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던 때와 같이 생각지 않게 방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첫날이자 우리 명절 날이었다. 

9월 3일은 우리에게만 속하는 명절이었다. 1952년 연변에 조선족자치구가 성립되고 3년 후 자치주로 이름을 고쳤는데 해외에 사는 우리 동포들 중 중국의 조선족만 유일하게 자치 권리를 향수하고 있고 이날은 중국의 200만 백의 동포, 그 중에서도 자치주 내 80만 조선족 동포들의 제일 큰 명절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말과 글을 마음 대로 사용한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우리 말로 된 교과서로 우리 말로 가르친다. 우리 말로 대부분의 의사 소통이 되는데 중국어를 짬뽕으로 쓰고 있기에 그 부분만은 더러 고유한 말을 잊어가고 있지만 옛날 옛적부터 전해 내려온 고유한 풍속 습관을 버리지 아니하고 고이 지켜왔다. 

간판도 연변 주내 어디 가나 두가지 문자로 붙어 있고 자치주 주장님은 반드시 우리 민족이어야 한다. 중국이라는 다민족 국가에서 30개나 되는 소수민족 자치주 중에서도 교육 수준이 가장 높아 해마다 많은 인재가 나오고 지역적인 원인으로 공업은 미발달이지만 농업은 상당히 발달되어 있고(비록 수작업이 많을지라도) 그 주력군은 그래도 우리 동포들이다. 이름도 북간도, 동만주로부터 연변이라고 성립 초기부터 고쳐져있고 4만여 평방키로의 주내 곳곳에 우리들의 1세가 개척한 논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고 그에 힘 입어 한전과 과일 농사도 잘 된다. 

요즘은 두만강 개발과 백두산 관광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조선족 사회가 실업과 출국의 충격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지만 은혜스런 중국 공산당을 잊지 않으며 자치 권리를 향수하게 된 이날을 해마다 제일 큰 명절로 굉장하게 쇠고있는 것이다. 

지난 해에 나는 훈춘에서 이날을 보냈다. 기업소마다 축구팀, 농구팀, 배구팀을 내보내어 경기를 치르는 걸 보았었다. 어렸을 적에 씨름과 그네와 같은 민속 경기도 보아 왔지만 요즘은 구경하기가 힘들다. 

1993년 9월 3일에 나의 증조모가 93세로 돌아 가셨는데 음력으로 제사 날이 언제인 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양력으로 이날 돌아 가셨기에 이날만 되면 자연히 증조모 생각을 하게 된다. 경북 영천군 고경에서 살다가 1929년에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에 오신 후 파란 많은 인생을 살다가 내 아들애가 태어나기 두달 전에 돌아 가셨는데 우리 집이 5대가 한집에 사는 새로운 기록을 낼 번했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길 떠나는 내 손을 잡고 

“니 할배 살구 있으믄 얼매노 좋아 하겠노?” 

하면서 낙루하셨고, 방학마다 찾아 뵙고 큰 절로 인사 올리는 나를 찬찬히 여겨 보시다가 

“영도 아니가?” 

하면서 내 두 손을 잡고 즐거워 하시던 증조 할머니. 

일제 때 넷째 할아버지는 2원 때문에 사범 학교에 붙었지만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 한을 품고 넷째 할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일찍 돌아가셨고 다섯째 할아버지 집에 계셨던 증조모께서는 고향이야기를 포함한 가족 이야기를 전혀 들려주지 않으셨다. 영천에 대한 이야기와 중국에 온 다음의 가족사를 지금 생전인 셋째 할아버지에게서 많이 들었을 뿐이다. 

아버지때부터 함북 사투리에 묻혀 살아도 경상도 사투리를 마냥 하시던 증조모는 88세 되는 해까지도 당신 절로 빨래 하셨고 세살 되는 증손녀를 키워 주셨으며 석탄도 날라 들이셨다. 돌아가시기 전해에 다섯째 할아버지네 단층 줄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우리집에 오셔서 인생의 마지막 한해를 보내셨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담배 두대를 태우면서 증조모 생각을 하다가 자리를 걷고 주방에 갔는데 어제 힘든 걸음을 한 로따가 

“오늘 큰 명절을 잘 쇠여 보자.” 

