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생의 기억 시리즈는 읽으면 아시겠지만, 어떤 장르도 아닌 그저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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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학교선배와 만났다가 선배 차를 얻어타고 시내까지 왔다. 선배는 큰딸이 오늘 소선대입대식이여서 늦으면 안된다고 말했으나, 우리가 학교앞에 도착했을 때 운동장은 이미 줄을 선 아이들과 부모들로 완벽한 직사각형을 이룬 뒤었다.
서둘러 뛰어가는 선배뒤를 늦은 걸음으로 따라 갔다. 얼른 가라는 선배말에 알았다고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경비아저씨가 대문을 닫고 계셨다. 어쩔수 없는 듯이 머물렀으나 내심 구경하고 싶었나보다. 소선대입대식 구경도 좋지만 이곳은 20년전에 졸업한 나의 모교다. 나를 키운 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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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남으로 연길의 도심을 흘러 지나는 강의 이름을 나는 소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알았다.
“연집강 기슭에 뿌리를 박고 창공을 떠이고선 **소학교”
고작 소학교 1학년이었으나, 강 기슭에 뿌리를 박았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나이는 아니었다. ‘아 그러면 우리 학교 근처의 그 강이 연집강이구나’라는 깨달음에 도착하던 순간이었다. “창공을 떠이고 서다”라는 표현 또한 120cm 남짓한 아이에겐 과장이 아니었다. 한족학교를 다니다가 꿈에도 그리던 조선족 학교에 전학한 나에게 학교의 모든 것은 새로웠고 설레임을 주었고 사랑스러웠다.
“배움의 꽃대문 활짝 열고서 우리를 한품에 안아주는 곳”
내가 집에서 비공식적으로 “ㄱ, ㄴ, ㄷ, ㄹ”라고 대충 배운 자음을 “기윽, 니은, 디읃, 리을”이라고 읽는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말그대로 “배움의 꽃대문”을 열고 들어선 기분이었다. 스펀지처럼 가르치는 족족 빨아들였다.
담임선생님은 자애로웠으나 엄격함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되니 엄격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읽고 쓰고 외우는 재미가 있는 조선어문, 더하고 덜고 곱하고 나누는 정직한 산수를 비롯한 모든 학교공부가 그 어떤 놀이보다 재미가 있었다.
한족학교에서처럼 언어구사가 어렵지도 않았고, 마음에 맞는 딱친구도 생겼다. 잠간 비주류가 됐던 나는 다시 주류가 된 느낌이었다. 교실중앙에 있던 난로에는 아이들이 사온 알루미늄도시락통이 탑을 쌓고 있었고 이따금 새어나오던 밥냄새나 김치냄새도 나에게는 정서적 안전감이라는 울타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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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학년 시기의 가장 선명한 기억을 꼽아본다면 두개가 있다. 하나는 나의 기억을 이곳에 데려다준 소선대원 입대식이다. 에리가 있는 하얀 셔츠에 빨간 넥타이를 전날에 잘 개어서 놓아두던 입대 전날, 어린 마음에 넥타이의 의미에 대하여 배우던 순간도 가슴이 벅찼지만, 그 넥타이를 꼭 예쁘게 매고 다니리라는 엉뚱한 다짐이 있었다. 이미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선호하는 넥타이 재질이 따로 있었고, 학교앞 어느 매점에서 판다고 서로 공유하기도 하였다. 일명 플로레타리아가 되는 준비를 하면서 마음속엔 부르주아가 싹트고 있는 격이었고, 제사보다 젯밥에 눈이 어두운 셈이었다.
우리학년은 소선대 입대식을 영화관에서 진행했다. 고학년 학생들이 한줄건너씩 서고, 그 사이에 예비대원들이 들어가서 고학년 선배와 마주하면, 선배가 우리 목에 넥타이를 매주었다. 주먹쥐고 각오와 다짐을 구호로 외친 후, 애국주의 영화도 한편 보았던것 같다.
두번째 중대사건은 뭐니뭐니해도 반을 가르는 일이었다. 그때 연길에 소학생이 많았던건지, 시내 동편에 소학교가 새로 섰고, 새로 선 학교는 학생들을 충원하여야 했다. 자연히 연길의 각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새 학교로 전학시키게 되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우리는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떠나는 학생대표와 남는 학생대표가 앞에 나가서 편지도 읽고 그랬던것 같다. 선물도 교환했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했다. 갓 열살이 된 우리는, 그나이에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애틋함을 표현하였던 것 같다. 그때 아이들이 했던 말 중에,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말이 한마디 있다. “우리가 왜 떨어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친구들을 보내고 몇몇 반을 통합하여 3학년으로 진급하였다. 한족학교의 트라우마가 사라질 즈음, 한어가 재밌어지기 시작했고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던 드라마 주제곡들의 가사를 깨우치게 되었다. 우리 글을 읽고 쓰던 열정을 이번에는 한어에 쏟아부었다. 교과서에 인쇄된 우리글이 단정했다면, 한자는 멋있었다. 획을 따라 신화자전을 찾는 일은 친구들끼리 서로 내기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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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다니는 재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매점이었다. 학교앞에 즐비한 매점들에는 늘 다양한 불량식품들이 구전했고 사먹는 아이들로 빼곡했다. 십전으로도 뭘 사먹을 수 있던 때였다. 예쁘게 생긴 설탕덩어리도 있었고, 달달한 가루도 있었다.
