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이 구간에서는 북에서 남으로의 방향으로 흐르는 두만강, 여기서 35키로 더 흐르면 태평양에 이르고 중국과 조선, 그리고 마지막 15키로는 러시아와 조선의 국경선으로 된다. 

두만강에 놓여진 많은 다리 중에서 하류 쪽의 마지막 도로 다리가 이 곳에 있다. 다리 동쪽은 중국의 권하(圈河)촌이고 다리 서쪽은 조선의 원정(元汀)리이다. 

3월 9일. 

이날을 평생 잊을 것 같지 않다. 바로 이날 나는 이 다리를 건너 내 조상의 넋이라도 살아있을는 지 모를 나진(羅津)으로 갔던 것이다. 그 것도 난생 처음 출국이라는 명의로 말이다. 

출국이라면 다 자연스런 말로 들릴 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 조선이나 한국으로 가는 데에 출국이라는 말을 쓰면 어쩐지 어색할 수밖에 없다. 형식상 중국 국적으로 어느 나라에 가든지 다 출국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조선과 한국은 우리 옛 조상이 살던 나라여서 그런지 감정상 그냥 국내에서 고향집으로 가는듯한 기분이니 말이다. 그런 어색한 기분을 안고 약간 긴장된 상태로 다리를 건넜다. 

며칠 전의 폭설로 두만강은 원래 모양을 감추고 있다. 

“니 참 운수좋구나!” 

원정 종합검사청사에서 조선 입국수속을 하던 이모부가 흐뭇한 모습으로 한창 수속을 밟는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돌리며 나한테 말했다.

“니 초청장이 오늘 떨어졌다!” 

초청장이 있어야 입국할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는 전혀 그런 얘기가 없었다. 일에 닥쳐서 직접 느껴보고 감수하라는 것, 자기가 하는 말은 일을 하면서 터득하고 뜻을 풀이해서 활용하라는 것-이러한 경우는 후일 나진에 부지런히 다니던 2년 동안 이모부 옆에서 많이 겪었다. 

아침부터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초조히 기다리던 이모부의 전화는 점심 식사 후에도 얼마간 지나서야 걸려왔다. 몇달 전 이모부의 회사에 취직한 후로 오늘에야 진정 회사 선을 보러 가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바로 이날 나진 여객수송회사는 정식으로 영업을 허락받았다. 말하자면 회사 설립의 날이 되는 것이다. 그런 교묘한 일치가 있다는 걸 후에 알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당장 나진의 회사에 가보는 것만큼 급한 일이 없었다. 나진에 선 보러 가는 일로 요즘은 일도 제대로 못하고 그 시각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파트 북쪽 창으로 아래를 보니 우유빛 찦차 옆에 서서 왼손으로 핸드폰을 든 이모부가 오른손으로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집에서 퍼그나 오래 기다렸는지라 출발 준비는 벌써 다된 상태고 겉옷을 걸치고 7층에서 내려와 찦차에까지 가는데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 내고향 훈춘(琿春)에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아파트가 하나도 없다. 그만큼 7층짜리 아파트가 격에 맞는 시골에나 불과했던 자그마한 국경 도시었을 뿐이다. 그만한 시간이면 꽤 빠르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인지라 이모부는 더 긴말 없이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부모 옆에 와서 있은 지는 일년쯤 되었고 타향 살이를 오래 하는 동안 친척들과의 상종이 적은 탓으로 성격이나 일본새 같은 건 이 일년 동안에 더러 알아 두었던 것인데 이모부가 말이 없는 건 바로 만족스러울 때의 표징이라는 것도 입사한 뒤에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출발해서 47키로 달려 두만강 다리도 건넜고 수속을 마치고난 뒤 다시 이모부가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벌써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곤두박히고 있어서 눈길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다. 이모부는 대퇴골무균괴사라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미 여러해 되었다. 훈춘에서 출발해서 4키로 지점의 도로 수금소에까지 요즘 재발된 병으로 하여 운전이 잘 안된다고 여러번 되뇌었었다.

수금소에 도착하기전 내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수금소를 지난 다음 내가 운전할까?” 

중국에 사는 조선족은 연장자와 얘기할 때 더러 반말을 쓴다. 오래된 습관이라고도 할수 있고 사투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모부는 그만 아프다는 말을 더 하지 않았다. 수금소에 도착한 후 왼쪽에 앉은 내가 이모부한테서 돈을 받아 도로세를 물었다. 

이 찦차는 디젤 엔진을 쓰는 일제 도요다였는데 일본에서 조선에 중고로 넘어 왔고 우리 회사에서 사들인 후 《라선ㅡ외ㅡ128》이란 번호를 받아 요즘 사업용으로 두 나라를 오고 가며 사용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그냥 왔기에 핸들은 오른 쪽에 있는 채로이다. 톨 게이트의 창구가 길 가운데에 있기에 왼쪽의 조수석에 앉은 내가 도로세를 낸 것이다. 도로도 시골에 어울리는 2차선이다. 

수금소를 지나 얼마 못가서 이모부는 끝내 내가 운전하는 데 동의했다. 이렇게 되여 나는 기네스 북에 오를 정도만큼은 안되는 자그마한 기록을 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두 나라의 면허를 다 받지 못한 상태였고 운전 수준도 형편 없었으니 이모부가 나한테 자신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입사한 뒤 훈춘에서 몇달 동안 나진에 나갈 중고차들을 더러 수리하면서 운전을 약간 익히기도 했지만 마음 놓고 운전을 맡길 처지는 못되었다. 이모부는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한테 차를 맡기는 것이다. 

