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회는 우리 민족의 전통 요리라고 할 수 있다. 젓꾹지는 나의 외갓집 동네에서 발명해 낸 겨울철 요리인데 김치 깍뚜기에 담수어의 살코기를 썰어 넣어 만든 회의 일종이다. 나는 난생 처음 젓꾹지를 먹으면서 외갓집 마을의 음식 문화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었는데 여기에 대해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원정 종합검사장의 새 청사가 사용에 교부되였다. 중국측의 통상구 청사도 거의 되어가고 있었는데 연말 쯤이면 새 청사에서 일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원정의 새 청사는 자체의 노력에다가 중국의 많은 지원을 받아 일떠선 것인데 우리 회사에서도 시멘트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로 지원했었다.

난방이 없는 것이 참 희한하기만 했다. 원래의 낡은 청사를 허물어 버렸는데 지난해 겨울철과 마찬가지로 원정에 있는 시간이 적어도 30분 정도는 되었으므로 겨울 철에 원정을 통과하기란 참으로 커다란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2년 동안의 나진행에서 볼 수 있었던 독특한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수리소 쪽에 가지 않고 회사쪽에서만 맴도는 나의 행실이 고약하게 보였던지 아니면 버스 운행에 큰 문제라도 없었는지, 또 그렇지 않으면 새 차를 잘 관리하지 않고 우리 말을 모르는 쟈쟈갸 수속 때문에 애먹는 것이 안되었는지 로따는 나보고 인수원 작업을 또 다시 하게 했고 쟈쟈 차를 따라다니게 했다. 이때 따라 로얼의 어머니가 중풍을 맞아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효도가 극진한 로얼이 중국 쪽의 작업에 크게 신경 쓸 새가 없어 내가 더러 하기로 했던 것 같다.

선봉 발전소의 파이프는 올 겨울에 백톤 넘어 실어가게 되어 있다. 이미 쟈쟈가 여러 차 실었는데 절반 정도는 나른 것 같았다. 나와 함께 두 차 싣고 나서 이날 세 번째 차를 실어 일에 익숙해진 쟈쟈만 보내고 집에 남게 되었다.  

약 한시간 반 후에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오전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쟈쟈였는데 대반령 고개 위에서 차가 오버 히트했고 겨우 경신까지 도착해서 전화를 찾아 거는 중이라고 했다. 냉큼 돌아오라고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나진에 다니는 기사들로부터 우리가 산 새 차와 같은 차종을 몰고 다니는 그네들과 한담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이 차종이 오버 히트만 하면 힘이 떨어져 무조건 수리해야 한다는 걸 얻어 들은 적이 있다. 옛날 나의 이웃이었던 이(李)기사는 한번 오버 히트한 후 헷또(헤드)를 교체해서야 엔진이 다시 정상 되였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적어도 엔진을 분해하고 탄성이 못해진 링을 바꾸어야 한다. 엄중할 때는 헷또뿐만이 아닌 블록까지도 교체해야 했다.

수입차들은 오버 히트가 극히 적게 일어나고 일어난다 해도 엔진에 크게 손상이 없어 그냥 쓸 수 있었지만 중국산 차는 설계와 부품의 재질 문제 때문에 기사들이 이런 고역을 치르게 하고 있었다. 예방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관리를 잘하는 것뿐이다.  

돌아온 쟈쟈는 고개 밑에서 이미 오버 히트가 생기기 시작 했는테 내려서 라디에이터 앞의 커튼이 막히워진 걸 올려놓고 부동액을 보충한 후 다시 고개 길을 톺았다고 했다. 험한 고개를 반쯤 올라갔을 때 다시 오버 히트하는 걸 그냥 몰고 경신까지 갔다는 것이었다. 눈이 깔린 가파로운 영길에서 12t의 파이프를 실은 차를 주차시켰다가 다시 발진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연초에 유라, 베쨔와 함께 유조차를 나진가지 따라갔던 일(뒤에서 언급함) 상기하면서 용서해주려 했는데 쟈쟈가 한 다음 말을 듣고는 끓어 오르는 밸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부동액을 보충하고 나서 옆에 주차시킨 쑈찌와 한담을 하다가 라디에이터 캡을 잊고 닫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먼저번 오버 히트는 가히 용서해 줄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오버 히트라면 운전에 익숙한 쟈쟈가 오버 히트시간이 얼마 안 되었을 때 발견했음을 단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버 히트할 때 저속으로 엔진을 계속 돌리면서 수온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쟈쟈의 모습을 여러 번 보아왔기 때문에 그 정도로는 엔진이 크게 손상 받지도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올리막 2키로나 계속 오버 히트하면서 지나간 것이 뚜껑 문제였다는 소리를 듣고는 화가 치밀었고 욕설이 되는 대로 쏟아져 나왔다.  

