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교토사람과 그 밖의 사람으로 말이다.

이는 해외 문화인류학자들이 일본에 대한 평가 중의 하나다. 일본의 전통 하면 제일 먼저 교토를 떠올린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곳 교토는 불문율이 많기로 유명하다. “아는 자만이 누린다”. 룰이 많다는 건, 뒤집으면 그만큼 일상을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자세가 몸에 박혀있다는 얘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도 이미 알거라는 전제로 행동한다. 그리고 그 룰들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바깥 분'(よそさん)인가 보다 라고 여긴다. 차별로 들릴 수도 있지만 미묘한 뉴앙스의 차이가 있다. 상대에 대한 ‘폄하라기 보다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다. 교토의 이러한 문화는 세상의 모든 제국의 수도에 사는 사람들이 그랬듯 ‘정치적 조심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이 천년을 웃도는 도시에 이어져 온 ‘공동작업’ 즉 더불어 일하는 전통으로 인한 지식의 축적이 더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70년 분의 이야기는 듣고 자라기에 교토사람은 자연스레 교토사람다워 진다.’ (入江敦彦, 『교토인 만이 알고있다』)

나라의 서울 주민으로서의 분업제와 그에 따른 업종 간 협업으로 가장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야 했던, 그래서 수많은 관습과 전례들을 입에서 귀로, 귀에서 또다시 입으로 옮기면서 긴 호흡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게 교토사람이다. 그래서 100년 정도로는 명함을 내밀기 무색할 만큼 오랜 전통을 가진 옛가게(老字号)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놀라운 건 이런 가문의 대부분은 한 세대 건너 가업을 전수한다는 것이다. 

즉 할아버지가 어려서부터 손자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할아버지가 은퇴하여 아버지가 대를 물려받아 가게를 꾸려갈 때 즈음 되면 손자는 직접 가게 현장에서 실전을 익혀가고, 아버지는 또 증손자에게 직접 기술을 전수하는 식이다. 그러니 아이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부터에 익숙하고 그 손때에서 자란다. 그러니 70년 분의 관록와 지식이 몸에 배인다는 얘기다. 

삶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생뚱같은 도입부로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질문에 다다르게 되어서이다. 우리 ‘조선족’들에게 70년이면 어느 정도의 세월일까? 어느새 이미 기성세대의 바통을 넘겨받고 있는 80후만 예로 들어도 1910년대가 될 것이다. 그 시간이면 질풍노도 같은 근대사를 거친 우리에게는, 망국과 식민지와 간도개척과 만주국과 광복과 공화국 창건과 골육상잔과 분단과 자치와 운동과 동란과 개혁개방과 노무수출과 또다른 이산(離散)과… 강산이 몇번이나 색을 갈았던 세월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그만큼 ‘조선족’으로서 우리는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많은 것을 잃지도 않았나. 한 눈 팔 새도 없이 바뀌고 또 바뀌는 삶의 기후에 적응에 적응을 더하기에만 바빴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켜켜이 쌓인 역사의 지층에는 또 어떤 것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땅속 유물로 묻혀져 버린 걸까.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의 구조는, 일년이 다 가도 일가친척들이 한 번이나 모일까 말까 한다. 글쓴이도 어쩌다 마련되는 그런 자리에서 가끔씩 꺼내는 어른들의 ‘옛말’ 조각들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짧은 시간과 쪼그만 파편들조차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 게다가 옛날 얘기를 자꾸 꺼내는 건  ‘늙어서 그렇다’는 라벨이 퍽이나 쉽게 와 붙어버리는 풍토까지 곁들여 진다. 그러니 우리는 몇년의 기억이나 뒤돌아보며, 아니 몇년 정도의 관록이나 곳간 뒤주에 쌓아두고 눈 앞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 걸까. 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이 후려칠 때가 있다. 삶을 돌아봤을 때 가닿는 눈길의 거리만큼 생각이 깊어지는 거고, 또 그만큼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건데, 근데 내 눈은 왜 이다지도 컴컴할까고. 여기서 문제의식을 품는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과거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으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선족’이 가진 역사는 길지 않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유산을 쌓아 놓았다. 아니, 풍성한 유산이라 함이 맞을 것이다. 다만 주마등처럼 뒤바뀌는 역사의 수레바퀴 사이에서 이러한 보물들은 정리될 새도 없이 하찮은 돌멩이 취급을 받아 굴러다니고 발에 걷어차이고 있는게 다반사가 아닌가 싶다. 그나마 정리되어 나오는 일부 좋은 ‘조선족’ 이야기 콘텐츠들은 젊은 세대의 외면을 받고있다(물론 쓰레기가 더 많은게 현실이다). 공감을 사지 못하는 것이다. 전에 다른 곳에서 이런 표현을 한 적이 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망각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보다도 윗세대의 유산과 끊기는 아랫세대와, 아랫세대와 곬이 생기는 윗세대가 안쓰럽다. 다년생 과목이 일년생 들풀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1940년대 룡정 명동촌(사진: 김재홍 수집, Algorithmia 처리)