“앞에 영철이가 있다. 나는 그 차를 타야겠다.” 

그런 얘기도 이제야 한다. 

며칠전에 차 두대가 훈춘에 왔었다. 오토 미션이 고장난 《라선ㅡ외ㅡ96》은 다 수리되여 오늘 찦차와 같이 나진에 가게 되었는데 영철이는 우리보다 먼저 길을 떠난 것이다. 

영철이는 이모부의 형님집 아들인데 나보다 세살 어리지만 운전 경력이 몇 년 잘 되었고 이미 몇년동안 숙부를 따라 다니고 있는 터이다.

고개에 거의 도착할 무렵 96호를 따라 잡았고 거기서 128호의 스피어 타이어를 부리어 싣는 동안 이모부는 시트가 더 편한 96호로 가면서 

“조심해 몰아라!” 

한마디 던졌고 96호의 왼쪽 조수석에 앉자마자 먼저 떠났다. 도요다 EXIV로 성능이 좋은 승용차이다. 역시 핸들이 오른쪽에 있는 채로이다. 

96호와 128호는 같이 두만강 다리를 건넜고 지금은 96호를 역시 영철이가 몰고 먼저 떠났고 수속하면서 다리 운동을 조금 한 이모부가 128호를 운전하고 내가 조수석에 앉아 약간 늦게 떠났었다. 

“니가 팔령을 어떻게 넘는 가 근심했다.” 

팔령이란 훈춘에서 18키로 떨어진 곳에 있는 대반령(大盤嶺)을 두고 하는 말이다. 훈춘에서 사는 사람들 특히는 두만강 하류 쪽에 사는 조선족 사람들은 대반령이란 원래 이름을 쓰지 않고 팔령이라고 불러왔다. 중국어 발음 반에다가 우리 말 발음 반인데 게다가 앞의 《대》자도 빼버린 만들어낸 말이다. 

대반령 서쪽은 두만강이었고 동쪽은 러시아와 육지로 경계선을 두고 있어서 이 좁은 구간을 통과하려면 국경을 넘지 않는 이상 반드시 대반령을 넘어야 한다. 그리고 나진으로 가는 첫 고개로 산길이 험하기 이를 데 없으며 눈길은 더욱 위험하다.

일제가 중국에 와서 닦아 놓은 이 산길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방금 건넌 두만강 다리도 1935년에 놓은 것이라 한다. 일제가 두 나라를 침략했다는 견증물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그 시기에 사용하기에는 좋은 도로였겠으나 지금은 불편해도 어지간히 불편한 정도는 아니다. 

이 험한 산길에서 해마다 수십 차의 사고가 생기게 되니 뉘라서 걱정이 따르지 않겠는가? 

팔령 남쪽에는 훈춘에서 36키로 거리인 경신(敬信)이라고 부르는 시골 동네가 있다. 내 어머니의 고향으로 사실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 팔령을 넘어 외갓집에 다녔으니 저그만치 33년을 다닌 셈이다. 눈을 감고도 어느 굽이인지 알 것 같다. 그런 연고로 이모부가 나한테 차를 운전하라고 격려했는 지도 모른다. 

듣는 말에 의하면 올해에 훈춘부터 두만강 다리까지 새 도로를 건설하게 된다고 한다. 

국경을 넘어 고개 하나를 지나면 조선의 하여평이라는 동네가 있다. 도착하기 전에 이모부는 다리의 통증으로 더는 운전하지 못하겠다며 다시 나한테 운전을 맡기고 만다. 

다시 자그마한 두 고개를 넘고 다음 고개에 오를 때이다. 

“영철이 차를 내가 몰겠다. 선봉 수금소에 도착하면 영철이가 이 차를 몰게 해야지.” 

이모부가 잠깐 말을 그치더니 

“이 고개가 저술령이라는 고개다.” 

하였다. 

당시 열심히 운전하는 나에게는《저슬령》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1년 후 저술령(猪瑟嶺)고갯길에 도로 표식이 나지기 전까지는 계속 《저슬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신경을 도사려 운전하는 나에게 저술령은 그렇게 험한 고개로 인상이 남지 않았다. 다만 후일 많이 다니면서 중국의 팔령보다 조금 더 험하다고 느껴졌을 뿐이다. 

저술령을 넘어 고개 밑에 있는 선봉 수금소에 도착하기 전에 96호를 따라 잡았고 이모부와 영철이가 차를 바꿔 운전하기 시작한 후 얼마 안되어 수금소도 지났고 이내 선봉(先鋒)군 소재지인 선봉읍에도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아스팔트 길이다. 포장 도로가 끝나고 다시 고개 하나를 넘으니 멀리 밝은 불빛이 명멸하는 곳이 보였다. 저 것이 나진항이겠지 하고 짐작했고 이제 나진에 거의 도착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찰나 말수 적은 영철이가 고개 아래 불빛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저기 제일 가차븐데(가까운 곳에) 보이는 게 우리 집이요.” 