옛날 공장에 출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밸이 꼬일 때가 있었고, 아내와의 결혼생활 중에서도 화 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웬 일인지 될수록 참으면서 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을 뿐 풀 줄을 몰랐었다. 나진을 다니면서도 이미 습관화 된 그 성질을 고칠 줄 몰라서 화 낼 줄을 몰랐고 욕조차 변변히 하지 못해서 싸움이 그칠 새 없었는데 그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하는 정도였지만 3월 달의 차 사고를 겪고 난 후로부터 그런 현상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남들은 성격이 이상하다고 여겼을 지 모르겠고 나 자신도 성격 개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차 사고를 계기로 끙끙 앓기만 하던 옛 습관을 버리게 되었고 점차 욕설도 더러 배워두게 되었다. 나진행에서의 다른 면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욕하지 않아도 데면데면한 쟈쟈는 항상 로따의 욕을 뒤 덜미에 달고 다녔다. 지난 달에도 훈춘 시내 안에서 술을 잔뜩 퍼 마신 후 빈 차를 운전하다가 길 옆에 쓸어 넣어 라디에이터가 오그라들고 에어 크락숀이 박살나는 자그마한 사고를 저질러 로따의 풍부한 욕 중의 거의 전부를 동원시켰다.

나는 중국어 소설을 읽으면서 두 시간 동안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한마디도 중복된 욕을 하지 않는 아낙을 묘사한 대목을 본 적 있다. 로따의 욕 재주는 워낙 그 아낙에 미치지 못해 10분쯤 욕하는 속에 몇 번은 중복되는 것도 있었다. 나는 더 형편 없다. 1분쯤 욕하는데 중복된 욕만 서너 번을 했을 뿐이었다. 나의 연락을 받고 로얼이 다른 차를 구해 가지고 우리 옆에 나타났기에 변변치 않은 욕도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미 클레인 차가 도착해서 옮겨 싣기 시작한다. 아침에 밥도 먹지 못하고 일찍부터 적재 작업을 했었는데 벌써 점심 시간이 다 되어 나는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로얼은 언제보나 평화스런 그 말투와 행동으로 파이프를 옮겨 싣는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고 나와 쟈쟈는 엔진을 분해하는 수리공들의 작업만 지켜볼 뿐이었다.  

다른 차는 바로 전기사의 180호였다. 마작을 놀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 나왔다고 했다. 겨울 철에 들어서서 오늘 처음 나진으로 나간다고 했다. 몇이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전기사가 혼자 출발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 핸드폰이 울렸다. 전기사였는데 접촉사고가 나서 나진에 못 갔으며 사고지점은 대반령 넘어 내리막의 제일 마지막 굽이이고 지금 소반령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전화를 찾아 거는 중이라 했다.  

로얼과 연락을 하고 또 다른 차를 구했다. 다들 일감이 많아 차를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이기사는 오후에 이미 다른 사람의 짐을 실어 놓아 안 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있는 곳으로 바삐 뛰여왔다. 전기사와는 원래 같은 기업소에서 근무하는 딱친구 사이였고 될 수록이면 짝을 지어 나진을 다니면서 서로 돕고 있었다. 전기사의 전화를 받고 사고난 일을 알았으나 사고가 어느 정도인지 더 자세히 알려고 달려온 것이었다. 왕기사의 차는 오늘 금방 나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컨테이너를 부리워 놓고 파이프를 옮겨 싣기로 했다.

