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어려서는 이날을 로인절로만 알고 있었다. 어떤 연고로 광복절을 로인절로 정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에게 있어서 로인절이 가장 큰 명절중의 하나였다.

지난세기 90년대에 러시아에서 유학을 하면서 광복절은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다.

하바로프스크라는 도시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당시 하바로프스크에는 2만명가량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고려인도서관에 책 빌리러 갔는데 고려인협회에서 도서관 관장을 맡고 있던 지인이 며칠후에 명절행사가 있는데 초대한다는 것이였다. 무슨 명절이냐고 물으니 우리말을 잘 하시지 못하셨던 분이라. 일본놈들 투항한 날이라고 했다. 날짜를 보니 8월15일이고 광복절이였었다.

그땐 참 신기했다. 구소련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은 우리말과 글 그리고 민족 전통들도 잘 알지 못했었는데 광복절을 유일한 민족행사로 보낸다는 것이 신기했다.

광복절날 그 아주머니가 알려준대로 아무르강가에 가니까 유람선이 떠있고 우리민족 음악이 흘러나왔다. 고려인 협회에서 유람선 하나를 대절하고 아무르 강 중심에 있는 무인도를 빌려서 행사를 한다고 했다.

우리를 요청했던 도서관 아줌마는 다른 일 때문에 정작 오지 않고 우리 조선족학생 셋만 생면부지인 사람들속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게 되었다. 씨름이랑 여러 가지 행사가 진행되였다.

점심때가 되니 지인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점심식사를 했다. 우리 조선족 유학생 셋은 꿔온 보자리처럼 참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강중심의 무인도라 음식점이나 가게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맘씨 착한 고려인 아저씨 한분이 뻘쭘하게 서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요청을 해왔다. 참 다행이였다. 그 아저씨 가족과 친구들이랑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러시아고려인들의 광복절의 유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러시아의 고려인은 크게 두부류로 나뉜다.

한부류는 사할린에 강제이주를 당하여서 탄광에서 일했던 분들인데 이들은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 그리고 제주도 출신들이다.

그리고 다른 한분류는 함북도출신들을 위주로 하는 연해주에 이주해 살던 분들이다. 이분들은 우리 연변조선족들이랑 이주과정이 비슷한 분들이였다.

이들이 바로 30년대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세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분들이다.

사할린 출신의 고려인들은 평생 사할린 섬 밖으로 나갈수 없게 금족령을 받았었다. 사할린에 있던 조선어 학교들도 전부 페쇠당하고 러시아어로 수업을 받게 되었다. 내가 아는 노인분들중에는 소학교 초급학년까지 우리말로 공부하다가 러시아어로 공부하게 된 분들도 있다. 그리고 사할린의 고려인들은 섬밖 러시아 본토의 대학으로 공부하러 갈수가 없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나 지인중 사할린 고려인중 처음으로 러시아 본토에서 공부한 분이 있다.

그분의 이야기는 전설과 같았다. 내가 싸샤 아저씨라고 불렀던 분인데 그분은 어려서부터 탁월한 두뇌를 갖고 있었다. 공부도 참 잘했는데 당시 사할린에는 대학이 없었고 고려인들에게는 섬밖으로 나갈수 없게 금족령이 있어서 대학진학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시 소련 교육부에 수많은 편지를 보내서 대학 입학을 신청했지만 사할린 섬을 떠날 수 있는 통행증을 받을수가 없었다. 선례가 없었으니까. 학구열에 타올랐던 싸샤 아저씨는 결국 밀항을 선택했고 러시아 본토에 발을 딛인 첫 사할린 출신의 고려인이 되었다.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을 했고 사할린 고려인출신의 제일 첫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와 쏘련 교육부의 도움으로 본토에서의 합법적인 거주허가를 받게 되었다.

그때가 후루쇼브시대였다. 후루쇼브가 스탈린의 잘못된 정책들을 청산을 하면서 싸샤 아저씨의 케이스가 계기가 되어 사할린 고려인들의 러시아 본토 대륙으로의 진출이 시작되였다. 

