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밤을 보내고 나니 여름의 첫날-입하를 맞이하게 되었다. 5월 5일이었다. 이날부터 아랫집 2층 사무실의 벽체가 올라가기 시작했고 늄창 작업장의 지하실 건설 작업도 동시에 시작했으며 건설자들이 휴식실로 쓰던 허은희 어머니 집도 허물게 되었다. 그 자리에 주유기를 앉힐 작업실을 지어야 했던 것이다. 임시 건물의 동쪽 방을 휴식실로 쓰게 했다. 

이날 나는 선봉에 갔었다. 무역조의 최영복과 함께 항일 투사의 딸인 김 할머니를 나진에 모셔와야 했다. 최영복은 오래 전부터 로따와 거래했던 사람이고 초창기 때부터 회사의 무역 지도원으로 되었는데 부기를 오래 한 경력이 있었고 선봉에서 사업하던 토대로 선봉군 각 농장의 장사거리를 엄청 많이 끌어 왔었다. 선봉군 여러 농장의 중고차 판매는 전부 다 최영복이 받아 들였는데 실적이 아주 좋았고 지대 안의 기업소들과의 장사 거래도 더러 맡아 했는데 화술이 뛰어나고 임기 응변하는 재주가 있어서 초창기 때부터 많은 이익을 창조해낸 사람이다. 

일의 특수성으로 회사에 앉아 있을 때가 없이 거의 매일 외근에만 매달려 있었고 회사에 돌아오면 반드시 일거리를 맡아 가지고 왔었다. 수동식 교환 전화가 그에게는 큰 도움이 없었기에 늘 나진시와 선봉읍을 발이 닳도록 걸어 다녔는데 대체로 힘든 줄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타입이다. 술을 잘 마셨는데 취할 때가 많았고 위 탈이 생겨 며칠씩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에 큰 지장이 없이 능율적으로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소식통으로서 내가 나진에 있을 때 어마어마한 소식 몇 개도 그한테서 들었었다. 이를테면 서해 쪽에 매장량이 10억 톤 되는 유전 두 곳이 발견되고 수산물 자원을 보호하는 조치로 앞으로 3년 동안 나진 앞 바다에서 일체 수산물 생산을 금지한다, 양덕 고개 사고로 죽은 모든 이들에게 나라에서 장례식을 치러 준다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조선의 TV 방송은 조선 중앙 TV 방송국의 채널 하나밖에 시청할 수 없었고 라디오 방송과 신문 잡지들도 TV 방송과 마찬가지로 국내외의 소식들에 대해 보도하는 범위와 내용이 너무 적은 편이어서 정보 시대에 살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들과는 판이한 폐쇄 식의 생활 방식으로 사는 나라로 양덕 고개 기차 사고 때와 같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 소식을 아는 것이 아니고 전해 듣는 것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 정확성의 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충격적인 것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조선의 현황이라고 생각이 굳어버린 지 오래 되었고 구 소련의 3명의 과학자가 황금 3톤의 대가로 두 유전의 정확한 위치와 매장량에 대한 견해를 내놓겠다는 전해들은 소식에 불과했으나 점점 고갈되어 가는 물질적 자원때문에 극히 엄중한 경제난에 봉착한 조선의 형세를 놓고 말할 때 실로 사람들의 신경을 흥분시키고 정신을 분발시키는 강심제와도 같은 소식이다. 

최영복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조상의 나라가 어쩌면 잘 살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설레는 우리와는 달리 조선 사람들은 소식은 소식이고 자기가 사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태도와 마음을 가지는 것이 보통 일인데 최영복은 괜히 흥분을 하고 있었고 적어도 나진에서는 그와 같은 사람이 드물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왜냐하면 흥분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보적인 사상이 그만큼 안 받침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진에 있는 동안 멀리 앞을 내다볼 줄 알고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해 오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인간들을 몇몇을 보아왔지만 회사 내에서는 차영감 외에 최영복을 두번째로 발견하게 되었고 이 두 사람은 내가 종업원들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이었다. 

3년 간의 수산물 생산 금지라면 우리한테는 큰 충격이었다. 은행(중앙 은행 나진 지점)에서 조선 원으로 출금하고 그 돈을 외화로 환전해야 하는데 수산물 장사로 나진에 다니는 중국 사람들과의 환전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엄청난 자금난에 허덕이게 될 것이었다. 