선봉 수금소에서부터 선봉읍과 아스팔트를 소개했고 아스팔트가 끝나는 곳의 공장이 조선에서 가장 큰 석유 정제공장이라고 소개한 뒤에 한 그의 마지막 설명을 들으면서 이제 나는 명실공히 출국했다는 이미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과연 내가 상상하고 있는 회사와 현실 중의 회사는 어느 정도 다를 것인가? 나진에 와 있는 둘째 이모부한테서 많은 얘기를 들어 왔지만 오늘 차를 운전하는 두 사람한테서는 많이 들어보지 못했는데… 

오늘 두 나라 땅 100키로 구간에서 서투른 운전이나마 무면허로 70여키로를 운전해서 기록아닌 기록을 냈다고 들뜬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사이 우리 찦차는 제일 가까운 그 불빛을 지나버렸고 앞의 승용차를 따르지 않고 좌회전을 하는 것이었다. 

“96호는 앞으로 길을 에돌아 가고 우리는 길이 좀 나쁘지만 여기로 들어가도 되오.” 

영철이는 자신만만한 어투로 나에게 말한다.

질러간 길은 울퉁불퉁 형편없는 곡식밭 옆의 자갈돌 많은 길이었다. 도랑물에 깊이 패인 길로 96호같은 승용차는 도저히 지나가지 못하겠지만 이 4륜 구동의 찦차는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정도였다. 오른쪽으로 멀리 이모부가 좌회전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한번 더 좌회전하여 조금 더가니 그 불빛과 점점 가까워졌고 이모부 먼저 회사 구내에 도착했던 것이다. 

“집에 왔소!”

영철이가 차를 세운다. 

한 연장자가 오른쪽 끝방에서 나오더니 차 옆에 와서 영철이와 인사를 나눈다. 

“아하, 이거 영철 선생이 왔구만!” 

“아바이 수고함다!” 

연장자의 말은 약간 꼬부라진 소리였다. 

차에서 내려 불빛을 빌어 둘러 보았다. 1층 건물이 《ㄷ》자 모양으로 지어 졌는데 우리는 《ㄷ》자의 트인 곳으로 곧추 들어 왔고 마당에는 버스가 여러 대 서있다. 영철이가 소개하지 않아 연장자와 인사 수작을 못하고 있는데 이모부가 도착했다. 

“어이쿠, 총경리 선생도 오셨구먼!” 

그 연장자가 너스레 떠는 소리가 들렸다. 

“영감, 이게 뭐이요? 경비 서는 사람이 자주 술을 마시고 어떻게 경비 서오?” 

이모부가 높고도 엄한 목소리로 책망한 뒤를 이어 

“오늘 직맹 회의가 있었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한 고뿌(컵) 했읍지유.” 

하는 영감은 아주 당당하다. 

“저 아바이 이름이 이일부요. 우리 회사 직맹 위원회 위원장이요.” 

영철의 말을 들으면서 뭔가 잘못돼 가고있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친다. 자기 잘못을 알면서도 어쩌면 저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가? 도착 첫 시각부터 이해되지 않는 일을 목격하게 되니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말투는 우리가 훈춘에서 쓰는 사투리와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 영감은 왜 저렇게 당당할 수가 있고 또 《직맹》이란 무엇인가? 궁금증을 풀새도 없이 차에 실었던 짐을 들고 회사 청사에 들어섰다. 

오른쪽 첫 방에서는 여자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고 복도에는 연기와 함께 이상야릇한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아까 원정 종합검사청사에서 이와 비슷한 냄새가 났었는데 회사 청사안의 냄새는 그 냄새보다 더 강했고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든다. 

"정말 망태기야!” 

중국어로 욕설을 퍼붓던 이모부가 뒤따라 들어오면서 왼쪽 끝이 침실이라고 알려주고는 오른쪽 여자들 소리가 나는 방으로 가는듯 했고 나는 희미한 전등 불빛을 빌어 복도 끝의 문 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연기가 보얗게 서린 온돌 방에 술상이 벌어져 있었고 문과 마주 앉아 있던 둘째 이모부가 일어 나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야! 우리 조카 동무가 왔구나! 빨리 올라 오라!” 

모두들 문을 연채 안을 들여다보는 나한테 눈길을 쏟아 주었다. 지금도 그때의 얼굴 중 세명을 기억하고 있다. 안방에 돋보기를 걸고 뭔가 들여다보고 있던 영감이 성큼 일어 서더니 

“동무가 영도겠구만! 오느라 수고 했소!” 

하고 반갑게 인사해 왔다. 

“전에 자주 말하던 그 차아바이다!” 

둘째 이모부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아바이! 안녕하십니까?” 

내가 깊게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이 영감의 얘기는 훈춘에서도 많이 들어온 터였다. 내 얘기도 많이 들은 것 같다. 

밥상에 앉아 둘째 이모부와 함께 앉아 술마시던 사람은 김춘복이라 불렀는데 옆으로 솜이 삐죽이 나온, 때가 반질반질한 겨울 옷을 입고 있었고 회사 차대의 운전수(기사)라고 하였다. 얼굴이 까마잡잡하다. 그저 고개를 끄덕하는 것으로 인사가 오갔다. 

주방에서 방에까지 온 아가씨가 새물새물 웃으면서 인사 순서를 기다리는 모양, 

“이 아재가 정화다.(아재-고모와 이모의 사투리) ” 

회사의 신고원으로 일한다고 들어온 터이다. 인사는 간단히 말 한마디에 눈 인사면 다였다.

“수고하오!” 

“오느라 수고했음다!” 