조선족 기사들은 웬지 일감이 적어 노는 시간이 많았지만 한(漢)족 기사들은 거의 매일 길에서 헤매고 다녔는데 그 만큼 일감을 많이 얻는 융통성과 부지런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클레인차도 함께 불러 로얼과 내가 수리공 한명과 같이 사고 지점으로 출발했다.  

마지막 굽이에서 앞에 갑자기 나타난 트럭과 접촉했는데 속도가 늦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잖으면 전기사가 잘못 될 번 했다. 윈도우글라스가 박살났고 동력 조향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두 차를 가지런히 세워 놓고 옮겨 싣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전기사는 왕기사의 차에서 얼어든 몸을 녹였고 나는 수리공과 함께 전기사의 차를 손질했다.

두 쪽 작업이 거의 동시에 끝났고 전기사의 차에 로얼과 수리공이 앉아 돌아간 후 나는 왕기사의 차에 않아 경신까지 가게 되었다. 클레인 차도 마침 내일 작업이 기다리고 있어 경신 쪽으로 가게 되었다. 내가 왕기사를 따라간 것은 왕기사에게 초청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기사는 원래 초청장 유효 기일이 오늘까지이고 새 초청장이 나오지 않았는데 내일 원정에 가서 얼렁뚱땅하면 넘어갈수도 있다고 했으나 만일의 경우 넘지 못 할 때는 초청장보다 더 편리한 거주증을 갖고 있는 내가 운전해야 한다.

왕기사는 어느 한번 다른 물자를 실었을 때도 초청장 없이 자신 있게 넘을 수 있다고 했었는데 그 날 원정통검에서 놓아주지 않았고 마침 원정까지 따라갔던 로얼이 나진까지 세시간정도 몰고 나갔었다. 왕기사는 경신에 처가가 있었다. 그는 처가에 들어가고 나는 외갓집에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나왔던 나는 지치기도 하고 얼어든 몸이 채 녹지 않았는 데다가 배도 고파 왔다. 매제네 식당에서 밥 먹을 계제가 못 되었다. 외사촌 여동생은 한국에 갔는데 매제의 부모님들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가 불편하고 난방 시설이 있는 데도 보일러를 때지 않아 여관방에서 잘 수도 없다. 그만큼 겨울에는 손님이 적었던 것이다.

그래도 외갓집이 있으니 좋긴 좋다. 큰 솥에서 누룽지가 한 바가지나 나왔다. 그걸 한창 먹고 있다가 종래로 본 적 없는 요리가 나왔으므로 한 입 맛보았다. 우스운 얘기지만 외사촌 남동생이 말하는 요리 이름을 《젖꼭지》로 잘못 들었다. 아니, 잘못 들은 게 아니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후일 알았지만 외사촌 동생이 농담 반에다가 짙은 사투리로 말한 것을 내가 제대로 듣긴 했으나 진짜 이름은 《젓꾹지》였다.

배고파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그 날 먹었던 젓꾹지는 세상 별맛이었고 그렇게 즐겨 먹던 누룽지도 망각한 채 밥 두 그릇을 뚝딱 비웠다.  

외갓집이 있는 경신의 자연 호수에는 민물고기가 많이 난다. 낚시로 10키로짜리 초어를 잡는 것은 보통 일이고 최고 큰 놈으로 17키로짜리 잉어와 30키로 되는 초어를 그물로 잡은 적이 있다. 매제네 식당 앞에서 늘 2-3키로 되는 잉어를 파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크고 작은 붕어에다가 철따라 10키로 이상 되는 송어 외에도 황어, 숭어 등 바다 물고기도 볼 수 있었으나 그보다도 초어나 백련어 등 담수어는 특히 많았다.

오늘 젓꾹지는 2키로 이상되는 백련어의 살코기로 만든 것 이였는데 다른 물고기의 살코기로 만들어도 이 젓꾹지의 맛을 따를만한 게 없다. 그 살코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깍두기 김치 비슷한 것 과 섞어 만든 거였는데 양념이 맞춤하고 독에 넣어 둔지 며칠 되어서 간이 잘 들었으므로 맛이 기막히게 좋은 거다.  

