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조 없이 불현듯 찾아오는 슬픔이 있다.
예고 없이 하나도 반갑지가 않는 흔들림도 있다.
그것은 때론 마음 속에서 일어난 욕망이었다.
그것은 때론 마음 밖에서 찾아온 자극이었다.
나이가 들면 쉽게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 감성적으로 쉽게 일렁이고 싶지 않았다.
불안 하나 쯤은 누구나 품고 살아간다.
그러니 나의 불안은 잘 다독이면서 그냥 담담해지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 비수처럼 꽂히는 순간이 적어질 줄 알았다.
그렇지가 않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타격감의 강도가 하늘과 땅 차이가 났다.
아무나 였다면 언급할 가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6년 넘게 일해온 내가 “존경”하는 선생이 였을 때는 말이 달랐다.
– 너희는 진짜 자유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거야.
– 하고 싶은 말을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잖아.
– 음식 주문할 때도 선택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니! 정해준 것만 먹어야 되는 거네…
– 너의 그런 생각이 바로 중국의 공산주의 이념의 반영이야.
– 너는 참으로 뼛속까지 중국인이구나.
– 지금까지 잘 버텨냈어. 너는 오리지널 한족도 아니잖아.
중한-한중 통역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한국과 중국의 비지니스의 현장을 경험했다.
한번 스쳐지나는 미팅으로,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당연히 그 중에는 지속적으로 수년 동안 이어지는 인연도 있었다.
서로의 이익을 목적으로 프로젝트 협업을 진행할 때는 언제나 순조로운 편이다.
왜냐? 난 중국 측에서 원하는 것과 한국 측에서 원하는 것을 잘 조율할 수 있었다.
단,
깊이있는 만남으로 이어진 후 사회 문제를 논의할 때면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생긴다.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인정하고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나의 성장 배경, 학업 과정, 일하는 사회환경의 영향을 쉽게 지울수는 없다.
내가 말문이 막혔던 것은 머리 속에 두가지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에 일부분 공감하면서 또 나의 머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다른 목소리를 압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양갈래로 나뉜 소리의 물길이 머리 속에서 부딪힐 때면
파도가 생겨 일렁이고 크거나 작거나 흔들림은 피할 수 없다.
나는 굳건한 나 만의 신념의 부재를 느끼면서 작아지는 것 같았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인지할 때면 화가 나고, 따라서 울분이 올라왔다.
현실에 입각해 살아남기 위해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이념 싸움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흑과 백으로 나뉘는 어느 한 극에도 치우치지 않으려고
중도라는 핑계로을 앞세워, 유연함이란 이름 하에
선택을 요하는 상황을 판단할 때 이기적으로 대처했다.
그렇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모순되는 말인가.
행복의 기준은 무엇이고, 행복한 생활은 어떤 모습인가?
행복은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순간 순간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가.
어렵다.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다.
이럴 때마다 또 도망치고 싶어진다.
오늘은 욱하고 올라오는 이 감정이 여느때보다 격하다.
이 순간이 지나 하루 더 지나면 울분이 옅어져 사그라들 수도 있다.
한번 쯤은 정제되지 않은 울분을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 그 순간의 나 자신에 대한 한탄을
여기에 글로 기록해두고 싶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소망한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먼지로 되겠지만,
그럼에도
내 자리를 지키는 큰 바위가 되고 싶다.
깊이 뿌리내린 나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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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돌보기란 키워드를 선택한 것은
먹먹하게 저려오는 가슴의 이 느낌이
해발 4천미터에서 느낀 산소부족으로 인한 고산증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체험한 고산증은 심호흡을 통해 조율 되었다.
심장 부근을 무언가 짓누르는 느낌, 멀미할 때와 비슷한 메슥거림 그리고 다리가 무거워나는 그 느낌.
마음을 돌보려고 할 때
심호흡을 하면서 글로 써내려 오니 속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린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글쓰기를 스스로 할 수 있는 치유의 과정이라 하는가보다.
자기 절제가 참으로 중요한 미덕이라 하는데,
오늘의 이 글은 절제의 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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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는 이렇잖아” 하고 말하는 말은 “너는 이렇잖아”보다 더 아픕니다. 맞는 말이라고 해도요.
맞슴다.
“너네”라고 지칭했을 때 중국에 사는 조선족을 통틀어 말하는 그 상황이 진짜 훨 아프게 느껴졌슴다.
三体도 이야기전개가 중국식사고방식이라 평가 받았잼까. 그래도 우수한 작품임에 틀림 없고. 그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어떤 락인이 박히는 것, 나쁘지 않슴다 / 그리고 이런 피드백을 받으면서 상대에 대한 반응이나 대응 방식을 수정하는 것, AI 딥 러닝과 비슷하지에. 어느 알고리즘의 모 权重 수치가 조정됐슴다. 데이터가 풍부해지고 시스템이 업그레이드 된건 축하할 일이구에
생각의 전환을 이렇게 비유해 주시니 명쾌함다.
경험치 추가와 동시에 조정이 진행된 것도 분명함다.
락인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도 수양쌓기짐에~
감사함다~~
두 언어에 관련된 일을 하다보면 어쩔수없이 마주치게되는 상황들이죠.학교때 한족 룸메들이 아무생각없이 내뱉는 ‘你们朝族’나 한국에서의 외국인취급.제 나름대로 보호막을 친 방법은 일 외에 깊은 얘기를 안하는거였습니다.나름 효과있어요.
통번역을 오래 하다보니 일로만 만나는 상황에서는 개인 감정 빼고 프로다운 등가 교환만 하면 되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