이때 이미 500원짜리 고액권이 나왔고 제일 골칫거리이던 10원짜리와 50원짜리 지폐가 새 지폐로 바뀌어져 돈 붙히기 작업은 다 합쳐도 하루에 1시간 안으로 줄어들었으며 그래서 지폐를 묶어 놓은 후의 돈 다발의 체적도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계좌의 돈이 최고로 3천만이 출금되었을 때 봉고차 한대로 운반하던 일이 역사로 되고 말았으나 환전하지 못하는 돈은 금고에 넘쳐 났고 상대적으로 출금하기 쉬운 무역 은행(황금의 3각주은행)에 입금해 둘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담보로 무역 은행에서 외화 대부금을 내올 수 있었고 중국의 은행에 출금 통지서를 보내주면 우리가 중국에서 직접 인민폐를 받을 수 있어 편리한 점은 많았으나 그 돈은 일년 거래액의 10%도 안 되어서 자금난을 푸는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산물이 없이는 외화가 벌어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 때문에 절대적으로 금지하지는 못했고 조금 풀어놓은 후 절대적인 관리 조치를 강화하지 않는 모양인지 가을철부터는 중국의 수산물 장사꾼들이 다시 다니기 시작하고 우리의 자금난도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그러나 대기실 건설 중이던 여름철에는 실로 상상하기도 어려운 자금난을 겪었고 그래서 로따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듯 했다. 몇 년 동안의 거래와 지금은 회사의 사원으로서 최영복은 로따에게 적지 않는 돈을 벌게 해 주었고 로따를 위해 진심으로 열심히 일을 해 왔었다. 이제 로따는 대기실 건설의 시기를 빌어 지금도 선봉읍에 집을 잡고 있는 최영복에게 나진의 부지를 받아 살림집을 지어 주려는 결심을 내렸고 부지를 받는 데는 엄청난 빽이 필요했으나 그것이 없어 거의 두 달을 끌어오다가 마침내는 오늘 마지막 수단으로 선봉 행을 하라고 나에게 지시한 거였다. 

나는 지금도 김 할머니가 어느 항일 투사의 딸인지 모른다. 그리고 로따의 사촌 형님도 항일 투사라는 말을 들었지만 누구인지 모른다. 또한 김 할머니와 로따가 어떻게 되어 거래할 수 있었는지는 더욱 모르고 다만 항일 투사의 가족으로서 어디 통하는 데가 있다는 것으로만 추측했을 뿐이었으나 이미 몇 번 나진에 다녀간 김 할머니를 누님이라고 깍듯이 부르며 존경하는 로따의 언행으로부터 보통 가까운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 낼 수 있었다. 

며칠 전에도 나진에 오셨는데 그때 허물지 않았던 내 침실에서 《춘향전》을 보았고 《홍길동》도 보고 나서 오후에 선봉까지 내가 차로 모셔다 드렸다. 그 날 김 할머니는 대기실을 지은 자리가 명당 자리라고 거듭 치하했고 로따만한 애국자가 없다고 극구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 중에서 유독 표준적인 우리말을 하고 아주 예의있게 대하는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최영복은 선봉에 살고 있으면서도 얼마 전부터 비로소 김 할머니를 상대해 왔고 이내 좋은 말재주로 가까워졌다. 나진의 부지 위치를 눈독들인 최영복이 김 할머니가 한마디만 하면 성사될 줄 알고 로따와 의논한 것 같다. 로따는 전화로 김 할머니와 연락을 했고 선물로 새 배터리 두 개도 가져다 주라면서 차를 내주었던 것이다. 

나한테는 더없이 좋은 휴식 시간이 되는 하루였다. 운전하는 시간외에 세워두는 시간에 차에서 쪽 잠을 자 둘 수 있었다. 차에서 잠자는 건 이미 굳어진 습관으로 되었다. 어쩌다가 나들이 옷을 입었는데 머리도 씻고 수염도 깎은 뒤 즐겨 입는 가죽 점퍼를 입고 구두도 닦아 신었다. 

출발하기 전에 남연숙을 실었다. 은행에 볼 일이 있어 가야 한다면서 자기를 실어다 주고 선봉으로 가란다. 

“영도 선새임은 오늘 집에 들어가는가?” 

처음에 작업복 차림이 아닌 나를 보고 그렇게 묻던 남연숙이었다. 다들 나의 작업복 차림에 이상해하지 않았고 나들이 옷을 갈아 입었을 땐 거의 다 귀국했으므로 그렇게 묻는 것이 습관 되었고 

“오시느라 수고 했음다!” 

도 늘 듣는 인사말이었지만 요즘은 그 말을 들어 본지도 오래 되었다. 

“에구에구! 저렇게 좋은 남자한테 간나들이 다 눈이 메서 안 오는 거지. 내 젊었으믄 새끼고 머고 다 데지구(버리구) 따르겠다.” 

“흐흐, 이 노친네가 남자 생각에 미쳐 있구나. 그래 말카 둔 건(정해 두었거나 챙겨 둔 것) 없나?” 

내가 동혁이와 성사하지 못하고 계속 홀로 오누이 자식을 데리고 사는 남연숙이와는 늘 짙은 사투리와 반말로 얘기를 하는데 습관된지 오래다. 말을 해도 다 농담이다. 사무적인 것을 빼고는 농담하지 못해 안달을 떠는 남연숙이에게서 차영감 다음으로 풋풋한 인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말카둔 게 많다. 남자 생각에 미칠 새 없다. 그래 멋있는 남자가 아직도 색시 못 얻었단 말인가? 어째서 내가 미칠 새 없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으흐흐, 노친, 숱한 색시들을 갈아대면서 매일 장가가는데 왜 한사람에게만 매달려 살라는 거유? 나도 여자 생각에 미칠 새 없다!” 

“입은 살아서 말은 잘한다. 빨리 하나 붙잡아 와라. 새끼 거두는 게 있어야지.” 

겨우 마흔 살 좀 넘은 여자를 노친으로 부를 만큼 겉늙어 보였지만 좀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모든 조선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순박한 일면은 곳곳에서 보였다. 제 새끼도 서슴없이 팽개치고 남편도 무정하게 차버리는 조선족 여자들이 남의 새끼를 눈에 차할 리가 없건마는 남연숙은 그런 것도 모르고 나름대로 걱정해 주고 있다. 

