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길공원의 이름은 원래 인민공원이였다는데, 생각해보니 그랬던것 같기도 하다. 연길에 하나밖에 없는 공원이름이 기억에서 희미해질 정도로 몇년에 한번 갈가말가한 곳이 되였다. 

며칠전 우연한 기회에 연길공원투어를 했다. 올 겨울 연길은 눈도 몇번 안왔고 대체적으로 춥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입춘이 코앞에 닥치니 동장군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추운 날이 연속되었는데, 그날은 그나마 따뜻한 오후였던지라 공원 한바퀴 도는 것이 그닥 무리는 아니였다.

동물원 옆으로 난 동쪽대문으로 들어가니 먼저 보이는 것이 원숭이였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원숭이 한마리밖에 보이지 않는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도 우리는 추운데, 쟤는 얼마나 추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원숭이를 격하게 좋아하는 친구가 보면 아마 가슴아파서 데려다 키우려 할 것 같다. 어릴때 유치원에서 소풍와서 저기 원숭이우리앞에 깨알같이 모여서 해바라기 같은걸 던져주던 생각이 난다. 맨날 그것만 먹어서 그런지, 던져주면 얼마나 잘 까먹던지. 지금 혼자 있는 저 원숭이는 아마 그때 내가 준 해바라기를 먹던 녀석의 손주쯤 되려나? 원숭이의 평균수명도 모르면서 속으로 별 생각을 다한다. 나도 역시 날이 추워서 그런가보다. 

몸을 돌려 왼쪽으로 45도 방향으로 걷다보니 “곰굴”이 나왔다. 연길 살던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곰굴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구도이다. 그날엔 곰은 보이지 않았다. 몇년전에 들은 말로는 곰들은 모두 모아산쪽으로 이사를 하였다는 말을 들은것 같다. 주인없이 텅빈 굴을 내려다 보노라니 어릴적 괴담들이 생각났다. 소학교때 한두번은 들었던것 같은, 철조망을 타고 오르다가 곰굴에 떨어진 아이에 관한 이야기, 내 기억이 잘못 된거라고 믿고싶다. 

  2  

좀 더 걷다보니 “귀신의 집” 같은 허접한 체험시설이 나온다. 우리 어릴때엔 저런 격이 떨어지는 코너는 없었는데. 그럼 어릴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건 뭔가 잠시 생각을 해본다.

바로 웃음거울이다. 진한 붉은 색 또는 갈색의 나무테두리에 들어있던 커다란 볼록 거울, 오목거울 그리고 이름 모를 거울. 어릴때 거울앞에 서서 느낀 기분은 아마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느낀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가. 웃음이 없던 아이도 웃음거울 앞에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근심걱정이 있는 부모일지라도 이때만큼은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와 함께 키를 낮출수가 있었나보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가끔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깊은 근심을 가지고 있다. 일상의 말과 소리가 모두 거울밖으로 밀려나고, 못생긴 모습일지라도 온전히 부모와 함께 거울프레임에 담겨 웃고 있는 그런 순간, 아이는 그 이상한 나라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발닿는 대로 걷다보니 놀이기구가 나온다.  여기도 비어있고 저기도 비어있다. 바이킹시설 옆을 지나다보니 너무 녹슬어있어서 아직 생에 미련이 있는 나로서는 올라가지 못하겠다. 그래도 대관람차는 아직 쓸만해보인다. 저게 좀만 더 크면 파리나 도쿄처럼 도시를 장식하는 상징물이 되지 않을가 하는 바램을 해본다. 어느것 하나라도 가리키면서 저건 나도 어릴때 타봤다고 말하고 싶은데 다 낯설어보이고 다만 그자리에서 내가 탔던 놀이기구들이 생각날뿐이다. 