좋은 과거 이야기가 외면받는 건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화법의 문제라는게 글쓴이의 생각이다. 우리는 굴곡이 너무나 촘촘한 길을 걸었고, 세대의 차이가 아니라 10년, 지어는 5년을 단위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다. 조선족 공동체가 사전이라면 우리는 세대 별로 서로 다른 기초어휘를 가지고 있는 외국어 대역집(對譯集) 같다. 더군다나 앞세대가 꾸던 꿈을 이야기하던 그 화법과 담론은 이미 본의 아니게 오염이 되어버렸다. 작가 王朔를 비롯한 그 시기로부터 시작된 중국 주류담론에 대한 해체로 인해  ‘为人民服务’와 같이 리상을 담던 낱말들은 이미 상한 반찬 신세다. ‘薅社会主义羊毛’에 이르기까지 일단 개그와 해학을 담았다 나면 다시 쏟아낸다 한들 더는 원래의 그릇과 원래의 맛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말들로 아무리 좋은 역사를 풀어낸다 한들 그 성의가 독자한테 가닿을 수 있을까? ‘말’에 이미 신물이 나있는데. 본의 아닌 대화의 단절이다. 

고도압축의 과거를 걸은 앞세대더러 지금 와서 화법을 바꾸라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그러니 뒷세대가 대신 풀고 담금질하고 되새김질 하는게 맞을 것이다. 젊은 세대 마음에 쏙 드는 말투로 바로잡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듣기에 거부감 없는 자연스런 화법으로 바꾸는 정도까지는 애쓰는 것, 그게 최저한도의 예의이자 교양이라는게 글쓴이의 생각이다. 그런 방식을 통하여 공동체의 바탕을 공유하고 ‘앎’의 폭을 넓혀가고 공감대를 회복해 나갈 때에야 만이 두만강 뱃노래가, 백두의 아리랑이 오늘 현실에까지 공명으로 울릴 수 있으리라. 

태어나기 전 70년의 이야기가 스며 들면서 자라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모습들, 교토라는 도시는 그렇게 쌓이는 문화의 켜와 켜 사이에서 독특한 새 아이디어들을 움틔워 왔다. <슈퍼 마리오>나 <포켓몬고>를 낳은 닌텐도(任天堂), 세라믹칼로 유명한 전자재료 기업 Kyocera(京瓷), 센서 기술로 이름있는 OMRON(欧姆龙)과 같은 세계적 브랜드들을 만들어 내기까지, 이 작은 도시는 오늘날까지도 그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교토라는 사례의 개별성을 감안하더라도, ‘조선족’ 공동체가 가진 가능성을 읽어 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나. 

우리는 우리의 ‘할배’, ‘크라바이’까지만 알아도 너무나 많은 걸 ‘상속’받을 수 있다. 해 아래에 새 것은 없다. 사실 그들이 겪어 왔던 패턴 속에 다 들어있다. 그러니 공동체 기억은 유통기한이 지나면 처리되어야 할 도태품이 아니다. 씨간장이고 비법육수다. 폰이 바뀌어도 위챗 비번이고 클라우드 백업파일이다. 다만 새 시스템에는 새 어플이 필요하다. 새 계절에는 그 시절의 젊은 언어가 요구된다. 

그러니 다시 읽자. 새로이 말하자. 그리 잇자. 

+ 교찾로 시리즈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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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떠돌면서 듣고 모으고 배우는, 이야기 "꾼"이 되고싶은. 연변, 북경을 거쳐 교토에서 고전과 씨름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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