중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딱딱하고 메마른 인사는 오히려 출국이라 하기보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 시골 마을에 놀러간 것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게다가 회칠도 하지 않은 벽체가 시멘트 도장한 모양 그대로였고 곰팡이가 군데군데 퍼져 있어서 지은 지 얼마 안되는 건물임을 대뜸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하여 기분이 엉망이다. 

그런대로 차에 실었던 물건들을 다 침실에 옮겨놓고 식사도 끝냈다. 운전수는 큰 이모부가 들어서자 바람으로 눈치를 힐끔힐끔 보더니 밥그릇이 올라오는 것도 마다하고 집으로 간다고 나가버렸고 차영감도 식사 전에 나갔는 지라 중국에서 간 네명과 정화까지 다섯 명이 식사를 했던 것 같다. 

불길이 잘 들지않아 보얗게 서렸던 연기가 빠져 나가고 정화가 설거지하는 동안에 마작 놀이가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시간 나는대로 네명이 모이면 마작 놀이가 벌어진다. 이 놀이는 적지도 많지도 않게 꼭 네명이 놀아야 하는 도박의 일종이다. 굳이 도박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나들지 않으면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매일 마작 놀 수 있게 되겠구나?”

둘째 이모부가 나를 보면서 농담 삼아 한마디 한 후로 정화의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한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큰 이모부가 투항한다. 

“다리 아파서 더 못놀겠다.” 

조금 뜸을 두더니 

“정화를 집에 데려다 줘라.” 

했다. 

영철이가 큰 이모부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출입문 쪽에서 금방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 가는 정화 뒤를 따라갔다. 

복도 저쪽 켠에서 벅적대던 여자들의 말소리도 즘즘해졌고 이제는 서서히 피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미닫이로 방 한개를 두개로 갈라 놓았지만 닫지 않으면 방이 한개나 다름없다. 갖고 온 이불을 윗방에 펴고 누워서 오늘 출국을 다시 음미해 보았다. 

참으로 오랫동안 기대해오던 출국이다. 

증조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3형제를 이끌고 온집 식구 다섯 명이 1929년에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의 왕청(汪淸)이란 곳에 정착했었다. 그때 셋째 할아버지는 돌도 안되었다고 한다.

지주의 밭을 소작 지어서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었고 생각다 못해 증조 할아버지는 소금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가 살판치던 그 세월에 팔령과 저술령을 넘나들며 나진으로 소금 가지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해 갑자기 실종된 뒤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서 아들 넷(후에 왕청에서 넷째 할아버지가 태어났다.)을 키우기 힘들어 증조 할머니는 재가하는 수밖에 없었고 기막히게 가난한 생활 속에 또 자식을 오누이로 두명 보았다. 

일제의 손이 만주에까지 뻗쳐 키골이 장대하고 힘장사였던 할아버지는 큰 동생과 함께 징병으로 뽑혀갔다. 그렇게 간 곳이 나진이었고 나진 부두에서 힘겨운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2백 근 되는 콩마대를 네개씩이나 지고 창고에서 배에까지 150미터 되는 곳까지 가는 엄청난 힘장사였다. 지금의 계량 단위로는 몇키로 되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나진 부두에서는 힘장사로 손꼽히는 사람이어서 일본 사람들도 감히 명령투로 말을 건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탈주에 성공하여 다시 부모 형제가 있는 왕청으로 돌아갔으며 후에는 온가족이 훈춘으로 이사왔었다. 

증조부와 조부 두분께서는 다 나진에다 발자취를 남기셨다. 그런 곳으로 오늘 내가 찾아왔다. 이모부의 회사 사원으로 일하러 온 것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증조부나 조부 그리고 나는 전부 다 살기 위해 나진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밤에 도착했기때문에 나진은 나에게 있어서 아직도 면사포를 쓴 그대로이다. 

나진에서의 첫날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간밤 꿈에 군복을 입고 장총을 멘 조부가 나타났었다. 늠름한 그 자태는 사진에서 많이 보아왔던 그모습 그대로였다. 

***

밖에서 들려오는 혼잡한 소리에 눈을 떴다. 날은 훤히 밝았고 둘째 이모부가 아침 식사 준비하는 모습이 주방 저쪽에 보이고 큰 이모부와 영철이는 어디 갔는지 이불을 펴놓은 채 보이지 않는다. 

나진의 겨울 바람에 소대가리 터진다는 말을 귀아프게 들어왔던 나였다. 또 이른 봄 차가운 바람에 여우도 눈물 흘린다고 했다. 아무튼 기후에 무척 신경쓰는 나는 겨울 옷차림으로 나진에 왔었다. 그 옷차림 그대로 밖에 나갔다. 

회사 구내는 북적 끓고 있다. 

아가씨들이 바게쯔를 들고 오락가락하고 시동을 건 버스들은 출발 준비에 바쁘다. 아가씨들이 뜨거운 물을 담은 바게쯔를 들고 몇번씩 차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은 물을 라디에이터에 넣느라고 그러는 거였다. 

몇몇 버스가 나가자 그제야 구내는 조용해졌다. 구내를 빠져 오른편으로 어제 오던 길을 내다보니 나진 앞바다가 한눈에 안겨왔다. 가이드로 한국 관광객들을 인솔하여 중국의 대련에서 바다를 본지 5년 만에 다시 보는 바다다. 쓸쓸하고 한적해 보인다. 대체로 남쪽 방향인 것 같다. 

