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해서 어느덧 월말이 되었다.   

출국이라는 말과 같이 귀국이란 단어도 나진에 다닐 때는 어색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출국을 나간다 혹은 나온다, 귀국은 들어온다  혹은 들어간다라고 다들 말하고 있다. 소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어떤 의식적인 면을 보여주는 말이 되겠지만 그런 표현에 모두 습관이 되고 양국 사람들이 너나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듯 했다. 3년전 나진이 개방되면서 두 나라 사람들이 함께 새로운 말을 수태 만들어낸 모양이다. 

그 동안 중고 버스 한 대를 다 수리해냈다. 회사에서 쓸 거라고 한다. 31일 나가는 날을 맞춰 시트를 장착하지 않은 외에 모든 작업이 다 끝났다. 버스 안에 전날 저녁 전으로 조선에 내갈 타이어도 다 실어 놓았다. 

중고 트럭 한 대도 같이 내가는데 거기에도 타이어를 실었다. 이 트럭은 적재량이 1.5톤인 소형이다. 기사석과 조수석 뒤에 또 한줄의 시트가 있어서 사람과 짐을 같이 실을 수 있어 조선의 사정에 맞는 차종에서도 제일 좋은 차종이다. 반짐차라고 불렀다.   

31일, 이날은 두번 째로 나진에 가는 날이다. 첫 출국 때보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 지고 길에 있던 눈도 다 녹았다.  오전에 출발해서 교두(두만강 다리 동쪽의 중국 측 권하통상구 종합검사청사를 다들 그렇게 불렀다)에 도착했다. 

인원은 다섯명-큰 이모부, 나, 영철이 그외에 장용철(张龍哲)과 기(紀)기사가 동행했다.  

버스는 쑈찌(小紀-기기사)가 맡았다. 하루간 삯일 하는 사람으로 데려 왔었다. 조선으로 다닐 때 필요한 모든 서류를 다 갖고 있었고 우리 일행 중에 유일하게 버스 면허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년 전, 이모부가 대조선 무역을 할 때부터 서로 신세 보던 사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훈춘 M무역공사(회사)의 이름으로 합작 회사를 내오고 회사에 국경을 넘어 다니는 트럭이 없었으므로 개인적으로 차를 사가지고 대조선 운수업을 하는 중국 사람들의 차를 많이 써 왔는데 쑈찌는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보통 경우에 차주인이 직접 운전한다. 오늘 아침 전화를 받자마자 선뜻이 나진까지 버스를 몰아다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조선에서는 중고 트럭을 대량으로 구입한다. 중국에서는 폐차장에 넘겨진 차들 중에서 조선에서 쓸 수 있는 정도의 차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모든 수리를 잘 해내고 겉모양도 그럴듯하게 도장이 잘 되어 있으며 오디오가 장치된 정도의 중고 트럭은 불이 나게 잘 팔렸다.   

일반적으로 중고차들은 그 서류가 다 없어져서 교두 세관을 통과할 때 애먹는 수가 있다.  왜냐 하면 세관에 꼭 필요한 서류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서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행차증(行車证)이었는데 차종, 엔진번호, 엔진모델, 섀시번호, 주인이름 및 차번호 등등이 낱낱이 적혀 있는 차의 신분을 나타내는 서류의 일종이다. 

이것이 없을 경우 폐차증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잖으면 세관에서 도난당한 차를 끌고가는 게 아닌가고 의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번호판은 이미 다른 차 번호판으로 바뀌었고 원래의 행차증은 물론 폐차증도 내놓기 어렵다. 

그때까지만 해도 훈춘에는 정규적인 폐차장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폐차증이라는 건 더욱 있을 수 없는 거였다. 간혹 어떤 중고차만 다행히 원래 행차증을 복사해둔 것이 있을뿐이고 거기에 보폐(報廢)라는 두글자로 된 도장이 찍히고 일자가 적혀 있으면 그것이 곧 폐차증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차의 원 주인들은 이런 합법적인 서류마저 잘 남겨놓지 않기때문에 교두에서 중고차의 서류를 내 보이는 자가 극히 적었고 또한 판매차인 경우 반드시 교두 현장에서 신고해야 했다. 세관 신고비용이 너무 비싼 것도 아니지만 그 돈을 남기기 위해 아무 번호판이나 달아 놓고 그 번호판에 해당한 행차증을 보이고 나서 조선에 차린 회사에서 쓸 차라고 얼버무리고 신고 서류를 만든 다음 통과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아무 사람이나 다 통과시키는 건 아니었다. 행차증에 적혀 있는 엔진과 섀시의 번호가 맞는 지 한번 확인해보는 것이 정상 절차였지만 그 번호가 맞을 리가 없고, 아는 얼굴이면 그 절차를 취소하고 그냥 통과시킨다. 

