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숲속 끝쪽에서 쟁쟁한 칼부림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나무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던 서은이 언뜻 눈을 떴다. 장정 하나가 이순신에게 다가와서 뭔가 수군거리는 모습이 그녀의 눈안으로 들어왔다. 장정의 말을 들은 이순신이 눈가에 묘한 미소를 담고 그녀를 보았다.

“니탕개가 헤투알라성 성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오.”
“그럼 저 병장기 소리는…”
“도망가다가 관군을 만난 것 같소.”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관군이라 함은…이여백의 군사가 지척에 있다는 얘기다. 문득 꼼짝 말고 숲속에 있으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서둘러 움직이려 하자 이순신은 웬 일이냐는 듯 그녀를 보았다.

“이장군의 군사가 곧 올터인데…”
“바로 그렇기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할수 없다는듯 이순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가 뭔가 더 말하기도전에 절주있는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소리가 나는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아침햇살이 말잔등에 높이 앉아있는 그 사람의 모습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하지만…분명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그토록 절박했던 그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지금은 이토록 슬프기만 한 것을 어이하랴…

“당신 참.”

말에서 내린 그의 얼굴에 짧게 노기가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곧 그녀의 등뒤에 있는 낯선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의 얼굴이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잠깐 서은에게 눈길을 준 후, 이순신을 향해 정중히 두손을 맞잡았다.

“보아하니 강을 건너 수렵을 나오신 분들 같은데, 꺼리지 않으신다면 영채로 모셔 이 사람을 구해주신 은혜에 사례할까 합니다.”
“이장군의 이목이 소식이 빠르구려.”

이순신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여백은 고개를 숙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소식이 빠르다면 어찌 이 사람이 장막을 벗어난 것을 모를수 있답니까.”

뒤이어 고개를 든 그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이순신을 보았다.

“또한 어르신이 어떤 분인지, 왜 여기 오셨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왕 먼길을 오셨으니 주인의 뜻을 다할까 합니다.”
“니탕개의 무리와 접전을 했다면 어찌 모르신단 말이요. 장군의 그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소.”

이순신이 몸을 돌리자, 이여백이 언뜻 그의 앞길을 막았다. 하도 빨라서 장정들이 미처 칼을 빼들 틈도 없었다. 이순신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고, 서은은 깜짝 놀라 이여백을 보았다.

“당신…”
“어르신님이 행적을 비밀히 하는지는 아오나, 니탕개의 무리가 헤투알라성안에 들어갔은즉, 정녕 이대로 돌아가시려 하는 겁니까.”
“내가 개입할 일은 아닌 듯 하오.”

이순신의 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여백은 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한발 물러서서 다시 머리를 숙였다.

“이미 강을 건느셨으면 이 일에 개입을 하신 것입니다.”
“…”
“니탕개가 누르하치와 손을 잡으면 분명 요동의 후환이 됩니다. 어서 저들의 세력을 갈라놓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수 있단 말이요.”

이순신의 의문에 이여백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잠깐 헤투알라성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이순신에게 돌려졌다.

“어르신님이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봄에 동한 이번 싸움이 여름이 되도록 끝나지 않은 것은 단 하나의 이유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이요.”
“용병입니다.”

이여백의 말에 이순신은 피씩 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고목나무 가지끝의 흔들리는 나뭇잎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장군의 말은 내 알아듣지 못하겠소. 내 비록 장군을 익히 알지는 못하나, 그대의 아버지 이총병님의 성함은 우뢰같이 듣던터라…이총병의 용병술을 자제분인 그대가 익히지 못했다는 건 요동뿐만아니라 천하의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일이요.”
“제가 익힌 용병술을 누르하치가 똑같이 익혔다는것이 그 화근입니다. 아버지에겐 저보다 누르하치가 더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이순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은은 뭔가 알듯말듯한 기분이 되어 이여백과 이순신을 번갈아 보았다. 이여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잠시 영채에 머물러 주십시오. 이 싸움이 끝날수 있도록, 어르신님의 출중한 용병술로 저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이번에 그대를 돕는다면, 그대는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이순신이 한참후에 침묵을 깨뜨렸다. 이여백은 잠시 서은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단단히 각오를 다진듯한 얼굴로 이순신을 보았다.

