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더 이상 외부의 절대적 기준으로 보지 않는 니체의 사유는 동일자 존재의 해체와 더불어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들은 제가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프랑스 문학비평가 모리스 블랑쇼의 ‘바깥’ 개념 및 진리의 중심이 사라진 자리에서 생기는 ‘틈/공간’에 머무는 사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이란 에세이에서 저자(말하자는자/주체)의 권위를 해체시키고 텍스트의 의미생산을 독자에게 두는 관점과, 니체가 ‘신은 죽었다’를 선포함으로서 주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강조하는 관점은 결국 양자 모두 ‘말하는자/저자의 해체를 ’, ‘주체의 해체’를 통해 ‘중심이 아닌 외부’을 향한다는 점에서 또 모리스 블랑쇼의 ‘바깥’개념과 이어져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말하는 자/주체의 해체를 통해서, 현대적 글쓰기라는 것은 나(주체)의 언어가 아니라, 주체(중심)를 넘어선, 붙잡을 수 없는 ‘바깥’을 붙잡으려는 空纠缠이라는 것이죠. 프루스트, 샤르트르, 카뮈, 제임스 조이스 많은 이들이 이것에 다가갔지요.
말씀하신 ‘저자 해체’나 ‘빈틈’이라는 개념은 저에게는 생소하지만, 언어학의 하위 분야인 화용론과 매우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의미를 어휘와 문법에 고정된 것으로 보았지만, 구조주의 언어학이 정점을 찍은 이후인 1960~70년대 언어철학에서는 오스틴과 서얼 등에 의해 화용론이 등장하면서, 의미를 상황 맥락 속에서, 화자와 청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되는 것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지요. 의미는 더 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 맥락에 따라 유동적인 것으로 인식됩니다. 물론 사회적 관습이 영향을 미치고, 화용적 규칙이 있다고 보지만요.
한편, 두 접근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도 있는 듯합니다. 해체 이론은 철학적·문학적 맥락에서 의미의 권위와 중심성 자체를 해체하려는 데 초점을 둔다면, 화용론은 언어 사용의 실제 맥락에서 발화의 의도, 효과,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데에 주력한다는 점에서요.
결국 문학·비평의 ‘빈틈’이나 ‘저자 해체’와 화용론은 비슷한 시기에 각기 다른 분야에서 등장한, 시대적 문제의식에 대한 공명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언어, 주체, 의미의 해체와 재구성을 향한 동시대적 사유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독자, 즉 텍스트 의미 생산자로서 아다먹끼님은 니체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네, 좀있다가 대댓글로 쓰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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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구조주의 관점에서 '차라투스트라' 의 세 동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세 가지 상징 ―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 대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그러기에 앞서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양쪽 진영에서 바라보는 언어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나는대로 적어본다. (기호, 기표, 기의, 코드, 차연 등등 전문용어는 최대한 생략한다. )
1.
먼저 구조주의적 측면에서 보는 언어의 체계다. 구조주의 관점에서 보면, 한 단어와 그 단어가 지시하는 의미는 서로 본질적인/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무슨 말인가? 장미를 예로 들어보자. 그 빨간꽃을 우리 부락에서는 ‘장미’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아랫마을에서는 ROSE라고 정했고, 윗동네서는 玫瑰라 정했다. 장미, ROSE, 玫瑰… … 각각의 글자 조형도 다르고 음성도 다르다. 그러나 모두 그 빨간꽃을 지시한다. 단, 윗동네 사람이 아랫마을에 가서 아무리 玫瑰라고 불러보고 적어봐도 그들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 턱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사회적 약속일 뿐이다. 공동체(구조시스템)가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했을 뿐, 단어와 의미 사이에는 본질적 연결이 없다는 것이다.
좀 더 나가본다. 어느날 우리 부락의 추장이 아내를 맞았다. 추장의 아내는 ‘장미’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걸 싫어했다. 어린 나이에 요절한 장미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떠올라서 그랬으리라. 그래서 추장은 명령한다. 이제부터 ‘장미’를 ‘개미’라고 바꿔서 불러야 한다고…
자, 이제는 ‘개미’라는 단어가 그 빨간꽃을 의미하게 되었다. 대신 원래의 ‘장미’단어는 그 빨간꽃을 지시할 수 없다. 원래의 ‘개미’단어 역시 작고 까만 곤충을 지시할 수가 없다.(아니면 구조적 혼란이 생긴다.) 결국 ‘개미’라는 말은 ‘장미’라는 말과 달라서 ‘개미’를 의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양이’라는 말은 ‘호랑이’나 ‘개’라는 말과 달라서 고양이를 지시할 수 있다. 여기서 이런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언어가 의미를 불러오는 것은 ‘차이’를 통해서다.
궁극적으로 언어의 의미는 구조(시스템) 속에서 ‘약속’과 ‘차이’를 통해서 안정되게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안정적이며, 단어와 의미가 서로 대응하는 폐쇄적인 체계를 가진다. 이것이 구조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언어다.
2.
이번에는 후기구조주의다~
앞서 구조주의가 ‘약속’과 ‘차이’를 통해서 언어가 그에 상응한 안정적인 의미를 대응시키는게 가능했다면, 후기구조주의에서 언어는 의미를 정확하게 대응시킬 수 없다고 본다. 예컨대 한 단어는 계속 다른 단어를 불러낼 뿐 그것의 의미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따라서 의미는 지연되고 유예를 거듭한다.
