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보의 소비는 소유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얻는가? 책이나 영상이나 대화 중에서 어떤 모르는 말이 나왔다고 치자. 당신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무엇을 하겠는가? 아마 대부분 이들은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할 지 모르겠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부터 나는 그래왔다.
요즘은 포털에 검색하면 바로 국어사전적인 풀이가 나오거니 백과서전적인 표제어가 제일 위에 뜨는 경우가 많다.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바이뚜 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사물 이름 같은 경우는 이미지 버튼을 클릭하면 시각적으로 모양이나 생김새를 확인할 수 있어서 편하다. 더 나아가 동영상도. 최근 들어 들었던 꽤나 충격적인 얘기는, 요즘 십대들은 아예 유튜브를 포털 사이트처럼 이용한다는 것. 유튜브에 검색해서 나오지 않으면 그냥 없는 줄로 안다는 것. 그만큼 이제는 정보 유통이 문자 텍스트에서 숏츠나 영상 위주로 변하고 있다는 얘기겠다. 요즘은 아마도 직접 챗지피티 같은 생성형 AI에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겠지.
근데 어떠한 형태든지를 막론하고 즉각적인 검색으로 정보를 얻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보면, 해당 부분의 지식을 우리의 대뇌 밖으로(예를 들어 하드 디스크나 인터넷 공간에) 아웃소싱을 한게 아닐까.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시간이나 정력을 절약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다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똑같은 단어를 검색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가끔 현타가 올 때가 있다. 즉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
왜일까? 왜 기억이 안 되는 것일까? 두 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다. 첫째는 정보량이 너무 많다는 것,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정보가 정제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째는 언제 어디서든 이른바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착각에 나의 뇌가 게으름을 부리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다.
하긴 길지 않은 나의 삶 가운데서, 뇌가 이미 아예 작동을 멈춰 버린 영역들이 여럿 있다. 나의 뇌는 더이상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줄줄 외우지 못한다. 대학교 학부 때만 해도 친구들의 숙사 전화번호나 부모님 번호는 외웠었다. 헌데 요즘은 가끔 내 폰 번호가 생각이 안날 때도 있다. 또 낯선 곳에서 길을 물어 가고 시간을 가늠하는 일도 내려놓은지 오라다. 미리 여행노선을 찾아 보고 교통정보를 노트에 적고 그래도 현지에 가면 헷갈려서 지나는 행인에게 (대답해 줄만한지 눈썰미를 익혀가며) 질문을 골라서 했었는데 말이다. 까마득한 전생의 환각 같기도 하다. 그만큼 나의 뇌도 끊임없이 변해가는 도구들에게 기억 '하청'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2. 정보의 소장: 사전 읽기
현실 속에, 정제된 정보를 제공하면서 대뇌를 충실하게 하는 매체가 있다. 바로 사전이다. 요즘 같은 검색의 시대에 왜 사전?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리고 사전도 전자사전의 시대에 접어 들고 있지만, 사전을 읽는 것은 글쓴이가 직접 경험한 좋은 문화행위이다. 범람하고 있는 자아계발 서적보다 훨씬 응축되고 질좋은 대뇌 먹거리라고 생각한다.
제일 처음 내돈내산, 그리고 처음 전체를 훑었던 사전은 영어사전이었다. 시골의 소학교라 나름 시대에 발맞추어 영어 과목을 도입한다고 한게 내 나이 바야흐로 3학년이 되던 해. 아주 당연하게도 영어사전을 구입하게 되었다. 5원 20전이었던지 6원이었던지 그 정도. 출판사를 봐야 한다는 개념도 없었고, 구매처는 살던 동네의 신화서점이었던지, 그것조차 가물가물하다. 일단은 작고 싸면서도 소학생이 쓰기에는 나름 모자람이 없는 사전으로 골랐던 것 같다. 또래 중에서도 몸집이 작은 내 손에도 거의 다 담길만한 크기의 사전이었다. 제목에 '小学生'이 들어가 있었던지도 확실치 않다. 커버가 노랑이었던 것만이 선명하게 뇌리에 찍혀있다. 맥도널드 로고 노랑처럼 샛노랗지도 않은, 조금은 누렇다고 해도 될만한 노란색 영어사전.
아직 싱싱했던 소학생 대뇌피질이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두께의 미니 사전을 훑으면서, 알파벳 순으로 읽으면 이런 영어단어들이 서로 이웃 관계네, 이런 뜻의 단어도 있네 하면서 영어 어휘의 세계를 접했던 기억이다. 재미있다고 느낀 단어는 따로 목책에 적어 정리하기도 하고. 20년도 더 된 지금, 그 사전은 이사를 거듭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레이아웃(排版)과 글꼴과 그립감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다. 작달막한 그놈을 읽고나니 교과서 이외의 영어 문장을 읽을 때도 낯익은 단어가 눈에 들어오면서, 내가 뭔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경험을 한 것이었다.