“내게 돈이 많으면 몰라라. 그러나 언젠가는 나도 돈이 많아질게고 하나 잡게 될 거다!” 

나는 어느새 심각해져 있다. 

“이크, 그러니까 색시 못 잡지. 하루 장가는 고사하고 한 뉘 가지 못하겠다!” 

그러는 동안에 은행에 도착했다. 은행은 출입국 사업처 길 맞은켠에 있는 일제 때의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진에 있으면서 기차역과 은행, 그리고 많고 많은 민가가 일제 때의 건물이라는 걸 보아냈고 아직도 남아 있는 훈춘의 일제시기 건물보다 겉모양이 좀 깨끗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여기 은행에 올 때마다 훈춘 시내의 일제 때 건물을 떠올렸고 연변 각지에 있는 철교와 터널 양쪽에 아직도 잔존해 있는 또치까와 저술령 약수터 가까이에 있는 《檜嶺橋》라고 한자를 써놓은 다리를 떠올렸었다. 일제가 아무리 침략 역사를 부인하려 해도 견증물이 남아 있는데는 억지를 부리지 못할 거였고 두만강 건너 1차 이주를 한 피눈물의 역사를 안고 사는 우리들한테도 머리 숙이고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거라고 생각을 하게 하는 건물이다. 

최영복의 재촉을 들으며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최영복은 지난해 연말 굴포리에서 사간 차를 한번 봐주어야겠다고 말했다. 전기 장치가 시원치 않은 것 같은데 요즘 애먹는다고 했다. 그 차는 지난해 여섯 대 중의 하나였고 내가 나진까지 무진 애를 써서야 겨우 몰아 온 차였다. 물 호스가 조금 파열된 데로 물이 새였고 열 번 이상 물 보충을 하면서 겨우 도착시킨 차였다. 기사가 트랙터를 운전하던 사람인데 전기 장치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후일 내가 보았는데 배터리의 《-》단자 어스 케이블이 제대로 잇기지 않아서 발전 상태가 안 좋고 여러 가지 고장도 잇달아 생긴 거였는데 기사들 거의 다가 운전경력 수십 년이 되어서도 간단한 전기 고장을 수리하지 못하는데 대해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었다. 

차안에서 최영복은 내가 전혀 들은 적이 없는 인천 앞 바다에서 남북 군사 충돌이 있었던 얘기를 해주었다. 또 나진이 개방 도시로 된 후 지대를 두른 철조망을 통과하려다가 해군 병사가 감전되어 죽은 이야기도 했고, 은덕군의 장사도 종이돈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얘기에다가 집을 다 지은 후 자기네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먹자는 말도 했다. 하여튼 무수히 많은 얘기가 입을 열기만 하면 그칠 줄 모르고 나왔다. 싫증 나지도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귀를 기울이게 한다. 선봉까지의 20분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껴질 정도로 지루하지 않은 그의 얘기는 정말 듣기 좋았다. 

김 할머니네 집과 좀 떨어진 곳에 주차시켰다. 먼저 들어간 최영복이 한 남자를 데리고 나왔고 그 남자가 할머니의 아들이라고 곱게 인사하더니 배터리를 안고 갔다. 나진에 있는 동안 깍듯한 태도로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을 양덕 고개 사고 때 죽은 체신 운영국장 다음으로 두번째로 보게 되었다. 거의 다 반말에다가 건방진 태도였으며 처음 만나도 반말에 예의스럽지 못한 조선 사람들 중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한참 후에 차 옆에 오는 김 할머니를 보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나진시 인민 위원회 주차장까지 경쾌한 조선 음악을 들으며 도착했다. 할머니와 최영복이 국토 관리국에 들어가 있는 동안 처음엔 계속 노래를 듣다가 이내 잠들었다. 

인민 위원회는 역전동에 있었는데 서쪽으로 300미터 정도 되는 곳에 기차역이 있었고 길 건너에는 외국 기업으로 그때 당시 가장 컸던 연변 H그룹 나진 지사가 있었는데, 인민 위원회 주변은 대형 간판이 제일 많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우선 청사 바로 앞 벽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가 있었고 길 가운데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가 있고 H그룹 나진 지사 앞에는 

“3대혁명 + 주체사상 = 공산주의” 

라고 쓴 글발 앞에 손을 들고 서있는 김일성 주석의 모습을 그린 거폭의 그림이 있다. 

주차장에서 길 쪽을 보는 방향으로 차를 세우고 차안에서 바로 앞으로 이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머지 않은 곳의 길옆에 

“모든것은 항일유격대식으로!”

“3대혁명 붉은기 높이 추켜들고 총진격 앞으로!” 

“우리나라 사회주의제도 만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만세!” 

등의 대형 간판들도 있었다. 

우리 세대는 70년대에 소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길거리에서 간판을 더러 보면서 자랐으나 지금의 조선처럼 많은 투자를 들이지 않았던 탓인지 그때의 간판이 적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으며 나진 남산 호텔 광장 앞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를 조각한 대형탑과 

“21세기의 태양 김정일장군 만세!” 