“만일 앞으로 어르신이 계신 나라에 저를 쓸 일이 생긴다면, 몸이 찢겨 가루가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음…”

이순신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한식경이 지나서야 머리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온 것도 인연인즉, 이참에 누르하치의 용병술을 한번 구경해보겠소. 행여 부족함이 있더라도 이장군은 이 사람을 웃지 마시오.”

……

“공주님…”

영채에 이른 그들을 마중하여 나치야가 영채문밖으로 나와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것은 그녀의 뒤에 서있는 두 사람이었다. 서은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원외님은 제가 보냈었지만…지휘사님은 어떻게 여기 오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우사가 미처 말을 하기도전에 나치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서은의 팔을 잡고 자기 영채안으로 잡아끌었다.

“저는 헤투알라성의 세작들이 얼굴을 알기에 두문불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제 지휘사님이 먼저 오시고 주원외님이 공주님의 명을 받아 오셨는데…두분이 다시 장막으로 돌아가보니 공주님이 계시지 않는다 하여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무사하지 않습니까.”

서은은 빙그레 웃었다. 나치야는 혀를 차면서 그녀의 아래위를 잠깐 훑어보았다.

“그리 고운 사람이 이게 무슨 장속이랍니까. 어서 이 무거운 융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이입으세요. 목욕물도 마련했습니다.”
“제가 이리 올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도련님이 출마하셨는데 안오시고 어디 됩니까. 아침에 도련님께서 주원외님의 말씀을 들으시더니, 공주님을 찾아오시겠다고 필마단기로 나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지요. 도련님께선 절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나치야는 서은이 목욕을 마치고 넓은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끊임없이 궁시렁거렸다. 젖은 머리를 틀어올리면서 서은이 방긋 웃었다.

“곧 누르하치를 만나게 되니 그리 진정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재잘거리던 나치야의 말이 등뒤에서 뚝 멎었다. 서은은 아차 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치야가 가늘게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서은은 자리를 움직여 나치야의 손을 잡았다.

“제가 그만 실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불안해보여…농을 한다는 것이 그리 되었습니다…”

서은이 자책하는 모습에 나치야는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확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자 서은은 새삼스레 당황해졌다.

“나치야…저를 욕해주세요…요즘들어 왜 이렇게 실언을 거듭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나치야는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곧 새롭게 솟아나는 눈물이 그녀의 볼을 흥건히 적셨다.

“공주님, 이 세상에…순수한 사랑이 있을까요…”
“…”
“아무 잡 것도 섞이지 않은, 아무 조건도 욕망도 복잡한 인간관계도 섞이지 않은 그런 순수한 사랑이 있을까요…”
“…”
“만일 있다면 저는 그것을 얻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나치야…”
“분명 세작이 고했겠지요…분명 제가 여기 와있는줄 알면서도…누르하치는 왜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는 걸까요…”
“…”
“그 사람에게는 천하가 우선이고, 후계자가 차선이고…저같은 것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인연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생에 제 불심이 깊지 못하여, 이생에서 저 사람과 이정도 인연에 그친다면…”
“나치야…저를 탓해주십시오…광녕사에서 정양하는 그대를…이리로 끌고 온 것은 내 욕심이었으니…”

깊은 자책에 젖어 서은이 말했다. 나치야는 눈물자욱이 어린 얼굴을 들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눈으로 확인하려 하였습니다. 그리 해야만 만가닥 칠정육욕의 미련을 잘라 진정으로 불가에 귀의할수 있으니까요.”
“나치야…삭발은 안됩니다.”
“누가 삭발을 한다는 것이냐.”

영채의 장막을 젖히며 누군가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나치야는 눈물흔적을 감추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님…”
“나치야, 미안하지만 잠시 주안상을 봐주시오. 제일 안쪽 영채에 강건너 오신 귀한 분이 계시니…”

나치야가 머리를 숙이고 나가자, 이여백은 조용히 서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잠깐 몸을 기울여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숲속의 장막이 그렇게도 안일치 못해서, 그새를 못참고 밖으로 나가 봉변을 당한 건가.”
“내가 왜 당신 말을 그대로 들어야 하는데요?”