하고 제의해서 다들 대찬성이다. 

명절을 쇤다는 건 곧 놀음을 놀고 평소보다 더 잘 먹는 것을 의미한다. 장마당에는 보통 점심 때쯤에 수산물이 없는 것이 없이 다 나오게 된다. 그런데 태풍때문에 수산물이 나오게 될는 지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수산물을 사야하겠다면서 로따가 영철이 보고 점심 시간에 장마당에 갔다 올 것을 말해 주더니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다른 사람 먼저 마작을 찾아 내왔다. 

여자 세 명과 내가 주방에서 마작을 놀기로 했고 남자들은 장걸의 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로따는 아픈 다리때문에 불과 한시간도 못 놀고 마작판에서 나왔고 주방과 장걸의 방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다리를 놀리고 있었고 주방의 마작놀이와 장걸이 방의 카드놀이는 점심을 건는 채 오후 네시까지 진행됐다. 

영철이가 놀음판에서 떠나기 싫어했기에 로따가 회사에 나온 몇몇 종업원을 데리고 장마당에 가서 수산물을 가득 사들고 왔다. 이모가 학교에 가는 큰 아들을 연길에서 바래고 돌아올 때 VCD 디스크를 사왔는데 연변노래가 다섯개나 있었다. 여자들이 저녁식사준비를 시작할 때 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잇달아 카드놀이 하던 그룹이 쓸어와 마이크를 빼앗아 가면서 목청이 찢어져라 노래하게 되었다. 

자치주창립 48년사이에 연변의 작사, 작곡가들이 만들어 낸 노래중에서도 조선족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한곡 한곡 불려 졌고 용철이는 흥이 나서 벌써부터 춤을 추고 있었다. 가라 OK 노래방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다 내가 영감, 노친들의 꼬부랑 흉내를 내고 남자들끼리 그러 안고 춤추는 우스깡스러운 모습까지 섞여 주방은 술마시기전부터 어느새 명절 분위기가 도도해졌다. 

그 때문에 음식상은 두시간만에 끝나고 또다시 오락 한마당이 될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술상이 길어도 어지간히 긴 정도는 아닌데 오늘은 음식과 술보다도 노래와 춤이었다. 풍성한 음식이었지만 노래와 춤이 더 좋은 걸 어찌하랴. 

나는 노래에 맞춰 춤추기 좋은 곡인 《자치주성립의 노래》를 몇번 불렀는지 모른다. 그날 나진에 있던 11명이 저마다 열몇 곡씩 부른 기록을 냈으니 먼저 마신 술을 말끔히 깼고 저녁 열시 반이 되어서 다시 술상이 마련 되어서야 아쉬운 대로 마이크를 휴식시켰다. 

노래와 춤으로 다들 힘을 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날 밤 술상도 한시간 밖에 벌려 놓지 않았지만 평상시 혀 꼬부라진 소리가 많던 주방에 그 한시간 동안 만은 갖가지 음담패설과 농담으로 웃음이 그칠 새 없었다. 

경비 서던 조경화가 기웃거렸고 회사 옆의 동네 집에서도 몇명이 와서 들여다 보고 갔었다. 우리처럼 마음의 탕개를 풀고 마음껏 노는 모습이 신기하게 여겨졌는 지도 모른다. 부르기 좋은 연변노래 말고도 중국, 조선, 한국 그리고 일본노래까지 재밌는 노래를 다 불렀고 노는 방식이나 행동이 아무런 구애도 없었기에 미친 사람같이 보일 수도 있겠고 어찌보면 부러워할 지도 모를 일이겠다. 

지난해 《5.1》절 들놀이 한번 만으로 조선 노래밖에 부르지 못하는 종업원들과의 오락이 재미가 덜하다는 것을 느꼈고 우리 식구들끼리 나진에서 재밌게 놀아 보기는 아마 처음인 것 같았다. 태풍만 없어도 재미 있는 《9.3》명절을 우리 식으로 제멋에 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집에서도 굉장히 쇠는 우리 명절을 나진에서 제멋에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9.3》 명절에 큰집인 우리 집에 친척들이 다 모여 있는 장소에서 

“정말 공산당의 덕분이 크다.” 

하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던 할머니의 얼굴을 떠 올리면서 꿈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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