회사는 어제 넘었던 마지막 고개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세가 높아 나진시 전경이 한눈에 안겨 오고 바다도 항구도 다 굽어 보이는 실로 명당 자리나 다름 없는 곳이다. 

주변에는 회사 오른쪽에 단층으로 줄집이 한 줄밖에 없었는데 10호 정도 주민이 살고 있는듯 했고, 회사 왼쪽에는 어제 찦차가 내려왔던 고개 쪽으로 해서 수십 호가 살고 있는 게 고작이고 가장 가까운 나진 시가지까지는 1키로 정도 되게 떨어져 있는 상 싶었다. 

남아있는 버스 몇대는 고장난 차임에 틀림 없었고 오일 투성이인 헐망한 작업복을 입은 몇 명의 수리공들은 벌써 펑크난 타이어를 분해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육속 출근하는 듯한 사람들의 눈길을 느끼면서 나는 침실에 돌아왔다.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차영감이 들어섰다. 

“니호우!(你好-중국어로 《안녕하십니까?》의 뜻)” 

다들 그렇게 인사했다. 

썩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차영감은 중국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두 나라 사이에 마음대로 국경을 넘어도 상관하지 않던 그 시기를 만나 조선에 나왔었다. 그때 중국에 살던 조선족들이 무던히도 많이 조선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19세기 말엽부터 반도인들이 무수히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이주한 이래 두번째로 되는 대이주라고 해야겠다. 

먼저는 먹고 살기 위해, 두번째는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두번째 때에는 중국에 연속 3년이나 재해가 들어서 먹는 것조차 구하기 몹시 힘들었다고 하니 더 살기 좋은 조선으로 많이 이주했던 것 같다. 그때 이주한 사람들은 다 어느 정도 중국어를 할 줄 알았는데 이런 사람들을 상대할 땐 우리말보다도 중국어를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편할 수 밖에 없다. 

“니호우!” 

차영감도 아주 표준적인 중국어로 우리와 맞 인사를 했다. 

윗방에 큰 이모부와 둘이 앉아서 많은 담화를 하는 것 같더니 한식경이나 지나서야 화제가 나에게로 돌아왔다. 

“야(《이 애》의 사투리)를 인수원으로 쓸가 하꾸마.” 

이모부가 차영감보고 하는 얘기. 

“이제부터 세관 수속하는 걸 배워주고 물자 인수도 할수 있게 할까 하꾸마. 나진에 나왔을 때는 자동차 전기수리도 시키구.” 

"영도 동문 총경리의 훌륭한 조수로 되여야겠군. 그래 조국에 나와 보니 인상이 어떻소?” 

큰 이모부를 총경리라 불렀다. 회사의 사장을 중국에서는 다 그렇게 부른다. 

“생각보단 많이 좋습니다.” 

솔직한 말이다. 

오래동안 나라적으로 어렵고 곤난하게 지낸다고 들어 왔지만 이제까지 보았다는 것이 기껏 회사와 회사 주변밖에 안되니까 말이다. 

"이제 날씨가 좋아지면 회사도 더 멋있게 꾸며 질거고 여기 생활에 많이 습관도 될거요.” 

차영감은 작업을 해야 한다면서 빠른 움직임으로 침실에서 나갔다. 

“저 영감은 가만있지 못하는 성미야. 수리반 사람들과 같이 매일 버스때문에 싱갱이질 하지.” 

아침에도 차영감이 타이어 작업하는 것을 보았다. 부지런하고 정력적이라는것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넌 오늘 전기 수리를 인계받아라. 청진의 영감 하나가 전기 수리하는데 다음 번 네가 나오기 전에 내보내겠다.” 

큰 이모부가 하는 말이었다. 

나는 자동차 공학을 전공했지만 여태껏 자기가 직접 손을 대여 전기 방면을 수리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대학 3학년 때의 여름 방학에 집에 와서 숙모의 알선으로 한달 동안 자동차 전기수리를 조금 배운 적은 있지만 스타트 모터와 발전기 같은 건 이제 어떻게 수리하는 지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지난 몇달 동안 수리한 차들은 이 두가지 가장 기본적인 전기 부품을 통채로 바꾸거나 다른 수리소에 갖고 가서 돈 주고 수리해 왔기때문에 겉은 알지만 속은 어떻게 생겨 먹었는 지 모르고 있다. 

조선에 가져다 팔거나 회사에서 쓸 차들은 훈춘의 한 수리소에다 맡겨 놓고 수리했었는데 고급 승용차 전문이기에 헐망한 중국산 차들에 손을 대려하지 않았다. 내가 공구들을 하나하나 사가지고 직접 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동차의 구조와 기본 원리를 터득하고 있는 것만으로 전기 방면을 수리하는 데는 판부족이다. 

그런대로 이것 저것 물어가면서 버스, 트럭, 찦차 등을 한대 한대 수리해서 조선에 내보냈으므로 어느 정도 수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당장 나한테 다 맡기는 것도 좀 무리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론은 있는 데 실기가 형편 없는 것이다. 

“니 그 수준이면 여기 회사의 어느 조선 사람이든 초과한 거다. 다만 저 영감 앞에서 모른다는 말 절대 하지 말아라.”

이모부는 처음으로 나에게 이런 격려의 말을 해준다. 