서은은 도발적으로 턱을 쳐들었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눈가에 옅은 조소가 번지자,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나를 보내려는 마음이 진짜라면, 내가 당신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나쁘지 않지, 그것 또한 내가 바라마지 않는 일이야.”

그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히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그녀의 그림자가 담긴 그의 눈동자가 무심함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이런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하는거라니…어떻게…

“굳이 나를 보내지 않아도 돼요…그 누구의 협박을 받든지…절대 타협해선 안돼요, 우리.”

조금은 망설였지만 결국은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무심했던 그의 눈동자가 약간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속에서 언뜻 오래동안 참아왔었던 고뇌가 보였다.

“누군가의 협박따위에 이러진 않아.”

그가 거짓말을 하고있는줄 안다. 그 당연한 사실에 마음이 아파왔다. 비록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지만…이런 자기학대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그녀는 분명히 안다. 하여 그녀는 더이상 아무것도 모르는척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다.

“나를 보내지 않아도 돼요…세상을 바꾸지 않아도 돼요…우리가 아는 세상을 거스르려면, 우리가 바꾸려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확신이 안서고…또 그 세상이 되면 누군가에게 피해가 올가봐 이러는 거 알아요. 병란이 일어나면 조선으로 가야 한다는 당신…이미 당신도 당신의 운명을, 그리고 개인이 바꿀수 없는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겠죠. 그래서 그런 말을 한거겠죠.”
“…”
“그래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여기 와서 결과적으로는 역사에 따라 움직이고, 그 역사를 만들어가게 되었어요. 이태후마마는 이제 나대신 가짜 서안공주를 만들어 만후에게 시집을 보낼 것이고, 난 어쩌면 후사가 없어야 하는 당신의 운명에 따라 우리 아기를…큰형님에게 보냈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역시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파르르 떠는 한숨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이 흐른뒤, 그녀가 드디어 말했다.

“북두에 수를 빌겠어요.”

그가 눈을 뜨고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그가 시선을 내려 그녀의 붉은 옷소매를 내려다본다. 통이 넓은 침의에 가려진 그녀의 하얀 팔이 그토록 가냘프다. 그가 다시 눈을 들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북두?”
“네, 명부에서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북두성군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북두가 다스리고, 인간의 삶은 남두가 다스립니다. 명부에서 제 삶을 앗아가려면 북두성이 허락을 해야 하는데, 일찍 삼국지에 관로라는 점쟁이가 단명의 젊은이에게 북두성에게 수를 비는 방법을 가르쳐준적 있습니다.”
“제갈공명도 북두에 수를 빌었었지.”
“네, 그 방법을 전수받은적 있습니다.”

그가 놀란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대체 어떻게 그런 방법까지 아는가 하는 의문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때 북두칠성을 보면서, 아버지가 가르쳤던 방법입니다. 제갈공명은 7일동안 제단을 차려 12년의 수를 빌었습니다.”

염라대왕의 말대로 2년만에 돌아가야 하는거라면, 이제 그녀가 여기에 남아있어야 할 기일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싸움을 끝내면 시간은 충분하다. 다만 북두성이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지, 천기를 누설한 죄를 명부에서 용서할지, 전혀 불가능해보이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게 가능할까?”

그의 얼굴에 천천히 화기가 돌기 시작한다. 마냥 차겁고 냉정해서 따뜻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수조차 없던 그의 눈에서, 드디어 한줄기 희망의 빛이 반짝인다.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자, 견딜수 없는 날카로운 통증이 그녀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되구말구요. 염라대왕은 명부를 다스리지만, 명부의 위에는 수를 장관하는 북두가 있고, 북두의 위에는 또 주신이 계시는 하늘이 있습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란 이런 것인가. 그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보내지만 않게 된다면…남은 열흘만이라도, 그가 희망과 행복을 느끼게 하고싶다.

