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간이 꽤 오래 지난 후에야 서은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때 차라리 자신이 무예를 모르는 편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고.

갑자기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려다 마지막 순간에 다른 방법을 택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말이 달리면서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자,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면서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등자에서 발을 미처 빼지 못한 것을 그녀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반공중에서 반바퀴 회전한 후 그대로 땅으로 내팽겨쳐졌다. 말은 그런 그녀를 끌고 한참을 더 달리다가 목장주인이 앞을 가로막아서야 비로소 멈춰섰다.

“임서은…서은씨…정신 차려…”

눈앞에서 오감독의 얼굴이 차츰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이생에서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위를 분주히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렴풋한 가운데 윤아의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서은아, 이게 웬 일이야! 니가 어떻게 이렇게 다칠수 있니…”
“윤아야…울지 마…”

그녀는 입속으로 미약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의사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뒤이어 오주명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렸다.

“아니,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말도 안돼…”

그녀는 또 중얼거렸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숨막힐 듯한 통증에 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몇번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샌가 이상한 몰골의 두 사람이 침대머리에 서있는 것이 그녀에게 보였다.

간신히 눈을 떠보니 그 두사람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둘다 검정 정장차림에, 한사람은 소의 얼굴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말의 얼굴이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서은은 문득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세요.”

그리고 그녀는 발견했다. 병실안에서 유독 이 두 사람만이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둘은 서로 마주보더니 피씩 냉소를 지었다.

“우리? 우린 우두마면(牛头马面)의 저승사자지. 고금중외의 서책을 두루 섭렵한 니가 우리 존재를 모르진 않을텐데?”
“저승…사자라면, 설마 절…데리러 오신 거에요?”

그녀는 울컥 설음이 몰려왔다.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던가. 왜 하필, 왜 하필 지금일까. 그동안의 모진 고생을 끝내고 이제야 일이 풀린다고 기뻐했는데 왜 하필 지금 죽어야 하는 걸까.

한낱 평범한 인간으로 사는 한 생로병사는 피할수 없다고 하지만 생에 대한 미련은 그녀로 하여금 눈앞의 이 상황을 초연하게 받아들일수 없게 했다. 그녀는 사람을 부르려 했지만 소리는 커녕 몸도 꼼짝달싹 할수 없었다. 저승사자들은 또 한번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 포기하는 게 좋겠군. 지금은 누구도 니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넌 우리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 놀러 온줄 아느냐.”
“난…가지 않을 거에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들은체도 하지 않고, 둘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팔을 양쪽에서 꼈다.

“이생의 인연은 끝났다. 가자!”

그녀는 그대로 몇걸음 끌려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에는 또 하나의 그녀가 그린듯이 누워있었다. 무슨 죽음이 이리 허망하고 가벼울까.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녀는 사자에게서 벗어날수 없었고, 그렇게 두 사자에게 끌려 잠시후 그들은 빛 한점 없는 깜깜한 곳에 이르렀다.

“여기가…바로 지옥인가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두사람에게 물었다. 두 사자는 픽 하고 웃었다.

“지옥이 니가 가고싶으면 가는데인줄 아느냐. 무릇 사람이 죽으면 최판관한테 먼저 가게 되고 판관이 판결을 내려야만 18층지옥에서 고초를 겪거나 내하교(奈何桥)를 건너 윤회의 과정을 거치게 되지.”
“최판관이 판결을 내려요? 염라대왕이 아니구요?”
“대왕님이 너 같은 무명소졸을 만나줄 것 같으냐? 최판관한테 가면 자연 네 앞일이 결정될 것이다.”

말을 주고받는 사이 두 사자는 그녀를 끌고 한 음산한 전각에 이르렀다. 어두컴컴한 전각안으로 들어가자 판관모양을 한 검은 얼굴의 사내가 붓으로 한창 뭔가를 부지런히 적고 있었다.

“판관님, 인간세상의 임서은을 대령했습니다.”

두 저승사자의 말에 검은 얼굴의 사나이는 머리를 돌려 서은을 머리위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작은 벽실로 들어가면서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잠시 기다리거라. 내 생사부를 가져올테니.”