후에 나는 이 말의 의미 심장함을 점차 터득했다. 방금 영감 앞에서도 내가 실기가 좀 차하다고 말하는 걸 들었었는데 이모부는 내가 수리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 지에 대해서 무척 걱정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나대로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이불짐과 옷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대학교 때의 교과서들도 갖고 왔었다. 80년대 말에 나온 책들이라 중국에서는 조금 때가 지난 것들이지만 말을 전해들어서 조선의 차를 수리하는 데 많이 필요할 것이라 짐작이 갔던 것이다. 조선에서 쓰는 차들은 자체 생산이 극히 적은 데다가 80년대에 생산된 중국의 차들을 중고로 들여다가 많이 사용하고 있었기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책과 물어보면 된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차아바이가 평생 전기를 다루어 왔으니 그한테 더러 신세져야겠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이모부의 내심이 어떻든 앞으로 나진에 있는 동안 자동차 전기수리를 잘 배워내려고 계획한 첫 걸음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웃음집이 흔들거렸다. 

이모부가 나를 이끌고 전기 수리하는 영감을 찾았다. 

“영감, 야한테 인계하오.” 

이미 얘기가 다 되어있는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중국에서 박식한 분이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그런 쐐기까지 박아뒀구나. 

“수고하십니다. 김영도라 부름다.” 

어제 원정에서 배워둔 나진식의 인사이다. 

“영감은 오늘 야한테 인계만 하고 계속 일을 하오. 영감이 언제 떠나는가는 다시 말할 때가 있을거요.” 

이모부는 말을 마치자마자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연세 많은 분이 저한테 가르쳐 주셔야지요.” 

이런 인사 수작이 오간 후 수리용 공구들을 하나하나 확인하였다. 

너무나도 간단한 조건이었다. 이제 배터리액 비중계도 있어야겠고 라디에이터 용접 공구도 갖추어야 하고 게다가 작은 공구들도 많이 부족한 것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충전기는 그런대로 쓸만했고 어떤 공구들은 자체로 만들어내야 한다. 다음에 올 때 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놓고 일을 시작해야 빨리 하고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영감은 그날 이후 다시 보지 못했다. 

밖에서 둘째 이모부가 부르고 있었다. 

“시내 가자, 수산물 좀 사고 처음 왔으니 시내 구경도 해야지?” 

찦차는 어느새 시동이 걸려 있었다. 

“여름엔 구경할 만한데 아직까진 볼 만한 게 별로 없다. 바다 쪽에나 가보자.” 

128호는 내가 중국에서 손질해 놓았다. 

판 스프링을 규격이 맞는 것으로 겨우 구해서 맞추었고 오버 히트를 하는 것도 수리가 다 되어서 지금은 히터도 잘 작동된다. 디젤 엔진이어서 그런지 올리막 길에서 버스도 끌어 올린다고 한다. 

제일 큰 결함은 도어가 두개밖에 없어서 뒷좌석에 오르내리기 불편하고 눈길에 중고 타이어가 걱정스러운 것인데 중고차로서 그만한 성능이면 두나라 사이를 오가거나 나진에서 타고 다니기에는 일품이다. 길이 험해서 아무리 좋은 차라도 몇달 쓰고 나면 다 망가질 정도라니 이런 차가 제일 격에 맞는 것이다. 

둘째 이모부의 운전 수준은 나랑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속도는 좀 빠르다. 나진 호텔부근까지 갔을 때 하마트면 길을 가로 질러가는 암캐를 깔아 뭉갤 번했다. 길 옆으로 미끄러져 나간 차가 궁둥이를 길 옆으로 처 박은 채 90도 돌아선 상태로 되었다. 

“앞 기어를 넣어야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기어를 넣더니 다시 운전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안주동이다. 우리 집은 안화동이고.” 

조금 더 가더니 건물이 뜸해지고 바다 옆으로 비포장도로가 있는 데서 세웠다. 

바다는 너무도 깨끗하다.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인다. 저쪽 켠은 나진항이 틀림없겠고 바다 한가운데 잠수함이 한쪽 끝이 가라앉고 다른 한쪽은 물 위에 내놓인 채로 세워져 있었는데 선체는 녹이 쓴 채로이다. 

“쏘련에서 폐철(고철)로 사들인거란다.”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한마디였다. 습관적으로 러시아는 계속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저 커다란 섬이 푹 꺼져 들어온 바다를 막아주니 참으로 천연적인 좋은 항구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이다. 

“저기 섬은 초도이고 평균 수심이 17~18미터여서 천연 조건이 좋고 개발 가치가 있는 항구다.” 

무공해의 천연항구! 

둘째 이모부의 안내를 받으며 나진에서 처음 감탄했다. 이 항구가 본격적으로 개발된다면 그 잠재력은 어디에 가 미칠가? 이스탄불? 암스테르담? 홍콩? 참으로 생각만 해도 벅찬 일이다. 저으기 진정 개발된 나진항이 기대되기도 하는 순간이다. 

그날은 언제일가? 

증조부나 조부께서 보았던 부두는 기필코 아닐테고 언제든지 훌륭히 건설될 수 있다는 상상과 확신을 갖게 하는 무궁한 기대감이 가는 항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자!” 

상념에 잠긴 나를 부르며 다시 시동을 거는 둘째 이모부. 그의 얼굴에도 어떤 기대감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안주동의 집집마다에 걸려 있는 연통과 숲같은 TV안테나들을 보면서 어쩌면 80년대 초 훈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회사와 멀지 않은 시장에 도착했다. 조개, 소라, 게 등속을 수태 사가지고 회사에 돌아왔다. 