큰 외숙모는 물고기 요리를 하는데 유명해져있다. 미꾸라지 요리는 누구나 알고싶어 하지만 혼자 보류하고 있고 큰 솥에 끓여낸 백련어 대가리 국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이다. 끓이고 볶고 지지고 굽고 버무려서 하는 갖가지 물고기 요리는 경신에서도 우리 큰 외삼촌네 집의 것이 단연 으뜸으로 맛이 좋다.

오늘 젓꾹지는 회와 비슷하면서도 김치처럼 오래 저장할 수 있는 것이 특점이여서 겨울철 아무 때건 먹을 수 있는 최상의 민물고기 요리라고 할 수 있었다. 큰 외숙모는 정말 아까운 재간을 썩히고 있는 것이다. 경신에 이름난 그 재간을 잘 개발해 만천하 사람들이 모두 와서 먹을 수 있는 식당 하나를 차린다면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으련만!  

젓꾹지, 그 이름만 들어도 입에서 군침이 슬슬 돌아간다. 독자 여러분들은 맛볼 생각이 없는가? 생각이 있으시면 여기 경신으로 오시라.

백두산에도 올라보고 중, 러, 조 삼국이 나란히 있는 국경 지대의 경치에다가 연꽃 늪도 구경하고 난 뒤 백련어 대가리국에다 젓꾹지 반찬으로 식사를 드시는 것 정도로 이 세상 가장 훌륭한 관광을 하시게 될는 지도 모른다.  

왕기사는 이튿날 캔 맥주 한 박스의 대가로 초청장 없이 나진에 갔다 왔다. 그 후 나머지 파이프를 연속 세 번이나 날라 갔고 마지막 번에 내가 따라갔다.

이때 나는 나진을 떠난지 일주일간이 되었었다. 저녁 늦은 시간이어서 발전소로 가지 않고 나진의 회사에 직접 갔다. 식사 때에 《젖꼭지, 젖꼭지》하고 자꾸 얘기를 해서 이모는 내가 야담을 하는 줄 알았고 다른 식구들도 무슨 장난이냐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었다.

나중에 로따가  

“젖꼭지가 아니고 젓꾹지다.”  

하고 말해 주어서 외사촌 동생이 장난으로 요리 이름을 알려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부터 사투리가 유난히 심한 동네였고 장난기가 많은 그 동생이 항상 그랬듯이 장난 친 걸 가지고 나는 《저술령》을 《저슬령》이라고 잘못 들었던 때와 같이 역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파이프를 마지막으로 실었던 그 날부터 훈춘의 새 포장도로가 개통되었다. 일제가 닦아 놓은 대반령 고갯길을 쓰던 역사는 이제 끝나게 되었다. 영밑에 뚫어 놓은 1,400미터도 넘는 터널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보이지 않는 곡선이다. 대반령과 경신사이에 나의 어머니가 소학선생으로 근무하던 대두천(大肚川)이라는 다른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 부근에 있는 소반령이라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 밑에도 길이가 300미터 되는 터널이 뚫리였다. 바로 나의 첫돌생일 전 날에 큰 외삼촌이 나를 업고 어머니와 함께 넘었던 그 고개다.

훈춘에서 두만강 다리까지 43키로 남짓한 구간이 고갯길이 없는 2차선 시멘트 도로로 건설된 것이다. 눈길에 두시간 이상이 걸리고 아무리 빨라도 한시간을 초과하던 원래 도로보다 시간이 많이 단축되여 40분이면 충분하였다. 이제 나진 행에서 제일 골치거리었던 도로 문제가 반은 해결되였다.  

쟈쟈는 그 좋은 도로 덕을 보지 못하고 차 수리가 끝난 다음 해고되고 말았다. 요즘 황기사를 새로 물색하였다. 바로 나진에 내 갈 자동차 부품을 우리한테 중계 판매해주는 황보스의 동생이었다. 다음 번부터는 황기사가 쟈쟈가 몰던 트럭을 운전하게 되었다.  