원래는 신고 서류중 한 부를 교두 세관에 남기고 다른 한 부는 기사에게 주었다가 차가 돌아올 때 세관에서 다시 걷어 들여 차의 귀국을 승인해 주었지만 안면이 있는 사람이 팔 차라고 설명을 하면 신고 서류를 다 남기고 통과시켜 주었고 그렇잖으면 아예 신고 서류를 만들지도 않는다.  

이모부는 중국 회사의 이름으로 대조선 무역을 활발히 할 때 많은 얼굴을 익혀둔 것 같았고 지금은 개인적으로 회사를 내오고 보니 그 안면 장사가 은을 내고 있는 거다. 물론 지금도 M무역회사의 간판을 내 걸었지만 도장 하나만 달랑 남아서 우리들이 출국 수속하는 데 편리를 줄뿐이지 회사가 파산당한거나 마찬가지여서 유명 무실해진 거였다.   

하여튼 그 방법으로 차 두대가 무난히 세관을 통과하였고 타이어는 정상적으로 신고가 되어 있었기에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절차에 문제가 생겼다.  

교두에서 수속하는 중에 마지막 순서가 변방 검사이다. 군대가 하는 검사인데 여기서 다시 한번 사람과 차의 신분을 확인한다. 

사람은 여권이나 통행증(중조 양국에서 다 승인해주는 사람의 신분 증명서ㅡ중국 변방부대에서 여권을 당분간 만들지 못한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발급하는데 국경을 통과할 수 있다.)을 본인이 직접 얼굴과 함께 보이면 되고, 차도 역시 통행증(중조 양국에서 다 승인하는 차의 증명서ㅡ 역시 중국 변방부대에서 발급한다.)이 있어야만 통과시키고 신분 증명이 없는 사람과 통행증이 없는 차는 무조건 통과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유효 기일이 지나도 통과시키지 않았다. 

종합 청사안에서 수속 절차를 밟지 않은 사람과 차는 무조건 통과할 수 없었다. 차 두대 중 반짐차는 통행증을 이미 전에 만들었고 유효 기일이 지나지 않았기에 통과되었지만 버스의 통행증을 만들지 않았기에 그만 다리를 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쑈찌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공중 전화박스에 들낙거리더니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도망치듯 가버리는 바람에 이중으로 문제가 생겼다.   

이모부는 자신 있게 부대의 책임자를 찾았는데 오늘따라 새로온 처장이란 사람이 통과시켜주지 않아서 사정할만한 사람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두는 점심 시간에 휴식 시간이 있었는데 지체되면 오후에 나가야 할 판이다.  결국 영철이를 버스와 함께 남기고 나머지 세 명이 반짐차로 먼저 다리를 건넜다. 이미 얼음이 풀려 있는 두만강을 내려다 보면서 이모부는 오전 중에 용철이와 나 두 사람이 반짐차를 몰고 가야하겠다고 했다.   

원정에서 모든 수속이 끝나 우리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에 이모부는 다시 다리를 건너 중국 쪽으로 향했고 반짐차는 먼저 한번 출국한 적이 있는 내가 운전하기로 했다.  처음 가는 용철이보다 내가 길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기에 자진해서 운전석에 올랐던 것이다. 

이모부는 둘이 다 면허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혹시 선봉 쪽에서 교통 경찰에 단속되면 탄광 판매소장을 찾으라는 말까지 남겨놓았다. 나진에서는 시내 입구 쪽에 회사가 있었으므로 교통 경찰들과 맞띄울가봐 걱정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용철이를 소개한다.   

