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초여름의 아침이슬이 해빛의 반사를 받아 영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수림속에서는 새들의 지저귐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왔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희미한 길이 어렴풋이 뻗어있었고 그 길로 묵묵히 새벽길을 조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말을 타고 앞장을 선 사람이 문득 말고삐를 당기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송구합니다, 형님."

서은은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동안 머리속으로 생각했던 모든 변명을 입속으로 삼켜버린 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여백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넌…우리가 의형제를 맺으면서 했던 맹세가 다 거짓이라고 생각되느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참괴합니다, 형님."

서은은 여전히 고개를 숙였고 두사람사이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후 서은은 언뜻 고개를 들다가 바로 그 순간 그의 눈빛에 스쳐지나가는 웃음기를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풋 웃자 그는 여전히 딱딱한 기색이였지만, 그녀는 그의 입귀가 조금 올라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절 용서해주시는것입니까? 형님…"

그녀는 말위에서 깊숙히 허리를 숙여보였다.

"실은 일부러 저의 신분을 감춘 것이 아니라, 형님 또한 조선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늦었다. 가자."

그는 고개를 돌리면서 담담하게 말했고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그뒤를 따라나섰다.

말고삐를 조여 길을 재촉하면서 그녀는 어제 할머니와의 대화를 머리속에 떠올렸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든 왜 여기로 왔든 중요하진 않다. 중요한건 네가 여백 그 아이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백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할머니…"
"너의 여아 신분을 감춘 건 단지 일을 도모하는데 편의를 위해서냐,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냐. 그 영감탱이가 설마 너더러 남장까지 하라고 하더냐."
"아닙니다. 그분은 다만…송구하오나 천기를 누설하면 그 어떤 화가 닥칠지 몰라 함구하는 점 용서해주옵소서."

서은의 말에 할머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와 세번의 인연이 있다. 한번은 내가 너를 본  것이요, 한번은 네가 나를 본 것이니라. 그리고 마지막 한번이 바로 지금인데, 이번이 지나면 너도 나에게 물어볼수 없고 나도 너에게 말해줄 기회가 없느니라."
"…"
"명부의 일은 내가 아는 일이니 이는 네가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본 것이다. 해서 네가 뭘 걱정하고 두려워하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말해도 되느니라."

눈앞의 할머니는 대체 얼마만큼 알고있는 걸까. 그리고 자신과는 어떤 인연을 가지고 있는 걸까. 할머니의 선연한 시선을 마주하고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두려운 것은…천기를 누설하고 역사의 순리를 거슬러서 감당해야 하는 후과가, 제가 사는 시간대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돌아가고 싶으냐…"

할머니의 질문과 염라대왕의 질문이 중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서은은 그때 염라대왕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선뜻 당연하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머리속이 삼검불처럼 뒤엉킨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시선을 내려버렸다. 할머니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꼭 돌아가야 한다면 네 소신대로 하거라. 네 소신이 천기를 누설하지 않고 네게 소중한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으며, 이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도 네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켜낼수 있다면 말이다."
"저의 소신이…틀렸다는 말씀이십니까."
"틀리지 않았다. 다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느니. 세상을 다 가지려고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느냐."
"세상을 다 가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게 향한 그분의 마음을 가지려는 것뿐입니다!"

그녀가 울컥하여 내뱉는 말에, 할머니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돌아가는 방법이 그 아이로구나."
"…"
"이리 쉽게 누설되는 천기인데, 너 혼자 여태 전전긍긍하고 있구나."

할머니의 담담한 말에, 그동안 애써 지탱하고 있었던 그녀의 방어선이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저는…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여기에 온뒤로 방향을 잡지 못하겠고 무슨 일을 어디서부터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는 묵묵히 그녀를 보았다. 그 초연한 시선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저는 애초부터 여기 사람이 아닙니다."
"…"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는…지금으로부터 몇백년후의 사람입니다. 지금 제가 알고있는 일이라면…제가 우연한 사고를 당해 명부에 갔다가 생사부에 뭔가 사연이 있어 지금 이 시공간에 편승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염라대왕님이 돌아갈 방법을 제시하셔서 하는수 없이 그 방법대로 요동에 온 것이구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이 여백의 마음이구나."