우리 학교 앞에는 좀 유명한 간식이 있었는데 바로 건두부를 초장같은 것에 찍어먹는 것이었는데 타 학교의 아이들도 찾아올 정도로 유명했다. 제대로 된 가게도 아닌 컨테이너처럼 생긴 가게안에서, 초장맛이 매워 얼굴이 빨개지고 혀를 내밀면서도 아이들은 더러는 쪽걸상에 앉아서 더러는 서서 건두부를 먹곤 했다. 건두부를 팔던 아주머니는 나중에 보니 연변일중 근처에 자신의 사진을 간판으로 건 진짜 가게도 차렸다. 대학생이 됐을 때 친구랑 가서 먹으면서 추억을 나눴던 적이 있다.
어김없이 방학도 꼬박꼬박 찾아왔다. 그때는 방학숙제라는 책이 따로 있었다. 모든 과목의 숙제를 통합한 얇은 책 한권이었다. 방학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배정할 수 있는 매력적인 두달이었다. 일종의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한 시간이었다. 대략 첫주에는 날짜에 따라 숙제를 착실히 해나간다. 일기도 쓰고 독후감도 쓴다. 일기소재를 만드느라 아침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바퀴 뛰기도 하고 부모님을 돕기도 한다.
그러나 길어야 2주였으며, 그 뒤로는 늦잠과 드라마복습과 친구만나 놀기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개학이 코앞이다. 마지막 한주는 방학숙제 몰아서 하기, 일기 몰아서 쓰기, 친구 일기 빌려다가 날씨 베끼기(참으로 치밀하다) 등으로 바빠도 너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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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이 되었다. 정식으로 소학교의 후반기에 들어섰으니 딴엔 다 큰것 같았다. 숙제도 슬슬 시시해졌고, 넥타이도 집에 두고 오는 일도 생겼다. 그렇게 무료한 4학년의 끝무렵을 장식해준 두가지 이벤트가 또 있었다. 군사학교와 연길시 6.1아동절 대경축행사였다.
그때 연길에는 동존서부대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 4학년이 소년군사학교로 뽑혔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동존서의 생전부대에 속한 소년군사학교라고 하니 뿌듯함이 하늘을 찔렀다. 전 학년이 군복을 발급받았다. 군사체조를 배웠고 행진도 하루종일 연습했으며 그외에 군사학교 이름에 어울리는 각종 활동들을 했다.
6.1아동절대경축에는 시내에서 가장 큰 우리학교와 다른 학교가 대규모 집단무용을 선보이게 되었다. 우리 학교는 예술체조라고 하는 무용으로 정했고 여학생들은 훌라후프를, 남학생들은 횃불모양을 쥐고 거의 전교생이 그 무용에 투입됐다. 나름 열심히 했고 우리 학교 무용이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리허설 때 다른 학교 무용을 보고나니 너무나 기가 꺾였다. 그 학교에서는 테마별 무용을 선보였는데, 진달래꽃아이도 있었고, 예쁜 학 모양을 한 아이들도 있었고, 상모돌리기도 있었다. 우리 학교 무용은 거기에 비하면 너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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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왜 생이별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던 2학년 아이의 외침이 엊그저께 같았는데, 5학년에 올라가면서 또 새로운 학교에 동무들을 보내줘야 했다. 이별이 한번은 어려워도 두번은 괜찮았던건지, 머리가 커서 감정표현에 쑥스러워진건지, 이번에는 전보다 담담한 이별이었다. 반을 가르고 통합하면서 새로 생긴 학우들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 새로운 학교가 생긴건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새로 들어온 친구들 중에는 후에 나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된 친구가 있었으니까. 그 아이가 없는 나의 십대는 생각할수가 없다고 말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나의 첫 롤모델이 된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의 눈빛과 걸음걸이와 말투와 옷차림 등 모든 것이 좋았다. 선생님의 열정과 공정함과 엄격함은 더욱 좋았다. 만년 소대장이었던 나는 그 선생님을 만나서 처음으로 두줄을 달았다. 두줄을 단것보다, 선생님께서 나를 조금은 인정하는구나라는 생각에 꿀을 먹은듯 달콤했다. 그전에는 늘 책에 나오는 과학자같은 사람들이 되고 싶었는데, 나의 꿈이 바뀌었다. 선생님처럼 평범하게 사는 멋진 여성이 되고 싶었다. 강선생님, 한번도 찾아뵙진 않았으나 그분은 나의 마음속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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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에 올라가면서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는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넥타이를 주머니속에 구겨넣는 것을 용기로 생각했다. 더 용기있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어린 나이에 이성친구도 있었다. 중학교 형들과 어울려 놀고 집에 늦게 들어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갑자기 비싼 옷에 비싼 문구를 쓰는 아이들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렵이 연변에서 많은 어른들이 한국으로 진출하던 시기였다. 작은 도시안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채 그런 변화에 흔들리고 있었다.
졸업사진을 찍고,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어느 중학교에 갈지 궁금해하면서, 6년을 머물렀던 이 소우주에서 우리는 졸업을 하였다.
[2018.6]
와… 소학교 6년동안을 한해씩 나누어서 생동하게 기록하셨네요. 저의 추억도 함께 막 떠오르는데… 붉은 넥타이를 매지 않고 등교하여 반에 점수를 깎아먹던 일, 6학년 마지막엔 서로 同学录를 써주던 일… 그런데 하나 슬픈거는 소학교때의 추억은 이젠 더이상 어제일 같지는 않네요. 몇해전까지만 해도 어제 같았는데. ㅋㅋ
그때는 반에 점수 깎아먹는거 아주 최고의 악으로 치부하였죠. 거 좀 깎이면 어떻다고. ㅠㅠ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웃다가 되새길수록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어떤 애가 아주 비장하게 말했더랬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