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피곤했던 몸과 마음이 20일 만에 다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한테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동안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앞으로 몇 달간 나진에서 더 배겨낼 수 있게 정신적인 힘도 키웠다. 

7월 5일 아침에 늄 재료를 만재한 쟈쟈의 차에 앉아 나진으로 출발했다. 원정에서 다 검사 마치고 나서 통검의 부탁으로 군관 한 명을 실었는데 혼자 적재함 쪽에 실어 두면 뭐든지 훔쳐낼 것 같아 할 수 없이 내가 적재함에 올라 탔다. 

고향이 강원도인 군관은 집이 군사 분계선 바로 옆에 있다고 했다. 입대한 지 8년이 되었고 아직 한 번도 집에 다녀오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집에서 생긴 한국산 《88》담배를 한 대 권했다. 원래 꽤나 독한 담배를 피우던 나였지만 지금은 점점 순한 담배 쪽으로 피우고 있고 가이드 생활 중에 많이 한국 담배 맛을 들여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독한 잎담배에 습관 된 조선 사람들의 입맛엔 한국 담배가 너무 슴슴하다. 피우는 것 같은 느낌마저도 없다면서 세 모금쯤 빨고는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나라 담배보다 많이 못하구만 하는 말을 잊지 않고 내 뱉었다. 

《우리 나라》란 무엇인가? 

나는 이 문제 때문에 너무도 많이 신경 써 왔다.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우리 나라는 중화 인민 공화국입니다.” 

하고 가르쳤었다.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항일 투쟁을 벌렸고 해방 전쟁에서 승리하고 토비 숙청을 하고 나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는데 이바지한 피와 땀으로 이 나라 주인된 자랑을 느껴야 한다고 배웠었다. 고중(고등학교)을 다닐 때까지 줄곧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았다. 그동안 다민족 국가에서 늘 볼 수 있는 민족 기시를 직접 경험했고 얻어맞고 들어온 손자 애를 어루쓸면서 

“제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 꼴이 이게 뭐냐!” 

하고 넉두리 하던 동네 할머니의 모습도 가끔 보아 왔지만 나라라는 개념이 아직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우리 나라》라는 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86년 대학에 입학할 때에 있은 아시안 게임 때부터라고나 할까. 88 올림픽을 유치할 정도로 경제력이 막강해진 내 조상의 나라가 나한테는 큰 관심이 되었다. 

대졸 후 백두산 가이드를 하면서 조건이 형편없이 차이나는 백두산 관광 시설을 두고 손님들이 불평 부릴 때마다 

“여기 백두산은 독립 운동가들이 수십년 간이나 피 흘리며 싸우던 곳입니다. 그네들의 고운 넋이 서려 있는 이 땅에 오셔서 불평 부린다면 투사들 낯에 침을 뱉고 먹칠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옷깃을 여미고 5분 동안 애도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달래고 나서 

“연변은 옛날의 북간도로서 이주민 1세가 정착했던 곳이고 독립 운동가들이 피로 지켜낸 땅일 뿐만 아니라 그 후예들인 우리 3세, 4세가 땀을 흘려 가꾸는 천혜의 땅으로서 여기 살고 있는 조선족은 이 땅을 자기 조국으로 알고 살고 있습니다.” 

라고 설명을 하여 변화되어 가는 조선족의 조국관을 이해 시켰었다. 

북경에서 가이드 할 때는 손님들의 언어 습관에 맞춰 한국을 《우리 나라》라고 곧잘 말했었다. 중국의 명, 청 시기와 이씨 조선 왕조 시기의 거의 비슷한 시간을 두고 이것저것 비교하면서 설명한 예를 보기로 하자. 

-여러분들께서 오늘 첫 코스로 가 보시게 될 명 13능 중의 유일한 발굴 묘인 정능의 주인은 명나라 13번째 황제인 주익균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신종이라 불렀는데 매일 술상을 벌려 놓고 파티를 조직했고 파티 후에는 반드시 취하고 취하고 나면 반드시 노하고 노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죽이는 역사에서 둘도 없는 폭군이고 주색만 일삼는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이조에 증병을 보내 주고 거북선 창시자인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의 척계광이 함께 바다에서 연합작전을 하게 해준 배려를 베푼 일이 있는 것으로 하여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가히 기념할만한 인물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때 우리 나라는 이조 14대왕 선조 시기였지요. 

선조의 어명으로 우리 나라 문화 유산의 하나인 《동의보감》이 편찬된 것도 그때 일이구요…

자연스럽게 해설해 나가는 중에 자연스레 번져지는 《우리 나라》였다. 만나는 한국인들에게서 《우리 나라》라는 말을 심심찮게 많이 들어 왔지만 조선에 다니면서부터는 얼마 들어 보지 못했다. 

내가 차영감과 최영복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나라》를 말하고 더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그 점이었다. 이제까지 《우리 나라》에 대해 말한 두 사람 외로 오늘 이 군관한테서 다시 《우리 나라》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다니면서 《우리 나라》가 아니고 《조국》 혹은 《조국 시간》 등으로 조선 사람의 언어 습관에 맞게 말을 나누었던 것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조국에 오셔서 큰 사업하시는 모양입니다.” 

