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다음으로 페인트 한차가 나진에 나왔다. 완검사가 아니고 컨테이너에 실었는데 로얼이 재주를 부려 역시 외상으로 내온 거였다. 수입품 명세에 적혀 있는 수량보다 실제 실은 양이 많을 때 전부 다 몰수한다고 종합검사장에서 새 규정이 나온 뒤였다.

유기사를 따라 내가 경순이와 함께 갔는데 부리워서 확인한 결과 신고한 양보다 백키로 정도 적게 실은 것이 확인되었다. 세관, 통검, 대외상품 등 여러 부문에서 합동 검사하는 것이 정말 능율적이다.  베니야판과 아연도철판, 그 외에도 자동차 부품이 조금 실려 있었는데 다 잘 팔리는 것이었다. 특히 자동차 도장용 페인트는 없어서 팔지 못하는데 이번에 실은 페인트중 절반이나 차지했다. 며칠 후면 다 팔리고 한통도 남지 않는다. 휘발유와 마찬가지로 잘 팔리는 물건은 소식이 퍼지기만 하면 2-3일 내로 다 팔렸는데 그때마다 매장은 복새판을 이룬다.    

영철이와 설화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아 페인트를 늄창 작업장 밑의 지하창고에 넣는 것을 내가 도와 주었고 수량을 확인하고나서 색상에 따라 갈라 놓아주었다. 혜영이는 다 정리된 지하창고에 들어와 보고 예쁘게 웃어 주었다. 지하를 빠져나오면서 오래동안 보지 못하던 세포 비서와 마주치게 되었다. 전근 되었단다.  

로따에게 물어 보았더니 비서의 남편이 복직 되었는데 보위부에서 원래 하던 일을 하게 되었고 보위부 가족이 외국인 기업에 근무할수 없다는 규정에 의해 어쩔수 없이 된 일이라고 알려주었다. 비서는 전근한 후에도 역시 비서로 임명되었고 오늘은 그 쪽 기업소의 필요한 자재를 구하러 우리 회사에 왔던 걸음이었다.  

이틀후 러시아 유조차도 들이닥쳤다. 식구들이 채 나오지 않아 나는 그야말로 눈코 뜰새없이 보냈다. 매점을 들낙거리는 외에도 잔 심부름을 많이 하고 오늘은 위홍이 대신 기름 부리는 작업을 해야 했다. 요즘은 눈이 크게 두번 내린 뒤어서 유조차가 힘겹게 왔다는 걸 위쨔가 말해 주었는데 이후부터는 베쨔가 다닐 것이라고 했고 다음번까지는 자기가 운전할 거라고 했다.  

평양의 장사군 아낙이 약을 갖고 왔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먼저 한가지씩 샘플로 가져 왔는데 다시 연길에 가져가서 확인해 보고난 뒤 사두는 일만 남았다. 약 두곽을 지니고 위쨔의 차에 앉아 귀국 길에 올랐다.

관곡고개 중간쯤의 제일 가파로운 곳에서 앞의 트럭을 추월하려고 왼쪽 길에 들어 섰는데 멀리 앞에 마주 오는 트럭이 보였다. 나진-원정구간은 훈춘도로와 마찬가지로 2차선이고 중앙선이 그려져 있지 않은 비포장이 대부분이다. 매끄러운 올리막길에 거의 같은 속도로 고개를 오르는 앞의 트럭 꼬리를 물고가는 것도 위험하고 그렇다고 속도를 늦추면 바퀴가 공회전 했기에 올리막 끝까지 가기 더 힘들다.

앞의 차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올라가는 동안에 마주오던 차가 점점 가까워지고 어쩔수 없이 유조차 앞에서 두 차 가운 데에 끼워 들었다. 그대로 지나가 버리면 될 것을 가지고 그 기사는 어이없게도 브레이크를 밟고 있었다. 뒤바퀴가 제동상태에서 돌지 않는 것이 보였고 차가 통째로 미끌면서 순식간에 유조차와 접촉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다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사고가 날 번했다.  차를 세우고보니 내가 앉은 조수석쪽의 도어는 열리지 않았다. 윈도우 글라스는 깨지지 않았는데 그 대신 유리 아래 쪽 헤드라이트가 박살났다. 

