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쟈가 새 차를 몰고 늄창 재료를 싣고 나왔다. 중국 번호판을 달고 첫 운행을 하면서 차를 천천히 다루었다고 했다. 짐도 3t 정도밖에 싣지 않았고 속도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몰고 왔다 한다. 

놀러 왔던 이종 동생들이 다 돌아가고 로따의 큰 아들은 대학 입시도 받지 않은 채 돈을 먹여 북경의 F대학에 소원 대로 가게 되었다. 일본의 어느 학원에서 입학 통지가 왔지만 그래도 북경을 선택했다. 남들은 대학을 포기하면서 출국인데 이 애는 고생스런 국외의 유학 생활을 포기하고 있었다. 좀 이상한 데가 있는 애였다. 

버스를 세워둔 지 일주일이 되었다. 부족한 휘발유때문에 부득이 세워둔 것이다. 

그 동안 휘발유 사건이 있었다. 누가 고발했는지 나진과 선봉에서 연유를 사다가 높은 값으로 되넘겨 판다고 시당에 문제가 제기되었고 시당에서 사람이 직접 와서 휘발유를 팔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물가국에서도 키로당 120원이라는 가격에 문제가 있다면서 조사하러 왔다. 휘발유가 항상 딸리는 형편에서 잔고가 많이 남아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고 몇 번을 현금으로 키로당 120원을 받고 판 적은 있었다. 그중에서 기억되는 건 중국에 넘어갈 고급승용차 십여대가 와서 한꺼번에 주유한 것이다. 

그때는 러시아 유조차가 연속 몇번 나왔고 나진의 7개 주유소 중에서 우리 주유소에밖에 휘발유가 없었다. 중국으로 밀수차가 들어가는 일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실감했고 옥탄가가 낮은 러시아 휘발유를 사용하면 승용차가 고장을 일으키기 쉬웠기 때문에 처음에 팔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휘발유가 없는 마당에 옥탄가가 높던 낮던 장사군들은 상관하지 않았고 우리한테 책임 추궁을 하지 않겠다고 했기때문에 억지 공사로 팔았던 거였다. 

그리고 다 종이돈으로 먼저 내고 후에 가져가는 식의 장사여서 위홍이는 이제까지 현금을 받으면서 휘발유를 파는 일을 거의 겪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현금일지라도 부기실에서 돈 받고 전표를 끊어주었고 그 전표가 없으면 위홍이는 휘발유를 주지 못하게 규정해 놓았지만 몇키로 씩 사가는 사람들한테는 전표 없이 현장에서 돈만 받고 팔 때도 가끔은 있었다. 

요즘은 버스가 섰을 뿐더러 승용차들도 다른 주유소에 가서 돈주고 주유했었다. 로따가 세포 비서와 함께 연유 상사에 가서 사정했지만 한번에 5백 키로밖에 주지 않겠다고 강경히 나왔으며 나는 휘발유가 없는 선봉 쪽에 오랫동안 가지 못했었다. 나진 연유상사에서는 이미 시당의 지시를 받아 우리한테 팔지 않기로 승낙한 것 같았으나 5백키로라도 주겠다고 한 것은 그래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버스가 이틀 밖에 쓰지 못하는 양이었지만 키로 당 65∼70원씩 하는 연유상사의 휘발유를 이틀에 한번씩 세번 실어 왔고 그 휘발유로 버스가 적어도 5일간 노선에 나갈 수 있었다. 

연속 되는 운행중지와 손님이 적은 탓으로 기사와 차장들의 생활비는 형편 없이 떨어지고 오히려 고정적으로 4천8백을 받는 늄창조에 들어가게 해주었으면 하는 눈치가 알리기 시작했으니 적극성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늄창조에 가는 것을 혁명화니 단련대니 하던 풍월도 자연히 가라 앉게 되었다. 