“예, 큰 사업은 아니지만 자그마한 일을 하고 있지요.” 

군관의 틀을 버리지 않은 겸손스런 말투에 나는 경계심을 늦출 수 있었다. 

선봉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반말이 많이 섞인 나진 특유의 사투리 같은 걸 들어 보지 못했는데 어쩌다가 기분 좋은 대화를 했다는 것으로 하여 먼지를 먹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선봉읍에서 내리려던 군관이 쎄리곤 하나를 들고 내리려는 것을 보고는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왜 갖고 갑니까?” 

“이거 쓸 일이 있어서…” 

“아무런 얘기도 없이 그냥 가져가면 되는 거라는 말씀입니까?” 

“야-아, 하나만 좀 주시오. 이렇게 많은데…” 

“안됩니다. 놓고 내리시오!” 

“야-아, 야-아!” 

군관은 끝내 나진의 

《야-아, 야-아!》

를 내뱉고 말았다. 늄창 제작 때 먼지를 막기 위해 틈을 메우는 데는 많은 쎄리곤이 필요한데 늄 재료를 실을 때마다 몇 박스씩 싣고 다닌다. 어느 결에 그걸 꺼냈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나와 대화하는 중에 그 박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쎄리곤이라는 걸 안 것이지 박스 겉에 씌어진 영문을 알아보고 포장을 뜯은 것 같지는 않았다. 

작별 인사를 잊은 듯 하지 않으려고 그러는지, 아니면 무안해서인지 머리를 떨구고 길 옆에 서 있는 군관을 보면서 나는 쟈쟈에게 출발 신호를 했다. 

외국인들 차에 앉아서 《조국》을 거론하던 군관이 어떻게 보나 구별점이 있는 것 같았고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우리 나라》와 《조국》은 도대체 무엇인지 이제는 더 깊은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손에 쥐어진 쎄리곤을 유심히 뜯어보면서 나진까지 내내 생각했으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들 반가운 인사를 했다. 마당은 콜타르와 작은 돌을 섞은 혼합물로 포장을 해놓아 반듯하고 깨끗해 보였다. 늄 재료를 부린 후 쟈쟈는 그 길로 훈춘에 돌아가고 나는 오후에 수리소 쪽으로 올라 왔다. 

광수는 그때 215호를 운전했었는데 이상하게 오늘 나가지 않고 수리소 마당에 세워두고 있었다. 차에 올라가 보니 광수가 제일 뒷켠 좌석에 누워 신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어 보고 나서야 전염병인 《파라》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파라》라고 부르는 전염병은 열이 나고 배가 아프면서 사람을 정신 추지 못하게 하는 감기 고뿔 비슷한 병이었는데 여름에 많이 발생하고 전염된다고 한다. 약도 먹지 않고 열흘쯤 누워 땀을 내면 자연히 나아진다고 하면서 광수는 땡 볕에 세워 둔 버스에 계속 누워 있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경비실엔 계속 허은희가 있었고 대기실 주변 집짓기 공사가 다 끝난 뒤로 차영감도 와 있다고 한다. 아마 경비실 안방에서 오침 중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할 일 없이 저녁때까지 잡담하다가 회사에 내려오니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팔리지 않은 중고차를 몰고 저녁 시간에 동맹원들과 같이 잔디를 실어 오라는 로따의 지시가 떨어진 거다. 

안주동 쪽에 나진 경기장이 있는데 그 경기장 길 맞은 켠에 해양 공원이 있다. 청계동에서 흘러 내려오는 청계강이 바다에 흘러 드는 곳에 위치한 공원을 몇 년 동안 품을 들여 《청년 공원》이라 이름을 고치고 종합성적인 놀이터로 만든다고 하는데 이미 각 기업소의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어느 정도 새 모습으로 꾸며지고 있었고 거기서 생산한 잔디를 판다는 소식을 듣고 로따가 그걸 사기로 했던 것이다. 

대기실 앞의 넓은 부지에 화단을 만들고 꽃을 사다 심은 것이 전번 달 일인데 이제 화단 주변에 잔디까지 펴놓을 예산이었던 것이다.이틀 동안의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잔디를 실어 들였다. 동맹원들과 같이 하는 작업은 웬 일인지 늘 내 몫이다. 늄창 작업장 지하실 공사에 필요한 막돌도 동맹원 처녀들과 함께 수십 차 실어 날랐었다. 

정화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처녀들을 휘동하여 일을 착실히 해내었다. 나는 그의 지휘에 따라 차를 잘 대주기만 하면 되었다. 차영감과 외삼촌이 함께 잔디 펴는 일에 나도 끼어 들었다. 

공원에서 떠온 잔디를 잘 펴놓은 후 양수기로 하루 종일 물을 뿜어 놓아서야 잔디밭 공사가 끝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잔디를 깔지 않은 앞쪽에 대통로처럼 콜타르와 작은 돌 혼합물로 포장해 놓으니 대기실 서쪽 앞마당이 그럴 듯하게 되었다. 