두번째로 읽은 사전은 한자 사전인 <신화자전>. 직접 산 것은 초중 졸업 무렵이었던지 고중 때였던지, 제10판을 사서 소유했었다(위 사진 중 오른쪽 네번째, 지금도 고향 집 책장에 있을 것임). 물론 그 이전에도 신화자전으로 한자를 찾아 본 적은 많지만, 본격적으로 '읽은' 것은 초중 2학년 즈음이었던지… 옆 도시에서 하숙하면서 외지생활을 했었는데, 방학에 집에 오니까 별로 할 일도 없고 볼 책도 없었고, 그래서 집에 굴러다니던 초록색 책가위의 신화자전을 집어들었다(위 사진 중 왼쪽 다섯번째 같은 색상). 제5판, 6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이미 오래 쓴 탓에 종이는 누래지고 자주 펼친 탓에 부피도 불어서 훨 두터워 보이는 그런 사전.
첫 페이지부터 무작정 읽어내려가다 보니 같은 음을 가진 한자들의 관계를 직관적 그리고 직감적으로 느끼게 됐었던 것 같다. 후일 보면 그것은 한자 육서(六書) 원리 중의 형성(形聲)을 체득하는 과정이었다. 색인을 읽으면서는 같은 편방(偏旁) 부수(部首)에 속한 글자들을 관람하는 과정이 되었고, 희귀한 글자, 재미있는 글자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으로 써보기도 했다. 꽤 이전 판본을 읽다 보니, 다음자(多音字)나 번자체 정보도 더 많았고 그래서 내용이 더 알찼던 것 같다. 한 방학 동안 신화자전을 독파하고 나니 이번에도 역시는 역시, 한어로 된 소설이든 혹은 고전을 읽어도 막히는 걸림돌들이 확연하게 줄었고 자신감이 들었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훗, 자식, 뭔가 좀 컸는데? 이렇게 말이다.
위와 같은 경험들은 알게 모르게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3. 사전은 항상 그리고 계속…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나는 회사원에서 다시 대학원생이 되었고, 문헌학을 공부하면서부터는 그냥 일반 사전이 아닌 전문분야별 사전이나 혹은 이른바 대형사전을 떠나서는 지낼 수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용어들을 밀도있게 설명하고 참고문헌을 첨부하고, 낱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문헌 용례와 어원이나 역사에 대한 서술까지… 이런 사전들을 펼칠 때마다, 어떻게 이런 사전이 다 있지 하는 한편 사전을 묶은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새삼스레 느끼곤 한다.
사전을 읽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구나 하는 경험, 그것은 참 값진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사전을 만들게도 되었다. 뜻이 맞는 멤버 몇이서 느리고 더디고 미약하고 미비한 데도 많지만 모어 사전인 <연변말모이>를 쓰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모으고 생각하고 기술하고 의논하면서 한 걸음씩 굼뜬 걸음을 떼고 있으나, 학계에도 알리고 홍보하면서 진행 중이다.

사전과 포털검색이 뭐가 다를까? 결과만 보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 원하는 정보를 얻은 것 같으니까. 그러나 과정을 보면 다르다. 사전은 일단 지면의 제한도 있기에 꼭 담아야 할 정보를 꼭꼭 눌러 간결하게, 그리고 근거를 가지고 쓴다. 인테넷 정보는 수만자를 써도 몇 바이트 정도의 용량 밖에 차지하지 않으니 늘여서 장황할 때가 많다. 또한 답에 접근하는 과정이 다르다. 사전은 색인을 찾고 자모 순서대로 종이장을 넘기며 원하는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 앞뒤 다른 낱말들 즉 이웃 관계가 확인 가능하다. 그보다도 찾는 과정에서 찾고자 했던 낱말과 관계는 없지만 정제된 모습으로 기다리는 다른 낱말을 만날 때도 많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특정된 책만 사서 읽는 전자책 독서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동일 분야로 정리된 책장에서 하는 독서가 다른 것과 똑같다. 즉 사전은 정보를 고립된 섬이 아닌 전체 지도에서의 위치로 알려 줄 수 있고, 사전을 찾는 자에게 균형 있는 감각도 함께 훈련시키는 셈이다. 이는 인터넷 검색이 할 수 없는 일이다.
4. 새로운 도전: 또 한권 통채로 삼키기–<두만강 유역의 조선어 방언 사전>
<연변말모이>를 편찬하면서 알게 된 연구자가 있다. 바로 수십년간 사비까지 들여가며 우직하게 연변 지역에서 방언조사를 했던 서강대학교 곽충구 교수. 이 분이 평생의 심혈을 정리해낸 사전이 바로 <두만강 유역의 조선어 방언 사전>(태학사, 2019년, 이하 '두만강사전')이다.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사전은 "1995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8개 지점에서 조사"한 말들과 발화 실례들을 정리하여 묶은 것이다. 조사지역은 다음과 같다.
