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동찬

2015년 열아홉 되던 해, 중국 선양(瀋陽) 태생인 나는 서울로 유학을 왔다. 소싯적부터 동경해온 한국 땅에서 나는 종종 우스갯소리로 '망명 중'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지리적으로 자신이 태어나서 자라난 익숙한 곳에 산다고 해도, 아무리 피부색과 언어가 동일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 삶은 망명자와 다를 바 없다

중국에 살면서도 나는 국가에 의해 '소수민족'으로 규정당하는 마이너리티(minority)였고, 초중고 과정을 조선족 학교에서 마친, 주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중국의 국민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조국' 귀환으로 메이저리티(majority)의 삶을 살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에 나는 이곳을 부단히 욕망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처참히 깨졌고, 중국 못지않은 내셔널리즘과 구분 짓기에 당혹스러웠던 건 매한가지였다.

익숙하지만 낯선, 망명자의 한국

▲  코로나는 차별하지 않지만, 그 피해는 차별적으로 발생한다. 지난 2020년 8월, ‘코로나 시국에서 나타난 외국인 차별·혐오 현상과 대응방안’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 박동찬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단일민족', '순혈민족' 같은 신화에 젖어 국민과 민족을 동일시하는 '국적=정체성' 프레임을 내재해왔다. 민족적,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동질성이라는 것이 국민국가의 제일의 허구인데도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민족과 국적의 불일치를 평생 경험하며 살아왔던 조선족이 한국이 아닌 장소를 '조국'으로 고백할 때, 한국인은 그들에게 배반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한국과 중국이 축구 하면 어디를 응원할 것인가"의 질문은 나 역시 누차 받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한 검증수단으로서 여전히 자주 동원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살면 살수록 '한국인'이 될 수 없고, 되고 싶지도 않은 나를 이따금 마주한다. 다수의 한국인은 고맙게도 재외동포를 한국인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한국인으로 돼주기를 요구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한국에 대한 애국심과 충정심을 가지고 살아주었으면, 한국의 편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우리에 대한 나름의 ‘기대’가 있었던 거다. “한국인 다 됐어”, “당신은 그냥 한국인이네”라는 말은 타자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또 다른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인간의 의례적 평등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뿐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200만 이주민 중에서도 80만 조선족은 우리 일상 곳곳에 들어와 있다. 식당에서 서빙하는 '이모'들, 베이비시터나 가사도우미, 일용직 건설노동자들, 요양병원의 간병인들까지. 한마디로 보통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에서 이들을 볼 수 있다.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이른바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사회적 재생산의 기저를 만들어왔지만, 이들의 공헌은 비가시화된 지 오래다. 

대신 그들이 출신국에 남겨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행하는 해외송금은 너무 쉽게 포착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축적을 바깥으로 빼돌리는 악질적 행위로 여겨진다.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

'올여름, 최고의 오락영화'란 캐치프레이즈를 달고 2017년 개봉한 영화 <청년경찰>은 누적 관객 수 565만 명을 기록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하지만 "여긴 조선족들만 사는데 여권 없는 중국인도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요. 경찰도 안 들어와요. 웬만하면 밤에 다니지 마세요"란 영화 속 대사는, 조선족과 대림동에 대한 혐오를 증폭시켰다.  

한국 영화에서 조선족이 등장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소비되는 방식만큼은 일관적이었다. <카운트다운>(2011), <공모자들>(2012), <신세계>(2013), <차이나블루>(2012)와 <차이나타운>(2015) 등을 거치면서 조선족의 잔혹한 범죄자 캐릭터는 하나의 클리셰(Cliche, 고정관념)가 되었다. 

2016년, 모 정당의 대표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의 해결책으로 "조선족을 대거 받아들여야 한다"고 발언했다. 2019년, 동일 정당의 또 다른 대표는 "외국인은 한국에 기여가 없으니 임금을 차등해야 한다"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다. 

형편없는 인권 감수성은 별론으로 하고, 이렇게 무책임한 발화가 반복되는 것은 이주민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이중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철저히 한국 사회의 필요에 의해 호명되다가도 정치·경제적 여건이 악화할 시에는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주민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환대의 장소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의 횡행 가운데 안정을 상징하는 정주의 삶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고, 이동과 이주는 필연이 되다시피 하였다. 국경선을 넘어 해외로 나가야 이주민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사와 이직과 파견근무, 학업과 취업을 위한 이동 등 우리는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으로, 단기적이거나 장기적으로 이주를 경험하기 마련이다. 낯선 환경에 던져졌을 때 느꼈던 외로움과 고립감을 상기한다면, 이주민의 고단한 삶에 조금 더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주민 사회가 한국 사회에 기대하는 것은 어떤 특권이 아니다. 연민과 시혜도 아니다.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차별 없이 가지면 그만이다. 선주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공정하게 관계 맺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5월 24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시작됐다. 머지않아 집을 떠날 낯선 당신에게 부탁드린다.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포용과 환대의 땅을 함께 일구어나가자고. 무엇보다 머지않다는 표현이 우리의 행동을 유예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회적 합의' 뒤에 숨어 나중을 외치는 동안, 차별과 혐오는 결코 유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저자 본인의 동의 하에 올리는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원문은 오마이뉴스 2021년 5월 26일짜 인터넷기사'[차별금지법 나만 필요해? 제3화]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200만 이주민도 함께 살고 싶다' 라는 부제로 등재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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