평양에서 영화 찍기 위해 숱한 이름 있는 배우들이 나진에 왔는데 제작진이 움직일 때 필요한 교통 수단으로 우리 회사의 버스를 쓰게 되었다. 찍는 장소는 지대 안의 해안과 선봉 읍내였다. 배우들 중 어떤 이들이 투숙처인 역전 여관 앞에서 5전 짜리로 얼음을 사먹으려다가 난처해진 일들을 제작진을 따라 다닌 차장들이 종알대며 말해 주곤 했다. 나진의 시장에서 무엇이든 다 원으로 가격을 매겨 놓고 있었고 제일 싼 얼음이라도 5원이었으니 한달 월급이 백 원쯤 되는 배우들이 사먹을 계제가 못 되었다. 

얼음 파는 아지미가 공짜로 주더라고 그 차장이 깔깔대었다. 버스도 한 번 쓰면 적어도 3천 원이었지만 평양 행표로 100원짜리를 인민 위원회에 주었고 우리는 다시 인민 위원회에서 3천을 받았다. 평양에서 백 원이 엄청난 돈일 수는 있겠지만 나진에서는 휘발유 1키로도 사기 힘든 돈이었다. 100원으로 어떻게 3천 원을 대신할 수 있는지는 아무리 해도 이해 안 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영화 이름이 《붉은 댕기》라는 말을 듣고 제작진이 수개월 간 찍는 방대한 공사라니 그 영화가 무척 기대 되었고 그 영화를 우연하게 구정 때에 보게 되었으니 그때 받은 감수를 쓰는 일은 뒤로 미루기로 한다. 

우리 대기실 건설에 참여했던 70명의 건설자들은 수리소 동쪽켠의 산비탈에 새로 닦은 길 옆의 공사장으로 이동해 갔다. 그 공사는 나진 종합검사장 건설 건이었는데 그것만 건설되면 수입품이 도착했을 때 각 부문을 다니면서 사람 찾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차가 나진에 대이는 길로 바로 검사장에 들어가면 모든 부서의 사람들이 다 있는 가운데 검사도 빨리 끝날 거였다. 

짐꾼들도 두게 된다는데 부리었다가 다시 싣는 비용과 검사 비용은 물건 임자가 내게 되어 있고 문제있는 차는 주차비를 받아 내면서 며칠동안 처리결과를 기다리게 하고 기사도 검사장에서 주는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검사장 건설비용이 모자라는 형편에서 그런 문제차들에서 받아 낸 비용을 보태서 검사장을 완공한다는 거였다. 듣고보니 조선에서는 있음직한 일이었고 결심만 하면 바로 일을 내미는 조선사회에서 검사장 하나를 완전히 못 건설하는 지경까지는 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품어 보게 되었다. 

7월 16일은 월식이 생기는 날이었으나 흐려서 보지 못했다. 이 달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중국 방문에 이어 조선을 방문한 것과 같은 중대한 대사도 있었다. 

중국의 학교들에서는 여름 방학이 시작되어서 로따의 두 아들애와 외삼촌의 오누이 자식도 이때 나진에 놀러 갔었다. 새로 쓰기 시작한 부기실은 매점과 창문 하나를 사이 두고 있었는데 무더운 날 햇볕이 들지 않는 부기실이 너무 시원하고 널찍했기에 우리 이종 형제들은 저녁에 거기서 마작을 놀아 댔다. 2층에는 세포 비서와 정화의 사무실이 새롭게 꾸며져 있었고 사무실을 제외한 널찍한 홀이 회의 장소이자 우리가 마작 노는 또 하나의 장소이기도 했다. 

외숙모는 음식 솜씨를 남김 없이 발휘했다. 쟈쟈는 단속이 심한 가축의 생고기를 자동차의 도어와 스피어 타이어에 감춰 가지고 나왔고 외숙모는 그걸로 꼬치 구이를 만들었다. 저녁에 마당에 둘러앉아 숱불에 구워 먹는 꼬치구이의 맛이란 정말 좋았다. 대기실 주변 집짓기 공사가 이제 옥상 방수작업만 남았을 뿐 다른건 다 되어 있었고 식구들이 불어나면서 노는 일이 많아 졌다. 

회사 건설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로빠이와 쟈쟈 아버지, 그리고 영철이의 아내와 쟈쟈의 여자친구도 나진을 방문했다. 이종 형제들은 방학 기간에 집에 돌아갈 필요 없이 나진에서 시간을 보내면 되었다. 이날 로따의 둘째 아들이 무면허로 번호가 없는 닛산을 장마당 정류소까지 몰고 갔다가 바로 옆의 순찰대에게 몰수당했다. 세포 비서가 며칠 간 뛰어 다녀서야 찾아 올 수 있었다. 

