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생산대(生産隊) 대장
광란의 시대라 불리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 5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와 8월 제8기 11중 전체회의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그 막을 올렸단다. 이 두 회의를 기점으로 혁명의 불길이 전면적으로 타올랐는데, 이 비극은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지난 1976년 10월에야 비로소 끝이 났지. 당시 화국봉(華國鋒), 엽검영(葉劍英) 등이 중앙정치국을 대표하여 당과 인민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고, 악명 높았던 4인방(四人幫)을 일거에 체포하면서 길고 길었던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앞서 잠깐 이야기했었지만, 이 시기 너의 증조할아버지(나의 할아버지)의 계급 성분 탓에 집안은 거의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어. 그 모진 여파로 제3세인 너의 할아버지(나의 아버지)는 가슴에 품었던 학업의 꿈을 무참히 꺾어야만 했단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영광스러운 입학통지서(入學通知書) 대신, 청년 할아버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산에 들어가 나무나 베라는 차가운 입산증(入山證) 한 장뿐이었지. 그렇게 펜 대신 톱과 도끼를 들고, 잉크 대신 땀방울을 흘리며 산에서 벌목공으로 모진 세월을 견디시다가, 훗날 산을 내려와 왕청대대 11대, 즉 채대(菜隊)의 일원으로 흙과 쟁기를 만지게 되셨단다.
그렇게 암울했던 문화대혁명의 한복판인 1968년 즈음, 할아버지는 운명처럼 너의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어. 당시 소개팅으로 만났는데, 왕청현 맨 북쪽 깡촌 시골 마을에 사시던 너의 할머니는 참으로 당찬 여장부셨다. 남자의 정치적 성분이 좋든 나쁘든 그건 둘째 치고, 오직 이 지긋지긋한 시골을 벗어나 왕청 시내(鎭內)로 시집을 가겠다는 야심 찬 욕망을 가지고 계셨거든. 어찌 보면 할머니의 그 '탈출 욕망'이 할아버지와의 사랑보다 더 뜨거웠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 야심과 인연이 닿아 두 분은 부부의 연을 맺으셨고, 이듬해인 1969년 10월에는 너의 고모인 큰딸을, 그리고 1971년 3월에는 너의 아빠인 나를 낳으시며 그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셨단다.
비록 몸은 고된 노동에 시달렸지만, 할아버지의 영혼은 늘 문학을 갈망하고 계셨어. 유난히 글 쓰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지금도 왕청의 할아버지 생가(生家)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빛바랜 일기장들이 유물처럼 여러 권 보관되어 있단다. 철모르던 어느 날, 아빠는 너의 고모와 함께 그 시절 할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을 몰래 펼쳐 읽어보면서 서로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어.
그 속에는 시대가 강요했던 당에 대한 붉은 충성심도 억지로 짜내어 적혀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고등학교 시절 남몰래 사모했던 어느 여학생에 대한 풋풋한 에피소드들과, 고된 벌목 시절의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처절한 기록들… 그리고 장차 김소월(金素月), 윤동주(尹東柱)와 같은 민족 시인(詩人)이 되고 싶었던 뜨거운 열망과 습작 시들이 마치 보석처럼 박혀 있었단다. 특히 할아버지는 김소월 시인을 어찌나 흠모하셨는지, 첫딸인 너의 고모 이름을 아예 '김소월'로 지으려 하셨다는구나. 비록 암울한 시대였지만, 그 속에서도 할아버지는 펜 끝으로나마 그렇게 애달픈 꿈을 꾸고 계셨던 게지.
어디 그뿐인 줄 아니? 할아버지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틈틈이 글을 써서, 연변 지역의 대표적인 주요 간행물 《연변일보(延邊日報)》와 문학 월간지 《연변문예(延邊文藝)》에 자작시와 직접 번역한 단편소설 등을 드문드문 발표하기도 하셨단다.
지금도 할아버지 유물 속에는, 그때 당시 신문과 잡지에 실렸던 작품들을 손가위로 정성스레 오려내어 차곡차곡 풀칠해 모아둔 낡은 책이 여러 권 남아 있단다. 그 종이 조각 하나하나에 할아버지의 꿈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것 같아, 아빠는 그걸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곤 해.
그 시절, 할아버지의 그 반짝이는 재능은 주머니 속의 송곳, 즉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숨길 수가 없었나 봐. 신문과 잡지에 실린 글솜씨가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서, 할아버지는 가끔씩 인근 소학교나 중학교에 초청을 받아 과외 보도원(課外輔導員)을 맡기도 하셨단다.이것은 학교 선생님이라는 직함이 아니라, 사회에서 본받을 만한 어른이 학생들에게 생생한 인생 경험담을 들려주는 일종의 특별 멘토 같은 역할이었어. 할아버지는 강단에 서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학생들에게 시(詩) 쓰는 즐거움도 알려주시고, 본인이 겪은 삶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더 넓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따뜻한 불씨를 지펴주셨지.

상황이 이러니, 생산대(生産隊)의 상급 조직인 대대(大隊) 간부들의 귀에도 이 소문이 들어갈 수밖에. 그들은 글 잘 쓰고 강연까지 다니는 그 똑똑하고 아까운 인재가, 거친 밭고랑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쟁기질만 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거야. 고운 펜을 쥐어야 할 손바닥에 투박한 굳은살인 장알만 박혀가는 게 영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지.
결국 대대에서는 할아버지를 본부로 불러올려 회계(會計) 업무를 배우게 했고, 곧이어 간부(幹部)로 전격 발탁했단다.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하면, 흙 속에 묻혀 있던 원석이 눈 밝은 사람에게 띄어 화려하게 '캐스팅' 되거나 '스카우트' 된 셈이지.
그렇게 대대(大隊) 본부에서 성실히 일하시던 1977년 즈음, 할아버지 인생에 또 한 번의 큰 도약이 찾아왔단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대대에서 회계 업무를 보며 차근차근 간부로서의 자질을 닦으셨고, 그 까다롭다던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에도 정식으로 입당(入黨)하게 되셨지. 이제는 누가 봐도 어엿한 지도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거야. 그때,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청년 할아버지의 나이는 딱 만 31세였단다.
그 무렵, 왕청 제3생산대(왕청 3대)를 이끄시던 '윤 대장'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연세가 많아지셔서 더 이상 거친 현장을 지휘하기가 어려워지셨단다. 결국 그분은 일선에서 물러나 대대 판공실(辦公室,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게 되셨지.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젊고 유능한 너의 할아버지가 제3생산대 대장(生産隊 隊長)으로 정식 임명을 받아 가시게 된 거란다.
펜을 잡고 시를 쓰던 문학 청년이, 톱을 들고 산을 오르던 벌목공을 거쳐, 마침내 수십 가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한 마을의 대장이 된 것이지. 그것은 할아버지의 성실함과 지성이 만들어낸, 참으로 눈부신 인생 역전 드라마였단다.

つづく
「 1.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
2. 1부2처(一夫二妻)
3. 중국해방 그리고 …
4. 악운(噩运)
5. 홍진(天然痘) 바이러스
6. 문화대혁명
7. 수북(水北)과 할머니의 흉터
8. 독버섯(毒蘑菇)사건
9. 파란 껍데기와 빨간 껍데기, 호구부의 설움 」

어느 분이 아버님일지 한참 들여다봄..
진짜 인생 역전 드라마 맞슴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