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되는 텍스트
문학은 시간과 동행한다. 첫째로, 문학 작품은 내부로부터 시간을 갖는다. 그것은 창작과정에서 작품에 부여되는 시간이다. 둘째로, 독자가 시간을 부여한다. 작품을 읽을 때 시간은 우리에게 따라붙고,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곁을 떠난다. 소설을 감상하는 행위는 작품의 내부와 외부에서 흐르는 시간을 겹쳐놓는 일이다. 우리는 두 선상의 시간이 만난다고 느끼는 순간,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그 희열은 착각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몇 해 전 한 영화감독이 소설 『춘향전』의 한 파트를 재각색한 『방자전』이란 영화를 발표했다가 일부 관객들로부터 빈축을 산적이 있다. “내가 아는 춘향전에 나오는 방자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라는 이유때문에서다. 그렇다면 방자는 어떤 사람일가? 소설가 개인의 소산일까? 아니면 문화적 해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캐릭터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독자의 이해가 낳은 산물일까? 감독에게 비난을 가한 그들은 원작을 읽으며 희열을 느꼈고 원작을 신봉했을 것이다. 그 희열은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이해가 합일을 이루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과연 그 희열을 절대적으로 긍정해야 하는가?
영화 방자전 포스터
전통적인 관점에서 저자는 진리의 제공자로서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여 작품의 의미를 주관하는 권한을 행사해왔다. 반대로 독자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있었다. 독자가 하나의 작품을 읽고 나서 얻어가는 것, 소위 말해 책읽기의 성공여부란 저자의 의도를 얼마나 파악했느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이런 논리가 성립될 때 독자는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다. 만일 권리를 가진다고 친다면 그것은 저자가 만들어낸 의미를 ‘소비’하는 권리에 그치지 않는다. 이 같은 구조는 단지 독서행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소비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한 정체성의 표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현대문학은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작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개별체임을 인정한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를 작품의 기원으로 삼은 것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저자의 죽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작품은 탄생되는 순간 저자를 떠나 ‘내’게 달라붙고, ‘내’ 안에 들어오고, 다시 ‘내’ 곁을 떠나 또 다른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작품의 얼굴은 이데올로기가 고착화시킨 해석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독자들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전도된다. 독자의 해석이 의미결정의 위치에 오르려 할 때 독자는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또 다시 새로운 독자가 탄생한다. 이 같은 구축과 해체의 무한한 반복을 통해 작품은 끊임없는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관점은 근대가 쌓아올린, 난공불락으로 여겨왔던 ‘주체’라는 신화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앞선 질문은 창작자와 수용자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자, 결정자의 권한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작품의 해석이 예술가의 권위에 종속되던 시대는 지났다. 작품에 대해 표준적인 해석을 들이대던 시대도 지나갔다. 그러한 것들은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이용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 텍스트는 탄생하는 순간, 자신을 읽는 이들과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그것은 봉건적 작가지상주의와는 다르다. 더 이상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스스로의 성질을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텍스트는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고 연주되는 것이다.
토니 스미스, 죽다, 1962
주체의 와해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관객에게 보여줬던 것은 공장에서 기계로 뽑은 듯한, 작가의 개입이 배제된 비인격적인 사물들이었다. 그들은 인부들을 시켜 벽돌공장에서 실어 온 벽돌들을 전시장 바닥에 깔아놓았고, 전시가 끝난 뒤에는 다시 트럭에 실어갔다. 그들은 철공소에 전화 주문하여 작품제작을 맡겼고, 시장에서 사온 형광등을 인부들을 시켜 전시장 벽에 걸어놓았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지시’를 내린 것뿐이다.