매일 패치기였고 조금은 따분한 기분이 드는 늦여름이었다. 그러다가 장춘에 갔다 오라는 로따의 지시를 받고 서둘러 귀국했다. 장춘이라면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의 지금 이름이다. 나진 형타(금형) 공장에서 새차 한대를 주문했는데 나는 쟈쟈와 함께 직접 장춘의 공장에 가서 새차를 사오게 되었던 것이다. 

밤 열차를 타고 이튿날 아침 장춘에 도착했다. 우리 회사의 수출품 수속은 전부 다 훈춘의 Z 무역 회사에서 대리해 주고 있었는데 상품을 수출할 때 수속 절차가 명확하면 수출관세를 면제 받았고 그것은 수입의 일부분으로 되었다. 지난해 새차를 여러 대 판매했는데 수출 관세까지 포함하면 차 당 마진이 30%도 넘었다. 그런데 이번 걸음에 Z 무역 회사의 업무원과 동행하여 조사해 본 결과 수출 관세를 면제받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출 관세 쪽의 마진이 17%여서 신중히 고려해야 할 문제였으므로 전화로 훈춘에 있는 로얼에게 문의했다. 자동차 공장에서 독점적으로 수출시장을 소유하기 위해 직접 판매하는 데서만 수출관세 면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더니 그냥 사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마진이 15% 정도 남아도 괜찮은 장사였으나 연속 몇 곳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았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려는 차종을 만나지 못했다. 

휘발유 엔진을 쓰는 적재함 길이 4.2m 짜리 차였는데 중국 국내에서는 수요자가 적어 동남아시아거나 조선 같이 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나라들에서 주문한 것만큼밖에 생산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중계판매회사가 수백개나 되는 거리에서 겨우 우리가 찾는 차종이 있다는 조그마한 판매 회사를 찾아내었는데 자동차공장 산하 판매 회사에서 오늘 이 차종을 찾아내면 손에 장이라도 지질 것처럼 말하던 일이 상기되면서 믿어지질 않아 직접 차 가지러 가보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정말로 차 두 대를 인계받는 거였다. 판매회사의 기사가 차 한 대를 몰고 쟈쟈가 다른 한 대를 몰아 판매회사에까지 왔다. 두 차 중에서 괜찮은 것을 고른 다음 돈을 물고 휘발유를 만탱크하고 나서 귀로에 올랐다. 

고속도로라지만 시속을 60㎞밖에 볼 수 없었다. 새차여서 처음엔 아껴서 다루어야 한다. 두시간쯤 지나 고속도로를 내려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출발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 졌고 이제부터는 일반도로다. 한창 운전하던 쟈쟈가 내가 잠이 들까말까 할 때 길옆에 주차하는 거였다. 

쟈쟈는 어린 나이지만 산판에서 통나무를 실은 차를 4년이나 운전한 경험이 있어 어지간한 기사를 찜쪄 먹을 만한 운전술을 갖고 있었고 그런 쟈쟈와 같이 다니면서 나는 운전술이 무척 제고되었다. 쟈쟈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는데 수십키로에 한 번씩 주차시키고 뒤바퀴에 대고 오줌을 누는 것이다. 바퀴에 오줌이 묻으면 뭐 사고 안 친다나? 이번에도 오줌을 누려고 그러는 가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예 시동을 꺼버리고 핸들 위에 몸을 싣고 있었다. 

“왜 그래?” 

“여기서 자고 가기요!” 

중국어로 대화하는 게 얼마나 편한 일인지 모른다. 존대어도 거의 없고 우리 말로는 길게 해야 될 말을 짧은 말로 간단히 하면 의사소통이 된다. 

“니가 이쪽에 와서 좀 자라. 내가 운전할 게.” 

쟈쟈가 순순히 나하고 자리바꿈을 했다. 무면허라지만 지금은 연변 경내에 들어서는데 무인지경이 많고 깊은 밤인지라 단속이 무섭지 않다. 

새차는 그래도 새차다. 나진에 수십 대를 몰아 내가면서 겪었던 갖은 고생을 떠올리면서 신나게 몰아 댔다. 한 숨도 쉬지 않고 연길 공항과 가까운 주유소에까지 거의 300㎞를 운전했다. 잘 자고 일어 난 쟈쟈와 함께 주유를 마치고 연길 기차역 부근의 골목 길에 들어가 주차 시키고 잠에 빠져 버렸다. 

차에서 두 시간쯤 자고 나니 날이 다 밝아 있었다. 옆의 식당에 들어가 대충 아침을 먹고 물을 얻어 세수도 했다. 운전 시간을 따져 보니 장춘에서 연길까지 480㎞를 열 시간 왔다. 중간에 저녁 식사시간이 끼웠고 영 길도 몇 개 지났으니 정상적인 시간 범주였다.

우리 회사의 버스들은 다 중국에서 80년대 말에 생산한 거였다. 이장근이 몰던 213호의 판 스프링은 연길에서도 한 곳에서 밖에 살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걸 사기 위해 출근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흐리터분한 기분을 풀려고 캔 콜라를 한 개씩 마셨지만 정신이 나지 않았다. 흐지부지한 정신으로 겨우 출근 시간까지 버텨 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쟈쟈도 마찬가지였지만 계획대로 판 스프링을 사고나서 다시 출발했다. 