실례를 들어보자, ‘정의가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정의는 공정함이다’라고 답했다. 그럼 ‘공정함은 무엇인가?’, ‘공정함은 올바름이다’, ‘올바름은 무엇인가?’ ‘올바름은 규범이다’ ‘규범은?’… … 이렇게 한 단어는 또 다른 단어를 불러내면서 의미는 지연되고 미끄러진다. 의미는 고정된 것도 아니고 중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잡히지 않고 계속 달아나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의미의 관계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이고 개방되어있다. 언어는 항상 의미를 향해 출항하지만 의미는 수평선처럼 점점 멀어져서 결코 닿지 못하는 항해를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둘 다 언어의 의미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차이점은? 구조주의는 의미가 ‘(구조 안에서) 고정될 수 있다’고 믿는 반면, 후기구조주의는 의미가 무한히 흔들리고 파생된다고 본다. 결국 이러한 파생은 다중적인 해석을 증식한다는 논리다.
3.
그럼 아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관점에서 ‘차라투스트라’에 등장하는 낙타, 사자, 아이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1) 먼저 구조주의 관점에서 보기:
낙타, 사자, 어린아이가 단순히 포유류로서의 동물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모두 다 안다. 그 단어들이 상징하는 바도 다 안다.
‘낙타’는 짐을 지는 동물— 복종, 인내의 상징,
‘사자’는 힘— 공격성, 파괴의 상징.
‘어린아이’는 놀이, 창조—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상징.
여기까지는 쉽다.
자, 그렇다면 세 동물은 고립된 채로 본질을 가질 수 있을까? 세 동물은 왜 같이 나올까? 낙타, 사자, 어린이는 서로 ‘차이’를 통해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 낙타는 낙타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낙타는 사자에 의해 정의되고, 사자는 어린아이에 의해 의미가 분명해진다. 낙타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낙타는 사자와 대립되며 ‘복종’의 의미를 얻고, 사자 또한 어린아이와의 대비 속에서 ‘파괴가능 하지만 재구축(창조)이 가능하지 않은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의미는 ‘차이’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는 구조주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나아가, 낙타는 복종, 사자는 파괴, 어린이는 창조의 상징이라는 이 의미는 고정될 수 있는가? 안정적이고 폐쇄적인 의미체계를 언제나 가질까? <차라투스트라>라는 하나의 서사 속에서, 말하자면 ‘약속된 구조’ 안에서만 의미 고정이 가능하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 동네의 장미가 아랫마을에 ROSE로 되듯이, 다른 구조와 맥락 속에 들어가면 사자는 파괴의 상징으로, 어린이의 창조의 상징으로 설명되지 않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낙타, 사자, 어린이의 의미는;
1) 서사적 구조 속 2) 개체들 간의 차이.
이것들을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
4. 다음으로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보기:
후기구조주의 해석에서는 의미가 안정되게 고정되지 않고, 항상 미끄러지며 유동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령 ‘낙타’는 복종, 인내를 암시하는 듯하지만, 나치냐? 공산당이냐에 따라 ‘의미 없는 희생’으로 읽힐 수 있고, ‘사자’는 광기, 폭력으로 해석할 수 있겠고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는 창조성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동시에 곧 무책임함, 무지 등을 함께 떠올리며 균열을 낸다.
이때 텍스트는 폐쇄적 구조가 아니라 중심으로부터 탈주하며 끊임없이 의미가 파생되는 열린 구조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들에게 텍스트는 완결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주되고 생산되는 것이다.
5.
그래서?
구조주의는 규칙과 체계 속에서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면, 후기구조주의는 그 구조를 의심하고, 구조 '바깥'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의미는 구조 안에서 결정된다.' 구조주의가 말했다.
그에 후기구조주의는 대답한다. '그 구조 속에서 제외된 말들은 어디로 갔을까? . 그것은 흩어지고, 해체되어 우리는 그 흔적을 쫓아간다 '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선택적 접근은 우리가 텍스트를 해석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교류할 때 대면하게 되는 도구로 작용한다. 구조주의적 접근으로 보면 “이 문제는 본질은 이런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겠지만, 후기구조주의적으로 접근해보면 “그 문제는 보는 사람의 입장과 문화적 맥락에 따라서 따라 달라질 수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두 시선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어떤 때는 구조와 규칙 안에서 의미를 찾고, 또 어떤 때는 그 균열된 구조의 틈새에서 새로운 발견을 한다. 결국 우리가 세상을 마주하고 세상을 읽는데 단서를 제공해주는 툴 같은 것이라는 거지~ 용두사미로 급마무리
ps: 몇해전에 썼던 다음의 글과 맥락 상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주체가 사라진 자리] https://wulinamu.com/otherwenxue/24408/

니체 또는 제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인가요? ㅎㅎ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설명이 명료하고 훌륭합니다! 말씀하신 후기 구조주의는 사회구성주의와 유사한 데가 많군요. 찾아보니 프랑스 문학 비평 중심의 후기 구조주의가 60-70년대에 먼저 나와서 교수 학습 이론이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구성주의에 영향을 미쳤다는군요. 흥미롭습니다.
네~ 오늘날의 이미지비평은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소쉬르의 기호언어학을 기반으로 하는 구조주의 비평은 90년대까지도 미술비평에서 강세였고, 그러다가 후기구조주의가 뒤늦게 수입되면서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이상 고정된 시각에 머무르지 않고 관람자편이나 맥락편으로 옮겨왔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는 후기구조주의란 말보다 영미쪽 뉘앙스인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가 더 보편화되어있습니다.
서로 다른 영역의 사람들과 교류하다 보면, 가끔은 내 이야기가 너무 무지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 간의 유사한 시기의 사조를 비교하거나, 비록 시간차가 있더라도 비슷한 흐름을 퍼즐 맞추듯 이어 보는 일은 늘 흥미롭습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대화 속에서 얻는 통찰은 저한테는 언제나 소중한 것이지요. 이러한 교류가 학문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함께 나눌 수 있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