나보다 다섯 살 위였고 한국의 한 사장이 훈춘에 와서 차린 합작 회사에서 차수리를 했었다. 바로 이모부가 중고차를 맡겨 놓고 몇달 간 내가 다니면서 수리하던 그 수리소였다.  

시골에서 농사 지을 때부터 경운기 디젤 엔진을 수리하는데 독특한 재주를 보였고 후에는 대형 디젤 엔진을 마음대로 수리하는 수준 급에 이르렀다. 며칠 전까지는 수리소에서 주로 제관공으로 일했기에 재간이 더 많아졌다. 차 운전도 가능하다.  

내가 처음 나진에 갔을 때 이모부는 엔진까지 수리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을 더 데려오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전기를 내놓은 다른 일엔 정말 자신이 없었고 또 용철이가 전기를 내놓고 도장 작업까지도 할 수 있었기때문에 일단 두 사람이면 모든 차 수리를 다 할 수 있겠다고 결론이 내려져 이번에 둘이 함께 나진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모부는 원래 다른 사람을 물색 했었는데 용철이가 그 사람보다 조건이 더 훌륭했기때문에 기어이 그 수리소에서 빼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모부의 조카 사위라는 친척 관계도 있었으므로 나는 형님이라고 불러왔고 수리소 안에서 다른 사람보다 그의 신세를 제일 많이 졌던 것이다. 이제는 나진의 이모부 회사에 같이 취직했으니 결국 제집 일을 해 논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아무리 잘 손질해 놓은 차라도 중고차라면 병집이 있기 마련이다. 낮은 고개는 그런대로 2단으로 넘었지만 저술령은 1단으로 겨우 톺고 있다. 오버 히트하는 바람에 끝내는 세우고야 말았다. 물통 하나를 물까지 넣어서 준비해 두었기에 금방 물 보충을 할수 있었지만 차를 쉬울 수밖에 없다.   

봄날치고는 꽤 더운 날이었고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물을 구할 곳은 좀체로 찾아볼 수 없다.
물을 준비해온 것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고 혀를 끌끌 찼고 담배도 두대쯤 태웠다.   

이 반짐차는 엔진 위에 시트가 있었고 앞머리 쪽이 라디에이터 윗쪽을 절반이나 막고 있어서 산열이 잘 되지 않게 만들어진 거였다. 세계적으로 어느 회사든지 이런 차는 봉고차와 마찬가지로 다 이렇게 태생 병신으로 만든다. 수입차들은 오버 히트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반면에 중국산 차들은 이상하게 이런 통병을 어느 차나 거의 다 앓고 있었다.   

한참 후에 길가던 사람 둘이 선봉까지만 태워 달라고 사정해 왔다. 라디에이터 뚜껑을 열어 다시 한번 물량을 확인한 후 뒷자리에 그 두사람을 태우고 출발했다. 선봉 수금소까지는 무사히 갔고 그 두사람이 길안내를 했기 때문에 선봉읍을 잘 통과할 수 있었다.   

석유 정제공장까지 가니 고개 위에 길이 훤히 내다 보였으므로 걱정없이 나진에 도착하는가 싶었으나 고개 위에서 다시 한번 오버 히트해서 고역을 치르고 난뒤 점심 12시경에 나진의 회사에 어렵게나마 도착할 수 있었다.   

따져보니 원정에서 출발해서부터 두시간 반동안 걸렸었으나 날씨가 좋았고 차가 더 큰 고장이 없어서 다행스런 여정이라고 할 수도 있는 거였다. 통상적으로 한시간 반이면 이 여정이 정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기때문이었다. 거리는 54키로였으나 비포장이 대부분이고 오불꼬불한 고개도 다섯 개, 그중 저술령은 오늘 처음 험한 고갠 줄을 알았다.  

점심도 먹고 오후에 용철이와 함께 수리반 아저씨들과 인사도 나눴다.   

나진에서는 직위가 있는 사람을 직무 뒤에 동지를 붙혀 불렀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그냥 이름만 부르거나 이름 뒤에 동무를 붙혀 불렀으며, 장가간 남자들은 아저씨, 아직 시집가지 않은 아가씨들은 처녀라고 불렀다. 