“이생의 12년은 현세의 1년입니다. 현대의 저의 아버지에겐 불효한 일이지만, 분명 그때까지 저를 기다려줄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까지 자신의 거짓말에 넣어버렸다. 긍정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그녀를 그는 조용히 응시하기만 한다.

“저 또한 당신과의 인연을…12년정도 더 욕심내는게 큰 죄는 아니겠지요. 명부에서 허용하지 않아도 북두성은 굽어 살필 것입니다.”

말은 그리 했지만 그녀는 왜인지 떨고있었다. 그는 석상처럼 굳어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못견디겠다는 듯, 몸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이 품…사무치게 그리웠던 이 품…열흘후면 영영 떠나야 하는 이 품…

“누르하치가 전서를 보내왔습니다.”

장막밖에서 소리높여 아뢰는 군사의 목소리에 둘은 황급히 떨어졌다. 그 서슬에 그의 미간이 언뜻 찌푸러졌다. 미세한 표정변화였지만 그녀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급히 앞으로 다가가 그의 옷앞섶을 헤쳤다. 겹겹히 감싼, 피에 젖은 붕대가 눈에 띄였다. 그는 서둘러 그녀의 손길을 막았다.

“별일 아니야. 헤투알라성의 화살에 맞았다.”
“별일 아니라니요…언제 상처인데 아직도 이렇게 피가 배였나요! 한여름에 왜 이렇게 꽁꽁 감싸고 있는데요!”

그가 황급히 손을 흔들어 그녀의 다음 말을 막았다.

“장막밖에 귀가 있다.”

그가 빠른 동작으로 옷섶을 여미는것과 동시에, 장막밖의 군사가 전서를 받든 헤투알라성의 군졸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손을 내밀어 전서를 받아 읽은 후, 피씩 웃으며 고개를 들어 헤투알라성의 군졸을 보았다.

“오뉴월 군사는 오래 동하지 않는 법, 내일 오시(점심)에 접전하기로 회답을 주마. 밖에서 기다렸다가 답서를 받아 가거라.”

군졸들이 물러간후 서안앞으로 다가서는 그를 가로막으며, 그녀는 말도 안된다는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내일 어떻게 접전해요. 그 상처…”
“명심해라, 군중에 상처입은 사람은 없다.”

그가 낮고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붓을 들어 전서에 답장을 쓰는 그를 향해, 그녀가 나직한 어조로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면 진법으로 최후의 승부를 가린다 하십시오.”

붓을 든 그의 손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그러더니 어떻게 그런 발상을 했냐는 듯 그가 칭찬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진법만큼 쉬이 가릴수 있는 승부가 없지.”
“당신 몸도 그렇고…”

진법으로 접전을 하면 직접 나서 싸울 일은 없으니 그녀는 일단 한시름 놓았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 답서를 쓰는 그의 뒤로 에돌아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가 약간 주춤하다가 계속 써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12년이 지나면 어떡할 텐가.”

답서를 봉한 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물었다. 그녀는 입가에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그녀가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짐짓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참…비도 오지 않았는데 바람이 분다고 하는 식이네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 아닐까요.”
“그때 가서 내가 이생에서 죽으면, 당신이 있는 세상에 환생하게 되지 않을까?”

담담한 어조로 그가 이토록 충격적인 말을 한다. 그녀의 몸이 삽시에 경직되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땅이 꺼져들어가는것만 같다. 그를 막으려고, 생을 허타이 굴지도 모를 그를 막으려고 애를 써왔건만…그를 위한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단 말인가.

“환생을 하면 맹강탕을 마셔 기억을 잃게 돼요. 꼭 마치 내가 서안공주가 아닌 것처럼,당신도 당신 아닌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이 될텐데…”

목멘 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만나고싶다 .기억이 없더라도, 그의 환생이라도 괜찮을것 같다. 하지만 정녕 그러할까.

장막밖으로 쏟아지는 해빛은 그렇게 찬란한데도, 장막을 스치는 바람은 그렇게 따뜻한데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은 싸늘하게 시리기만 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풀고 몸을 돌렸다. 그녀는 얼른 표정을 감추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당신이 서안공주를 거절한 것처럼, 나도 당신의 환생을 거절할지도 모를텐데요?”

