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예술인가? 회화의 노복인가?
"사진은 충실하게 사물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예술이라 할 수 없다. 그 기능은 화가를 위한 심부름꾼으로서 인정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보들레르 『근대 대중과 사진』
사진술은 카메라로써 모든 것을 똑같이 베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탄생과 더불어 그 역할에 대한 찬반논란을 불러왔다. 사진을 도구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사진술이 공표 되었을 당시, 그것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사진의 완벽한 사실성에 넋을 잃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흥분은 차츰 의심으로 가지를 쳐나갔다. 사진이 아무리 인간의 육안을 뛰어넘는 묘사를 한다할지라도, 거기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떤 화가가 아름다운 모델에 옷을 입히고 화장을 시켜 이를 그림으로 그린 뒤,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운 문장 한 구절을 써넣고 <줄리엣>이라고 제목을 붙인다면 칭찬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진가가 같은 모델에게 같은 옷을 입히고 촬영해서 <줄리엣>이라고 제목을 붙인다면 어떨까? 그것은 결코 줄리엣이 아니다.
화가는 사실적인 부분을 생략해가며 꿈을 그린다. 그녀의 줄리엣다운 면만을 그린다. 그러나 사진가는 화가 날 정도로 모든 것을 그대로 찍어내버린다."
-버나드 쇼 『Wilson's Photographic Magazine』
당시 사진을 소개한 대부분의 글들에서는 사진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유인즉 차가운 기계에 의해 ‘있는 그대로’를 찍어낸 사진이미지와, 화가가 ‘상상력을 불어넣어’ 창조한 회화이미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사진에는 예술가의 손길과 정신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진은 회화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져 예술이 아닌 ‘기계’로 폄하되기에 이른다.
사진이 예술로 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베끼기만 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사진이 예술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사진도 회화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사진도 인상주의 그림처럼 몽롱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촬영자의 ‘상상력’이 개입될 수 있다는 점, 교훈적인 메시지가 전달 가능하다는 점, 이러한 점들이 당시 사진 제작의 지침이 되었고 이와 같은 창작 기후 속에서 사진가들은 회화를 닮은 사진을 제작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회화주의를 끌어들인 사진을 사진사에서는 픽토리얼리즘이라 부른다.)
그들은 카메라를 일부러 흔든다거나, 렌즈에 침을 바르거나 검프린트 기법을 이용한 흐릿한 초점으로 사진의 섬세한 묘사를 피했고 여러 장의 필름을 조합하는 합성인화로 사진이 지닌 리얼리티을 제거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수공업적인 방법이 사진을 기계성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이러한 최초의 시도로 구스타브 레일란더의 <인생의 두 갈래 길>이란 작품을 들 수 있다. 30여장의 사진을 합성하여 제작된 이 교훈적인 작품은 중앙에는 ‘후회’를 상징하는 인물상이 있고, 그 오른편에는 근면, 왼편에는 게으름을 상징하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가운데의 인물을 중심으로 좌우 분할이 5:3의 황금비율을 보이고 있어 내용상으로나 형식상으로나 미술 아카데미가 규정한 회화미학 방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구스타브 레일란더, 두 갈래의 길, 1857
사진, 회화로부터의 분리
상술한 창작론은 세계적인 유행을 몰고 왔다. 하지만 사진이론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이같은 방법론으로는 사진을 예술로 격상시킬 수 없음을 자각한 비평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진이 오랜 세월동안 회화를 따라한 것은, ‘스스로의 본질을 찾지 못함에서 기인된 결과’라는 점이 그들이 지닌 문제의식이었다. 사진이 회화를 따라하면 따라할수록 회화의 아류로 더 깊이 전락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사진은 회화가 가질 수 없는, 사진만의 특수성을 확립함으로서 회화의 종속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렇다면 회화와 차별되는 사진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기계적인 사실성이다. 여지껏 회화처럼 되기를 열망하면서 은폐해왔었던 사진적 속성- 기계적 사실성, 이제 그것을 다시 전면에 내세워야 했다. 이러한 이론적 제시는 스티글리츠에 의해 더욱 체계화된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은 사진처럼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사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연출하지도, 꾸미지도, 손질을 가하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 잡아내는 스트레이트 사진임을 강조한다.
본질을 찾은 사진, 그렇다면 이제 사진은 예술에 입성하게 되는가? 아니다. 여기에는 딜레마가 있다. 기계적 사실성에만 의존할 경우, 사진은 여전히 도구의 반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진이 탄생한 이래 예술로 인정받으려는 시도에 있어서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던 부분이 바로 기계적 사실성이었기 때문이니라. 바로 이 지점에서 스티글리츠는 당시 미국 사진가들과 함께 사진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추상적 효과를 포착해내는, 말하자면 구상과 추상을 함께 구현하는, 얼핏 자가당착 같아 보이는 이러한 작업에 성공을 거둔다.