그녀는 눈물을 거두고 머리를 끄덕였다.

"염라대왕은 저에게…형님의 온전한 마음을 가져야 돌아갈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만일 제게 마음을 주신다면…제가 간 후 그 사람은 어찌되는 것입니까…어찌 차마 그 사람을 혼자 이곳에 버려두겠습니까…여기에 오는 동안 저는 줄곧 이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명부에서는 왜 하필 저한테 이런 버거운 사명을 주시는 겁니까. 정녕 염라대왕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은 저의 전생이 저지른 일이여서 후생의 제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까…전란이 빈번한 이곳 요동까지 와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단순히 그 사람의 마음을 가지는 일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운명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까…왜 누구도 제게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까…!"

그녀는 자신의 두서없는 말을 할머니가 이해할수 있을지 걱정되어 잠시 말을 중단했다. 할머니는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알려주겠다."
"네?"

그녀는 놀란 눈길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다면 저는 그대로 믿고 따르겠습니다."
"네가 옳다고 판단되는 일을 하거라. 그리고 그 어떤 화가 떨어져도 받아들이거라."

그녀는 잠깐 멍해졌다. 그녀는 할머니의 말을 천천히 되새기다가 그만 허구프게 웃고말았다.

"할머니…이건…그냥 제 멋대로 하라는 거네요."

할머니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뭔가 기억을 더듬는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한때 나 역시 너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 내 예지능력으로 이 세상의 그른 것들을 바꿔보자는 생각들을 했었지. 그리고 그 모든 능력을 한순간에 잃었을 때 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것 역시 이 시간과 공간에서 내 운명이며 내 사명이 아니겠느냐."

그녀는 할머니의 말을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고 망연한 기색을 지었다.

"전…그래도 잘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원하는대로 하고 세상을 원망말라…그렇게 들리긴 합니다만."
"지금은 몰라도 되느니라. 그냥 내가 한 이 말만 기억하거라. 너와 나의 인연이 다하지 않았다면, 혹여 네가 위기에 몰려 어려움이 있거든 내게 향 한가치만 태워다오."

할머니는 말을 끝맺은 후 잠깐 마당쪽을 바라보았다.

"여백에겐 내가 얘기를 하겠다. 지금의 너는 여백에게 있어서, 단순한 예지능력을 갖고있는 내 조선인 지인의 후손일뿐이다. 내 말뜻을 알겠느냐."
"네…"
"그 아이와의 일은…앞으로 네가 잘 알아서 대처해야 하느니라. 영감탱이도 참…하필이면 그 아이더냐."
"…"
"깊은 상처가 있는 아이다. 혹시 앞으로 너에 대해 불신이 생겨도 섭섭해하지 말거라. 그 아이로선 최선이다."
"명심하겠습니다…할머니."
"이젠 나도 시름놓을 수 있게 되었구나."

할머니의 말이 어쩐지 처연하게 들려와서 서은은 정중히 머리를 숙여보였다.

"다음에 내려올때도 찾아뵙고 인사 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없다. 너와 나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다. 이 세상과의 인연도…이젠 끝이려니."

서은은 머리를 들었다. 그토록 예지로 빛나던 할머니의 눈빛이, 이 세상 그 어떤 아픔도 무색할만큼 진한 슬픔으로 차오르고 있어서 그녀는 곤혹스러웠다.