아침은 둘째 이모부가 지었고 점심과 저녁은 정화가 한다. 남자가 나까지면 네명인데 언제 시걱할 한가한 시간이 없는지라 그녀의 손을 빌어쓰는 거였다. 그때만 해도 정화의 신고원 일은 그렇게 많지 못했다. 

큰 이모부는 금방 영업이 허락된 회사를 갖추기까지 조선으로 다닌 지는 벌써 8년이란 시간이 되었고 아직도 회사 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없이 보낸다. 

원래 나진 여객수송합작회사라는 간판이었는데 합작 상대인 나진 자동차사업소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은 단독으로 나진 여객수송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연말 극히 어려운 조건으로 지금의 회사 건물을 지었고 몇달 간의 끈질기고 정력적인 사업을 통해 끝내 회사의 영업 허락을 쟁취했던 것이다. 

이런 회사를 중국에서는 독자 기업이라고 하고 조선에서는 단독 기업이라고 부른다. 단독 기업이 합작 기업보다 영활성과 주동성이 더 강하다. 사업의 고효율과 투자 유치의 준확성을 담보하기 위해 단독 기업을 어렵게나마 만들어낸 거다. 

둘째 이모부는 합작 때부터 창고장으로 있으면서 자금 관리도 겸해 하는 상태였고 차영감은 합작때 조선측 사장이었기에 계속 사장 동지로 불리웠으며 영철이는 매장의 판매원으로 있었다. 매장에는 주로 자동차 부품이 대부분이다. 

“엄마! 많이도 사왔네!” 

정화가 수산물을 담은 주머니를 보고 놀란 소리를 한다. 

“영도 왔는데 저녁에 먹자!” 

수산물 주머니를 주방 끝쪽에 놓으면서 둘째 이모부가 말한다. 

"창고장 선새임은 언제나 많이 삼다, 예?” 

정화의 얼굴에 잠깐 부러워 하는듯한 기색이 어리는 걸 도둑질해 보면서 나는 밥상을 펴 놓았다. 

중국보다 한시간 이른 조선 시간, 중국 시간으로 열시 반이다. 

“어허! 배 고프다!” 

아침에 대충 먹었더니 벌써 소식이 왔다. 나의 밥 투정을 귀엽다는 듯이 일별하고는

“아직 시간이 안됐음다!” 

정화가 일손을 놀린다. 

***

오후에 또 찦차를 타게 되었다. 이번엔 영철이가 운전했고 차아바이가 명호라는 곳에 일보러 간다고 했다. 

항구가 있는 창평동을 지나 유현동을 거쳐 철조망이 늘여져 있는 해변가를 따라 질주하더니 어느 자그마한 기차역이 있는데서 우회전해 들어간다. 길옆에 있는 이정표를 보고 지나온 곳 이름을 대충 기억했고 계속 더 가면 청진 방향이라는 것도 알았다. 아까 오전보다 길옆에 철판으로 만들어진 표어판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중국의 70년대 중반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을 만들었다. 

차영감도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었지만 그 옷차림은 한번 피뜩 봐도 나진 사람이라는 것이 확연히 알린다. 특히 솜신이 인상적이다. 아주 추하게 생겼는데 중학교 다닐 때까지 신어 봤고 그 후엔 오늘까지 《왕바》라는 중국 이름을 거의 다 잊어버릴 지경으로 보지 못하던 것을 여기 와서 다시 보게된 것이다. 

아바이가 일보는 사이 사품치는 바다를 보면서 영철이와 한담하고 그러는 가운데 궁금증도 많이 풀었다. 

나진 사람들은 굉장히 고집도 세고 자기 잘못을 웬간해서는 바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직맹은 노동당이 아닌, 노동 계급의 조직인데 중국의 공회 조직과 같은 거라고 한다. 기관, 기업소마다 그리고 단독 기업이나 합작 기업이라도 노동당 조직과 직맹이 있으며 청년들에게는 또 사로청(사회주의 로동청년 동맹)이라는 조직이 있다. 

합작 회사때 원래 노동당 세포 비서가 있었는데 지금은 잠시 자리가 비어 있고 사로청도 아직 비서가 없으며 경비 서는 이일부 영감이 직맹 위원장을 하고 있다. 

해변의 철조망은 간첩을 막기 위한 것이고 스팀을 쓰는 건물은 거의 없다. 재래식의 석탄이나 장작을 때는 온돌이 아니면 전기 온돌이다. 

이렇게 두서없이 한담을 하는 중 차영감이 다시 차에 탔고 길 옆에 붉은 깃발을 많이 꽂아둔 이유를 아바이한테 물어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직도 나에겐 나진이 더 없이 궁금하기만 하다. 

조선의 농장은 집단농사가 기본이다. 그중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을 모범 농장원이라고 한다. 해변가에 그네들에게 줄 집을 짓기 위한 공사를 벌렸다. 그 분위기를 만드느라고 깃발을 많이 꽂아둔다. 아직도 얼어있는 땅을 녹이느라고 땅을 조금 판 후 그 구멍에 톱밥을 넣고 불을 놓아 그냥 타게 하는데 길 옆에서 본 연기는 바로 그 집 짓는 공사장에서 나는 거란다. 