를 조각한 대형 간판처럼 웅장한 기념비 같은 것은 더욱 보지 못했다. 나진의 간판이 나한테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는 독자들의 상상과 판단에 맡긴다. 

잠 잘 자고 나서 다시 음악을 틀었을 때 희색이 만면한 김 할머니와 최영복이 차에 돌아 왔고 새로 짓는 대기실의 동쪽 방향으로 먼 곳의 골짜기에 위치한 부지에도 가 보았다. 내가 검차 때문에 군수 동원부에 도장 찍으러 다녔는데 바로 옆에 있었다. 시내가 흐르는 조용한 곳이 정말 좋은 자리다. 회사에 돌아오니 점심 식사가 다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아랫집을 회사라고 하고 윗집을 수리소라고 하겠다. 이사를 한 다음 사실상 그렇게 되었다. 수동식 교환 전화도 아랫집을 여객 수송회사 대기실이라 했고 윗집을 여객 수송회사 수리소라고 대줘야 정확히 걸려 졌다. 

주방에서는 이모가 바삐 돌아치고 있었고 제수는 온돌에 누워 있었다. 상이 두개 갖추어져 있는 구석 쪽에 식모가 누워 앓고 있으니 꼴이 말이 아니다.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어쩌다 낮잠을 자보았다. 로따네 침실에 있던 김 할머니가 떠날 때가 되어서야 깨어났고 이모한테서 조선 원을 받아 들고 차에 올랐다. 부지 문제는 해결 받은 것 같았고 최영복은 김 할머니와 자주 전화 연락을 하기로 약속하면서 도와주어 고맙다는 인사도 하는 것이었다. 김 할머니를 집에까지 실어다 드리고 무역 은행 선봉지점에 가서 최영복이 약속해 놓은 대로 인민폐 몇 천 원을 환전해 가지고 돌아 왔다. 

사업용 차들은 다 이모가 관리하게 되어 있어서 키를 이모한테 가져다 주었다. 장걸이 방을 낮 시간에 사무실로 쓰고 있었는데 거기서 키를 받아들던 이모가 나를 옆방인 영철이 방까지 끌고 와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바와 같이 동생 부부의 문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니 동생네를 데려 오자고 했다. 이제 보니 색시가 자꾸 앓지, 로따가 음식을 썩 잘 잡숫지 않는다. 아무래도 색시는 돌려보내고 내가 해야겠다. 니 동생이 주방 일을 하는 걸 옆에서 못 보겠다. 다르게 생각 말라. 

“이런 일은 직접 갸하구 말할 거지 그래오?” 

-그래도 너하고 말해야지. 색시가 좀 나은 후에 집에 보내야겠다. 

“아재 마음대로 하는 일 가지고 괜히 그러네?” 

-아무리 마음 대로라 해도 말은 해놓고 봐야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주방 일을 하겠니? 

“대수 할게지므.” 

-정말 골이 아프다야, 어디서 하나 다시 구해와야겠다. 

이모는 나랑 아무런 구애 없이 얘기해 왔었다. 식구들 가운데서 그래도 마음놓고 욕할만한 정도까지 구애 없는 사람은 그래도 나밖에 없었다. 나를 걱정해 주고 아껴주는 마음은 있으나 내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할 때는 도대체 내 이모가 옳은 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이모는 분명히 동생 색시를 돌려보내려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을 불러오려는 결심을 하고 있다. 그 사람이 외숙모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이라면 이모의 생각에 뭔가 잘못된 데 있다. 아무리 식모를 바꾸어도 로따의 식성에 맞는 음식 솜씨를 가진 사람을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인가? 바꾸는 일만 거듭할 거면 동생 색시를 계속 두고 쓰는 게 옳은 일이지. 피곤하게 자꾸 옆 사람까지 들먹이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구미를 골고루 맞추려면 외숙모가 나와야 했다. 그런데 외숙모는 왜서 구정 후에 나오는 걸 거절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고 이내 동생 색시를 돌려보내려고 결심한 이모가 누굴 데려 오려는지 그것도 궁금했다. 하여튼 동생 부부는 큰 말썽을 부리지도 않고 로따의 눈에 났고 미워하면 끝까지 미워하는 그 등쌀에 동생 부부가 이제 더 지탱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제수가 좀 나으면 둘 다 보내자. 보낸 다음 다시 나진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지. 내가 혼자 그 등쌀을 감당하는 게 오히려 바람직한 일일지도 모른다. 

로따는 미워하던 사람을 다시 고와할 줄 몰랐다. 내가 나진에 나오기 전에 로따의 막내 처남이 나진에 나와 있었는데 이모는 우리 집에 오기만 하면 로따가 자기 동생을 너무 미워한다면서 안타까운 말들을 했었다. 

사람이란 완벽한 것이 없다. 영철이는 그 처남과 비교되지도 않는 사람이었지만 로따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처남은 내 동생처럼 운전 면허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차를 운전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라도 오래 동안 운전하지 않으면 서툴어지기 마련이다. 모든 면이 영철이보다 나았고 특별히 영리했던 그 처남은 로따의 미움 깨를 받다 못해 주눅이 들었고 일할 때 실수가 많이 생겼던 탓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 

어쩌다가 한번 차를 운전했는데 그만 사람을 쳐놓았다. 사소한 일로 욕먹기를 밥먹듯 하는 사람이 치료비까지 지불하고 차도 고장내었으니 날벼락이 안 떨어진대도 된 욕을 어느 정도 먹었는지는 가히 상상할만한 일이었다. 이모도 돈을 물 쓰듯 하는 자기 동생을 어쩔 수 없었는지 가끔은 욕지거리를 하다가도 불쌍한 생각이 들었는지 돈을 조금씩 쥐어주었고 일만은 깐지게 하는 동생을 귀여워하는 때도 있었다. 