운전수 아저씨들과 차장 처녀들은 저녁에 만나 인사를 나눴고 저녁을 먹은 지도 이슥했지만 뒤에 따라 온다던 중국 버스는 여덟시까지도 도착하지 않았다.   

여덟시가 좀 지나서야 이모부가 집에 들어섰다.   

“니가 가서 차를 봐라. 발동이 꺼졌는데 다시 안 걸려서 영철이가 남아 있고 나는 다른 차를 타고 왔다.”  

찦차 키를 찾아주면서 이모부는 걱정스러웠던지 용철이와 동행하라고 한다. 옆에 있던 차영감도 같이 가겠다면서 벌써 출입문 가까이에까지 따라왔다.  

“아바이는 가지 맙소. 차가 약수터에 있는데 둘이 가서 먼저 무슨 고장인가 진단하고 다시 돌아와서 부속품(부품)을 갖고 가면 될 것 같스꾸마.”  

그렇게 말하는 이모부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 어려있다.   

나의 전기 수리작업실에 가서 공구를 더 가지고 우리는 밤길을 출발했다. 용철이보다 차영감이 가면 전기고장 쪽을 더 잘 판단할 것 같은데 이모부는 기어이 밖에까지 나온 아바이를 도로 모시고 침실에 들어가 버리었다.    

선봉 수금소에서 군대 한 명이 기어이 올라타는 것을 거절하지 못한 채 태우고 약수터까지 갔다. 알고 보니 저술령 북쪽 나진 방향으로 첫 커브가 있기 바로 전에 약수터라는 곳이 있었다. 군대는 굽이를 돌자마자 오른켠이 약수터라면서 내리더니 곱게 군례(軍禮)를 하고나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거기서 불과 100미터정도 떨어진 곳에 버스가 서 있었고 영철이가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동을 거느라고 배터리 전기는 거의 다 나가 있었다. 수동으로 거는 방법도 있는데 차안에서 스타칭을 찾아들고 돌려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장을 잘 판단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얼떠름해서 용철이 고압선을 엔진에 대고 불꽃 확인하는 것을 보고있을뿐이었다. 

후래시를 가져 왔었는데 뒤에 앉았던 군대가 훔쳐갔는 지 보이지 않았다. 찦차를 마주 세워놓고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작업해야 했다. 나중에 디스트리 뷰터의 고장이라고 진단내렸고 영철이보고 나진에 갔다오라고 하였다. 

거리가 30키로였으며 그때 시간이 이미 10시가 넘어 있었다.  두꺼운 옷을 여미고 노독에 지쳐 둘다 버스에 쓰려져 자는둥 마는둥 새벽 한시까지 기다려서야 찦차가 다시 도착했다. 

그동안 디스트리 뷰터 뚜껑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나는 드디어 고장 원인을 찾아 내고야 말았다. 뚜껑 가운데의 탄소봉이 다 달아서 고압 전기를 고압선에 전달하지 못하는 고장이었다. 용철이와 같이 탄소봉 뒤의 용수철을 약간 길게 하고 시동을 걸어보려 시도했었는데 불꽃이 잘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디스트리 뷰터 전체를 교체해야 될상 싶어 탈거해 놓았고 컴프레셔의 벨트도 더 조여 놓고 기다렸던 것이다. 라이터 두개가 다 녹아나서 담배도 피우지 못하면서.  

아바이도 함께 왔다. 이모부가 끝내 영감의 고집을 못 꺾은 거였다. 디스트리 뷰터 롤러가 180도로 돌아버린 상태여서 가져온 새 고압선을 다시 순서대로 꽂아 놓고 차영감이 스타칭을 돌리니 시동이 단번에 걸렸다. 네명 중에 그래도 버스는 영철이가 운전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고 합의했고 내가 찦차를 운전하면서 뒤에서 따르기로 했다. 회사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세시였으니 조선 시간으로는 네시였다.  모두가 피곤하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은 들떠 있었다. 뭐가 어떻든 차는 안전히 도착했고 나는 나진에서의 첫 공부를 그렇게 시작했으며 그렇게 배운 지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 고장은 가솔린 엔진에서 제일 주요한 전기 고장이며 독특한 환경, 독특한 시간에 독특한 방법으로 배워낸 것이기에 앞으로의 수리작업 중에서 제일 중시하는 고장으로 내 머리 속에 깊이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며칠후에 원래의 디스트리 뷰터의 뚜껑과 롤러 그리고 콘덴서를 교체한 후 다시 사용할 수 있었는데 결국 새 디스트리 뷰터는 탈거하여 창고 겸 매장으로 다시 들어갔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버스 고장때문에 하루 사이 저술령을 세번 넘었다. 거기에다 그 후 사흘 동안 매일 네번씩 넘어서 나흘 동안에 저술령을 열다섯번 넘어다닌 조금 고생스런 일도 있다.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한채 4월 1일 아침을 맞았다. 억지로 눈을 비벼 뜨고 밥술도 뜨네마네 하다가 수리소 작업장에 나갔다.    