연길과 훈춘 사이의 첫 50㎞는 요즘 고속 도로 건설로 인해 길을 많이 에돌아 다녀야 했는데 잠이 딸린 우리는 짜증만 날뿐이었다. 평소에 한 시간이면 충분했던 그 구간을 세 시간이나 걸려서야 통과했고 나머지 60㎞는 길옆에 인가도 크게 없고 해서 담배 태우고 한담하면서 길을 재촉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쟈쟈 부모가 이혼한 것이었다. 요즘 짐 부릴 때 이상하게 짜증내고 패치기에도 가담하지 않고 혼자 묵묵히 술만 퍼마시고는 고린내 나는 발을 씻지 않은 채 쓰러져 자던 쟈쟈였다. 쟈쟈 아버지는 이혼한 후 갑갑한 마음을 풀려고 나진에 나갔다 온 거였다. 후에야 자세히 안 거지만 쟈쟈 엄마는 첫 사랑 연인과 재회한 후 그 남자가 가정이 있는데도 자기가 먼저 이혼하고 나서 동거 생활에 들어갔고 그 남자가 이혼하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참으로 기상천외한 현대판이라 할 수 있는 일이겠다. 요즘은 젊은 남녀만 이혼하는 세상이 아니다. 세상이 꼬인대도 어찌 이 정도에까지 꼬일 수 있단 말인가? 50대, 지어는 60대나 70대까지도 이혼율이 점차 올라가는 추세라니. 세상일이란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다. 쟈쟈의 여동생은 남자에게 미쳐버린 엄마가 돌봐 주지 않아 며칠씩 굶기가 일쑤였고 쟈쟈는 그러는 동생을 너무 안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엄마가 데리고 있겠다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가 부다. 

나는 내가 위안의 말이 궁색하다는 걸 고백하고 싶다. 쟈쟈를 위안하는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요즘 여자 친구와는 잘 지내느냐고 화제를 돌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쟈쟈가 침울하던 기분을 바꾸고 대번에 명랑해지는 것이었다. 

“어느 여자 친구를 말하는 거요?” 

“뭐라냐? 그럼 너한테 여럿이 있다는 소리야?” 

“형, 나한테 몇 명 있소! 전번의 여자 친구는 나랑 결혼할 여자요!” 

“어쭈, 이 동무가 하는 소릴 좀 봐. 남은 하나도 없는데 여럿이라니?” 

“그게 머 대수요? 요즘에 여자 친구가 하나뿐인 남자는 다 등신이라오.” 

“그럼 하나도 없는 건?” 

“그것도 역시 등신이지 머요?” 

“허허허… …” 

“하하하… …”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고 나니 잠기가 가신 듯 없어 졌고 배가 허기져 왔다. 마치 내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쟈쟈가 말했다. 

“요 앞에 물만두를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서 점심 먹고 가기오!” 

바로 내가 원매와 운명적인 재회를 했던 마을인 밀강이었다. 따져 보니 10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쟈쟈가 주차시킨 곳은 원매가 차에 오르던 바로 맞은 켠이었다. 조금 전엔 쟈쟈가 침울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침울해 졌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나는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보험비 사건을 겪은 후로 스트레스 푸는 좋은 방법을 훌륭하게 익혔고 면역도 면역이라 모든 욕들도 피할 수 있었지만 원매와의 이별은 항상 나를 울리고 19세 소녀의 모습을 떨쳐 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창문 밖으로 건너편을 하염없이 보면서 물만두를 먹네 마네 하는 나를 상관하지 않고 쟈쟈는 맥주 두 병을 후딱 해치웠고 물만두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역시 젊은 놈은 식성도 좋았다. 내가 한 그릇을 채 먹지 못하고 남긴 것까지 먹고 나서야 배에 좀 기별이 가는지 기분이 좋아 가지고 한잠 자고 떠나자는 것이었다. 손님이 별로 없는 시골의 온돌 식당이라 누워 잘 자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눕자마자 코를 고는 쟈쟈를 둬두고 나는 차에 올라 음악을 틀었다. 

쟈쟈가 요즘 유행곡을 장춘에서 샀는데 포장을 뜯지 않은 채로 있는 테이프를 밤새 들어 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내가 즐겨 듣는 노래가 한 곡 있었다. 제목이 《단신정가(單身情歌)》였는데 요즘 대학생들 속에서 널리 유행되는 노래로서 외삼촌의 아들이 나진에서 나보고 저녁마다 같은 숙소의 친구들끼리 이 노래를 합창으로 부른다고 했었다. 명년이면 졸업할 이종 동생은 지금 한창 연애에 들떠 있을 나이었지만 연애 경험이 있는 것 같지 않았고 그 대신 노래만은 무척 좋아하는 타입이어서 나랑 같이 드라이브도 하면서 노래 감상을 많이 했다. 그가 속소 친구들과 합창했다는 노래를 쟈쟈의 테이프에서 찾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수첩을 꺼내 가사를 베껴 두고 쟈쟈가 나올 때까지 그 노래만 들었다. 

