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얼굴은 얼굴이 아니다. 말하자면 얼굴로 위장한 마스크다. SNS속 얼굴은 심사를 전제로 만들어진 얼굴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공개하기에는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수정한다. 이때 수정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다.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얼굴은 애초에 세상에 등장하지 못한다. 눈의 크기와 코의 높이, 턱선의 각도는 현실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와 재배치되며 심사를 통과하기 위한 서류처럼 취급된다. 오늘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의미를 잃었다. 기준이 된 것은 "나는 어떻게 보여지는가?"이다. 더 정확히는 "나는 타자의 시선과 알고리즘을 무사히 통과했는가?"이다. 여기서 '좋아요'(贊)는 칭찬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받는 신호다. 반응이 오면 안도하고 반응이 없으면 이미지를 삭제하거나 교체한다. 이때의 실패는 악플이 아니라 무응답이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나’라는 존재의 소멸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가 살아 있었다면 오늘날의 얼굴 사진을 보고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스투디움만 남은 얼굴 사진이다!"  맞다, 오늘날의 사진은 스투디움(studium, 사회적으로 안전하고 잘 읽히는 요소들)만 남겨지고 관람자의 심부를 건드리는 디테일과 우연-주름, 피로, 어색함, 불협화음-은 제거되었다. SNS에서 푼크툼(punctum)은 위험 요소다. 일부에게는 감동을 줄 수 있지만, '좋아요(贊)'의 안전한 흐름을 보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푼크툼은 관리 대상이 되고 업로드되기 이전에 제거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얼굴들은 과도하게 건강하고, 지나치게 밝으며, 이상할 정도로 시간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늙지 않는 얼굴, 지치지 않는 표정, 삶의 상처가 없는 마스크는 이렇게 생산되는 것이다. 결국 뽀샵한 얼굴은 나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내가 빠져나간 흔적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고독과 실패, 침묵은 지워지고 언제나 서빙할 준비가 된 표정만 남았다. 그래서 그 얼굴은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누구에게나 적합한 얼굴이다. 그렇게 얼굴은 이제 더 이상 운명이 아니라 소모품이 되었다. 

과도하게 매끈한 이미지는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대개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끝내 봉합하지 못한 순간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조차 의심한다. 상처마저 연출되는 시대에 무엇이 얼굴이고 무엇이 마스크인지 더 이상 쉽게 구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날의 얼굴은 결코 만족 될 수 없는 못한 욕망 속에서의 끊임없는 변검일지도 모른다. 

(本文为此前发表于公众号“蒲公英乘风而飞”的旧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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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먹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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