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방 하나를 갖는다는 것은 이 세상과 내 가정의 문제를 파헤쳐 해결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감정을 억제하거나 외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갈등을 피한다고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매일마다, 매 문제마다, 매 감정마다에 집착하여 그 근원을 캐고 분석하고 공동의 리해에 도달한다는 것은 얼마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것일가? 또 그렇게 하더라도 공동의 리해에 완벽하게 도달할 수 있을가? 어쩌면 상대보다 자신에게 먼저 지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일상의 어떤 관습들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무의식에 깊이 뿌리박힌채 강제적으로 제약하거나 강요한다. 부드럽고 참을성 있게 묵묵히 지키지 못할 때 도덕적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다보니 차츰 우리는 독립적 실존을 갖고 있지 않은 역할로 살아지게 되거나 이 세상과, 지어는 자신과도 갈등을 초래하며 고통받게 된다.
그때면 내 안의 방으로 들어간다.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내려고 모지름하며 스스로에게 상담자가 되여 누구나가 다 그런거라며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도 한다.그러고 이내 웃어버리기도 한다. 누구나 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내가 덜 아픈가? 우리는 왜 기어이 다른 사람이 아파야 내가 괜찮아지는 것일가? 무의식에 깊이 뿌리내린 리기적인 관념이다. 때로는 “우리는 세상에 일어나기 원하는 변화를 몸소 구현해야 한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내가 먼저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이타적이 되여 고상해지기도 한다. 또 빈곤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해 꿈꿔본다. 꿈은 자유니까. 그사이 차츰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증폭되기도 하다가 옅어지거나 사라져가기도 한다. 나는 편안해지고 일상으로 돌아갈 용기와 힘을 얻는다.
그러나 결혼이냐 싱글이냐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나은 삶의 방식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어느 것이든 그리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현실적 삶에 저항하면서 그 대항의 힘으로 한발자국씩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미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요즘은 과학이 발달하여 뇌에 대한 측정까지 하면서 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한다고 법석을 떨기도 한다. 나는 그 분야에 대해 무식하므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의 뇌의 수천억개의 세포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분석해내서 알맞는 지도를 해주어 예정된 한 인간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리의 세상은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그때마다 수많은 내적, 외적 영향을 받는 뇌신경의 변화를 측정하고 프로그램을 수정하며 잘 대처할 수 있을가? 과학은 이미 행해진 과거의 현상에 대한 그럴듯한 해답이 아닐가? 과학자 역시 인지능력의 한계가 있지는 않을가? 또 암만 노력을 하더라도 별개의 례외는 항상 존재하지 않을가? 과학에 근거하여 한 개인은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 세상도 더 나은 세상으로 개변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상황도 충분히 존재하며 또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교육받지 못하게 되는 우리의 평범한 삶이 압도적으로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글 한줄 쓸 수 있는 나는 어쩌면 예측이나 예감을 벗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의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뉘 땅에 엎드려 살아오셨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의 문학소양을 키워준다거나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할 사이가 없었다. 매 한포기의 곡식들이 싹이 트고 잘 자라고 염글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하루치의 논물이 중요했고 날씨가 중요했고 바람이 중요했다. 가장 사랑하는 새끼들인 우리의 입안에 밥을 떠넣어 배를 불리고 무탈하게 키우려고 온힘 다했으니까. 또 나의 생활은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였다. 집에 책이 있을리가 없었다. 읽을 것이라고는 학교에서 주문하는 신문이 전부였다. 나는 마당앞에 쪼크려 앉아 흙을 만졌고 산으로 들로 나다니며 나물을 뜯었고 돼지죽을 주었고 소여물을 작두로 썰었고 쥐구멍으로 재빠르게 빠져들어가는 쥐들을 보며 놀랐다… 내 격에 맞는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고 내 격에 맞는 직장을 얻고 나와 비슷한 사람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령역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도 없었다. 내 책임을 어딘가에 전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그랬다. 원한다고 다 되여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을 뿐이고 나는 수많은 한계를 가진 한 인간으로 남았다.
나는 매일 복닥거리며 부대끼며 살고 있다. 미리 예측된 남자를 만난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 아이는 자라지 않았다. 생활은 늘 알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그것이 때로 날 힘들게 하고 울게도 했지만 감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그래도 많이 설레였고 웃었던 것 같다. 나는 미리 정해지지 않은 하루가 즐겁다. 그래서 사랑에 가슴을 더 졸이거나 행복할 것이고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물들어갈 수 있을 것다고 여긴다.
나는 한 인간이 스스로 세상 속에서 자유롭게 커가며 위태롭고 혼란스럽더라도 현실에 알맞게 대처하며 살아내길 바란다. 때로는 론리성도 일관성도 없는 불시성의 일들 때문에 힘겨워 몸부림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만큼 우아하지 못한 몸짓이든지를 막론하고 그것이 생동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이며 사랑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멋진 신세게≫속의 끔찍스러운 모습들을 만날 것 같다. 어느 작가는 글의 마지막을 묻는 독자에게 그 끝을 다 알면 쓸 멋이 나겠는가고 했다는데 나는 그 작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결말을 모르기에 그가 글을 써내려갈 수 있었듯이 우리는 미래를 짐작하지 못하기에 살아보려는 것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과학적 근거를 수자로 갖고 있지 않기에 우리는 유치하지만 진지하고 두려우면서도 희망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측불가의 세상에서 미리 예측된적 없는 내게는 평온하고 친근한 오래된 나만의 방이 있다. 그곳에는 불온이나 불안의 냄새가 없다. 거미가 자기의 집을 만들려고 자기 배속의 내용물을 뽑아내듯이 나도 역시 내면의 고요하고 명료한 의식들을 뽑아올려 방을 만든다. 그 방에서 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더 깊이 바라보고 고민하며 새로워져간다. 나와 방은 서로 생명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현실에 묻히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의 존재를 고집한다. 자신을 신뢰할줄 아는 강인한 자아가 되려고 노력한다.
내 안의 방은 부딪칠 수 없는 단호한 현실의 벽에 대한 저항이며 역시 현실적 삶에 대한 포용이다. 하나의 방을 갖는다는 것은 침체되여있는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의지이며 생명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는 일이다. 현실에 결박당하거나 허공 속에 부유한다는 것은 파멸이다. 현실과 내 안의 방을 넘나드는 것은 인간적 삶의 확장이다. 현실의 상처와 화해하는 방법이며 나로 온전히 살아가는 방법이다. 먹고 배설하고 잠에 들고 다시 깨여나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여긴다. 나는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