두 사자는 그녀의 팔을 놓고 몇발자국 물러섰다. 서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각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책상 하나에 벼루와 붓을 제외하고는 전각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최판관이 들어간 벽실쪽에서는 뼈속 깊숙히 음침한 바람이 불어와서 그녀의 몸을 엄습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두팔로 자신의 어깨를 껴안았다. 모든것이 악몽과 같았지만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악몽은 영원히 깨어날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괴이하도다!”

갑자기 벽실쪽에서 울려나오는 최판관의 목소리에 셋은 깜짝 놀랐다. 최판관은 검은 얼굴이 아예 검푸르게 질린채 벽실을 나오면서 또 한번 말했다.

“참으로 괴이하도다!”
“혹시 저희 둘이 사람을 잘못 대령한 것입니까?”

소얼굴의 저승사자가 조심스럽게 묻자 최판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게 아니다.”

그리고 최판관은 한참 서은을 응시하다가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데려나가거라…대왕님께 데려가거라.”
“판관님도 어쩔수 없는 명수(命数)라는 말씀입니까?”
“대왕님께서 자연 분부가 있을 것이니라.”

최판관이 손을 젓자 두 사자는 다시 서은의 팔을 꼈다. 서은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죽는 것도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다니…판관도 모자라 염라대왕까지 개입하게 되는 그녀의 명수란 대체 어떤 것일까.

한참후 그녀를 데리고 두 사자가 도착한 곳은, 지상의 그 어떤 궁궐도 무색할 정도로 웅위롭고 화려한 전각이었다.

전각안으로 들어서자 높은 보좌에 근엄하게 앉아있는 염라대왕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염라대왕이 지상에서 묘사한 것처럼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는 것에 그녀는 이유 모를 위화감마저 들었다. 보통 인간 노인의 모습을 한, 평범하다 못해 자상하게까지 보이는 염라대왕은 그녀가 전각안으로 들어선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히려 이제는 두려움에 앞서 갑갑함을 느낄 정도였다.

“대왕님, 최판관께서 어려운 명수라 하여 대왕님 앞으로 대령했사옵니다.”

저승사자의 말에 염라대왕은 그녀를 바라본후 손으로 수염을 내리쓸었다.

“음…최판관이 모를만하지.”
“…”
“이 아이는 보통 명수가 아닌 특별한 사례니까.”
“저기…”

그녀는 차츰 두려움을 떨쳐냈다. 두려움보다 궁금증을 못참는 그녀의 평소 버릇이 머리를 쳐들었다.

“특별한 사례라는 건 어떤 건가요?”

그녀의 태도가 꽤 당돌했던 모양으로 염라대왕은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서은은 입술을 깨물고 둬걸음 앞으로 나섰다.

“대왕님이라 하셨죠? 염라대왕님…”
“…”
“대왕님, 전…전 아직 죽어선 안돼요. 윤아도 제가 지켜줘야 하고 아버지와의 오해도 못풀었고…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왜 벌써 죽어야 하는 건지…알려주세요.”
“어흠…너희 인간들은 그게 문제야. 태어날땐 왜인지 따지지 않다가 죽을땐 꼭 이유를 알고싶어하지.”

염라대왕의 비아냥에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백살까지 살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큰 걸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저 내 친구와 가족들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겠다는 건데 그것도 욕심인가요?”
“그건 네 명이다. 지금 여기에 와야 하는  것, 그리고 지금 죽어야 하는 것…이 모든 것이 다 네 명이다. 염라대왕이 삼경에 죽으라고 하면 뉘 감히 오경까지 미룬다냐…”

염라대왕은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만 최판관이 판결을 내릴수 없는 것은 나로서도 생각지 못한 일이거늘. 내 소상히 알아보고 다시 너의 명수를 정해주마.”

염라대왕은 머리를 돌려 두 저승사자를 불렀다.

“지금 당장 최판관한테 가서 생사부와 임서은의 모든 자료를 가져오너라.”

두 사자가 사라지자 그녀는 다시 전각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염라대왕에게 물었다.

“그런데…여기 염라전과 대왕님은 왜 인간세상에서 묘사한 모습과 많이 달라보이죠?”
“뭐라?”