그녀는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가 몸을 숙여 왈칵 그녀를 안았기 때문이다. 상처가 덧칠가 밀어내지 못하는 그녀에게, 그가 나직히, 그러나 진지하게 그녀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당신이 여길 떠나면…내가 찾아갈 것이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러니까 그렇게 무리하지 말아. 그러지 않아도 돼.”

……

제법 화창한 날씨다.

투명한 물빛으로 밝아오던 하늘에 한여름의 아침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서은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생에서의 또 하나의 하루, 이제는 다가오는 그날이 담담하게 받아들여진다.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갈수 있을지, 아니면 이대로 목숨을 잃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시한부 인생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아무런 목적과 희망도 없이, 다만 자신의 몸체와 영혼이 사라지는 그날만을  묵묵히 기다려야만 하는 고통의 날들…하지만 이젠 그런 날도 너무 부족하게 느껴진다.

“오늘 진법으로 최종 승부를 보기로 했다더군.”

어느샌가 그녀의 등뒤로 와있는 이순신이 말했다.그녀는 몸을 돌려 얼핏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하옵니다. 이참에 참군님의 용병술을 우러러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진법에 대해선 이장군이 더 꿰뚫고 있는 게 아니겠소.”

크게 들이마셨던 아침공기를 내뱉으며 이순신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들어 유달리 맑고 청량한 하늘을 보았다.

“이것이 수군이면 몰라도, 육지의 군사에 대해선 나도 아는바 없소.”
“그런 분이 울지내를 사로잡고 니탕개를 이곳으로 내쫓았습니까.”

서은은 가벼운 눈웃음으로 이순신에게 말했다. 이순신은 그런 그녀를 보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일전에 처자에게서 들은 이야기 말이요.”
“네.”
“처자가 여기 사람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여기를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아니면 여기에 영영 눌러살수 있는 것이요?”

그녀는 조용히 침묵했다. 귀가를 스치는 맑은 바람마저 슬프게 느껴지는 시간들이다. 차라리 이 시간들이 빨리 지나갔으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지요. 지금 저희가 이야기하는 이 순간도, 지나가면 되돌이킬수 없는 것처럼.”

탄식하듯 그녀가 입을 열어 하는 말에, 이순신은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그녀를 보았다.

“내 일찍 제갈무후의 기양(祈禳)하는 방법을 들어 알고있는데, 어쩌면 처자가 선택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소.”
“참군님도 제갈무후의 기양법을 알고계십니까.”

놀란듯 머리를 드는 그녀에게 이순신이 빙그레 웃었다.

“충무후(忠武侯) 제갈무후는 가히 평생을 두고 존중할수 있는 인물이요.”

이순신의 말에 그녀도 얼핏 미소를 지었다. 이순신과 제갈량, 같은 충무 시호를 받은 두사람,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비슷한 점도 많아 보였다. 평생 지지 않은 싸움을 한것도, 똑같은 쉰넷의 나이에 세상을 뜬것도, 그리고 후세에 남긴 그 한마디 뼈저린 말까지.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혹시 일기를 쓰십니까.”

문득 화제를 돌리듯 무심하게 묻는 그녀의 말에 이순신은 크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처자가 그걸 어찌…”
“최근에도 쓰셨습니까.”
“길을 떠난 몸이라 쓰지 못했소. 그건 왜 묻는 것이요?”

이순신의 의혹어린 눈길에 그녀는 잠깐 웃어보였다.

“별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곳에 오신 행적을 비밀리 하옵기에, 여기 일들도 일기로 남기는 일이 없도록 확인을 한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소매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어 이순신에게 내밀었다.

“오늘의 싸움이 끝나면 언제 다시 뵈올지 모르겠습니다. 작별인사로 이것을 드리고자 하니 참군님께서 받아주시옵소서.”

종이를 받아든 이순신은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머리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의 미간이 깊숙히 구겨져 있었다.

