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 내가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러 학자들은 이 단어를 보며 뒤러의 동명 도판화를 떠올린다.
나는 서양 신화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한 나머지 뒤러의 그림 속에서 사색하는 청년과 온통 수수께끼로 치장된 상징물들을 보면서 도저히 “멜랑콜리”라는 정서를 이끌어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상학적인 풀이를 하면서 이것이 왜 “멜랑콜리”인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이 그림은 멜랑콜리적인 정서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멜랑콜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첫 인상. 나는 때론 아는 것도 없으면서 허세로 가득 차 있다. 때론 무식함이 용감함을 낳을 때도 있으니..)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도 본능적으로 이 그림에 관한 더욱 깊은 연구를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게으름에 대한 변명까지..)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나에게 멜랑콜리란 무엇인가?
우울의 감정? 슬픔? 비관적 태도? 비애의 마음?
음, 멜랑콜리에 대한 나의 이해는 프로이트의 해석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다고 볼 수 있다.(단 멜랑콜리 개념을 바라보는 시점에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는 멜랑콜리를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상, 국가 등도 포함)의 상실로 인해 결국 당사자가 자기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마저도 잃어버리는 병리적 증상으로 간주한다.
멜랑콜리적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당사자는 자신이 상실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없으니 치유법도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종종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앓은 사람들이 최면술 또는 명상과 같은 무의식 활동 속에서 위안을 얻게 되는 상황이 납득되는 것도 같다.
한국에 오면서 나는 점차 삶에 대한 열정과 재미를 잃어 간 듯 했다. 당연히 얻은 것도 있다. 그것은 의기소침과 우유부단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지나친 비판과 ‘도덕적’인 속박들이다. 좋게 말하면 배려와 심사숙고의 정도라고 할까? 나는 아마도 오랫동안 멜랑콜리적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여기서 우울/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최대한 적게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멜랑콜리적 상태가 병리적으로 취급되기에는 이미 너무 보편화 되어 있다. 하지만 '정신질환' 또는 '신경증'이라는 타이틀이 일단 한 사람에게 붙여지게 되면 그는 자기자신이 ‘비정상’임을 판정 받음으로써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는 시도조차 포기해 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말 그대로 “멜랑콜리Melancholy”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한동안 나는 내가 마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듯, 마치 온 세상이 나와 상관 없는 듯 염세주의자와 허무주의자들 처럼 삶에 대한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내가 상실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간파할 수 없었다. 만약에 프로이트가 살아 있다면 그는 아마도 이러한 나를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로 취급했을 것이다. 멜랑콜리적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로 인해 자기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나아가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하게 된다.
니체는 이 잔혹한 세계와 피투성인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고 싶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믿고 싶어도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그 뇌우침의 계기를 앞당기거나 지연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참된 앎을 깨닫게 되는 정도에 따라 더욱 쉽게 풀리거나 더욱 어려워지는 듯 하다.
요즘 나는 여전히 삶에 대한 열정과 재미를 되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권태에서는 벗어난 듯 하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아주 경쾌하고 홀가분하다. 나는 잠시 멜랑콜리적인 침잠 속에서 벗어나온 것 같았다. 여기서 나는 '잠시'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멜랑콜리는 인간이 경험하는 사건들에 따라 시기 불문하고 누구든지 다시 빠져들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방이 꽉꽉 막힌 영원한 암울의 숲이 아니다.
이점은 아주 중요하다.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종종 멜랑콜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어둠 속에서 이념이라는 빛을 향해 달려 가고 예술가는 잔혹한 현실을 딛고 이상(또는 예술의 이념)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이들이 멜랑콜리적 상태 속에서 세계를 긍정하는 방식이다. 사상가(여기서는 진리를 끊임 없이 탐구하는 자)들은 어둠속에서 빛을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때론 그 멜랑콜리의 어둠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멜랑콜리적 관찰 방식은 일종의 모험과도 같은 행위인 것이다. (이들이 자살 하거나 정신 이상자로 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자기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본다는 것, 암흑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그러한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어둠의 집착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 단계인 것이다.
나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암울의 숲을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였다. 나 자신한테 그것은 ‘자기애(自爱)’를 되찾는 여정이였고 동시에 ‘자기애의 추락'을 스스로 발견하고 다독여 주는 시간들이었다.
세계를 알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태껏 세계의 피상적인 형식들 속에서(예를 들면 과거의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나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되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 내가 원하던 나는(과거의 이상향 속에 머물고 있었던 내가 아니라) 늘 사랑의 마음이 놓인 그 자리에서 자기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뒤러의 <멜랑콜리> , 이젠 조금 이해할 수 있으려나??
여전히 잘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