이튿날 하루 종일 정화를 보지 못했다. 저녁 식사 때 로따한테 물어서야 나진에 없는 동안 벌어진 일을 알게 되었다.  

일전에 다른 기업소에 중고차 판매 확인서와 관세지불 확인서를 만들어 우리 회사의 도장을 찍은 후 넘겨준 적이 있다고 한다. 최영복과 정화가 함께 저지른 일이었다. 최영복의 감언이설에 넘어 간 정화가 직무의 편리로 도장을 안고 도는 시간을 타서 두 문건에 도장을 찍어 놓으니 다른 중국 사람의 손에서 아무런 수속도 없이 산 그 중고차에 그 기업소에서 우리 회사에서 판매하는 차를 산 것으로 정상적인 수속절차가 다 갖춰지게 되었다. 

로따를 비롯하여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조사를 내려온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일로 두 사람은 강제 해고된 거나 다름없게 되었고 조사 후에는 무조건 단련대에 갔다 와야 한다고 로따가 침울하게 말해주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로 단련대에 가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먼저 여섯 번은 모두 기사들이었는데 이번만은 상황이 달랐다. 로따의 주변에 회사 일을 깐지게 하고 이윤을 많이 볼수 있게 해준 관건적인 종업원으로 차영감과 세포비서를 내 놓고는 이들 두 사람이었다. 공헌이 많은 이 두 사람에게 로따가 물질적으로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 두명이 회사에 대해 사심없이 많은 공헌을 해 왔다는 거다. 적어도 이번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상술한 네 명은 회사의 종업원들 중에서도 중견이였고 로따가 제일 믿고 밀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 두 명이 일을 저질렀다. 믿던 기둥이 넘어진다는 소리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가? 가장 믿던 사람들도 믿지 못한 일을 저지르니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믿고 일 해야 하는가? 이것이 나진의 현실이고 사실이라는 것을 이번 사건이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로따가 종업원 해고를 밥 먹듯이 하는 이유를 이제 와서야 철저히 알 것 같다. 이번 사건은 나뿐만 아니라 회사에 대해서도 더없이 큰 충격을 가져왔다. 일이 장사거리가 적은 겨울에 터졌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회사 업무가 마비되어 수습하지 못할 지경에 이를 수 있는 위험도 있었고 크나큰 시련을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로서 웅상병원 원장이 바뀔가 봐 걱정하는 로따의 내심도 대체로 알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있었던 일주일 간의 시간과 이번 일을 돌이켜 보고나서 나도 신임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놀랍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건 사실 몇 달 전부터 느껴 오던 것이었으나 결국 시간상의 문제일 따름이어서 마음속으로는 언녕 준비가 되어 있은 지는 오래 되었다. 이제는 그 시각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 시각만 오면 나는 모든 미련을 떨쳐버리고 나진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내색을 내지 않고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유일한 인물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나서 내가 나진에서 체험한 바를 글로 써내면 역시 평화상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농담 삼아 토해냈다.  

“넌 자꾸 《전쟁》을 해서 평화상을 받기는 글러 먹었다.”  

로따가 허허 웃으면서 말했고 나는  

“그램 문학상이라는 걸 받게 될거오.”  

하고 농담을 한번 더 쏟아냈다. 우리 식구 중에 노벨이 누구인지는 알아도 노벨의 재산으로 다섯 가지 영역에서 특수한 공헌이 있는 자에게 수상 기금이 마련되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농담하기도 멋적은 일이 되어버렸다. 식구들 중 먹물 먹은 사람이 극히 적은 것이 치명적이라고 할가, 이모가 단과 대학졸업이었으나 세대 차이어서 그런지 나랑 말이 통하는 게 얼마 없다. 게다가 중국의 20여 년 전을 방불케 하는 나진에서, 노가다 판이나 다름없는 데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의 의식은 점점 낙후해져만 가고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 속에서 재간도 더 익힐 것이 없으니 어차피 떠나기는 떠나야 했다.  

그 때가 언제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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