위쨔는 그대로 내려가 버리는 조선 트럭을 보면서 두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말 없이 탱크 위에 올라가더니 삽 두자루를 길에 내려놓는 거였다. 유조차가 올리막 눈길을 올라갈 때의 흙 펴는 작업을 나는 러시아인들과 여러 번 해왔다.

관곡고개에는 수십미터에 하나씩 흙더미를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 얼어든 흙더미를 까서 눈길에 흙을 펴놓고 유조차를 겨우 발진시켰다. 내가 공전하는 바퀴에 흙을 날라다 펴주면 조금 움직이고 그러다가는 다시 공전하고 또 흙을 펴주고, 그러기를 고개 위에까지 거듭해서야 다 올라갈 수 있었다.

몸은 땀에 젖어 후줄근해졌다. 둘이는 경쾌한 러시아 노래를 들으면서 훈춘에 돌아왔다. 오후에 위쨔를 러시아에 보내고 늦은 시간에 연길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소꿉친구 용수네 집에서 하루밤 신세 지고 다음날 홍사장과 약속한 아홉시에 만나고나서 곧바로 아들애 데리러 갔다. 오래 잖아 개학하고 역시 훈춘의 할머니 집에 돌아와서 계속 학교를 다녀야 한다.   바깥 문을 한참이나 노크해서야 문이 열렸다.  

“들어오쇼.”  

아내는 얼굴에 병색이 짙다. 약 달이는 냄새도 열려 있는 안쪽문으로 확 쓸어 나왔다. 이미 전화를 해 놓았기에 아들애는 떠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아들애는 내가 걱정하던 대로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기운이 없는 지 구들에 앉아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매(할머니)집에 가자!”  

나는 애를 독촉했다. 아내와 헤어진 뒤 이집에 두 번째로 들어 와 보지만 이제는 따뜻한 온돌에 잠간 앉았다 가라는 인사말도 얻어 듣지 못한다. 아내는 애에게 옷을 입히고 멀미약을 먹여 주었다.  

“어머니보구 빠이빠이 해라.”  

아내가 말하니 아들애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면서 힘 없는 소리로  

“빠이빠이!”  

했다. 신을 신기고 나서 내가 아들애를 돌려세웠다.  

“어머니하구 곱게 인사해야지?”  

그제야 아들애는 아내에게 깊이 허리 굽혀 경례했다.  

“그동안 수고 했소!”  

나의 인사에 대답한 것은  

“쾅!”  

하고 닫기는 바깥문 소리였다. 골목을 빠져 나와서야 아들애는 제법 신이 나서 달려 다녔다. 꽃샘 추위에 옷깃을 세우고 걷는 행인들을 하나하나 뒤에 떨구어 놓으면서 시내버스 정류소까지 줄달음쳤다. 맵짠 바람에 몸이 약한 애가 감기에라도 걸릴가봐 택시를 불러 타고 버스 역으로 가서 이내 훈춘행 버스를 탔다.

아들애는 한참동안이나 종알대다가 내 품에 안겨 잠이 들어버렸다. 이상하게도 잠기가 없는 아들애인데 차만 타면 금방 취해버린다. 저녁에 아무리 늦게 자도 아침엔 여섯시 경에 꼭 일어나고 낮잠도 자지 않는다. 차멀미의 징조로 먼저 잠을 자는 것이다.  

가로수는 기승 부리는 봄바람에 마지막 잎마저 다 핥퀴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고 도로 밖은 뿌연 흙먼지가 새하얀 눈을 덮고 있어 오늘따라 더없이 살풍경한 모습으로 안겨들었다. 그렇지만 자연의 섭리를 이기지 못하고 머지 않아 마침내는 본격적인 봄우뢰를 맞이할 것이다.  