에드워드 웨스턴,Pepper, 1930
사진, 추상적일 수 있는가?
미술용어사전에서는 추상의 정의를 아래와 같이 내리고 있다.
"추상: 구상성 또는 구상적인 반대 개념. 현실의 구체적인 시각 체험에 의존하지 않는 표현.
추상미술: 실제로 관찰되는 사실적 형태를 거부하는 미술유형으로서 자유로운 주정적 표현을 통해 표출하는 형태의 미술."
사전이 명시한 바대로, ‘실제로 관찰되는 사실적 형태를 거부’ 한다든지, ‘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추상이라면 사진은 원칙적으로 추상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진은 실재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전제로 하는 매체이며 대상의 사실적인 형태를 인화지 위에 정착시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글리츠와 그의 동료들은 꾸밈없는 직선적인 촬영방식으로 사진적 추상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진의 예술성이 반드시 추상성에 의해 확보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태생적으로 추상일 수가 없는 사진은 역으로 추상의 모색을 통하여 메커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웨스턴, Dunes Oceano, 1936
스티글리츠와 동료들은 사진의 기계적 사실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전제에서 형식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통해 구상과 추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는 사진미학을 터득해낸다. 이는 훗날 ‘형식주의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형식주의 사진이란, 한마디로 기계적 사실성을 극단적으로 밀어부쳐 대상을 낯설게 함으로써 대상의 구체성에서 벗어나는 사진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예컨대 카메라의 깊은 피사계 심도를 이용해 피부를 촬영했을 때, 피부(모공)라는 대상성에서 벗어나 갯벌이나 다른 걸로 인지되는 착시효과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둘째는, 대상을 포착할 때 치밀한 시각적 절단이나 교묘한 접근각도를 통해 대상을 낯설게 지각하게끔 만드는 방법이다. 에드워드 웨스턴은 이러한 접근 방식을 거장다운 수준에까지 끌어올렸는데, 그의 작품에서 주름진 식물 줄기들이 엮어내는 추상적인 형태라든가, 피망의 볼륨감에 의해 형성된 조형미는 형식주의 사진미학을 완벽하게 다루는 그의 공력을 잘 드러내준다.
이처럼 사진은 결국 대상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작가의 주관적 감정표현이 가능한 매체로 거듭난다.
웨스턴,nude,1925
문학의 시녀로서의 회화
"17, 18세기 회화가 가장 얻고자 한 것은 문학적 효과였으며, 회화와 조각은 문학의 영역에 영입되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조형예술의 쇠퇴였다. "
-클레멘트 그린버그
각 시대마다 지배적인 역할을 했던 예술장르가 있었다. 17세기 유럽예술에선 문학이 그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17세기 시민계급은 산업화의 산물인 인쇄매체에 각별한 애착을 가졌고 그것의 가격이 타 매체에 비해 저렴하고 이동성이 탁월하다는 이유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창조력과 성취력은 문학에 집중되었다.
주도권을 잡은 예술은 기타 예술의 선망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기타 예술들은 본연의 고유성을 숨기면서 주도적 예술의 효과를 모방하려고 하는 신분상승 욕구를 보인다. 회화 역시 모든 강조점을 문학적 주제(신화, 성경, 이야기)를 해석하는 데로 옮겨갔다. 사실 그보다 일찍 15세기에 씌여진 알베르티의 『회화론』에도 회화는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질서 정연하게 배열하는 작업이라고 명시되어있다. 이렇듯 회화는 오래전부터 문학의 효과를 모방하는데 주력해왔던 것이다.
벤첼 페테르,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이브, 1829
회화, 문학으로부터의 분리
그린버그는 회화 속에 다른 예술장르의 효과들이 섞여있음으로 인해 회화가 존립 가능성을 잃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문학이나 조각 등 다른 예술과는 공유되지 않는 부분을 찾는 것이야말로 회화가 자율성을 확보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그 결과로 먼저 내용, 주제가 버려진다. 문학과 공유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음 3차원의 재현효과 역시 조각과 공유하는 영역이므로 제거해야 했다. 말하자면 애초부터 서구회화는 2차원 평면 위에 원근법이란 눈속임으로 3차원의 입체적 환영을 구현하는 과제에 전력을 다해왔었으나 입체성의 탐구는 결국 조각의 영역이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또한 화면구조의 닫힌 형태는 무대예술과 겹치는 부분이므로 포기해야 했다.
회화 속에 섞여있는 불순한 효과들(문학, 조각, 연극 등)을 모두 정제해내면 남는 것은 회화의 평면성이다. 2차원의 평면! 그린버그는 평면성을 다른 예술과 겹치지 않는 회화예술만의 독자적인 특성이라 단언한다.