사랑을 잡지 못하는 나는 항상 그녀를 놓치기만 하네. 

사랑을 위해 고군작전 하면서 쓴맛도 많이 보았어라. 

행복한 사람은 많은데 나는 그 속에 속하지 아니하고 

사랑을 잃은 사람 중에 나도 끼어 있다네. 

사랑을 하려면 상처 입는 걸 겁내지 말고 

하루 빨리 용기 내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단신(單身)과 이별해야 하리. 

외로운 사람은 많고 즐거운 사람이 적은데 

사랑에서 패배한 나만 남아 

쓸쓸히 혼자서 정가(情歌)를 부르고 있네. 

사랑의 쓴맛을 본 이는 많고 많지만 

나는 결코 제일 마지막 사람이 아닐 지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나와 함께 이 노래를 부르려는고? 

그렇고 그런 내용이었다. 

가사도 맘에 들었고 곡도 마음에 드는 쓸쓸한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게 되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부르고 있다. 원매를 떠올릴 때마다 《지나가는 비》와 《단신정가》를 마음속으로 부르는 것이 그 후 습관으로 되어 버렸다. 항상 외롭기만 하던 떠돌이 생활 속에서 노래만이 유일한 내 동무였고 그 동무가 있었기에 유쾌하지는 못할망정 착실한 하루 하루를 살아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Z 무역 회사의 업무원인 천용이가 나와서 수출품 수속을 해 주었다. 새차는 상품으로 나갈 때 번호판을 달지 않아도 되었다. 차를 살 때 붙여 놓은 종이로 된 임시 번호가 윈도우 글라스에 붙어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두만강 다리를 건너 원정 쪽에 가면 아무 번호판이나 달아 주어야 통과시켰으므로 다리 위에서 준비했던 번호판을 차 앞에만 달아 준다. 수속이 명확했으므로 통과하는데는 이상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나진에 도착하니 로따의 욕이 쏟아져 나왔다. 

“너 인제 그만 해봤으면 알겠는데, 응? 왜 기어이 수속하고 나오는 거니? 수속하지 않고 그냥 번호만 달고 나오면 수속비용을 남길 수 있지 않니? 차가 나진에 나오면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말이야.” 

Z 무역 회사의 천용이는 나의 소꿉 친구다. 한번에 백 수십 가지나 되는 자동차 부품을 내갈 때도 신고하지 않고 다니는 우리를 보면서 내놓고 하는 밀수라고 하면서 농담도 던지는 어리무던한 친구다. 같이 장령자로 다니면서 유조차 마중도 잘 해주었고 대리 업무를 착실히 잘 하는 사원으로 나진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로따의 말대로라면 중국 세관을 어렵게나마 넘을 수도 있었지만 규정대로 하려고만 생각한 나에게는 천용이에게 괜히 부담을 주게 되는 것 같았고 번호판을 단 채로 중고차 행세를 하면서 원정을 통과하여 나진에까지 도착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범주에서만은 수입차 수속이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었기에 예전 방법대로 모든 수속을 다 해놓았던 것이다. 

수속비용은 거의 천 원이 들고 대리 비용은 차 값의 1.5%라는 데 로따는 그 돈이 아까워서 하는 소리였다. 로따는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 후에 판매한 새 차들을 무 수속으로 내가지는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한테는 괜히 욕만 해댄 걸로밖에 되지 않는다. 잠깐 스톱했던 욕이 다시 풀려 나오기 시작하고 나는 나대로 침묵과 미소로 대처했다. 

형타 공장 지배인은 약속대로 양 한 마리를 보내 왔다. 차가 도착하면 한 턱 내겠다더니 진짜로 행동한 것이다. 새 차를 보면서 이리 쓸고 저리 만지고 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이게 정말 새 차 옳나?” 

“야따, 지배인 동지는 눈을 뒀다 어디에 씁니까? 보면 몰라요?” 

내가 반문하자 지배인은 두 눈을 슴벅이면서 

“너희들 멀리서 끌고 오느라 수고 많았다.” 

하였고 내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장춘에서 나진까지 미터에는 정확히 700㎞가 나와 있었으니 길에서 어떤 고생을 했으리라고 지배인도 생각하고 있으리라. 100㎞만 더 넣으면 나진에서 평양까지 거리인데 그렇게 조선 식으로 생각할 땐 정말 고생이 막심한 운전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양고기 꼬치 구이는 꼬치 구이 중에서 제일 맛있는 거다. 중국의 신강에 사는 소수 민족으로서 위글족이 즐겨 먹는 음식인데 연변에서는 수년 전에 조선족이 받아들이고 맛을 조금 고쳐 요즘은 전통 음식이 되다시피 됐다. 두만강 옆의 사회리에서 일 보러 나진에 왔던 부기장과 기사도 끼워서 몇 꼬치 잘 먹었다. 