……

길을 재촉하는 가운데 어제 할머니의 슬픈 기색을 떠올리자 서은은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린후 등자를 굴러 이여백의 뒤를 바싹 따랐다. 이여백이 그녀에게 머리를 돌렸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네. 형님, 말씀하십시오."
"오늘저녁은 어디에 머물수 있겠는지 미리 알수 있겠는가."
"형님도 참…할머니께선 평소에 그렇게 모든 일정을 세세히 말씀하시더이까?"

그녀가 피씩 웃었지만 그는 진지한 표정이였다.

"너의 예지력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구나. 난 그런 능력은 이 세상에 할머니 한분으로 더 없을줄 알았으니."
"그냥 잠깐씩 떠오르는 생각이 현실로 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자고로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일이지 않습니까."
"큰 일만 알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겠죠. 하지만 또 세상 일은 항상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예지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상했던 것과 빗나갈때도 많습니다. 예지능력이란 결국 앞일에 대한 분석능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도 하구나."

둘사이에는 오래간만에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갔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지만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길을 조이는데 문득 서편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비방울이 후두둑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이여백은 말을 멈추고 그녀에게 머리를 돌렸다.

"길을 잘못 들어섰나보다. 숲의 끝이 보이지 않는군."
"그럼 어떡합니까."
"우선은 머물 곳을 찾아야겠다."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비 그을 곳을 찾지 못하다가 날이 완전히 저물어서야 겨우 수림속의 큰 나무밑에 말을 멈췄다. 초여름 가랑비가 촘촘히 내리고있었고 서은은 젖은 옷때문에 몸이 선뜩해남을 느꼈다. 그녀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눈꺼풀이 천근무게나 되는 듯 해서 그만 큰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요동으로 온 후 지금까지 한번도 탕개를 늦추지 못했더니 드디여 자신의 몸에 적신호가 온 것 같았다.

"괜찮으냐."

이여백의 걱정어린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온몸이 떨리고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지만 그녀는 괜찮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그녀가 기댄 나무곁으로 다가왔다. 나무밑은 한사람만 비를 피할수 있는 정도의 작은 공간이어서 어느새 그의 옷은 반나마 젖어있었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 보았다.

"형님도 여기 앉으십시오."
"둘 다 젖을 필요는 없다.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그래도…"

그녀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가 팔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갖다댔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미간을 구기고 그녀를 내려다 보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음률을 아느냐."
"네?"

그 무슨 뜬금없는 질문인가 싶어 그를 보았더니 그가 품속에서 먼가를 끄집어냈다. 희미한 달빛을 빌어 푸른 빛을 띈 옥적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옥적은 그의 손안에서 가볍게 움직였고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대자 곧 한가닥 청아한 소리가 수림속에서 울려퍼졌다.

밤장막속의 조용한 비소리를 곁들인 그의 옥적소리는 화평하고 온화했고, 그 소리는 어쩌면 큰 강에 봄물결이 흐르는 듯, 꽃나무에 봄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를 연상시켰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서은은 차츰 정신이 맑아오는 감을 느꼈다. 왠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감이 들었고 기분도 상쾌해진 느낌이였다. 아침햇살이 얼굴에 부드럽게 내리쬐이는 바람에 그녀는 그만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여백이 건너편 나무밑에 앉아서 좌선하고 있었고 그녀는 발자국소리를 죽이며 몇걸음 다가섰다.

"깨어났는가."

그가 입을 열자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성큼 물러섰다.

"형님, 주무시는줄 알았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몸은 어떠냐."
"어제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니, 완전히 좋아졌습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괜찮아 보이는구나. 음률에 약간의 기를 넣었다. 치유는 어렵겠지만 어느정도 몸을 추스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옥적이…그런 용도에도 씌이는군요."

그녀가 감탄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이였다.

"피리나 거문고같은 여러가지 악기가 무림의 고수들에게는 악기일뿐아니라 때로는 원기를 회복하는 도구로, 때로는 살상무기가 되어 사람을 구하거나 해치는데 씌이지. 무예를 아는 네가 그 점도 알 것이라 여겼거늘."
"아함…저도 그런 얘길…들었습니다."