정말 깃발에, 연기에, 차가운 바다 바람에 공사장의 열의는 드높기만 하다. 헌데 옷을 적게 입고 일하는 모습이 측은하게만 보인다. 게다가 중국에서 많이 보는 뚱보가 없다. 하나 같이 야위었다. 

저 모습으로 힘든 일을 하는 것은 순 정신력일 수밖에 없다고 나름대로 추측도 해봤다. 출국하기 전에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묻지 말아야 한다고 큰 이모부한테서 단단히 다짐 받았던 연고로 궁금한 것이 있어도 마음 대로 물어보는 게 아니다. 특히 조선사람과 직접 묻는 것은 금물이란다. 이제 서서히 궁금증을 다 풀게 될 때가 올 것이리라. 

저녁은 그야말로 풍성하였다. 수산물만 먹고나니 배가 불러 밥도 못먹을 지경이었다. 진수 성찬이란 말을 이제야 좀 알 것같은 기분이다. 

***

새날이 밝았다. 

간밤 기승을 부리는 바람으로 하여 창턱 안쪽에 많은 눈가루가 쌓였다. 역시 둘째 이모부가 아침을 짓고 있었고 엊저녁 늦게까지 마작을 놀아서 그런지 큰 이모부와 영철이는 아직도 코를 골고있었다. 시계는 중국 시간으로 6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벌써 복도 저쪽 켠에서 청소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약간 흐린 날이다. 

이불 속에서 오늘 할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모부의 성질에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시킬 것 같지 않다. 나 혼자서 뭐든지 일을 찾아해야 했다. 

차가 몇 대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고 수리반에서는 하루에 작업량이 얼마고 작업 장소가 어떻는지, 어떤 작업은 현장에서 할 수 있고 어떤 작업은 할 수 없는지 다 확인해야 한다. 

부품 공급은 문제가 제일 적은 편이었고 골치 아픈 것은 핏트가 없고 자주 정전이 된다. 차체 밑부분 수리는 차 밑에 사람이 들어가서 곧게 허리 펴고 설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고, 용접기와 컴프레셔는 전기가 있는 시간에만 사용이 가능하고 아직 산소 절단기도 없는 상황이다. 

오전에 차영감보고 핏트를 만들어야겠다고 말했다. 영감은 이미 총경리와 의논했다며 선선히 응낙했었다. 지난해에 채 완성되지 못한 건물은 해동된 후에 계속 차영감이 책임지고 마무리한다고 한다. 

오후에는 운전수와 차장들 그리고 사무실 사람들과 인사를 다 나누었고 버스가 다 들어온 후 들어보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했던 돈 붙히기 작업도 해 보았다. 

중국의 종이를 수입하여 찍어낸 돈이 종이 질이 형편없어 성한 거라고는 몇장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에서 테이프를 사다가 가위로 잘라서 동강난 돈들을 붙혀내는 작업이다. 

10원짜리를 제일 많이 붙혀야 한다. 다음엔 50원짜리와 5원짜리, 1원짜리와 100원짜리는 적게 붙히는 것 같았다. 돈을 붙힌 자리가 두터워 지니까 백장씩 묶어 놓으면 가운데가 불룩 솟아 올라와서 정말 돈같지 않게 꼴불견이다. 

나진에서 선봉까지 14키로인데 운임이 30원이고 그 중간의 작은 역 몇개는 다 30원 아래를 받는다고 한다. 버스들은 헐망했고 주로는 장사꾼들이 많이 탔는데 정원이 40명이면 80명 정도까지 태우고 차장은 반드시 차표와 짐표를 잘 팔아야 한다. 

이름이 여객 수송이니 버스 운행이 정상화 되어야 했고 그러자면 모든 절차가 명확하고 분공이 확실해야 한다. 

우선 차상태가 안좋기에 수리가 잘 따라가야 하고 차장들이 표 판 돈을 잘 바치도록 조치를 대야 할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바로 수리를 잘 보장해서 여객수송 수입을 최대한으로 높여주는 거라고 지레 짐작을 하고있는 터였다. 

그 적지 않은 돈을 사무실 사람들까지 모여서 웃고 떠들며 붙히는 작업을 했고 보통 여덟시(중국시간)정도가 되여야 일이 끝났으니 모두들 하루에 14시간 정도 일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니 운전수와 차장은 낮에 대기하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사무실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로 분주히 다니는 것 같지만 역시 진정 일하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으며 다만 수리반에서만 낮 시간동안 점심 식사시간을 내놓고는 일찍 퇴근하는 것이어서 비교적 정상적으로 출퇴근한다고 봐야 하겠다. 아무튼 서비스 업체여서 그런지 아침 출근이 좀 이르고 퇴근이 늦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여객 수송업이라는건 특수한 업종임에랴. 

둘째 이모부는 아바이와 함께 여자들 속에 끼워 돈을 붙히는 작업을 지휘했으며 작업이 끝나면 돈을 들고 침실에 왔고 이튿날에 그 돈을 은행에 입금시키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여객 수입과 부품 판매수입 그리고 중고차 판매 그 정도로 회사가 지탱되어 가고있는 듯 했다. 

이제는 회사의 상황을 조금 알 것 같다. 다음 번은 언제 올 지 모르나 할 일이 많은 것으로 하여 나는 나진에서 매일매일 충실하게 지낼 수 있겠고 또 유쾌한 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 너무나도 일찍 결론을 내려 버렸다. 

사흘 만인 12일날 훈춘으로 돌아 오면서 앞으로의 나진 생활에 기대감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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