염라대왕은 그녀의 질문이 억이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지나 궁금증을 못참겠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인간세상에선 어떤 모습으로 회자되었더냐.”
“염라전은 온통 검은 색일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화려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죠. 대왕님도 사찰이나 절에서 보면 보통 얼굴 푸르고 이를 드러낸 험악한…”
“흠…”

염라대왕이 미간을 구겼다. 그 서슬에 보좌위의 보석들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 보좌뒤로부터 뼈속 깊이 스며드는 음산하고 차거운 바람도 불어나왔다.

“무지한 인간들이 감히 나를…”

그녀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다행이 염라대왕의 노기는 잠시뿐이었다. 금세 분노를 지우고 씻은 듯 얼굴색을 변한 염라대왕이 다시 수염을 내리쓸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짐승의 눈에는 짐승이 보인다는 도리를 너는 모르느냐.”
“아네…”

그녀는 여공불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자신의 명이 염라대왕의 손에 달려있는 이상 그를 자극하는 말은 되도록 삼가해야 했다. 잠시후 서류들이 도착하자 염라대왕은 처음부터 까근히 훑어보다가 문득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흐음…지금 죽을 명수는 아니군.”
“맞죠? 그럼 전 다시 회생할수 있는 건가요?”

그녀는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염라대왕은 대답이 없었고 그녀는 초조한 마음을 누르며 염라대왕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처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그녀가 어릴 때 일이었다. 무술관에 들려 자신의 관상을 본 그 스님의 말을 그녀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녀의 얼굴을 본 스님은 그녀가 스물두살때 한차례 큰 사고를 당할 것이며, 또 그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릴때부터 많은 서책을 읽게 하고 병법과 무예까지 가르쳐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또 그래야만 그녀가 사고를 당하더라도 전화위복으로 아버지의 오랜 숙원까지 풀어줄수 있다고 그 스님이 장담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그녀에게 스님이 말한 그 모든 지식과 무예를 익히게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그런 엄한 교육때문에 거의 한숨도 돌리지 못한 채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데 그런 철저한 준비가 빛을 발하기도전에 이렇게 스러져야 하다니…원통하지 않을수 없었다. 억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니 이대로 죽어서는 절대 안된다. 그녀의 사색을 끊으며 염라대왕이 손을 저었다.

“이 아이를 데려가거라.”

염라대왕이 분부하자, 두 저승사자는 앞장서서 염라전을 나갔다. 아아, 드디어 회생인가. 서은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급히 저승사자를 따라나갔다. 하지만 염라전을 나서기전 머리를 숙여 염라대왕에게 인사를 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대왕님, 안녕히 계셔요. 때가 되면 또 올께요.”

염라대왕은 뒷짐을 쥔채 그녀에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염라대왕의 입가에 알듯말듯한 미소가 보였다.

염라전을 나온 서은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스님의 말대로 역시 자신은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참 저승사자를 따라가던 그녀는 문득 눈앞 희미한 가운데 아득히 떠있는 그 어떤 다리를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리앞에 줄지어 서있었고 얼굴에 자상한 미소를 띄운 한 할머니가 사람들에게 물 한그릇씩 건네주고 있었다. 그 기이한 광경에 그녀는 홀린 듯 서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따라오지 않고 뭐하는 게냐.”

저승사자가 머리를 돌려 재촉했으나 그녀는 다리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혹시…저것이 윤회의 내하교(奈何桥)인가요? 저 물은 맹강탕(孟姜汤—전생의 기억을 잊게 하는 물)이구요?”

그녀의 질문에 두 사자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냥 미적거릴테냐? 너도 저 맹강탕을 먹고싶은 게냐?”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 아이에게도 맹강탕을 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지만…이 아이는 윤회도 아니고 죽었다 깨는것도 아니질 않는가. 깐깐한 맹강파가 시끄럽게 물어볼텐데.”
“그럼 다시 되돌아가 대왕님께 물어보는 게 어떻겠는가.”
“대왕님은 우리가 이런 판단도 내리지 못한다고 화내실텐데…”

“저기요…저승사자님들.”

그녀는 급히 둘의 대화를 중단했다. 내하교의 맹강탕이라면 이생의 모든 기억을 잃게 하는 물이 아닌가. 만일 그런 물을 마시면…윤아도, 아버지도 다 잊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되었다. 그래서는 아니되었다. 세상에 망각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을까.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저는 죽는 게 아니니까 맹강탕을 안마셔도 되는 거에요. 그리고 깨어나게 되면 여기에서의 일은 다 잊게 되는 게 아닌가요? 명색이 저승사자님들인데 그런 능력정도는 갖추고 계시겠죠?”