그녀는 민망함을 감추며 급히 맞장구를 쳤다. 다행이 이여백은 더이상 의심하지 않고 않고 몸을 일으켰다.

"해가 뜨니 방위를 알겠다. 길을 다그칠수 있겠는가."
"네, 괜찮습니다."

둘은 말에 올라 다시 길을 재촉했다. 비에 씻긴 수림은 맑은 풀향기와 더불어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속에서 길을 재우치던 이여백은 문득 미간을 구겼다.

"수상한데."
"네?"

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수상하다니요? 뭐가요?"
"숲속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수상하지 않은가."

그의 말에 그녀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른 아침이여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침이니 더 수상하다. 원래는 새소리로 분주할텐데."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다가 문득 뭔가 발견한 듯 빠르게 말했다.

"뒤로 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수림속에서 한줄기 흰 빛이 번뜩했다. 뒤이어 그 흰빛은 서은이 탔던 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고 그 바람에 그녀는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옆으로 몸을 굴려 급히 일어서다가 숲속에서 나타난 한무리 군사들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이여백은 금세 싸늘한 표정이 되어 군사들쪽을 노려보았고 서은은 그 군사들속에 서있는, 어딘가 익숙한 한 사람의 목소리를 가려듣고 눈을 크게 떴다.

"절대 놓치지 말거라!"

……

"누르하치…"

서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군사들이 순식간에 그들을 포위했고 누르하치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누르하치의 눈빛에는 이름못할 차거운 빛이 내비쳤고 그 눈빛에 서은은 저도 모르게 오싹 몸을 떨었다. 이여백은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려선 후 멍해 서있는 그녀를 자신의 몸뒤로 끌어당겼다.

"괜찮으냐."

그가 반쯤 고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은은 눈을 크게 뜨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괜찮을수 없었다. 불과 두달전까지만 해도 총병부의 심복으로 있던 누르하치였다. 영채를 벗어날 때 자신과 했던 약속을 누르하치는 벌써 잊었단 말인가. 그녀는 배신감에 몸을 떨면서 이여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형님…"

이여백은 그녀를 향해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의 의연한 행동에 그녀는 입을 다물어버렸고, 그는 누르하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인가."
"도련님, 그동안 귀체 무강하십니까."

누르하치는 피씩 웃으며 머리를 숙여보였다. 때를 같이하여 군사들은 일제히 병장기들을 뽑아들었다. 이여백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 여진인은 문안을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
"송구합니다."

누르하치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이여백은 작게 웃었다.

"아무리 서로 갈 길이 다르다 한들, 건주여진의 새 추장이 은혜도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사람일 줄은."

누르하치는 머리를 쳐들었다. 그의 차거운 눈빛이 차츰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은혜도 잊지 않았고 원수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여백은 여전히 담담하게 웃었다.

"이렇게 길을 막으면 은혜를 갚는 것 같진 않군."

누르하치도 쓴웃음을 지었다.

"도련님께는 불손한 일이오나, 총병님의 허락을 받을 유일한 방법이어서 소인도 어쩔수는 없습니다."
"그건 무슨 말인지."
"두달전만 해도 소인은 불과 총병부의 일개 무명소졸였습니다. 하지만 총병님은 제 아비가 죽은 일을 덮으려고 저를 건주여진 추장, 즉 총병님과 감히 어깨를 겨룰수 있는 정2품 관직으로 추대를 해주셨습니다."

이여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누르하치는 분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제 자리는 제 아비의 목숨, 그리고 저희 아이신죠우르의 명예와 바꿔온 자리입니다. 허나…!"
"…"
"막상 제 원수인 니칸외란은, 총병님의 추천으로 도륜성 성주로부터 만주국주(满洲国主)로까지 승진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이여백은 눈을 들어 누르하치를 주시했다. 누르하치는 얼굴을 굳힌채 이여백에게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하오니 부디 제가 도륜성을 치게 허락해주십시오."
"네가 도륜성을 치려면 너는 아버님의 허락을, 아버님께서는 금상폐하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또 이 모든 일에는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동총병의 자리이고 아버님의 입장이시다."
"알고 있습니다."