매형이 입던 가죽 점퍼를 집에 둔지 오래되어 동생한테 주었는데 그 일 때문에 난리가 났고 끝내는 되찾아오는 역사를 치렀고 나중에는 시골에 있는 로따의 친척에게 보내 주었다 한다. 그렇게 매형의 미움을 받던 처남은 마침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어가고 말았다. 매형을 따라 러시아에 갔을 때 한번 크게 놀란 일을 겪으면서 매형과 함께 심장병을 얻었는데 매형과는 감히 말을 못하고 누나와 가슴이 갑갑하다는 말을 했지만 다들 귓등으로 흘러 보내고 치료를 등한시해서 나진에서 객사했었다. 

내가 나진에 오기 1년 전의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는데 훈춘에서 출발해 왕복에 30시간만에 시신을 운반해 놓고 난 뒤 로따는 죽어서도 애먹인다며 시신에 대고 욕했었다. 매형의 돈을 많이 후려내 쓴 것으로 하여 미움을 받던 나머지 처남은 저승 가는 길에서도 나이 아깝다는 매형의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로따의 그런 성미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동생 내외를 보낸 후 불원간에 나도 떠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거라는 판단이 자연히 서게 되었고 나를 어떻게 미워하는 지를 두고두고 보고 싶어졌다. 왜냐 하면 이 시기에 벌써 로따는 진짜 미워하는 욕을 나한테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게 만든 건 이모도 로따를 닮아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나는 로따와 동생 사이에서 시집살이를 면하게 될지라도 마음 편한 날을 보내기는 다 글러 먹었다. 그러나 그 것은 내가 원하지 않으면서도 겪어 보고 싶은 묘한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동생은 곤두섰던 신경을 겨우 눅잦히고 이틀 간 보라는 듯이 주방 일을 했다. 식사가 끝나면 형제가 같이 나가는 눈치를 알았는지 로따의 눈길이 부드러워 졌고 말투도 상냥해 졌다. 

나진의 외국인 투자자 가운데서 아무리 존경받는 인물일지라도 존경스럽지 못한 구석이 있었고 그 일면이 처조카 형제한테 보여진 후 어떤 불리한 국면이 생길까봐 걱정되었는지 겉으로는 타협의 언행으로 우리 형제를 달래주고 있었고 우리 형제는 예상치 않게 벌어질 번했던 싸움을 겨우 피면 했다. 이제 남은 일이란 동생 내외가 스스로 되돌아가고 다시 오지 않는 간단한 일뿐이었지만 서로의 가슴에 풀지 못할 옹이 맺히고 말았다. 

5월 7일. 쟈쟈가 시멘트 한차를 실어 내왔다. 

간밤에 귀국 준비를 마친 동생 내외는 돌아가는 쟈쟈의 차를 타고 무수한 응어리를 가슴에 안은 채 쓸쓸히 떠나고 말았다. 식구들 중에서 숙모가 첫 사람으로 해고된 후 두 번째로 장송의 아내가 떠나갔고 동생 내외가 세 번째로 해고되었다. 최영감은 나이가 많고 몸이 불편해서 집에서 중고차 수리나마 맡아보고 있었으므로 아직 퇴사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음은 도대체 누구의 차례겠는지? 

조선 종업원들 중 운전수와 차장, 경비들은 쩍하면 해고했는데 물론 원인이 있었다. 노동국에서 정책적인 간섭을 한다지만 초창기부터 파견장을 받고 정식 사원이 된 사람일지라도 기어이 해고하는 로따의 기세에 눌려 더는 상관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노동 지도원을 겸한 세포 비서의 일이 막중해졌으나 번마다 뒤처리가 깨끗했으며 후유증이 없었다. 

그러나 동생의 해고는 불과 입사 반년만에 있은 일이었고 입사가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해고도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굳이 이유라는 것이 있다면 첫째로 노동 계약이 없었고, 둘째로 로따가 용철이와 위홍이네와 조화롭게 지내지 않는 나에게 그들을 두고두고 쓸 수는 있어도 내 동생 지어는 나까지도 언젠가는 임의의 시간에 해고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꾸며낸 연극에 불과한 것이었다. 

떠나는 동생에게 앞으로 언제든지 오고 싶으면 나하고 말하라고 하는 로따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동생은 꼭 다시 올 거라고 대범하게 말해 놓고 떠나갔었다. 우리 형제는 투자자의 체면을 봐주는 입장에서 해고를 흔쾌히 받아 들였으나 마음 한 구석이 께름직한 무엇이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그 응어리를 풀 수도 물리칠 수도 없는 까마 아득한 나락에로 굴러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투자자로서 로따는 넓은 흉금이 있었다. 요즘 건설되는 나진 혁명사적관의 일로도 그 점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발전기를 30㎾ 짜리로 지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진행했고 비사 때문에 겪었던 불가사이한 일들도 없었던 것처럼 치부했다. 투자 일로 다병한 몸이면서도 정력적으로 사업을 했고 모든 적극적인 면들을 다 이용할 줄도 아는 성공적인 사업가이다. 