“이건…판옥선(板屋船) 모형이 아니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모형은 판옥선에 덮개를 씌워 만들었으며 판에 철편을 대고 배는 12cm이상의 튼튼한 소나무 재질로 만들어 충돌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다만 정확한 대포 구멍 위치와 노군들의 배치는 기억을 못하였으니 그에 대해선 참군님께서 따로 방도를 대어주십시오.”
“내가? 무슨 방도를…”
“어렵지 않습니다. 역사 이대로 흘러간다면 임진왜란 1년전에 조선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한분이 참군님을 찾아오실 겁니다.”
“…”
“함자는 나대용이며 그분이 오시면 그분의 건의를 그대로 채납하십시오. 거북선에 연구가 깊으신 분입니다.”
“거북선이라…”
“네, 일명 귀선(龜船)이라고도 하는데 철갑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배밑창은 쉬이 녹슬지 않는 나무못을 쓸것이며 선저는 U자형으로 만드시면 좋습니다.”
“그건 무엇때문이요?”
“왜군의 배들은 선저가 V자로 되어있어 원양항해에 편리하나 전투시 급히 방향을 바꾸기가 불리합니다. 그에 비해 크고 견고한 거북선 기동력을 강하게 할 필요가 있기때문에 선저를 U자로 만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철편을 댄 배 윗부분은 쇠송곳을 설치하여 적군이 배에 올라도 쉬이 배를 함락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차라리 철갑으로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소?”
“철갑을 씌워서 기동력을 감소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녀는 잠깐 말을 끊고 뭔가 생각하다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상에 검은 칠을 해서 철갑처럼 보이면…왜적들의 간담이 서늘해지겠죠?”

이순신은 한참 그녀를 응시하다가 문득 머리를 쳐들고 호탕하게 웃었다.

“과연 지혜로운 처자요. 이런 처자가 곧 떠날 준비를 하고있다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말이요.”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제가 떠날 준비를 하는것마저 알고계셨으니 참군님의 지혜에는 미치지 못하리다.”

이순신은 종이를 품속에 간직한 후 머리를 들어 그녀를 깊이 주시했다.

“이장군의 곁에 남을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는건 어떻겠소?”
“저는 저의 운명을 선택하겠습니다. 참군님은 우리가 존재하는데는 그 이유가 있고, 각자 자신의 사명이 있다 하셨지요. 저의 운명은 다한것이로되, 참군님의 운명은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제 남은 시간과 운명을, 이생의 제 사명을 완성하는데 쓰겠습니다.”

세상에 맞써 싸우기도 했고, 운명에 타협하지 않겠노라 몸부림 치기도 했다. 허나 지금에 와서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땅을, 이 땅과 사람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 남은 시간 자신이 할 일이라는 걸 그녀는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멀리서 최종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있었다.

……

중군기가 높이 바람에 나붓기고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오지만 헤투알라성 성문은 굳게 닫힌채로 있었다. 중군기 아래에 서있던 서은은 머리를 돌려 이여백을 바라보았다.

“누르하치가 약속을 어기려는 건가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

이여백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문득 눈앞의 성문이 열렸다. 융복 차림에 큰 칼을 찬 누르하치가 말에 높이 앉아 성문을 나선다. 그뒤로 헤투알라성의 여진인 군사들이 창과 칼을 번뜩이며 호호탕탕하게 따라나섰다. 이여백은 그들이 성문을 다 나서길 기다려 군사를 시켜 말을 전했다.

“먼저 진을 치라고 이르거라.”

누르하치의 군사가 성문에서 멀리 나온 곳에 멈추어섰다.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크고 웅위로운 진이 이루어졌다. 관군들은 저마다 놀란 얼굴이었고 누르하치는 군사를 시켜 말을 전했다.

“이 진법을 알겠습니까.”

이여백은 피씩 미소를 지은뒤 다시 군사를 불러 말을 전달시켰다.

“이는 [천창진]이다. 하늘의 천창성의 별을 따라 현무방위를 지키고 중원을 침범하니 살벌을 주장하는 의롭지 못한 진이라, 한번 출격하면 허술히 깰수 있다. 다른 진을 고쳐 치거라.”