아내는 한때 내 인생에 무시할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자유인으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여자로만 남았다. 마치도 항거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처럼 된 그 어떠한 법칙을 따르듯이 말이다. 다만 자유의 남자와는 궤적이 다른 것뿐이 아닌가?  

나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내 아내가 전통적이고 숙명적인 관념이 다분한 여자가 절대 아닌 것을 확인해 왔었다. 시부모님들을 잘 공대하고 남편을 잘 섬기며 애를 잘 키워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이 전혀 없는 여자였다. 가족에 파묻혀 온갖 희생을 다하는 어머니의 처지를 두고 비난하는 데까지 이르렀었다.  

그렇다고 시대에 맞는 혁신적인 생활 방식을 찾는 여자도 아니다. 자고 일어나 밥 먹고 출근하고,
일하고 돌아와서 밥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집 청소하고, 남들이 다 하는 그런 사소한 생활도 아내에게는 버겁기만 하다. 얼굴 가꾸기에 유난히 신경을 쓴 것외에 하는 일이란 커튼을 친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하루종일 전화통에 매달려 수다를 떠는 타입도 아니다.  

젊은 시절에 멋 부리지 못한 채 시집살이에 묻혀 살기 싫다, 시부모 잘 모셔 그 며느리 참 좋다는 평판과 남편을 잘 섬겨 그 아내 참 좋다는 칭찬을 듣고 싶지 않다, 밥 하고 빨래 하고 청소 하는 게 힘들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다, 미풍양속이면 어떻고 맘씨 고우면 어떠하랴, 숙녀는 싫고 현숙이라는 개념과 멀리 떨어져서 혼자서 편한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간다. 무능한 남편과 같이 살거면 아예 홀로 되어버리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 아내의 언행으로부터 추리해낸 이 모든 것들은 헤어지고나서 들은 여러가지 말로 확인해볼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 다 죽고 둘만 남는 대도 같이 살지 않을 것이다. 영원토록 성공 못할 남자다. 나를 단 한번이라도 사랑해준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하던 아내는 몸과 마음이 현실과 다 떨어져 사는 환상적 타입이었다. 이상적인 남자와 이상적인 사랑을 하면서 이상적인 생활로 인생을 장식하는 것, 그것은 단지 꿈이었을 거였다. 나를 상상중의 이상적인 남자와 비교하고 둘의 인연을 이상적인 사랑의 틀에 억지로 맞추려고 했으니 이상적인 생활은 그저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었다.

두리뭉실하고 둥글둥글 살아가는 것–이 같은 우주의 순리법칙을 엄청나게 뛰어 넘은 아내로서는 나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거였다. 그러는 나는 아내 앞에서 진정한 남편으로 되지 않았다. 자포자기에다가 가족의 역사로 늘 몸살을 앓고 있던 중 장손이라는 개념도 잊어버린 채 타락한 생활에 묻혀 살았다. 아내가 나에 대한 실망보다 다른 그 어떤 실망감을 지닌 채 말이다. 가정이라는 건 형식뿐이었고 이미 그 유지성을 상실 해버린 뒤였다.  

잠들어 있는 아들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불현듯 북경에서 가이드공부할 때 들은 적 있는 《무위(無爲)》의 사상경계에 대한 역사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진(秦)나라의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첫 황제였다. 그런데 진나라는 세워진 통일을 15년만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 원인은 진시황 자신에게 있었다. 바로 진시황이 나라를 하나로 통일한 외에도 모든 것을 다 통일하려 한 것이 제일 치명적이였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중국은 지방에 따라 문자도 다르게 썼고 소수민족이 많은 지방에는 언어풍속 외에도 도량형도 각기 달랐었다. 이 모든 것을 통일하려 한 자체가 바로 우주의 순리법칙을 위반한 억지공사였다. 진나라말기에 이르러 류방과 항우의 농민봉기가 일어난 뒤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지고만 것이다.  