사회리에서는 우리한테서 사간 차가 두 대 되고 휘발유도 종이돈으로 우리 걸 사갔는데 휘발유가 없는 것을 모르고 벌써 몇 번이나 헛탕을 치고 있는 거다. 수동식 교환 전화는 리 교환과 선봉 교환, 나중에 나진 교환을 거쳐야만 걸려지는데 성공율이 거의 제로다. 그 때문에 직접 다니면서 아까운 휘발유만 태워대고 있다. 양고기 말고도 낙지, 조개, 소라로 꼬치를 해 먹었고 오리 고기로도 해 먹었다. 

맨날 벌리는 술마당이다. 나는 먹기만 하고 이종 동생들을 데리고 마작을 놀았는데 놀이가 끝나서 잠을 자려할 때까지도 마당에서 꼬치 구이 하면서 술 마시는 식구들이 더러 있었다. 하루는 술이 거나해진 용철이를 보고 

“올라가 자기오.” 

하고 말했다가 트집 거는 듯한 대답을 들었었다. 

“가겠으면 혼자 갈 게지. 왜? 술을 마시지 말라는 거냐?” 

맨날 눈이 게슴츠레 해지고 혀 꼬부라지게 하는 쓰거운 술 마시는 일이 저렇게 좋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중국의 으뜸 술인 모태주는 역겨운 냄새와 쓴맛이 없는 명주로서 마시면 마실수록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이 더 깊어져 자꾸 마시고 싶다는 것을 대학 다닐 때 경험해서 알고 있으나 쓰디쓴 요즘 술 마시는 걸 언제나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나다. 술 마신 뒤끝이 알딸딸하고 기분이 둥둥 뜰 수도 있겠지만 쓴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을 때의 괴로움은 또 어찌 참아 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계절적으로는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당금이었지만 제일 무더운 삼복철이 바로 요즘이다. 윗동을 벗어 제끼고 마당에 앉아 먹는 일은 삼복철에 많이 생겼다. 요즘에는 이상하게 한밤중까지 파리도 없고 모기마저 다문 몇 마리라도 구경하기 힘든 고즈넉한 나진의 밤이 좋아서 꼬치 구이도 적잖게 해 먹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 식구들은 먹는 것은 집에서보다도 더 잘 먹었다. 지난해는 수산물을 걷어들이는 배가 있어 잘 먹었고, 금년은 꼬치 구이를 배 두드리며 먹어 주었다. 그런데 올해 제일 큰 유감은 그래도 먹거리였다. 다름아니라 지난해 맛을 들였던 참미역 회를 다시는 못먹어 봤던 것이다. 참미역의 굵은 부분만 뽑아 만든 회는 지난해 요리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는데 올해는 단 한번도 못먹어 봤으니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마작 놀지 않을 땐 경비실에 들어가 잡담으로 시간을 보낸다. 회사쪽의 낮 경비는 문은실이고 저녁경비는 재일교포로 조국에 돌아온 한영치영감과 조경화가 서고 있었다. 남수남은 수리소쪽에서 지난해 통근차를 몬적 있는 석건영감과 함께 저녁경비를 서고있다. 한영치영감은 말수가 적어 우리와 크게 말을 나누지 않았고 조경화는 종업원중에서 합작회사때부터 죽 따라 온 경력이 제일 긴 사원이어서 우리와 친숙했고 말거리도 많았다. 

인명사고를 친후 고생을 좀 했다. 단련대에서 나온후 먼저 수리소쪽에서 차 수리를 하다가 지금은 경비로 되었는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재미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우선 반말이 없는 존대어를 많이 사용하고 내가 궁금해하던 일들도 많이 들려주었는데 《춘향전》에서 춘향의 역을 맡았던 배우가 몽룡의 역을 맡았던 배우와 붙어다닌 일로 혁명화를 갔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남자는 유부남이었고 여자는 아직 결혼전이었는데 혁명화를 갔다 온후 계속 영화 배우로 일을 하고 있고 남자는 지금 병이 많던 아내를 잃고 돈많은 나진 여자와 다시 결혼했다고 했다. 《춘향전》을 찍었던 그 당시 절색을 자랑하던 그 얼굴이 요즘 새로 나온 영화에서는 영 형편없이 보이던 일을 상기하면서 이 여자도 결혼을 했을가고 궁금해서 물어 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요즘 나진에서 영화찍는 일을 두고 적지 않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영화에서 일본거리가 나오는데 선봉읍 내의 영화거리에서 찍었지만 김일성주석의 초상화가 나오게 되어 다시 찍는다, 군중 배우로 신흥동과 역전동의 주민들이 동원되었는데 처음에는 긴장을 하다가 후에는 자꾸 웃음이 나와 참기 어려워했는데 영화 제작에 지장이 많았다, 오토바이와 배는 나진에서 빌려서 쓰고 주역은 《홍길동》 영화에서 홍길동역을 맡았던 배우다, 등등 영화 실제 내용이 뭔지 모르면서도 잘 얘기해 주어서 영화를 보지 못해 안달을 떨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차사업소의 버스기사 창환영감이 뇌출혈로 죽었다는 얘기도 했다. 그쪽에서 순번제를 제일 많이 반대하던 사람이었고 체질이 안좋은 데다가 매일 술과 동무했고 새벽 운동의 후유증으로 죽은 것이 분명했다. 우리 기사들 중에서도 새벽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몇명 되었는데 그 중에서 빼빼 야윈 박동혁과 요즘 자주 배를 붙안고 신음하는 김중신이 심상찮았다. 