누르하치는 눈을 들어 이여백과 서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두분이 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두분을 이길로 잠깐 건주여진으로 모시겠으니 예의를 갖춰 모시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누르하치, 너는 이젠 신의를 저버리는 짓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여백은 누르하치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나를 억류해서 아버님의 약점이 될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총병님도 그리 생각하시는지 어디 한번 물어봐야겠지요."

누르하치의 눈에서 번뜩이는 살기 비슷한 눈빛에 서은은 가슴이 섬찍해났다. 만일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녀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수도 있었다. 그녀가 단단히 검자루를 틀어쥐기 바쁘게 누르하치의 명이 떨어졌다.

"잡아라."

누르하치의 손이 움직이자 이여백의 손도 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누구도 손쓸 사이 없이 어느새 하얀 빛을 내뿜는 검이 누르하치의 목을 겨누었다. 번개같았다. 아니, 어쩌면 번개보다 더 빠른 빛의 속도로 이 모든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된 듯 싶었다. 누르하치가 손을 든 채 미처 내리지 못한 찰나였다.

"도…도련님."

이여백은 누르하치의 목에 검을 들이댄 채 목소리를 깔았다.

"군사를 물리거라."
"…"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난 네 목부터 베겠다."
"…"
"그거 아느냐? 군사나 용병은 네가 능할지 몰라도 검은 내가 더 빠를 것이니."

이여백이 차분하게 말하자 누르하치는 입을 열었다.

"뭣들 하느냐. 다들 뒤로 물러서거라."

서은은 이여백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편의 수가 많아 상황이 불리하긴 하지만 어쩐지 그가 서두른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형님…"
"…"
"제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열은 몰라도 대여섯은 상대할수 있으니까요."

서은이 말하는 사이 누르하치가 서은의 뒤를 향해 눈짓을 했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 뒤에 서있던 군사가 그녀에게 덮쳐들었고 그녀가 미처 손쓸 사이 없이 이여백의 검날이 번뜩했다. 흰 빛이 허공을 가르며 검이 이르는 곳에 군사의 붉은 피가 솟구쳤다. 그 틈을 타 누르하치는 이여백의 검날아래에서 벗어난 후 칼을 빼어들었다.

누르하치가 칼을 든 손을 한번 흔들자 숲속에서 또 한무리의 군사가 벌떼처럼 뛰쳐나왔다. 워낙 중과부적이라 겹겹한 포위망을 뚫을 길이 없어보였지만 이여백의 표정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날카로운 검으로 그녀의 주위를 빈틈없이 감싸던 그가 문득 크게 반원형을 그리며 검기(剑气)로 군사들을 물리쳤다. 그리고는 막 검을 뽑아 싸움에 임하려는 그녀의 팔을 잡고 말이 서있는 방향으로 크게 몸을 솟구쳤다.

말잔등에 몸을 고정시킨 서은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전에 이여백은 접선으로 말의 엉뎅이를 힘껏 내리찍었다. 말은 머리를 들고 크게 울부짖더니 급기야 네굽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충격과 고통에 놀란 말은 달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형님!"

그녀는 머리를 돌려 큰소리로 불렀다. 이여백은 겹겹히 포위를 당해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고, 혼전중에서 누르하치의 목소리가 숲속을 쩌렁쩌렁 가르고 있었다.

"절대 놓치지 말거라!"