류방이 항우와의 패권 쟁탈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순리법칙을 잘 응용했기 때문이었다. 즉 한(漢)나라의 시조로 된 후에도 진시황처럼 개혁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뿐더러 그 전통을 아래 대 황제들도 이어가게 한 것이다. 한나라 제5대 황제인 한무제 때에 와서야 비로소 개혁조치를 대었는데 시기가 적당했기에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한나라가 전에 없이 강대해지게 되었다.  

진나라와 한나라에 걸친 이 역사적인 교훈을 《무위(無爲)》의 사상경계로 이론화시킨 것은 청나라 때이다. 북경 자금성 궁전안의 용좌 바로 위에 금테를 두른 액자를 걸어 놓았는데 《無爲》 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진시황처럼 실책을 범하지 말고 한나라처럼 순리에 따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론은 간단히 여섯 글자–《일체순기자연(一切順其自然)》으로 나타내고 있다. 뜻인 즉 모든 것은 제멋 대로 발전하게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이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로 많다.나는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나의 결혼 생활이 이 법칙을 벗어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순리법칙을 준수하기 위해 헤어지게 된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이제까지 이혼에 대해 뭔가 잡아 두고 결론지으려던 나의 집착은 마침내 원만한 결말을 보게 되었다. 아내에 대한 모든 것은 묻어 두고 다른 여자를, 앞으로 내 아내로 될 여자를 산뜻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온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내가 나진행을 결심했던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면 바로 오늘과 같은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도 철 없이 놀았던 지난날들이 결코 내 앞길을 막아나서는 거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발전의 훌륭한 주추돌로 되어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여자에 대해 너무도 몰랐던 나에게 있어서 지난날에는 실패와 좌절만 거듭되었다. 다행히도 2년간의 나진행을 통해 모든 것을 소중한 경험으로 마음속깊이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늦게나마 철이 든 것 같고 남자의 흉금을 갖출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지 아니하게 나진에서 인정이라는걸 깊이 느껴 보았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같지 않은 관념과 의식을 들여다 보면서 나에게만 속하는 새로운 인생을 깨닫게 되었다.

또다시 실패와 좌절을 겪어도 태연하게 대할 수 있는 침착함과 냉정함, 결코 인정에 억매이지 말아야 할 요즘 세상의 살벌한 구석구석들, 연애 결혼생활에 결여해서는 아니 될 예술성과 융통성,
사회인으로서의 근로함과 지혜로움, 잘 된 일이든 잘못 된 일이든 다 순리법칙으로 이해하는 것 …

얻은 경험이 너무 많다. 그래서 오늘은 헤어진 지 3년 되는 아내에게 너무도 감사한 마음이다. 나에게 참다운 인생공부를 시켜준 이 여자가 그지없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비록 인연이 끊어졌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내 인생의 항로를 비춰주는 영원한 등대로 남기고 그녀한테서 얻은 경험을 내 인생의 지침서로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졌다.  

두만강 옆에 착 달라 붙은 도로는 훈춘으로 통한다. 열일곱에 집을 나선 후로 10여년간 이 도로를 얼마나 달렸는 지 모른다. 당금 도착하게 될 훈춘처럼 내 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희망도 오래잖아 내 곁에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 희망이 있는 곳이 바로 어디고 이제 얼마나 더 달려가야 하는 지? …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난 이들은 거의 다 사업에서 성공하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뛴다. 나도 힘겹게 오늘까지 뛰어 왔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엄청난 역부족이다. 성공의 희망, 그 희망을 잡는 지극히 어려운 여정을 계속 뛰고 또 뛰어야 한다. 뛰다 보면 불원간에 그 희망이 내 곁에 다가올 것이리라.  

이 날은 회사 설립의 기념일을 사흘 앞둔 2월 1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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