선봉의 명광주유소에 휘발유가 왔다는 것을 알아낸 후 유조차로 실어오려 했지만 고장때문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틀간은 운전수와 차장이 운행중에 주유소에 직접 가서 주유하게 했다. 유조차가 다 수리된 후 나는 최고 적재량인 7t을 사올 수 있었지만 며칠이 안가 러시아의 유조차도 들이 닥쳤다. 

정말 오랜만에 나온 러시아 휘발유였다. 나진이나 선봉의 연유상사에서는 러시아 기름을 팔고 있었고 명광주유소에서는 러시아 기름에 관곡 제련소에서 나온 저질의 휘발유를 섞어 팔고 있다고 쉬쉬한 소문도 돌았지만 휘발유가 부족했던 그 시기에 어쩔수 없이 사들였고 러시아 유조차는 위쨔가 12t급으로 몰고 실어 왔다. 앞으로 며칠에 한번씩 보장될 것이라고 로따가 말해주었기에 차대는 다시 원래의 생기를 회복하는 것 같았다. 

차 영감이 아침에 나와서 태풍 예보가 있었다면서 앞으로 몇시간 내로 들이닥칠 거라고 얘기해주었다. 지난해에도 여러번이나 태풍 예보가 있었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다만 안화동의 슬레이트가 수십미터 내지 백미터 밖으로 날려가고 울 밖의 원통형 기름탱크가 150미터 밖의 냇가에까지 굴러갔을 뿐이었다. 

어렸을 적에 훈춘에서 한번 태풍을 겪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던 나에게 8월 31일 저녁에 마침내 진정 태풍을 겪는 시간이 왔다. 

이날 아침. 위쨔의 유조차는 로따를 싣고 돌아갔으며 버스도 정상 운행을 했다. 저녁 때까지 모든 것이 정상으로 움직였다. 식사 후부터 바람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더니 천둥 치고 우뢰 울면서 새볔까지 줄비를 퍼부었는데 대충 짐작해 보아도 강수량이 400㎜이상은 될 것 같았다. 

나진-원정 구간의 도로는 세 곳이나 밀려갔다. 하나는 관곡 정류소와 명광 정류소사이의 용평(龍平) 정류소 옆의 다리가 밀리고 두번째는 선봉 수금소 바로 앞의 다리가 밀렸으며 세번째는 청학 고개와 하여평 고개사이의 장로 다리가 밀렸다. 

바로 장로 다리옆에서 중국의 목편차 한대가 얼마 전에 고장난 채로 한주일 정도 서 있었는데 그 동안 헤드라이트, 발전기, 라디에이터, 연유 펌프와 바퀴 두개를 도둑 맞힌 적이 있었다. 기사는 다 수리된 차를 돌려 귀국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조선에 다니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원정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었고 후에 그 기사는 정말로 나진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장로 다리에서 조금만 더 나진쪽으로 오면 습격조가 출몰하는 청학 고개였기에 그 다리 부근부터 신경이 팽팽해지기 시작하는 일을 수두룩히 겪었으므로 지금도 잘 기억해두고 있다. 이상하게 하여평 고개 이북으로 중국 쪽에는 도로가 끊어진 곳이 없었는데 이 세 다리가 끊어졌기에 9월중순까지 중국 차들은 집에서 고이 놀게 되었다. 

9월 1일 아침이 왔다. 

아직도 작은 비가 좀씩 내리고 있었는데 종업원들이 하나 둘 출근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 정화가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주방에 달려들어 왔다. 첫 사람으로 출근했던 춘화의 부기실은 이상이 없고 두 번째 사람으로 나왔던 정화의 2층 사무실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서랍을 전부 빼내어 1층에 내려다 놓았고 서랍 속의 물건들을 줄느런히 널어 놓았다. 

대기실과 매장 그리고 2층 사무실의 서쪽 벽에 창문이 수태 있는데 이제까지 도난 방지한 경험도 있고 해서 철창으로 가리워 놓은 것을 뜯고 도둑이 들어온 거였다. 부기실 북쪽에 넓은 방 하나가 있는데 주방 쪽에 붙여 만든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갈 수 있고 아직 크게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비 내리는 날은 유리베는 작업을 이 방에서 하고 짜투리들을 벽쪽에 쌓아 두고 있었는데 그 유리 조각 위에 동맹원들의 생활총화 수첩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이 보였다. 