누르하치가 황기를 높이 휘두르자 좌우로 군사들이 움직이더니 진이 뭉쳐 더 크게 하나로 되었다. 이여백은 또 한번 피씩 웃었다.

“내 군중의 군졸도 칠줄 아는 [혼원일기진]이다. 좀 더 어려운 진은 칠줄 모르겠느냐.”

군사가 말을 전하러 간 사이 이순신이 중군기 아래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여백은 급히 그에게 머리를 숙여보였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이장군 혼자 충분히 대응할수 있는 것을…괜히 이 사람을 불러내어 추태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누르하치의 진을 다 알지만 저의 진도 누르하치가 다 압니다. 더이상 무승부로 끝날수는 없으니 오늘 그 결과를 보고자 함입니다.”

이여백의 대답에 이순신은 말없이 누르하치의 진법을 내려다 보았다. 누르하치는 진을 고치지 않고 군사를 시켜 말을 전하게 했다.

“이번에는 이장군님의 진법을 한번 보고자 합니다.”

이여백이 중군기 아래에서 검을 한번 들자 주위 군사들이 분분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사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던 이순신이 이여백을 보았다.

“장군께선 팔괘진을 치려고 함이요?”
“네, 흔한 진법이긴 하지만 8진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변화가 좋을지 고민입니다.”
“흠…”

이순신은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했다.

“팔진도라면 정동의 생문(生门)으로 들어와서 서남의 휴문(休门)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정북의 개문(开门)으로 쳐들어가면 쉬이 깨드릴수 있소. 만일 그사이 변화가 없다면 누르하치로서는 쉽사리 들어왔다 나갈수 있는 진법이오.”
“네, 그렇습니다.”
“혹 특별한 기관(机关)을 설치하신 것이 있소?”

이여백이 손을 들자 한 군졸이 사람 둘을 데리고 중군기 아래로 나왔다. 그들을 눈여겨보던 서은이 머리를 돌려 이여백을 보았다.

“당신…”

나치야와 추잉…드디어 인질을 이용하기 시작한 이여백…그가 이렇게 승부욕에 불타있는 모습은 그녀로서는 처음이었다.

“저는 이 싸움, 꼭 이겨야 합니다.”

이여백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순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 비치는 절박함에 이순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외에는 없소?”

이여백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와 똑같은 모습을 한 군졸 여덞명이 앞으로 나섰다. 키도 비슷했지만 얼굴이 너무 똑같아서 서은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군중에 가짜 이여백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저번에 길에서 한번 만나기도 하였으나 이렇게 직접 보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순신은 그들을 한참 훑어보다가 다시 이여백을 보았다.

“중원의 이용술(易容术)이 절묘한줄은 알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명불허전이외다.”
“이 사람들이 저를 대신해서 8문을 지키면 어떻겠습니까.”
“그외에 몇가지 변형을 더 주는게 좋겠소.”

이순신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군졸 한명이 그에게 지필묵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붓을 들고 종이에 전혀 생소한 진법을 그렸다.

“똑같은 8진이되 이런 변형을 줄수 있소. 내부는 그대로 두고 외곽만 변해도 쉬이 빠져나가지 못할것이요.”

그가 그린 진법 그림을 다들 난생 처음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두 자리에 사람의 그림을 그려넣자 다들 탄복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 두 자리가 인질의 자리요.”
“인질을 구하자면 이 두 사(死)의 문을 지나야 하는데 이건 독안에 든 쥐를 잡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여백의 말에 이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르하치가 인질에 대한 마음이 어디까지인지, 만일 꼭 구해서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그는 생포될 것임에 틀림없소.”
“저는 진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쪽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서은이 그때 입을 열어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옆에 서있는 나치야의 얼굴로부터 이여백에게 향했다.

“당신이 추잉을 인질로 데려온 것은 제가 어떻게 막지 못하는 일입니다. 다만 나치야까지 이용하는 것은…”
“공주님, 저를 염려 마시옵소서.”