이모부는 참 정력가다. 눈에 핏발이 서있었지만 용철이에게 수리반의 상황과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해주고 있었다.    

처음 만나서 인사수작을 해보면 그네들이 형편 없는 인사불성이라는 걸 단번에 보아낼 수 있다. 예를 갖추어 깍듯이 인사하는 사람들을 두번째 출국인데도 불구하고 볼 수가 없다. 똑마치 형편 없는 이붓 어미 손에서 자란 사람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의 간단한 인사는 어디까지나 내가 이제껏 살면서 들어왔던 사투리라는 그 하나만으로 위안이 되는 것이 참 이상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왜서 우리는 똑같은 말, 똑같은 사투리를 쓰면서도 국적이 달라져 있어야 하는지, 불과 100키로 거리에서 그네들한테서는 이역이고 나에겐 고향인 훈춘에서나 지금 있는 나진이라는 곳에서나 조국이 뭔지를 모르는 현실이 가슴 아프게 느껴져 올뿐이다.

비참한 생각이 더 깊어지기도 전에 정화와 함께 침실에 불려들어 왔다. 

사무실은 부기실 한 곳에만 전기 스팀이 있고 나머지는 다 난방 장치가 없었으므로 온돌방으로 뜨뜻한 침실이 사무실 겸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거였다.  

 -잠시후 너희 둘은 원정으로 간다. 앞으로 며칠 동안 너희 둘이 원정택시 차장이다. 저녁 때 돌아와서 수익금을 다 바쳐야 한다.  

큰 이모부는 간단히 임무를 주고는 빨리 떠나라고 재촉이 성화 같다. 밖에는 택시가 떠날 준비가 다 되어 있었고 부기실에서 차표를 받고 차에 오르자마자 출발했다. 

나진시 도심에 자그마한 광장이 있었고 광장 한쪽 귀퉁이에 출입국 사무처가 있다. 그 사무실 앞에 택시를 갖다 대었다.   

조선 측에서 볼 때 외국인이 국경을 넘어 조선의 어느 곳에 가든지 입국으로 되고 외국인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국경을 넘는 것을 출국이라 한다. 

출입국 사업처에서는 입국한 지 48시간이상 되는 사람들에게 체류 등록도장을 찍어 주고 출국하는 사람들에게는 출국 일자가 박힌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출국 도장에는 《삭제라는 두 글자가 찍혀 나왔으므로 보통 삭제 도장이라고 불렀다. 

내가 첫 출국을 했을 때도 이 두 도장을 다 박았었다. 국경 쪽에서는 두 나라에서 출, 입국 각각 두개씩 도장을 찍었기때문에 나진에 48시간이상 있을 경우 한번 나진에 갔다 오면 도장을 여섯 개씩 찍어야 한다. 그래서 출입국 사업처는 매일 외국인들로 붐비었으며 중국으로 돌아가는 중국 차가 적을 때는 원정까지 통하는 시외 버스도 없었기때문에 중국에 돌아 가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거였다.  이모부가 이 노선을 엿보고 중형 버스로 택시 업종을 허락받아서 오늘 첫날로 운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버스는 중국 사람을 상대로 했기때문에 처음 며칠을 내가 차장 노릇을 해서 홍보해야 했고(중국어를 해야 했기때문에) 운전수와 차장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 내가 철수하도록 이모부가 조직해놓은 거였다. 사전에 이모부가 상세하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출입국 사업처에 들어가서 태울 손님을 불러내면서 출입문에 붙어 있는 손바닥만한 택시 광고문을 자세히 읽고 나서야 출발 시간과 운행 횟수에 대해 한번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차에서 운전수 이창주가 하루에 두번 운행하며 오전 출발은 9시, 오후출발은 14:30이라고 얘기하는 걸 이미 들었었다. 가격은 인민폐(중국돈)30원 혹은 내화 (조선원ㅡ나진에서는 다 그렇게 부르고 쓴다.)800원이었다. 