두 사람은 그래도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시각이 꽤 지체된 것을 보자 다시 앞으로 걸음을 재우쳤다. 그녀는 그 뒤를 바싹 따라 한 낭떠러지에 이르렀다.

“다 왔다.”

두 저승사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통명스레 말을 이었다.

“가거라. 우린 돌아가서 대왕님께 복명해야 하니까.”
“어떻게…가야 하는 거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두 사자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확 밀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화뜰 놀라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미처 정신을 차리진 못했지만 온몸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인간세상으로 돌아온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한 여인의 슬픈 울음소리가 귀전에 들려왔다. 그녀는 그 울음소리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윤아…이 바보 멍충이…아직도 울고있다니. 넌 참 바보야…”

그녀는 서서히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다시 눈을 꼭 감았다. 병실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 왜 병원의 흰색 벽이 금색 휘장으로 변해있을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그것은…

“혹시 촬영세트장인가.”

그녀의 중얼거림에 여인의 울음소리가 잠시 멈췄다. 뒤이어 그 여인은 기쁨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께서 의식이 돌아오신 듯 합니다. 어서 폐하께 아뢰…”
“령아, 어이 그리 경황망조하느냐.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않으셨다.”

여인의 목소리를 누르며 나이가 좀 이상인 듯한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또렷이 귀가에 들렸다.

“아니옵니다. 유모님…금방 공주님께서 분명 말씀도 하시고 눈도 뜨셨사옵니다. 제 눈으로 분명 봤사옵니다.”

서은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너무하다 싶었다. 장난도 유분수지…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지금 사극놀이 하는 거에요?아픈 사람을 여기 눕혀놓고 다들 왜 이러시죠?”
“아아…”

금색 휘장밖에 있던 여인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방 한가득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공주님…부디 옥체 보중하옵소서…”

서은은 눈을 크게 뜨고 눈앞의 사람들을 내려다 보았다. 낯선 궁궐환경과 궁인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그들의 호칭…그녀는 문득 맥이 풀렸다. 염라대왕…그 알듯말듯한 미소가 이런 의미였다니.

그녀는 스르르 침대에 쓰러졌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그녀는 그대로 천정을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하늘이시여…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누가 제게 알려줄수 있나요?”

……

서은은 침상에 누워서 금색 실로 수놓은 비단휘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휘장밖에서 화려한 궁중복색을 한 여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고 있었고 한참후 아까 들려왔던 젊은 궁녀의 목소리가 다시 휘장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공주님, 어의 대령했사오니 진맥을 하게 해주옵소서.”

그녀는 기계적으로 한 팔을 휘장밖으로 내밀었다. 잠시후 진맥을 끝낸 어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공주님은 옥체 무탈하시옵니다.”

폐하…폐하?…진짜 황제인가? 어느 조대일까? 그렇다면…그렇다면 설마 말로만 듣던 그 타임워프…시간여행을 지금 자신이 했단 말인가?

“알았으니 물러가거라. 령이는 휘장을 걷어라.”

귀에 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 어린 궁녀가 휘장을 들어올렸다. 시선을 돌려 휘장앞의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서은은 새삼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반색을 하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감독님…오감독님 맞죠? 저희 지금 사극 촬영하는거 맞죠? 그런데 전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내하교 건늘 때 맹강탕을 마신 것도 아닌데…대체 무슨 영문인지 감독님이 제게 알려주세요…”

눈앞의 오주명은 진한 눈썹을 찌푸린채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차츰 힘이 빠졌다.

“감독님…아니신가요.”
“어의는 뭣들 하느냐. 공주가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웬 망발이냐! 어서 다시 어의를 들이거라.”
“잠깐만요…”

그녀는 급히 손을 내밀어 “오주명”의 황포 소매를 움켜잡았다.

“감독님…제발 좀 이러지 마세요. 제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면 감독님이 지금 절 놀리시는 거죠. 네? 제대로 좀 말씀해주세요. 지금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인가요? 왜 꼭 이래야만 하나요? 그래도 낙마사고로 다친 사람인데 아픈 사람을 바보 취급 하는 것이 재미 있으세요?”
“서안아…”
“서안?”