다른 친구들은 기억날지 모르겠는데, 80년대에 인민공원에는 직경 5미터쯤 되는 원을 따라 꽤 빨리 달리는 어린이기차가 있었다. 회전목마처럼 커다란 지붕도 달려있어서 비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탔던것 같다. 한번 타는데 입장료가 얼마였던지 기억은 안나지만, 번마다 한번만 타고 아주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이 기차의 백미 또한 회전목마와 마찬가지로, 기차가 달리면서 밖에서 지켜보는 엄마아빠를 지나칠때마다 의기양양하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었다. 나이 서른 넘어 롯데월드에서 처음으로 회전목마를 탔어도 어릴때 저 기차를 탈때 느끼던 기쁨을 갱신해주지는 못했다. 

 3  

8,90년대에 연변에서 6.1절이나 9.3명절은 온 식구가 제일 근사한 옷을 입고 나들이를 하던 좋은 날들이었다. 그때만 해도 가진 옷중에 제일 좋은 옷이 한복인 사람들이 많았던지, 여자와 아이들은 한복차림이 많았고 남자들은 양복차림이 많았다. 간혹 “메가내”라고 부르던 썬글라스를 착용한 어른이 가족 중에 한명 있으면, 그 메가내는 그날 한사람씩 단독사진을 찍을때면 빌려쓰는 아이템이었다. 우리집 앨범에 꽂힌 사진들이 이를 어느정도 증명해준다. 

어릴때 나는 독보적으로 피부가 까맸는데, 나의 한복은 그런 나에게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예쁜 연분홍색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한복은 좋아했지만 그걸 입은 나의 모습은 그닥 내키지 않았었다. 엄마가 하도 입으라길래 입긴 했는데 꼭 남의 옷을 빌려입은것 같은 기분을 떨칠수가 없었다. 어느 해 육일절에는 그 옷을 입고 공원으로 가던 길에 분홍 비단천에 하늘하늘한 분홍색 꽃이 가득 부착된 나의 한복에 꿀벌이 날아 앉은걸 본 엄마가 “꽃이 진짠줄 알고 꿀벌이 날아드네”라고 말한 한마디에 내 기분이 금새 좋아졌던 또렷한 기억이 있다. 

그렇게 모두 날개옷을 입고 공원으로 가는건 좋은데, 온 연길시내 사람들이 공원으로 출동한지라 공원다리 뿐만 아니라 양쪽 강뚝부터 사람들로 꽉 찼었다. 전화도 뭐도 없던 시절인지라 약속장소를 정했음에도 서로 찾지 못해 안타까웠던 기억도 있고, 뉘집 아이인지 인파속에서 부모손을 놓치고 서서 울던 모습들도 많았다. 

보통 약속장소는 정문 앞 또는 정문에 들어가서 정중앙의 계단을 오른후 보이는 가야금을 타는 하얀색 선녀조각상이었다. 집집마다 거기서 찍은 단체사진 한장쯤은 다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조각상은 원래 인민공원의 상징이었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곳에 있을때 가장 빛났는데 말이다.

이래저래 용케 공원에 입장하여 아까 얘기한 놀이기구도 타고, “귤물”이라고 불리는 오렌지주스도 아닌 색소만발한 음료수도 사먹고, 아이들은 주먹마다 1인 1솜사탕은 필수고 아무튼 명절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공원에 갔다가 같은 유치원 친구거나 같은 반 친구를 만나면 그 또한 얼마나 반가운지. 너는 뭘 탔니 나는 뭘 샀다 이거 먹을래 그래 먹어보자 이런 유치한 대화가 다였지만 유치원과 학교를 벗어나 우연히 만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자연스러운 사교활동의 시도였다고 하면…너무 확대해석이구나.

  4  

이렇게 오전내내 아이들 중심의 각종 놀이를 하고난 어른들이 피곤해진다 싶을때 쯤이면 감사하게도 점심시간이다. 놀이공원에서 좀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는 예전에는 커다란 숲이 있었다. 온가족이 메뉴를 나눠서 벤또(도시락)를 싸와 나무아래의 그늘에 펼쳐놓고 음식을 나누었다. 이쯤하여 급 궁금해지는 일이 하나 있다. 전화기도 없던 그 시절에는, 어느집에서 음식을 뭘 해오는걸 어떻게 토론하고 정했을가. 일일히 만나야 하는가. 나중에 어른들한테 물어봐야겠다.