잭슨폴록, no.1, 1949
회화는 평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회화가 주력해온 것은 화면의 ‘깊이’였다. ‘깊이’는 회화의 본질이 아니다. 다시 말해, 회화는 화면을 통해서 무엇인가 내다볼 수 있는 ‘투명한 창문’이 아니란 것이다. 뚫린 창문효과는 순전히 3차원 환영일 뿐이다. 회화는 본질적으로 꽉 막혀있는 불투명한 ‘벽’(평면)이다. 하지만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캔버스(천)와 물감의 불투명성은 전통회화에서는 숨겨야만 하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요소들은 전통회화가 강조하는 내용전달과 주제해독에 방해가 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더니즘 회화에서는 전통회화가 숨겨왔던 평면성(불투명)이 회화만의 독자적인 특성으로 간주된 것이다.
평면을 그리는 것, 이것이 모더니즘 회화의 의무이고 회화에 부여된 새로운 과제가 되였다. 주제, 내용, 대상, 깊이, 재현, 원근법, 환영 모든 걸 포기하고 평면으로 향한다는 것은 곧 추상으로 간다는 걸 의미한다. 이로써 추상표현주의시대의 서막이 열린다.
Barnett Newman, block, 1954
마치면서
이 글에서는 회화적 효과를 추종함으로써 회화처럼 되기를 열망했던 사진과, 문학의 효과를 표방했던 회화가 독자성을 찾아가는 행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글이 주목한 것은 사진과 회화 매체의 순수성이다. 이는 장르 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오늘날, 매체의 순결을 고집해보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단지 사진, 회화 영역에서 매체성에 대한 탐구가 각기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부언한다면, 사진과 회화가 타 장르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성을 찾게 된 데는 공통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장르의 한계적 요소를 긍정적 요소로 치환 시킨 그 점이다. 더불어 사진과 회화 양자 모두가 다른 예술장르에서 빌려왔던 효과를 제거하는 방법론을 채택했다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뇌세포를 좀 손상해야 아먹의 사진과 회화의 모더니즘일부를 알아볼까 말까함다……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촬영해내는 사진, 보이는 사물에서 보이지 않는 꿈을 몽상해내는 회화 ;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내는 사진의 기록성, 선이랑 색감으로 완성해가는 회화의 상상성; 뭔지 모르겠으나 , 둘이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은 게 있어요. 사진은 기록성에서 볼때 있는 그대로를 반영하는 정직한 실제라 생각되지만 아닐때가 많고, 회화는 예술의 영역에서 창작을 바탕으로 구상해낸거라 생각되지만 그런 실존형상이 존재할 경우가 많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회화는 좋아하는 사람을 종이에 묻혀내는 손끝과 심장의 문학같은 설레임이라면, 사진은 좋아하는 사람을 눈과 맘에 간직하고 싶은 대로 셔터버튼을 한컷씩 눌러보는 즉각적인 충족이 뒤따르는 행위예술 같아요.. 호크니가 이 두개를 잘 믹스한거로 알고 있는데(정확한지 몰겠지만) , 후에 관련 내용도 올려주시면 재밋게 읽겠습니다.빌려왔던 효과를 제거하고 남은 부분을 어떻게 어필하고 있는지도요.
잘 읽었습니다. 어려운 이론을 이렇게 명료하게 풀어내다니!! 형식주의 사진이 기계적 효과를 극대화(추출) 한 곳에 작가의 감정이입이 들어간거군요! 그래서 지독하게 사실주의적인 사진이 추상적으로 보이는군요! 흥미롭습니다. 회화의 본질이 아닌 모든 부가된 요소들을 제거 하는 추상표현주의 형식은 어떤면에서 보면 상상력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닐까요?
뇌세포 좀 기절했음다. 근데 회화가 독립하기 위해서 문학과 조각을 분리해냈다는 대목에서 오~그렇구나~ 했습니다. 사진은 회화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무엇을 분리해 낼까요? 글에서는 사실성을 분리해내고, 구체성(기계적 형식주의를 통한)을 분리해낸다고 읽었는데 바로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도 일종의 문학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선전도구로 전락되는 한 컷, 그런 프로파간다도 분리해내야 하지 않을지..
사진 자체는 리얼리티가 있는 듯하면서, 촬영하는 자가 그 사진틀(프레임)을 어떻게 정하냐 어느 앵글로 작은 네모를 뽑아내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거짓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거짓 자체도 일종의 예술성이 아닐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타즈마할릉도 줌아웃 해서 주변까지 같이 찍으면 엄청 황량하고 더러운 가운데 위치해 있는것과 같은 그런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