정화가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인데 도둑은 정화의 책궤까지 뒤져 보았고 바로 뜯고 들어온 창문 옆에서 쓸만한 걸 고르고 난 뒤 나머지를 널어놓고 간 거였다. 

김혜영이 울상이 되어가지고 자전거가 잃어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매장안에 세워둔 것이 잃어졌던 것이다. 부품은 얼마 잃어졌는지 정확한 입고와 판매 기록이 없어 알수가 없고 녹음기 한대가 잃어진 것까지는 확인되었다. 

이모가 주방 옆의 야채 저장실에서도 물건이 잃어졌다고 소리치고 있었는데 달려가 보니 열려진 창문으로 손을 들이밀어 먹을 것을 좀 가져갔을 뿐이었다. 외숙모가 집에 가있었는데 이모가 장마당에서 반찬감으로 사온 마른 명태와 마른 낙지 그리고 약간의 야채가 없어진 거였다. 

정화가 전화로 도난신고를 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도난 신고를 한 것이 태풍이 있었던 이튿날 아침 바로 9월 1일 그 한번 뿐이다. 안전원들이 온 것 같았는데 정화가 도난당한 물건 명세를 적어주고 현장조사를 끝내고 간 뒤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후 한달 후에 중국인 단독기업으로 한 회사가 도난 현장에서 도둑을 붙잡은 일이 있는데 다들 분석하기를 그 청진 도둑이 실마리를 제공하면 혹시 우리 회사에 왔던 도둑까지도 잡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내가 나진을 떠나기 전 또 한번 매점이 도난 당했음에도 도둑은 잡지 못했고 안전부는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태풍 때는 매점의 서랍에 있던 잔돈 몇푼까지 잃어 버렸는데 두번째는 설화가 매점에 두고 나온 7만 현금을 잃어 버렸고 부품도 10만 원어치 잃어 버렸었다. 한번 도둑을 붙잡아 보려고 벼르고 있던 중 월말에 끝내 붙잡았고 그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룬다. 

장밤 비가 억수로 내리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쳐서 경비로 나왔던 조경화가 밖을 돌아보지 않았기때문에 도난 사고가 난 것이지만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것 같다. 이내 철창을 다시 만들어 넣었고 경비들은 회사 주변을 돌아보는 것을 견지했다. 

태풍이 지나간 뒤의 나진 거리는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거리마다 감탕이 쌓여 있었고 남산 호텔로부터 기차역까지 길 양켠에 있던 아파트 1층에 전부 물이 들어갔다. 

그러나 물은 잘 빠졌다. 후일 로따가 말하기를 일본 사람들이 나진에 살고 있을 때 배수공사를 잘해 놓은 덕에 더 큰 손실을 미봉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진은 10만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항구 도시였지만 시내 도로는 전부 다 4차선으로 폭이 넓고 살림 집도 단층이 많았지만 산등성이에 다락식으로 지은 것이 많아서(대부분은 일제 때 건물임) 물의 피해를 극히 적게 받게 되어 있었다. 

청계로부터 해양공원에 이르는 도심을 가로지른 청계강에 물량이 형편 없이 적었지만 폭이 60미터 이상은 되는 것 같았고 지난해 강바닥을 긁어 내는 작업을 했기에 나진 시내안의 배수는 빠른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거리에 쌓여진 감탕은 인민반에서 동원되어 아침 일찍부터 걷어내고 있었고 지난해 겨울 눈치기에서 모범을 보여 주었던 창평동 인민반에서는 나진항 입구 쪽에 쌓여진 감탕과 쓰레기들을 벌써 거의 다 쓸어내고 있었다. 