나치야는 꼭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듯 말했다. 그녀의 청초한 얼굴에 초연하지만 비장한 기색이 어렸다.

“제가 장군님께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또한 누르하치가 추잉만 구하러 간다 해도, 저는 결코 비관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렵니다. 저로서는 이런 방법으로 확인을 한셈이니까요.”
“하지만…사람의 감정은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또한 특별한 환경이나 사정에 인한거라면…”

그녀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나치야의 절절한 눈빛에서 그녀는 자신이 잘못 알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나치야는 누르하치가 자신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려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르하치에 대한 감정을 정확히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녀의 예감은 적중했다. 팔괘진이 형성되고 누르하치가 짓쳐 들어왔지만, 이순신의 지휘로 팔진도가 새롭게 변형되자 누르하치는 진중에서 빠져나가기는 커녕 점점 더 깊숙히 들어가기만 했다. 중군 가까이에 이르러 그의 말이 우뚝 멈춰섰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앞을 막아선 사수들 사이로 보이는 나치야와 추잉의 모습…그가 잠깐 망설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군사들의 함성소리와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도 나치야의 처절한 목소리를 막지 못했다. 서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여백을 보았더니 그 역시 침울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본다. 누르하치는 나치야의 목소리에 주춤했지만 여전히 포위망을 뚫고 앞으로 가려고 좌충우돌 하고 있었다.

“더이상 가까이 오면 자진해버릴 거에요.”

언제 꺼내들었는지 나치야가 비수를 자기 목에 대었다. 서은이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지만 곧 이여백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몸부림을 치면서 이여백에게서 빠져나가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힘이 얼마나 억세었던지 그녀는 꼼짝달싹 할수가 없었다.

“이거 놔요! 나치야는 말대로 할지도 몰라요!”
“누르하치가 되돌아 갈거야.”
“어떻게 그리 확신하죠?!”
“내가…생문을 틔워주었으니까.”

그의 말에 그녀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머리를 들어보니 누르하치를 포위했던 군사들이 어느새 칼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발을 탕 구르더니 이를 앙다물고 몸을 돌렸다. 나치야가 천천히 땅에 주저앉았고, 누르하치의 모습은 눈깜짝 할 사이에 군사들 틈으로 사라졌다.

싸움이 끝난 성밖은 태풍이 지나간것처럼 스산한 풍경이었다. 군사를 점검하는 서은과 이여백의 곁으로 이순신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그들을 한참 보다가 이여백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준 관운장에 대해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오.”
“관운장은 의리를 지켰습니다.”

이순신이 머리를 돌려 빙그레 웃었다. 이여백은 고개를 들어 헤투알라성을 보다가 다시 이순신을 보았다.

“어찌 웃으십니까.”
“난 관운장을 조조 잡으러 보낸 제갈무후의 배포를 웃을뿐이요.”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나란히 서서 헤투알라성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지난후 이순신이 영채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이여백의 어깨를 한번 툭 쳤다.

“장군이 이겼소.”

이여백은 머리를 숙여보였고, 이순신의 모습은 영채쪽으로 점차 멀어져갔다.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서은이 조용히 이여백의 뒤로 다가섰다.

“이것이 당신이 준비한 기관이었군요.”

이여백이 시선을 내리고 담담히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의 입꼬리에 걸린 처연한 기색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참군님의 말씀대로 당신이 이겼습니다. 성을 정복하진 못하였지만 사람의 마음을 정복한 것이 싸움에서 이긴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누르하치는 그 마음을 공략해야 한다고 누군가 그러더군요.”
“당신의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되는군.”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헤투알라성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문득 성문위에 멈췄다. 늘 그러하듯 성문위의 여진인 군사들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철통같이 수비를 서고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위로 분명 크게 펄럭이는 뭔가가 있었다.

“항(降)기.”

그들은 놀란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다시 나란히 헤투알라성을 보았다. 흰색 기발에 크게 쓴 항(降)자가 그들의 눈을 자극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잠에서 깨어난 사람과 같은 경이로움이 차넘쳤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가가  아릅답게, 그러나 서글프게 호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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