조선에서는 모든 광고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손바닥만한 종이장에 써서 사무실 출입문에 붙혀 놓아 홍보하는 정도는 눈감아 주는듯 했다. 

정원이 22명인데 시험 운행을 해 보아야 할 노릇이었다. 버스는 내가 한달 동안이나 손질해서 2월 달에 내보낸 것이었는데 그동안 《라선ㅡ합ㅡ222》라는 번호를 받아 놓고 오늘 운행을 기다려왔던 것이었다.  

광고문의 효력이 적었던 탓인지, 내가 손님을 끄는 재주가 없어서인 지는 모르나 한번에 11명을 태운 것이 승객이 제일 많았던 거고 나머지는 전부 회당 10명 아래였다. 하루 두번 운행에 승객이 10명이 안될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는 휘발유 값도 나오지 안는다.   

그렇게 사흘 동안 차를 타니 자연히 저술령을 열두 번 넘게 된 것이고 한번 왕복에 110키로이니 사흘에 660키로 뛴 셈이었다. 거기다가 훈춘에서 출발하여 약수터의 왕복까지 넣으니 나흘 동안에 저술령을 모두 열다섯 번 넘었고 총 800키로 이상을 달렸기에 나진에서 평양까지의 거리와 맞먹는 셈이었다.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4일 날에 끝내 하루에 오후에만 1회씩 운행하는 것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장도 김영옥으로 결정했다.   

여기에 5일 날에 있은 에피소드 하나 소개한다.   

이날 원정에서 중국 손님은 한명도 싣지 못했다. 약수터까지 왔을 때 창주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원래 이 차는 조선 사람을 싣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나진에서 중국차와 《외》자 달린 차 즉 《라선ㅡ외ㅡxxx》 혹은 《라선ㅡ합ㅡxxx》란 번호를 단 세가지 차에 조선 사람이 타지 못한다고 규정해놓은 것도 있고 해서 아무리 세워 달라고 해도 그냥 지나쳐 버렸었다. 

이 노선에는 함북 북쪽 지방인 온성, 새별이나 은덕에서 나진 쪽으로 장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다녔는데 시외 버스가 없었기때문에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차잡이라고 한다.) 다니더라도 중국차나 《외》자 달린 차를 타지 못한다는 엄격한 규정때문에 국내 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차는 길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태워줘야 한다는 방침이 있었기에 아무리 짐을 많이 실은 차라도 길에서 만난 사람은 반드시 실어야 한다.  그러나 이 노선에서 그런 차를 만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와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라고 해야겠다. 나진의 차 보유량이 형편 없이 적었기때문이다. 그리고 짐을 만재한 차를 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는데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나 조선에서는 최고로 적재함에 70~80명씩 태우고 다녀서 그런 차를 볼 때마다 간담이 다 서늘해지는 것이다. 

정비 불량인 자동차가 대부분인데 주로는 부품이 없어서 억지 공사로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만든 차였고, 이같이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일은 어서 빨리 근절 되었으면 하고 그후 2년 동안 늘 생각해 보았었다. 

또 차사고가 생기면 덮어 놓고 운전수 차실이라고 했으며 운전수의 잘못이 없더라도 죄는 뒤집어 쓰게 되어 있다고 풍문에 들어서 조선 사람을 절대 태우지 않았다. 그네들이 아무리 측은하고 불쌍하게 보이더라도 말이다.   

며칠간 다니면서 초라하고 헐망한 옷과 해진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무거운 배낭을 지고 다니는 걸 많이 보아왔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태우고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이모부한테서 들은 그 규정이 생각나서 그냥 지나쳐 버리도록 창주를 잘 단속해 놓은 터였다.   

“그냥 가기오!”  