그중 가장 많이 간 도시가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톡 이르꾸츠크 모스크바 쌍트 뻬쩨르부르그와 같은 도시들이였다.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세아로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들중에는 지식인들이 많았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그 유명한 봉오골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있었다. 홍범도장군은 말년에 카자흐스탄의 한 조선인 극장에서 경비를 서다가 인생을 마감했다. 장군이 밖에서 경비를 서던 그 시각 극장안에서는 "봉오골전투"의 연극이 진행되기도 했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세아로 강제이주를 당하던 중 한달동안 달리는 화물차속에서 삼분의 일 정도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리고 기차가 중앙아세아의 허허벌판들에 도착하면서 여기저기에 고려인들을 내려 놓았고 농장을 개척을 하라고 했단다. 삭풍속에서 땅에 움막을 파고 개간을 하면서 고려인들을 중앙아세아의 각국에 정착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식용수의 부족과 영양실조로 수많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가장 많은 사망이유는 식용수가 부족하여 물도랑의 물들을 마시다가 장질부사로 돌아간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 또 연해주를 떠난 사람들중 삼분의 일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열경한 환경속에서 고려인들은 중앙아세아의 농장들을 일궈냈고 중앙아세아각국의 경제를 일떠 세웠다. 이들중에는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여러분야에서 중용을 받게 되었고 중앙아세아 각국들과 러시아 본토에서 여러 가지 영향력을 끼칠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후르쇼브시대에 사할린 고려인들이 러시아 본토로 진출하기 전까지는 이 두부류의 고려인들은 아무런 접촉도 가지지 못했었다.

사할린 분들은 중앙아세아 고려인들을 "큰 땅배기"라고 불렀다. 워낙 출신 고향이 다르고 이주 경위가 다르고 또 러시아에서 겪은 경력들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같은 러시에 있는 고려인들이지만 문화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언어사용등 여러 가지분야에서 많이 틀렸었다.

러시아 본토에서 만난 이 두부류의 고려인들에게 있어서 광복적이라는 명절은 이들 공유의 아픔과 기쁨이 있는 명절이 이들을 하나의 동질감을 갖게 하는데 적지 않은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고려인 협회가 이루어 졌고 광복절날에는 러시아에 와있는 북조선과 남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 중국조선족까지 초대하여 성대하지는 않으나 같은 아픔을 뒤돌아 보고 또 우리의 뿌리가 하나임을 확인케 하는 명절이 되였다. 정치나 이념이나 이익을 배제한 아름다운 그런 명절로 러시아에서는 광복절이 자리 잡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처음 보냈던 광복절 28년이 지났다. 그래도 이날은 나에게 늘 특별한 의미로 다가 온다.

우리민족에게 아픔을 주었고 지금까지도 민족내의 분열과 미움의 불씨를 심어놓은 일본, 그리고 그 역사사실을 왜곡하고 부인하고 있는 그 침략자들의 파렴치한 후손들과의 싸움은 우리 민족의 공동의 숙제이다.

원한을 후세에까지 심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역사가 왜곡되게 허락하여서는 안된다. 일본침략시기에 우리 민족의 공동의 숙제는 항일이였다면 현재 우리민족의 공동의 숙제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전쟁이다.

광복절은 기쁨의 명절인 동시에 슬픈 명절이다. 일본우익들의 후안무치한 역사왜곡에 점점 무듸여 가고 있는 것을 반성해야할 명절이기도 하다. 오늘도 일본 우익분자들은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해 가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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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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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주도 분들은 사할린까지 가서도 섬을 못떠나게 금족령에 묶이는군요. 사할린과 년해주가 서로 다른 경로의 이주인줄 오늘 알았습니다. 이국땅에 있으면 오히려 민족성을 더 지키게 되는 일면이 있는것 같습니다. 고려인 조선족들에게는 반도에서 사라진 미풍량속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도 점차 사라지는것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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