사업을 하다보면 남들과 척 지는 일도 가끔 생긴다. 거의 다 사업상의 일로 생긴 모순들이었고 뛰어난 솜씨로 무난히 해결하군 했었다. 

여기서 비사 때의 일을 다시 한번 보기로 하자. 

이미 은행의 지배인 자리에서 밀려난 원래의 지배인과 친구 사이로 가깝게 보냈다. 그 지배인의 말처럼 여객수송 회사는 거의 다 무현금 거래 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는 자금 유통이 원활해지도록 잘 보장을 해 줘야 하고 더욱이 다른 외국인 기업보다 언제나 더 많은 실적이 나오는 우리 회사를 중점적으로 보살펴 주어야 지대의 자금 활용이 좋아지게 된다. 그 정도로 우리 회사는 지대 안에서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계좌의 돈이 현금으로 출금되는 전제 조건이 성립되는 경우에만 회사의 무궁한 발전이 가능했고 지대의 건설에도 일정한 기여가 있게 된다. 

은행 업무에 숙맥이 아닌 사람이라면 우리 회사 같은 중점적인 기업에 대해 유통 관리를 잘 하는 것이 기본이란 점을 명기할 것이고 그 기본에 맞춰 업무를 진행 할 거였지만 새 지배인은 그렇지 못했다. 원래 지배인은 우리 회사의 출금을 잘 보장해 주었었다. 원래의 통화 과장도 

“여객수송 회사는 계좌의 돈이 없었으면 좋겠다.” 

는 말로 1년에 실적이 1억(50만$)도 넘어되는 우리 회사의 돈 거래 때문에 (그 시기에 제일 큰 거래 상대였다.) 혀를 끌끌 차면서 흔쾌히 사인을 했으며 영업실에서도 출금량이 많은 우리 회사에 가급적이면 고액권을 남겨 두었다가 지불하군 했었다. 은행 상하가 기본적인 업무 수준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사에서는 은행의 일부 사람들이 로따의 뇌물을 받아먹지 않았는 지에 대해 의심하고 지대의 현금이 형편없이 적은 데에 걸맞지 않게 출금이 잘 되는 우리 회사가 어떤 비정상적인 수단을 쓰고 있다고 가소롭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배인과 통화 과장이 억류되었고 로따도 그 때문에 불리어 갔다. 원래부터 정상적인 업무 상대 관계였으므로 범죄가 있을 리 없었고 지어는 티끌 만한 실책도 없었지만 원래의 지배인과 통화 과장은 파직을 면치 못했고 통화 과장은 억류된 동안 음료수 공급도 받지 못해 벽으로 흐르는 물방울을 핥아먹는 고역도 치렀다. 지배인은 요즘 제5건설 사업소에서 혁명화를 받고 있었는데 61세의 몸으로 노동자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은행 업무에 능란하지 못한 새 지배인은 출금 통지서에 사인할 때마다 부들부들 떨었고 드문히 은행에 잔고가 전혀 없어 애먹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우리 회사가 자금난에 허덕였고 잔고가 있음에도 사인해 주지 않아 출금이 어렵기로 말이 아니었다. 

로따는 가끔 비상 수단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 제일 쉬운 것이 버스를 세우는 것이었다. 연 며칠 우리 버스가 나가지 않으면 승객들의 아우성이 인민 위원회에 전달되었고 나중에는 은행의 출금 문제 때문이라는 걸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출금을 비준하라고 은행에 지시하는데 일이 그쯤 되면 다시 버스를 노선에 내 보냈었다. 이 방법이 몇 번은 효험을 보았고 나는 이해에 버스를 세우라는 로따의 지시를 여러 번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기사들이 투덜거리는 장면도 적지 않게 목격했었다. 

로따는 지대에서 사업하면서 언제나 《이기는 전쟁》을 했는데 가끔은 《지는 전쟁》도 했었다. 무자비하고 사정을 봐주지 않는 다른 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조선 종업원들을 괴롭히고 있었고 식구들 중에서도 유독 나만을 유난히 시달리게 만들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이중의 성격과 사업 태도가 다 갖추어져 있는데는 비난할 바가 못 되지만 과분하게 처조카를 쪽 놓는 일은 내키지 않았고 인격 중상을 하는 일도 못 참을 지경이었지만 나는 용케도 버텨 내었다. 

거의 1년 간을 더 버텨낸 자체가 이모부와 처조카 사이의 《무언의 전쟁》이었고 결과적으로 이모부가 처조카를 해고하는 사실로 낙착이 되었지만 그 사실 자체는 이모부가 친척 관계 해결에서 실패의 전쟁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나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다른 목적도 이룩할 수 있었으므로 아무런 미련도 없이 회사를 떠날 만 했다.