내가 명령조로 말했다. 영옥이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기 사람들 중에 우리 회사와 계약을 하고 차를 사려는 사람이 있다. 그 차가 며칠 전에 나왔으니 아마 가지러 가는 모양인데 태워주자.”  

이렇게 되여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차에 올랐다. 그 사람만 태우려고 했는데 무지막지하게 밀고 오르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다 태우고 말았다.   

그 사람이 창주하고 얘기하는 걸 들을라니 확실히 그 차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면서 덕분에 불의의 호강을 만난 거였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 길을 걷던 사람들이 트럭도 아닌 편안한 버스를 탔으니 비록 차가 낡아빠지긴 했지만 호강해도 단단히 호강한 셈이었다.   

차가 저술령을 오르면서 덜 들추는 때를 빌어 나는 시트에 몸을 의지하고 일장 연설을 늘여 놓았다.   

“여러분! 참 답답합니다. 이 차는 《외》자 달린 찹니다. 여러분들은 외국인 차를 타지 못한다는 규정을 알고 있겠지요? 그런데 왜서 이 차를 탑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이 차를 타면 여러 가지로 나쁜 점이 많습니다. 그런 걸 알면서 왜 억지로 탑니까?  

여러분들을 이 차에 태웠다는 차실로 우리 회사가 욕 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내일이나 모레부터 이 차는 운행을 금지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 차는 전문 나진으로 오가는 외국인만 태우는 찹니다.
그런 규정을 어겼으니 우린 이 차를 몰수당할 수도 있습니다.(조선에서는 확실히 규정 위반차를 몰수하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간접적 결과로 나진과 선봉사이를 운행하는 우리 여객 수송회사 버스들이 전부 다 서게 될 지도 모릅니다. 회사에 막대한 손실이 생겨납니다. 

게다가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조선 사람들도 해임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래 우리 회사와 전체 종업원들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중국에서 왔습니다. 외국인과 한 차를 탔다는 그 한가지 만으로도 여러분들은 규정을 어겼을 뿐만아니라 《외》자 달린 차를 타게 되었으니 더 큰 욕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여러분들에 대해서 우리 회사는 책임을 지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차를 탄 후과에 대해서 전적으로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한 말을 귀담아 들은 분들은 지금이라도 좋으니 차에서 내리고 선봉 수금소의 군대들과 마주치기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냥 앉아 있다가 처벌을 달갑게 받겠다는 것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회사는 책임을 하나도 지지 않으며 반드시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다. 내가 나진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은 다 설명하느라 했지만 이미 막무가내였다. 그렇게도 고집 불통이고 배짱이 컸다.   

약수터와 원정사이 청학이란 곳에 보위부 소속 검문소가 하나 있었는데 지나가는 조선 사람들은 전부 증명서를 내 보여야 했고, 증명서가 없으면 일단 구속되고 별의별 상소리를 다 들으면서 형무소 안과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많으면 며칠씩 갇혀 있다가 풀려 나온다고 풍월에 들었었다. 

약수터부터는 검문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선봉 수금소에 드문드문 군대들이 나와서 증명서를 검사할 때가 있다고 들었으며 이 며칠 동안 한두 번 보아왔으나 청학 검문소처럼 엄격하지 않은듯 했다. 

그러니 차에 탄 사람들은 볼짱을 다 본거였다. 돈도 없으니 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결국 영옥이는 1전한푼 받지 못하고 우리는 나진까지 무료 봉사한 셈이 되었다. 조선식대로 말하면 써비 없는 차(무료차)를 탔다, 혹은 차를 공짜로 탔다고 한다. 

참으로 한심한 인간들이 아닌가? 선봉에서 세워 달라는 것도 나진까지 태워서 부리어 놓고서야 뒤탈렸던 밸이 좀 풀리는듯 했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사람들을 불쌍하고 측은하게 생각해 왔던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짧디짧은 며칠동안 저술령에서 인생공부를 너무나도 많이 했다. 내가 이 세상 어느 곳에 간들 이런 공부를 할 수 있으랴?  

공연히 이런 공부를 끝이 없이 했으면 좋겠다는 허무한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허무한 그 자체가 그랬듯이 나는 2년 후에 그 공부가 싫어져 마침내 저술령을 되넘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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