음식을 즐기고 담소를 나누고 술한잔 들어가면 춤도 추고 잊지 않고 애들에게 노래도 시킨다. 어린 애들은 신나게, 좀 큰 애들은 건성으로 부른다. 춤추고 노래하고 시키는 족족 다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일이 너무 괴로운 아이들도 분명 있었겠으나, 그때는 내성적인 아이들은 얘가 혈액형이 A라서 그렇구나 하는 이해를 받기가 어려웠고 “양기없다”라는 가벼운 핀잔을 받았다. 

그래도 한 오분만 지나서 시원한 바람에 땀을 날려보내고 나면 그런 핀잔정도는 함께 날아갔고, 아이들은 나무그늘아래에서 뛰어다니며 알고 있는 모든 놀이를 쏟아냈다. 생각나는 것으론 숨바꼭질, 줄넘기, 잠자리 잡기, “기계사람”이라 불리던 집찾기 놀이(영역표시놀이), 유리알놀이, 딱지치기 … 쓰다보니 놀이가 점점 공간에서 지면으로 옮겨지는 느낌이다. 이제 이곳에서 자리를 떠야겠다. 

  5  

생각이 다시 현재로 돌아와 계속 걷는다. 겨울이라 꽁꽁 얼어붙은 인공호수 옆을 지나가는데 누가 내이름을 부른다. 그럴리가 하면서 혹시나 해서 바라보니 우리 둘째이모다. 손주를 데리고 썰매타러 나오셨다. 이모가 부르시자 저만치 혼자 놀던 조카가 우리를 바라본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잘생긴 녀석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다. 여기서 보니 더 반갑다. 코너만 돌아도 가족을 만나는 동네, 이럴때는 연길이 참 좋다. 

나도 모르게 연길공원을 너무 조용하게 그려놓은 것 같다. 그렇지는 않았다. 정문 안쪽에서는 음악을 크게 틀고 광장무를 추는 중년층이 있었고, 또 더 안쪽에는 어떤 조선족 어르신께서 술 한잔 걸치시고 노래방기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시기도 하셨다. 다른 날에 왔으면 젊은 사람들이나 아이들도 더 많았을것 같기도 하다. 올봄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공원에 놀러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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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만 집에 가야겠다. 딱히 출입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나갈 출구는 많다. 원래 담을 쌓고 입장료를 받던 정문이 있던 곳엔 이제는 커다란 돌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읽어보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였다. 지금까지의 잡다한 이야기를 들어주신데 대한 보답으로 돌판위의 글을 보기 쉽게 타이핑하여 드리려 한다. 

인민공원은 청나라 광서 33년(1907년)에 건설되여 변강사무감독 오록정이 제의하여 건설하였고 지금까지 1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초기 건설면적은 약 5헥타르였다. 민국시기, 상부국에서는 이곳에서 외사활동을 자주 진행하였는바 그로부터 <<상부국공원>>이라고 불리웠다.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던 기간, 공원내에는 일본신사, 공자묘 등을 설립하였다. 1953년에 정식으로 <<연길시인민공원>>으로 명명하였다. 건국이후, 여러차례의 확건을 거쳐 공원의 총 면적은 32.7헥타르에 달하고 공원에는 현재 동물원, 아동놀이터, 화초감상구, 휴식공간 등 구역이 있다. 2008년부터 무료로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현재 종합성적인 레저공원으로 되였다. 

나의 동년과 소년을 함께 하고 중년이 되여가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연길공원의 모습을 기억에 새기려고 이 글을 써봤다. 인민의 공원이라 불렸지만 이제는 시민의 공원이라 불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공원, 시대마다 역할을 달리하여도 늘 변함없이 사랑받는 곳으로 남기를 바란다.

【20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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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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