이날 아침 도로 상황을 관찰하러 나온 나는 88호로 시내 안을 죽 돌아보았고 끊어진 용평다리 부근에까지 가 보았는데 돌아온 후 운행 중지를 선포하고 기사와 차장들에게 하루에 한번씩 나와 보라는 말을 남기고 집에 돌려 보냈었다. 

누구 집에도 전화는 없다. 

회사가 겨울에 방학하는 동안 일이 있으면 집이 가까운 기사와 차장들에게 먼저 통지했고 다음에 그 몇명이 돌아다니면서 알려 회사에 나오게 하는데 반나절이나 걸렸었다. 그래서 후에는 긴 휴일이 있을 때마다 종업원들을 보고 매일 아침 일찍 한 번씩 회사에 왔다가라고 했던 것이다. 

태풍때문에 나라적으로 얼마나 손실 보았는 지는 보도 매체가 정확히 알려 주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우리 회사는 운행 중지때문에 수익금이 줄어든 외 매점의 판매액이 사정 없이 떨어졌고 장사가 제일 많은 초가을에 뜻하지 않게 보름 동안이나 모든 수입품 운반을 중지해야 했으므로 손해가 적지 않았다. 

대기실 쪽이 도둑당한 걸로 약간의 손실을 보았다면 수리소 쪽은 슬레이트가 또 바람에 날려버렸고 건물 서쪽의 돌벽이 무너지면서 배수구를 막아 버려 나의 침실 밑으로 물이 빠져 나갔는데 그 때문에 집이 무너질 위험에 처했다. 차영감은 그로부터 한달 동안 수리소 쪽의 배수구와 돌벽을 쌓는 석축 공사를 하고 슬레이트를 다시 얹은 후 내 침실의 온돌도 개조했다. 

수리소 창고 제일 동쪽 방은 원래 최영복과 정화의 사무실이었는데 비어있던 그 방을 잘 손질하여 온돌을 놓고 집답게 꾸며 놓기도 했다. 후일 그 방에 용철이가 들었고 태풍 후에 나는 내 방에서 거의 자지 않았었다. 코를 우렁차게 골아대는 장걸이 옆에 잠자리를 완전히 옮겨 버린 거나 다름 없었는데 장걸이는 코골기가 유명한 것으로 다들 《세계 일등》이라고 불러주고 있는 터였다. 

이튿날 저녁 늦은 시간에 로따가 외삼촌 내외와 함께 나진에 왔다. 외삼촌 부부는 며칠 전 방학이 끝나 학교로 가는 자식들때문에 집에 간 거였고 로따는 유조차를 따라 집에 간 후 일을 다 보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한명이 짐을 하나씩 들고 걸어 왔다고 했다. 외숙모는 옷 보따리 하나, 외삼촌은 주유기에 쓸 고무호스 10미터를 둘쳐 멨고 로따는 야채 꾸러미를 들고 왔었다. 

원정부터 하여평까지 10키로를 걸은 후 하여평 농장 지배인을 만나 우리가 판매한 트럭을 타고 장로다리까지 신세졌고 그 다음 청학고개를 타고 약수터를 지나 저술령 올리막 중간쯤에서 다리쉼을 했다. 다시 10키로 쯤 걸은 거였고 이미 해가 져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선봉 보험지사 차를 만났는데 그 차는 은덕에 일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고 길에서 유일하게 만난 차량으로서 그 차를 만난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선봉수금소에까지 신세졌고 거기서 전화를 하여 용철이가 88호로 마중 갔었다. 보험지사 차는 끊어진 다리때문에 수금소 옆에 세워두었고 일행은 우리 88호로 선봉에 도착한 후 비파도 쪽으로 에돌아 올 수 있었다. 

그날 국경을 통과한 사람은 이 세명 뿐이고 그뒤 한주일 후부터 몇명씩 통과했었다는 걸 후일 원정통검에서 얻어들었다. 

다병한 몸이면서도 정력적인 사업 열정이 로따를 성공하게 했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정신으로 모든 애로를 물리치는 로따한테서 배울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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