1. 훈춘시 경신진 회룡봉촌, 벌등촌
2. 훈춘시 밀강향 밀강촌
3. 도문시 월청진 마패촌
4. 룡정시 삼합진 청수 4대 북흥촌
5. 화룡시 룡문향 룡지촌 7조(구 아동촌)
6. 화룡시 남평진 로과촌
7. 룡정시 [시내]
8. 연길시 [시내]
이밖에도 저자가 진행한 중앙아시아 고려말 조사 자료와 한국 국내에서 진행한 함북 명천 출신자에 대한 조사 자료도 일부 사전에 반영되었다고 한다(<부록 1>).

두만강사전은 학문적으로도 참고가 될 만큼 소리의 표기에도 신경을 썼다. 실제 발화례에는 모방언 화자가 아니라도 꽤 높은 정확도로 알 수 있을 만큼 악센트 표기까지 다 되어있다. 저자와 출판사 편집자의 노고가 느껴진다. 이러한 수고를 아끼지 않은 데는 두만강 유역의 방언이 육진방언이 남아있고 "매우 보수적이어서 음운 면은 가위 근대국어와 방불하며 어휘 면에서도 고어가 많이 잔존해" 있어, "문헌자료를 보충해 줄 수 있고 나아가 국어사나 국어 방언 연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머리말>).
조선족들이 절로도 하지 못한 작업을 해주신 데 대해 경의와 감사를 표하면서 직접 사전을 사고 직접 읽는 행위로, 글쓴이는 실천하고자 한다. 간만에 새롭게 사전 한권 통채로 삼켜보고 싶은 열망이 살아났다. 전에 경험했던 것처럼, 두만강사전을 완독하고 나면 나는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2권으로 도합 4209쪽의 어마어마한 분량…)
오늘은 8월 15일, 남에서는 광복절, 북에서는 해방절, 연변에서는 '로인절'의 명목으로 기념하고 있다. 두만강사전에 이 낱말이 올림말로 수록되어 있다(721쪽). 용례들이 실제 발화라 더 재미와 의미가 있다. 아래 올림말 '노인절'의 내용을 보인다(입력상 일부 기호는 반영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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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졀[noinjəɾi] {명} 노인들의 명절. {참고} 1984년에, 8월 15일을 연변조선족자치주 '로인절(老人節)'로 정하고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 죠'꼼 있우무 이'게 먹기' 돟'구. 기내 익우'무 물'내 납데, 이'게. 기내 익우'무. 즉금두'· 이'게 먹울 만:하기'느 먹울 만: 하오. 요'게 새구지레 새콤한 게. 아주 그게' 노인절', 팔월달'에느 익디'? 양녁'? 팔월달'에 닉소'. 노인절' 및어' 게' 닉는 게'. 고게' 닉어'시문 아이' 좋갯소? 요새 맛'잇는 게, 딱딱 따개'디는 게. (조금 있으면 이것이 먹기 좋고. 너무 익으면 곯아서 냄새가 나데, 이게. 너무 익으면. 지금도 이것이 먹을 만하기는 먹을 만하오. 요게 조금 시고 새콤한데. 그것이 노인절이 있는 팔월 달에는 아주 익지? 양력? 팔월 달에 익소. 그것이 노인절 미쳐서 익는 것이오. 고것이 익으면 안 좋겠소? (= 익었다면 대접할 수 있을 텐데 익지 않아 대접을 못 한다는 말) 요새 맛이 있는데 딱딱 쪼개지는 것이. 삼합). = 노인의날(老人–). {분포}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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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두만강사전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이어서 소개해 보도록 하자.
그리고 읽는이들도 사전 한권 골라보는 건 어떤가? 통째로 삼켜보면 감칠맛이 길이 남을텐데, 동참해 보지 않으렵니까?
[관련 추천글]
연변말모이, 아시아사전학회를 가다 (feat.우리나무)

딱딱 쪼개지는 과일이 오얏일가요?
사전 두권을 어린 나이에 삼켰다니 탄복할 따름임다.
딱딱 때개지는 과일으느 토왜지 아이므 참살기갰지에. 8월이므 익는다는거 봐서는 왜지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임다. 살기는 좀 더 일찍 익었던 같슴다.
연변 왜지가 8월이면 익어서 딱 따개짐다 ㅎㅎ
나는 살구색을 잘 그림다. 두만강 유역의 조선어는 살구색 같지므.
살구빛 작품이 웬지 기대가 됨다
사전을 외우다니요. 떡잎부터 벌써 언어연구자….👏
읽다가 외우다가 건너뛰다가
글을 읽다보니 글이 잔잔한데 빛나는 호수 같다는 느낌이 들었슴다.
분에 넘치게 좋은 표현임다 고맙슴다
4000페이지가 넘는 사전을….. 그나저나 가, 나, 다, 라 순으로 읽으렵니까…?
‘사전 삼키기’에 동참하고픈 충동이 생기는군요 (겨우 참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