그녀는 허구픈 미소를 지으며 “오주명”을 보았다.

“감독님…저는 서은이에요…임서은…설마 제 이름까지 잊으신 건 아니죠?”
“폐하…”

령이라고 불리는 궁녀가 “오주명”에게 무릎을 꿇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공주님께선 아직 의식이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닌 듯 하옵니다. 부디 종용히 정양하게 해주옵소서…”
“그래보이는구나. 좋다…령아, 부디 잘 뫼시거라. 공주의 수발에 일호의 차착도 없어야 하되 만일 공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짐은 네게 그 죄를 묻겠다.”

“오주명”은 소매를 떨치며 방을 나섰고, 그녀는 다시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뭐야…사람들이…촬영이 아니고 정말인 것 같네. 아니면 혹시 내 머리가 잘못되었는가? 말에서 떨어져 뇌진탕이나 기억상실증이라도?…”

답답해진 그녀는 차라리 침상 기둥에 머리라도 박고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녀를 놀랍게 주시하는 궁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참후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방안 가득한 궁녀들을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다른 궁녀들은 방에서 물러나갔지만 령이라는 궁녀는 그녀의 침대옆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령이의 얼굴에 머물렀다. 순진해보이는 얼굴에 커다란 두눈을 가진 령이는 아직도 불안한 듯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우선은 이 궁녀에게서 뭔가 정보를 얻어내야 했다.

“이름이…령이라고 했죠?”
“공주님…소인에겐 하대를 하시와요. 황공하옵니다.”

령이는 더욱더 불안한 듯 급히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말투를 바꿨다.

“령이라고…했…느냐.”
“네에. 공주님.”
“내게 좀 상세히 알려주거라…여기는 대체 어디냐.”
“공주님…”

령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일시 기억이 돌아서지 않아서 그런다…아마 아직 완쾌되지 않았나부다.”
“하긴, 달포를 누워계셨으니 오죽하시겠습니까.”

령이는 소매끝으로 눈굽을 찍고나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한번 더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여기는 자금성이와요. 공주님…”
“자금…자금성?”

그녀는 미간을 구긴채 기억을 더듬었다. 자금성이라…이 명칭을 쓴다면 명과 청 둘중에 가능성이 있었지만 령이의 궁녀복색을 보아하니 청나라는 배제해도 될 듯 했다. 하지만 왜 하필 자신은 병원도 아닌 자금성으로 오게 되었을까.

“아까 그분은 누구냐…그 황포를 입은…”

그녀의 말에 령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공주님…설마 폐하마저 기억 못하시옵니까.”
“폐하라면 황제…자금성이면 명의 황제…지금 시호…아니 년호는 무엇이냐. 어느 황제냐는 말이다.”

령이는 그녀의 질문이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공주님…설마 시간까지 기억 못하시옵니까? 지금은 만력 년간이옵니다.”

만력…설마…만력황제! 왜 하필 만력황제일까…그녀는 이 우연의 일치에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령이를 보았다.

“그럼…난 누구냐…”
“공주님은 서안공주입니다. 폐하의 동복 누이동생이십니다. 태후마마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공주님이세요.”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듯 령이가 다소 평온한 어조로 그녀의 신분을 말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놀라서 할말을 잃고 말았다.

서안공주…서안공주는 만력황제의 동복 여동생으로서 역사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공주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거나 평범한 사람에게 시집을 간 경우라고 했다. 현시대에서 그녀가 맡게 된 배역이 바로 이 서안공주였다. 하지만 자신이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서안공주로 환생했는지 그녀는 알수 없었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염라대왕이 제멋대로 정한 것일수도 있었다.

염라대왕…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침상에 앉았다가 다시 벌떡 일어서서 방안을 거닐었다. 명부에서 이렇게 만든 것이 괘씸하다고 하나 미처 생각지 못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만일 이렇게 다른 시간대로 편승하게 되었다면 어떤 방법으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수 있는 걸까. 그리고 만일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아버지는, 윤아는, 그리고 현대에 있는 그녀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한 마음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던 그녀의 손이 갑자기 허공에 멈췄다.

“거울, 아니 면경을 가져오너라.”
“네에.”