말은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고 그녀의 얼굴에는 뭔가 선득한 것이 흘렀다. 바보같은 사람…그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그녀는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가슴이 먹먹하고 정신이 혼미해진 그녀는 달리는 말에 몸을 맡기고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음률에 약간의 기를 넣었다…"

그가 그랬었다. 그녀때문이었다. 그녀가 어제 앓지만 않았어도 그가 원기를 소모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방금전 그녀를 보내기 위한 검기…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이미 그처럼 많은 기력을 소모했다면 저 많은 군사들의 포위를 뚫을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더 먹먹해졌다.

그녀는 울컥 눈물을 쏟았다. 이여백의 곧은 성정으로는 죽을지언정 누르하치의 인질이 되어 이성량의 협박용으로 쓰이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자 그녀는 팔에서 힘이 빠지는 감을 느끼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의식을 놓기전 그녀는 입속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형님…제발…무사하셔야 해요…제발…무사하셔야 합니다…"

……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이 서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서은은 화뜰 놀라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는 벌떡 몸을 일으키자 급히 뒤로 움츠렸다. 희미한 와중에 눈앞의 여인의 모습이 차츰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서은은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었다.

"조윤아!"
"네?"

서은은 머리를 흔들었다. 눈앞의 여인은 나치야였다. 원래도 청초한 그녀는 두달전보다 퍽 수척한 모습이었다. 서은은 잠깐 눈길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그마한 초막안에 나치야와 자신 둘뿐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치야…당신이 어떻게…"
"물가에 쓰러져있어서 뫼시고 들어왔습니다. 누르하치와 같이 왔다가 아까 자리를 비우면서 이 초막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여기서 대기하고있는 중입니다."
"누르하치!"

서은은 그만 정신이 들어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잠깐 현기증이 일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나치야는 걱정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원기가 많이 상하신 듯 하옵니다. 자리에 누워 조섭하심이…"
"죽진 않습니다."

서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 나치야가 누르하치와 일행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참을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나치야를 바라보면서 딱딱하게 말했다.

"만일 우리사이에 아직 의리라는 게 남아있다면, 이제 누르하치를 보면 저를 만났다는 것을 함구해주십시오.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누르하치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임도련님은 저희 은인이시온데…"
"은인…"

서은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오늘 당신도 나를 한번 구해줬으니 이걸로 퉁칩시다. 이제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부디 몸 조심하십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저를 봤다는 걸 꼭 함구해주십시오."

그녀의 연이은 당부에 나치야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임도련님도 부디 몸 보중하시옵소서. 말은 초막밖에 있습니다. 남자들의 세상을 우리 여자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제가 비록 미천하나 함부로 입을 놀리는 일이 없을 것이니 시름 놓으십시오."
"우리…"

서은은 잠시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종종걸음으로 초막밖으로 향했다. 그러던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나치야에게 머리를 돌렸다.

"나치야…누르하치가…도륜성 성주 일로 당신에게 화풀이 하진 않습니까. 정녕 누르하치를 따른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무슨…말씀이시온지…"

나치야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은을 바라보았다. 서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 얼굴이…많이 수척해져서 하는 말입니다. 혹시 그날…제가 잘못한 것입니까.어쩌면 당신을 그냥 형님의 곁에 남아있게 하는 것이…당신에겐 더 좋은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서은의 목소리는 회의에 꽉 차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자기 자신이 이 시간대에 온 것 자체부터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르하치도, 이여백도, 그리고 눈앞의 나치야까지도 자기 때문에 운명이 뒤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머리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해나가야 할 일들에도 번뇌와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할머니가 말씀해주셨던, 자신이 옳다고 판단되는 일들의 기준은 무엇일까. 만일 그 기준에 어긋나게 된다면 자신도, 주위 사람들도 지금처럼 다치고 화를 입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화를 입는 것까진 받아들인다 쳐도, 주위 사람들이 자신때문에 상처를 입는 것만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참담한 결과였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치야는 조용히 입을 열어 그녀의 사색을 중단시켰다.