동생의 해고를 겪고 난 후에 나는 오히려 마음의 온정을 찾았고 습관대로 모든 일에 참견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기어이 밀고 나갔고 이모부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를 힐난하는 일이 적어지게 되었다. 욕 먹을 일이 점점 많아져가는 데도 불구하고 욕이 갑자기 적어지는 것은 왜서인지 내가 느끼고 있으면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로 되었고 그 때문에 로따가 시집살이하는 걸로 눈치 보이기도 했다. 

술상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이모한테서 키를 받아 가지고 안주동의 바다 가에서 드라이브를 즐겼다. 술자리를 피해 다니는 사람에게 술로 속을 풀지 못하더라도 즐기는 쪽으로 일을 하려 하는 것을 이모도 막지 않았고 내가 속을 푸는 일을 하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밤낮이 따로 없이 차를 주었다. 

나진 만의 동쪽 바닷가에서 한끝이 치들린 채 바다에 처박혀 있는 구소련의 잠수함과 서쪽 바닷가의 나진항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이제까지 나진에서 지내왔던 나날들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졌고 아내와의 옛일들도 되새겨 보았다. 당금 소학교에 입학하게 될 아들도 그려보았고 

“오빠!” 

를 부르며 환각 속에서 다가오는 원매와도 만났었다. 

나에게 있어서 안주동의 바닷가에서 가지는 한시간 정도의 사색의 여가는 만나기 조련찮은 즐겁고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다들 수산물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놓고 술을 한 잔 두 잔 기울일 때 비릿한 냄새에 푹 젖은 한적한 바닷가가 나를 동무해 주는 것이 더 좋았다. 

철조망이 막혀져 있지 않으면 그 깨끗한 바다에 뛰어 들어 한바탕 자맥질하고 싶은 충동을 얼마든지 행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일엽편주로 풍랑 세찬 바다에서 고독하게 허우적거리는 내가 언제쯤이면 여울에 올라와 피곤하지 않는 평범한 나날들을 보내게 될지 무척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그 여울에 닿는 데는 삿대와 노가 없는 나로서 순 손 힘으로 배를 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직도 손 힘이 엄청 부족한 것을 인식하게 되고 그 힘을 키우는 데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꺾이지 않는 신념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고 늘 자신을 격려했었다. 

그런 연고로 더 오래 있을 필요 없이 연말까지만 나진에 있는 것이 시간적으로 가장 적절하고 떠난 후에라도 내 힘을 키우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단히 마음을 잡고 나면 마음이 흥겨워 나고 다시 차를 출발시켜 돌아온다. 

오늘도 이상한 술상이 벌어 졌고 내 몸은 어느새 안주동의 바닷가에 나와 있었다. 

나는 한가지 일 때문에 굉장히 속 썩여 왔다. 무슨 일이나 닥치면 판단이 서지 않았고 그 당시에 과단하게 일 처리하는 판단력이 없었다. 무척 고민했고 그래서 두통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며칠을 고생하고 나서야 결론을 내리 군 했었는데 그것이 그만 습관으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생의 해고는 불 보듯 번한 일이어서 이미 각오하고 있었지만 시간적으로 오늘 떠나게 된 것을 두고 다시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정서조절을 잘 해두어 다음의 스트레스에 면역력을 키워두어야 했다. 

처음에 동생이 나진 행을 하게 된 것이 반년 전의 일이었다. 묘하게도 시간적으로 숙모와 똑같이 반 년 만에 해고되었다. 로따와 농담 삼아 

“나도 나진에 가기오!” 

하고 동생이 말하는 것을 들어 주었고 며칠 되지 않아서 나진으로 나가게 되고 차 수리에다가 샤시 작업과 그 밖의 자질구레한 일 같은 것을 했었다. 어쩌다가 중고차를 두 대 몰아 내갔고 도로 정비 때 부기 검증소에 지원 나간 것으로 운전을 조금 해 보았을 뿐이었다. 

지난 겨울에 우리의 크레인 차로 비파도에 가는 길 옆에 처박힌 중국 승용차를 건지는 작업을 하다가 크레인 차가 고장나서 선봉 쪽에 있는 제2건설 사업소에 수리를 부탁했는데 그때 동생이 몰고 갔었다. 거의 한 달만에 다 수리되어 가지러 갔을 때 휘발유와 탱크 뚜껑을 비롯해 여러 가지 부품들이 잃어져 차를 몰지 못하게 되어서 우리 형제는 따지고 든 적이 있다.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나와서 머지 않은 곳에 있는 군대들이 와서 훔쳐 갔는데 자기네들도 말리기 어려운 입장이었다면서 미안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 형제가 그 날 치를 떨다가 노선 버스에서 휘발유를 더러 받아 가지고 겨우 몰고 나진에 돌아 왔었다. 

그때 로따의 욕 또한 걸작이었다. 

“뛰는 버스를 세워 놓고 개지랄 했구나!” 

로따의 말인즉 하나는 서비스 업체가 손님을 무시하구 시간을 지체하는 무리를 저질렀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기사들에게 자꾸 휘발유 빼는 버릇을 굳혀 준다는 것이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욕설이었다. 

중국에 다녀간 분들은 아마 서비스 업체의 불친절과 예의스럽지 못한 언행을 많이 경험해 보셨을 것이다. 조선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서비스가 형편없었고 중국 보다 더 떨어져 있었다. 《손님은 황제》라는 표어를 높이 걸어 놓고도 고객에게 함부로 상스러운 말로 불친절을 베푸는 중국보다도 더 한심한 것이 조선의 서비스 업체이다. 