령이가 구리로 만든 면경을 가져오자 그녀는 그안을 들여다보았다. 면경속에는 까만 머리를 구름발처럼 틀어올린, 화려한 복색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익숙하지만 또 낯설었다. 익숙한 것은 그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이기 때문이었고, 낯선 것은 거울속 여인의 고혹적인 기품과 담정한 눈빛에 원래의 자신에게는 없었던 깊은 슬픔이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면경속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천천히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안녕, 서안공주.”

……

명 만력 11년, 1583년.

그녀가 온 현대로부터 무려 4백여년전의 명조 만력 년간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식음을 전폐한지 사흘째 되는 날, 령이에게 보고를 받았는지 오감독을 닮은 만력황제가 다시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때까지 그녀는 허탈한 기색으로 금색 휘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당장 어의를 부르거라.”
“어의를 부를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몇일째 쌀알 한톨도 들이지 않아 머리가 지긋지긋했지만 그녀는 애써 웃어보였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나 안쓰러운 모습인지는 감지하지 못한 채.

“서안아, 넌…아직도 고집을 부리고 있느냐.”

만력황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걱정어린 목소리에 그녀는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제가…”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평소에 폐하를 어떻게 불렀는지요…”
“서안아…”

만력황제의 눈에 언뜻 서글픈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네게는 일찍부터 짐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라고 윤허하지 않았더냐? 짐은 그 부름이 친근해서 좋았다.”
“알겠습니다. 오라버니…”

그녀는 시선을 들어 눈앞의 만력황제를 응시했다. 만력 11년이라…아직은 20여살의 젊은 황제였다.

바로 이 황제가 그 유명한 일조편법을 실시하고 임진왜란때 조선을 돕기도 했지만, 재상 장거정이 죽은후 30년동안 태정으로 나라를 방치한 그 무능한 황제란 말인가.

대외로는 조선에 파병을 해서 적극적인 원조를 주었고, 대내로는 과감하게 내정개혁을 실시하여 [만력중흥]이라고 불리울만큼 사회의 발전을 추진한 황제…하지만 친정이후 곧바로 이어진 태정으로 인해 명은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만력황제에 대한 후세사람들의 평가도 찬반이 엇갈린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이 황제는, 자신의 뒤를 이어 세 황제만 거친후 명나라가 영영 역사의 무대위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그녀는 저도 모르게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만력은 그녀의 표정을 다른 의미로 곡해한 것이 분명했다.

“우선은 여러 생각 말고 몸을 추스리거라. 뭘 좀 먹지 않고 되겠느냐?유모에게 일러 좀 만들어오라고 했느니라. 너한텐 기름진 음식이 좋지 않으니 쌀죽만 끓여오라고 시켰느니라.”
“네에. 오라버니.”

그녀의 순순한 대답이 의외였는지 만력은 한숨을 내쉬며 침상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서안아.”
“네.”
“앞으로는 절대 그런 바보짓 하지 말거라.”
“네?”

이번에 그녀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만력의 말에 의문을 표시하고 말았다. 하지만 만력은 그녀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뒤의 말을 이었다.

“그렇게도 여백이 좋다면 내가 조서를 내리마. 하지만…정녕 후회가 없겠느냐?”
“여백?”

그녀는 입속말로 한번 되뇌였다. 여백은 또 누구란 말인가. 만력은 잠시 침묵하더니 금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네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이 일은 앞으로 다시 거론하자꾸나. 령아, 공주를 잘 돌보거라.”

만력이 궁녀들에게 당부하고 자리를 뜨자 그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령이를 불러들였다. 령이는 걱정어린 얼굴을 하고 작은 차반을 들고 들어섰다.

“공주님, 묻는 것은 차후로 미루시고 미음이라도 한술 드시옵소서. 옥안이 창백하시옵니다…”
“령아, 그것보다 먼저 내가 묻는 걸 대답해줘. 여백은 누구냐?”

령이는 무가내한 듯 한숨을 내쉰후 차반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올해 신과 무과과거에 장원급제한 이여백도련님…공주님은 설마 그분도 기억 못하시옵니까?”
“그 사람은 누구냐? 내가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냐? 제발 좀 자세히 알려줘…”
“그분은…요동총병 이성량장군님의 차자이시옵니다.”
“요동총병의 차자…”

그녀는 고개를 기웃하다가 령이의 다음 말에 그만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분은, 공주님께서…연모하시던 분이시옵니다.”
“뭐 내가?”