"임도련님께서 도우시지 않으셨어도, 저는 지상이든 지옥이든 누르하치를 따랐을 것입니다. 여자들이란 다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겉으론 연약해도 속은 그 어떤 단단한 것보다도 굳건하여 한번 먹은 마음 쉬이 변치 않습니다."

나치야는 말을 마치자 그녀쪽을 향해 살포시 눈웃음을 지었다.

"누구처럼 남장을 하고 연모하는 이를 가까이 하지 못할지라도, 부족간의 대립때문에 연모의 마음을 접는다는 것 역시 천고에 남을 유감이 아니겠습니까. 저더러 운명과 타협하지 말라면서요…"

서은은 눈을 크게 떴다가 문득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어 다시 머리를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아까는 주의하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옷 앞섶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옷섶을 여민 후 고개를 들어 나치야의 태연한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비밀을 까밝히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래도 뭔가 설명해야 할것 같아서 갑자르고 있을 때었다.

"아까 숨이 미약하기에 구하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나치야가 먼저 말했고 서은은 얼굴만 붉혀버렸다. 나치야는 그런 그녀에게 더이상 아무 말 말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치야를 작별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던 서은은 날이 어두워져서야 겨우 포위당했던 곳을 찾을수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텅 빈 수림속 공터에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여기저기 어지러이 쓰러져있는 초목들이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

숲속 깊은 곳에서 으스스한 바람이 불어왔고, 어디선가 이름모를 벌레들이 구슬피 울었다. 삭막한 숲속의 밤이었다. 마치 낮의 혈전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수림은 흉악한 발톱을 감추고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형님…"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피에 물든 어지러운 풀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고, 그녀는 초점잃은 눈을 들어 멀리 수림 한끝을 주시했다.

"형님…어디 가셨나요…설마 누르하치에게 끌려갔나요…아니면 어디로 피신하셨나요…어떻게 되었든…제발…제발 건강하게만 살아주세요. 살아…있어야 해요."

그녀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숲속을 가로질러 대로로 나온 후 지친 말을 달려 광녕 총병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튿날 정오 시간이였다. 거의 탈진한 그녀의 모습에 문지기가 안으로 통보했다. 그녀가 총병부 대청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성량은 이미 대청문밖에 마중나와 있었다.

"아가, 행색이 어찌 이러한 거냐…"
"아버님…"

서은은 겨우 이 한마디를 한 후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송구합니다."
"어디 다친덴 없느냐."

이성량은 허리를 굽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성량의 중후한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았다. 그런 이성량에게 그녀는 또 한번 감복했다.

"우선 의원을 불러야겠다."
"의원은 급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이성량의 의연한 태도에 그녀의 헛헛한 마음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형님이…행방불명입니다."

이성량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녀는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저와 함께 오던 길에…누르하치를 만났습니다. 누르하치가 겁박을 하려 했고 형님은 저를 빼돌리고 혼자 싸우셨는데…제가 다시 찾아갔을 때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아버님."

서은은 머리를 떨구었고 이성량은 고개를 저었다.

"네 탓이 아니다. 우선 군사를 풀어 철령까지 훑겠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 아버님…모두 제 불찰입니다."

그녀는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성량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대청안을 거닐었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대청안은 물뿌린 듯 조용해졌다.

잠시후, 이성량은 여전히 대청안을 거닐었고 그녀는 왠지 조급해졌다. 그녀는 우선 후원 처소에 가서 행장을 챙기고 이성량의 군사들과 같이 이여백을 찾아 떠날 생각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생각을 이성량에게 고하려는 순간 갑자기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지기가 황망히 대청안으로 들어서며 고했다.

"총병님, 누르하치가 뵙고자 합니다."
"뭣이?"

이성량은 고개를 들었다. 서은은 깜짝 놀라 이성량을 보았고 이성량은 냉정을 회복하고 문지기에게 명했다.

"안으로 들이거라."

서은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르하치가 제발로 찾아오다니…대체 무슨 속셈일까. 그녀의 가슴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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