그렇게 미니멀리즘에 이르러 작가라는 ‘주체’는 사라진다. 그들은 ‘주체’의 개입을 철저히 줄이고자 자, 분도기, 콤파스 등 제도용구를 사용했고 나아가 공업용 절단기를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관객이 작가의 내면이나 배경에 개입되기보다는 작품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작품만을 바라보길 원했던 것이다. 미술사에 있어 주체가 약화되는 형태는 이미 1920년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automatisme)에서 발견되지만 본격적으로 이를 문제시한 것은 1960년대 중반 미니멀리즘에 이르러서이다. 그때가 마침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 발표되던 시기였다.
칼 앙드레, 등가물VIII, 1967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이 제시했던 ‘자기완결성’이라는 조건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즉 작품 내부에 완결적인 형태로 존재했던 작품성이 이제 작품의 외부로 옮겨간 것이다. 이제 독자 개개인의 감각과 사유의 과정이 작품의 속을 채우게 되었다. 이제 작품은 형식적 메커니즘으로 수용자(독자)를 불러들일 뿐이다. 그러한 형식은 과거처럼 작가의 의도와 수용자의 이해 합일에서 비롯된 희열도, 그리고 그 희열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아우라의 전략도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의미를 구성하는 수용자 개개인의 현존과 시간을 인식하도록 이끌어내는 구조이다.
주체의 상실, 고정성의 와해는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요청했다. 역사는 더 이상 모더니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탈모더니즘이라는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고정불변한 ‘주체’와 ‘고정성’이 사라진 시대에 이르러 저자와 독자는 더 이상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재탕/ 위챗계정 '시선' 게재)
ps: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구나 산업제품에서 ‘심플한 형태’로서의 미니멀리즘은 1970년대 이후 디자인 분야에서 흥기시킨 스타일로서, 미술사에서 미니멀리즘이 애초에 설정했던 목표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회화와 조각를 중심으로 보자면 미술사에서의 미니멀리즘작품들은 감성에 호소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형태였고 회화인지 조각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특징이 있었다.

글의 첫 단락 참 마음에 듭니다. ㅋㅋ 저의 시간을 부여해서 글을 읽다보니 미니멀리즘의 역사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도 조금 알게 되었고. 아, 그리고 지금은 산업디자인이나 디지털 디자인에서는 “Less is More”라고 하고 있슴다. 대구~ 마구 줄이는게 아니고 스티브 잡스처럼.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 읽으면서 웬지 이른바 조선족문단은 고의적으로 이걸 비켜가고 있는 현황이 되버린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자의 권위를 내려놓지 않으려고, 독자가 외면하는데, 그건 결국 ‘문학의 죽음’에 이르고 있는건 아닌지 하는.. 잡생각
글의 마지막에 요즘 많이 얘기하는 라이프스타일로서의 미니멀리즘은 현대미술의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맥락이라는 얘기로 이해했는데, 그럼에도 그 용어를 쓰는 것은 그냥 말이 매력적이여서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어느 정도 미술의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바를 이어받고 있어서일까요. 글에서 말하는 미술의 미니멀리즘에서 오히려 저는 물질(옷, 가구)등이 부재한 공간에서 인간성이 다시 피어오르는 가능성을 디자인의 미니멀리즘에서 볼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질등이 부재한 공간에서 인간성이 피어오르다 라는 사유방식이 신선하네요. 혹시 여기서 인간성이란 뭔가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을 뜻하는 것인가요?
제품으로서 우리가 쓰는 물질(물품)들은 이미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것이고, 그럼에도 ‘나’에게 맞춰서 만들어진건 아닌, 표준화와 규격화의 소산이니까. ‘나’도 결국은 그 제조목적에 맞춰서 살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죽소파는 물에 젖을까 담배피면 불똥이 튀어 구멍나지 않을까 걱정해야 되고, 단순히 앉는다거나 앉아서 쉬는 물체는 아닌게 된 것처럼. 미니멀리즘으로 인해, 이미 일정 틀을 가지고 만들어진 물품에 내가 맞춰가야 하는 수동성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주체가 사라졌다기보다, 텍스트 생산자의 주체가 유일, 지배적이던 이전과는 달리, 텍스트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주체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