그녀는 억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가능하다면 당장 지옥에 되돌아가서 염라대왕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하라 호통치고 싶고, 이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려놓으라고 야단치고 싶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쉰후 령이를 침상옆에 끌어다 앉혔다.

“령아, 지금부터 모든 일을 처음부터 얘기해줘…내 출신부터…내가 앞뒤를 완정하게 이을수 있게…부탁하마.”

령이는 머리를 끄덕이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공주님은, 자성태후 이태후마마의 소생이시자 폐하의 동복 여동생이오며, 그동안 이태후마마와 금상폐하의 모든 총애를 한몸에 받으셨사옵니다.”
“금수저였군.”

그녀가 중얼거리자 령이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신경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계속 얘기해.”
“근자에 이르러 폐하께서는 태후마마의 교지를 받들어 공주님께 맞는 훌륭한 부마를 물색하고 계시온데, 공주님은 워낙 성정이 곧고 강렬하시와 일찍부터 부마만은 꼭 몸소 고르셔야 한다고 폐하께 청을 드리신 적 있사옵니다.”
“거 참 당돌한 공주군…”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령이를 재촉했다.

“그래서?”
“이번 과거시험에 급제한 분들이 폐하께 알현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공주님께서 환관의 옷으로 남장을 하시고 저를 끌고 보화전으로 가보신 일은 기억하시옵니까.”
“참 그 공주 담도 크구나.”

그녀는 령이의 의아한 시선에 잠시 경탄을 거두어들였다.

“기억하면 네게 묻겠어? 그 다음엔?”
“보화전에서 장원급제한 분들을 보신 공주님께서는 앞으로 부마는 무과장원 이여백도련님이 아니면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겠다고 폐하께 말씀드렸사옵니다.”
“폐하…오라버니는 어떤 반응이었지?”
“폐하께서는 공주님이 부덕을 지키지 않으신다고 진노하셨고 공주님은 그날부터 침식을 전페하고 드러누우셨습니다. 이에 폐하께서는 공주님이 옥체를 상할까 심려하시어 이여백도련님을 다시 궁으로 불렀사옵니다.”
“이여백이…뭐라고 했느냐.”

그녀는 괜스레 긴장되어서 령이를 주시했다. 령이는 머리를 한번 가로저은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이여백도련님은…자신은 출사도 하지 않은 백신이라 감히 공주님을 바라볼수 있는 신분이 못되신다 하오며 폐하의 성음을 완곡히 거절하셨사옵니다…”
“그렇겠지…그렇지 않으면 공주는 언녕 이여백에게 시집을 갔을 테니까 여기에 있지도 않을테지…”

그녀는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뭔가 생경한 감정이 북받쳐서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이야기에 너무 몰입을 해서일까. 분명 남의 이야기인데 왜 은은히 가슴이 저리는 건지…그녀는 이런 이상야릇한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령이를 보았다.

“그다음은?”
“그다음은…그다음은 폐하께서 다른 부마를 물색하신다고 말씀하셨고…공주님께서 성음에 불복하여 그만 수은을 삼키셨사옵니다…연후엔…하늘이 굽어보시와 수은의 양이 많지 않아서 공주님께서 회생하셨사옵고…그뒤론 공주님도 아시는 일들이어서…”
“참으로 강렬한 성정을 가진 공주구나…”

그녀는 다시 감탄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약하기도 하지. 자신의 마음도 스스로 다잡지 못해서 그리 쉽게 죽음을 선택해?”

령이는 망연한 기색이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허하게 웃었다. 이여백…비록 얼굴도 모르는 인물이지만 꽃다운 나이의 공주로 하여금 수은을 삼키게 하고, 하마터면 자신이 환생한 이 아름다운 육신이 세상에서 사라질뻔 하게 하다니…여기까지 생각하니 이유 모르게 그에게 화가 치밀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란 소중한 거야. 한 사람의 마음이라는건 더욱 더. 지가 뭔데 이렇듯 다른 사람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냐.”

그녀의 노기띈 얼굴을 마주하고 령이는 당췌 영문을 알수 없어 머리만 기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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