 좋아 보여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내렸다. 루이스는 물줄기가 흔들리면 맛도 흔들린다고 했었다. 드립포트로 물줄기를 가늘게 조절하며 천천히 돌려 부었다. 가운데에서 시작해 바깥으로 한 번 원을 그리고 다시 안으로 돌아온다. 물이 커피 위로 차오르며 천천히 봉긋한 거품으로 부풀어 오른다. 고소하면서도 약간 쌉쌀한 향이 천천히 방 안에 퍼진다.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커피는 조금 썼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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