그렇다면 서비스 질을 그토록 중시하는 로따는 왜서 식사 시간이나 저녁 시간에 매점을 찾는 손님들을 마구 쫓아 버리는 것인가?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팔고 손님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일을 전혀 보지 못했고 손님을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을 방해한다면서 기어이 밖에서 다음 출근 시간까지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랬지만 물자가 결핍한 조선 사람들은 울분을 삼키면서라도 한두 시간 정도를 잘 기다려 주었다. 어떤 이들은 못사는 우리를 기시해도 너무 기시한다면서 자탄했겠지만 자동차 부품이라고는 우리 매점에서 마음대로 골라 살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마음속으로만 욕해 댔을 거였다. 자동차 부품에서만은 그때 당시 품종이 많은 것으로 나진에 한집뿐이어서 큰 소리 뻥뻥 치면서 배짱 장사를 하는 거였고 가격도 나름대로 정해져 있는 것이었기에 급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바가지를 쓰고 가는 판이었다. 그나저나 그런 본을 보여 주면서도 서비스에 대해 말하는 로따가 기막히게 한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몰고 갔던 88호를 다시 몰고 나진에 와서 휘발유를 가져다가 그 크레인 차를 몰아 오는 수도 있다. 그때 판단으로 버스를 세우고 휘발유를 좀 받아내는 일은 손님들도 이해해 줄 거고 88호로 나진 쪽을 한번 왕복하는 쪽이 시간적으로나 자금 면에서 다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던 것이다. 

묘한 것은 그때 선봉 쪽의 세 주유소에 전부다 휘발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벌써 거의 한달 동안 유조차로 선봉 쪽의 휘발유를 실어 나르지 못했는데 그때의 몇 달간은 나진시 전체가 휘발유 부족으로 많은 차들이 세워져 있었고 내가 선봉 정류소에 가서 먼저 차장들한테서 수익금을 받아내어 살수 있는 다른 하나의 방법이 행해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나 1전이라도 절약하는 로따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가급적이면 절약하는 쪽으로 일하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된 나였다. 

하다면 나진에 되돌아 와서 휘발유 갖고 가는 쪽으로 했더라면 로따의 반응 또한 어떠했을까? 그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개같은 새끼들이 휘발유 아까운 줄 모르고 망탕 차를 굴려댄다!” 

그런 욕이 차례 졌을 거였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지간에, 결과가 어떻든 지간에 거의 매일 그런 욕 사발이 떨어져서 습관이 되었고 면역이 되다시피 되었다. 

종래로 영철이를 욕하는 걸 보지 못했고 용철이와 위홍이한테 성이 상투 밑까지 치달아도 씩씩거릴 뿐 온전한 욕 한마디도 번지지 못하는데 왜서 우리 형제한테는 욕이 그렇게도 술술 잘 나오게 되어있는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를테면 자기 조카가 아니면 생리적 혹은 체질상 욕이 풀려 나오는 걸 조절할 수 없는 그 어떤 병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합병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병, 그것은 일종의 정신질환일 수도 있지 않을가. 그렇게 이해하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 욕하는 사람은 욕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귓등으로 흘려 보내면 되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동생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내가 연말까지 있게 되더라도 로따에게서 오는 스트레스를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황당한 기대까지 생겨나는 것이었다. 나의 판단을 들어보지 못하고 동생이 떠났지만 아무 시간에 떠난들 다 상관없었을 거라는 계산이 나오기도 했다. 

열아홉의 원매는 내가 추리판단을 끝낸 다음에 어쩔 수 없이 내 옆에 와 주었다. 내가 곤경에서 헤매고 있을 때면 항상 나를 격려해 주고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었다. 그러는 그녀가 고마웠고 지금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있는지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 싶어졌다. 그녀가 마지막 편지에 선물이라면서 보내준 노래 가사는 언제가도 잊어질 것 같지 않았다. 한국노래 《지나가는 비》였는데 슬픈 우리의 사랑을 기념할만한 노래여서 노래방에 갈 적마다 이 노래를 불렀었다. 운전하다가 이 노래를 부르면 바로 옆에 그녀가 앉아 있는 듯한 착각도 생겼었다. 

오늘의 밤바다는 참으로 좋았다. 

멀리 명멸하는 나진항의 불빛을 보면서 차에 앉아 담배 태우는 일이 오늘처럼 즐거운 적은 없었다. 이제 나는 내 앞에 가로막히는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하찮게 대하면서 부단히 풀어 나갈 것 같은 신심이 생겨난 것이었다. 마치도 세상살이하는 제일 큰 도리를 터득하기나 한 것처럼 기뻤고 지금의 생각을 가지고 10년 전쯤으로 되돌아 가보았으면 하는 허무한 생각도 가져 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기필코 다른 모습이었을 거라고 믿어마지 않으면서 바다 바람을 한껏 들이켰다. 게 다리를 뜯고 조갯살을 삼키는 것보다 더 후련한 노릇이었고 쓰거운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는 것보다 더 상쾌한 기분이다. 

나진의 밤 바다, 수없이 많이 보아 왔던 밤 바다 가운데서 그 날 밤 바다가 정녕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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