박동혁은 곁집살이를 하다가 집문제로 원주인과 대판 싸움을 하고 요즘 가정 살림을 수리소쪽에 옮겨 놓고 집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딸애는 어디다 맡겨 두는지, 혼자서 밥을 어떻게 해먹고 다니는지는 누구도 몰랐고 저녁에는 수리소의 경비실에서 자는 모양이었다. 야위어서 몸이 형편없이 보인다. 김중신은 집이 유현동쪽에 있었는데 가끔 버스를 가지고 유현동 집으로 가면서 우리가 박탈당한 후창 노선의 손님을 더러 싣고 다니면서 새로운 문제를 야기 시켰다. 오토바이 한대를 사가지고 집에서 출근해 오고 저녁에 너무 늦으면 경비실에서 자면서 노선에 나가 있는 우리 버스들이 휘발유 부족으로 달리지 못하는것도 자기 탱크에 남아 있는 휘발유를 내놓기 싫어하고 오히려 걸고 들면서 싸움질하는 위인이었다. 

며칠전 담당 차장이었던 한보경과 함께 후창 손님을 실었을 때 짐값 문제로 시당에 고발되어 시당으로부터 이 두명을 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중신은 어이없게 해고되었으나 늄창조의 일이 태산같이 많아서 한보경을 잠시 늄창조에 두고 쓰기로 했었다. 

로따는 관곡 연유창고 설계도 문제로 설계회사에 드나들고 나는 정화와 함께 대기실과 매점의 간판때문에 사람을 불러오고 재료 구입도 했다. 샤시작업은 해도 해도 끝없이 작업량이 많게 주문이 들어왔고 차대와 매점은 큰 이상이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 초에 뜻하지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광수가 장마당 정류소에서 후진을 하다가 버스로 어린애를 밀쳐 놓았는데 다리뼈가 끊어졌다. 묘하게도 청계동 한 마을 바로 뒷집 애였는데 광수에게는 치료비를 댈만한 돈이 없어 회사에서 안아 주었다. 치료비라 해도 무상 치료였기에 영양비에 충당하는 금액뿐이었으나 어린애 부모들은 매일 회사에 찾아다니면서 야단을 치고 소란을 피워 정상적이 업무에 영향을 많이 주고 있었으므로 로따는 세포 비서와 의논하고 적당한 금액을 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광수는 회사 종업원들 중에서 네 번째로 단련대에 가게 되었다. 내가 차대 대장을 맡은 후로 김광현의 차창유리사고 다음에 두번째로 겪는 사고이기도 했다. 

광수의 버스는 이춘일이 인계받고 213호도 내가 사온 판 스프링을 맞추어 달리기 시작했는데 218호가 밑바닥에 편 널판자가 다 썩고 떨어지기 시작하고 부품도 공급하기 어려운 버스 차종이어서 폐차시키기로 결정했기에 이제부터는 아홉 대가 실동에 나가는 거다. 6월 달의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일정 후로 손님이 더 적어져서 아홉 대중 앞 순번인 처음 넉대만 겨우 하루에 2회 운행을 보장할 뿐이고 뒤 순번인 버스는 영화 제작진에 빌려주거나 답사 일정에 내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 수익금이 형편없이 줄어들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지난해 아주 작은 규모로 시작된 매점의 장사는 지금 큰 규모로 확대되고 상품의 종류도 많고 큰 것으로 나오고 있어서 오히려 주업인 여객 수송보다도 돈이 더 많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 부품만 봐도 그랬다. 그때까지 내간 부품으로 트럭 수십 대를 조립해낼 수 있는 정도였으니 장사가 꽤 잘 되어가는 것이었고 건축 자재도 단일한 슬레이트와 시멘트로부터 페인트, 변기, 타일, 합판, 아연도금 철판, 유리 등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늄창쪽에서도 수입이 짭짤해져 이 모든 것이 적자를 보는 여객수송 쪽에 손실을 미봉해 주고도 많은 소득이 남아지는 거였다. 

어쨌든 여객수송은 눈감고 야웅하는 식이었고 그걸 방패로 다른데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다. 정책적으로는 여객수송에서 적자를 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기에 부업쪽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고 목적이다. 그런데 종업원들은 단순하게 여객 수입으로 수십 명의 조선 종업원과 10여 명의 훈춘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국인 기업이 세금이 없는 나라로 자랑하는 조선에 와서 얼마만한 세금을 내고 있는 지에 대해서 그네들은 알길 없었기에 이해할만한 일이었고 한달 비용이 조선원 200만에 간다고 하면 머리를 갸우뚱하는 그네들에게 구구히 설명해 줄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기 힘들어 하니 결국 소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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